삶은 기억의 축적이다. 기억들은 오늘을 받치는 토양으로 삶의 기저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그 기억들을 나름의 순서로 재구성하는 것이 소설을 비롯한 글의 목적이다. 문제는 흔히 그 기억들은 현실의 힘에 밀리고 눌려 쉽사리 지각변동을 겪게 된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하면,  본래 사람이 가진 기억이라는 것이 사실 온전하지 않아서 우리가 기댈 만한 것이 못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기억하는 행위 그 자체는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지만 그 기억의 내용은 우리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건을 대할 때 기억에만 의존한다면 우리는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결과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황석영의 소설 『손님』에는 이러한, 기억이 갖는 문제점들이 엿보인다. 황해도 신천의 학살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는 이 소설은 그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작가의 후기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객관성'의 문제에 대한 한 해결방안으로써 주관-객관의 비분리, 시점의 교차 등을 택하여 얻은 효과로 흔히 지적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는 쉽사리 윤색된다는 것을 잊은 것일까, 『손님』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과거를 제대로 재구성해내지 못하고 있다.


『손님』이 소재로 삼은 사건을 드러내는 방식은 무척 독특하다. '객관성'에 대한 고민의 한 결과로 작가가 내어놓은 결과는 빈번한 시점의 이동-교차이다. 하나의 시점을 택하여 이야기를 줄곧 내어놓는 다른 소설들과는 달리 『손님』은 하나의 이야기를 삼인칭을 포함한 여러 화자가 나누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진실에 보다 다가갈 수 있는 한 방편으로 이해된다. 어느 한 사람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 개인의 현실의 힘에 눌린 왜곡된 기억의 창으로 바라보는 것이므로 진실과 가깝다고 하기 힘들다. 따라서 빈번한 시점 이동을 통해 진정한 다성성多聲性을 획득하게 되기만 하면 보다 진실성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법정에서 하듯 원고와 피고, 그리고 여러 증인의 입장에서 한 사건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진실에 보다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소설 속에서도 이런 시점 이동이 가장 두드러지는 곳이 여덟째 마당 '시왕-심판마당'인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손님』이 보여주는 '다성성'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다성성이 아니다. 여기서의 다성성은 형식, 다시 말해 겉보기만 다성적일 뿐 내용적인 면에서는 단지 하나의 줄기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시점은 여럿이지만 관점은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손님』의 전체 구조 속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여덟째, 심판마당에서도 학살 사건을 각자의 시점에서 서술하는 인물들(주로 죽은 이들) 사이에 어떠한 관점 차이나 의견 대립을 목격할 수 없다.

'신천 학살 사건'은 서로가 각자의 신념을 좇아 행동함에 따라 생긴 사건이므로, 그 당사자들 사이에 의견대립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소싯적부터 사타구니에 거웃이 날 때까지 한 마을에서 뒹굴어온 놈들>(124쪽)끼리의, 거의 근친살해에 육박하는 큰 사건을 겪은 뒤에는 부지중에 죄의식을 덮기 위한 자기합리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자기합리화는, 이 소설 속에서는, 죽기 직전의 류요한 장로에게서 잠깐 관찰되는 듯 하더니,¹ 그의 사후에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북측 정부가 내세운 증인들의 증언(108-111쪽)이 모조리 윤색된 과거인 것과 비교하면² 여기서의 관점의 일치가 무척 투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¹ <“내가 왜 용서를 빌어? 우린 십자군이댔다. 빨갱이들은 루시퍼의 새끼들이야. (…)”>, 22쪽.
*² <그들은 모두 미군이라고 고쳐서 말했지만>, 108쪽.

그렇다면 그 투명성은 어느 평자의 말대로 죽은 자의 말이기 때문에 획득된 투명성¹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죽은 자'의 유언에는 거짓이 없다는 통념>과 나란히 우리는 또한 '망자亡者의 넋이 한恨을 풀지 못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러고보면 죽은 자의 말이 투명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죽은 자들의 불투명성 때문에 이 소설이 씌어지게 된 것이 아닌가. 어디에서도 그토록 투명한 관점의 일치는 불가능한 것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의 투명성은 작가가 전지적全知的인 관점에서 서술할 것을 각각의 등장인물의 시점으로 교묘히 환원시키는 과정에서 겉으로 보이는 투명성에 불과하다.

*¹ 오창은, 「억압된 기억의 꿈」, 경향신문 2002년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작.

작가는 후기에서 기독교와 맑시즘이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오는 동안에 우리가 자생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타의에 의하여 지니게 된 모더니티>(261쪽)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선사문명에서 고대로, 고대에서 중세로 가는 길에 각각 불교와 유교의 '수입'이 있었던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근대로의 전환기에 기독교와 맑시즘이 '수입'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 시기에 우리 사회는 이미 내부의 모순이 점차로 드러나는 과정에 있었다. 그것은 서학西學에 대한 일정한 반발로서 나타났지만 인내천人乃天 사상 등을 통해 '평등'을 내보여 서민층에 널리 퍼졌던 동학東學을 보면 알 수 있다. 실제로 동학이 서민층에 강한 인력引力을 가졌던 요인은 당시 기독교 역시 가지고 있었던 <반봉건 자주의식>¹에 대한 끌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맑시즘 역시 하층민에게 '해방'의 비젼을 보이며 접근하였던 것이다. 기독교와 맑시즘은 당시 사회 내부의 모순 때문에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¹ 강만길, 『고쳐쓴 한국근대사』, 창작과비평사, 1994, 296쪽.

만약 <식민지와 분단> 때문에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다고 말하려면, 왜 우리가 식민지와 분단을 겪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 또한 필요하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 이유도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데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작가는 자생적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규정 아래 우리 사회가 나아갈 이상향을 엉뚱한 곳에서 구하고 있다.

그는 새처럼 화면의 위로 날아가고 있다. 아래로 연이은 언덕과 실개천이 지나간다. 멀리서 소 우는 소리며 목에 걸린 워낭이 딸그랑대는 소리도 들리고 닭이 알을 낳고 꼬꼬댁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들판에는 사람들이 논에서 모심기를 하면서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린다. 풍물을 치는 빠른 북소리에 꽹매기 두드리는 경쾌한 쇳소리가 얹혀있다. 어머니가 아이를 부르는 소리도 들려온다.

얘들아, 밥먹어라. (257쪽)

『손님』의 마무리 넋반 대목에서 작가가 제시하는 '이상적 공동체'이다. 무척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이런 평화로움이나 아름다움이 근대 이전의, 자기 모순에 의해 붕괴된 전근대 사회를 묘사하는 것임은 쉽게 알 수 있다. 과연 소작농들이 이런 시각을 가질 수 있었을까, 머슴들이 이런 시각을 가질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이것이 전근대 사회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묘사라는 것은 쉽게 밝혀진다. 전근대 사회를 이상적 공동체로 제시한다는 것 자체가 '윤색된 과거'를 그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과거의 삶을 쉬임없이 참고하는 것은 역사를 하는 궁극적인 목적과도 부합하는 일일 테지만, 무턱대고 과거를 미화하는 것은 일종의 신비화에 빠지고 마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해방이지 과거의 회복이 아니기 때문이다.¹

*¹ 도정일,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민음사, 1994, 167쪽 참조.

그런데 과거가 쉽게 윤색된다는 사실을 잊은 데서 비롯한 이들 '겉보기만의 다성성'과 '과거 회귀 경향'은 이 소설의 형식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이 작품은 '황해도 진지노귀굿' 열두 마당을 기본 얼개로 하여 씌어졌다.>(262쪽) 작가의 입장을 따라 본다면 넋굿 형식을 채용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소설의 취지가 류요한으로 대표되는 학살 사건 당사자의 죄를 씻기고 그들이 저승으로 떠날 수 있게 하는 데에 있는 만큼 어떤 종교적인 의식은 필연적이다.

류요한의 죄가 문제시되는 것은 소설 초반부에 제시되는 박명선의 회고(45-49쪽)와 <“머 종교야 어두운 시절의 미신이니깐 다 좋다 말입니다. 반동이던 앞잡이던 기것두 거저 넘어갈 수 이서요. 사람은 왜 죽입네까?”>(94쪽)하는 류단열의 항변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죄가 살인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살인이 죄가 되는 이유는 아마도 사람이 사람의 생명의 여탈권을 갖는 것이 옳지 않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살인죄를 씻는 데도 역시 사람의 힘을 능가하는 어떤 존재의 힘을 빌려 씻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의 생명에 대한 여탈권을 쥐지 않았다는 말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도 역시 갖지 않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의 입장에서는 기독교는 자생적인 것이 아니므로 그 죄를 씻는데 적합하지 않다. 또, 유교와 불교 등의 종교도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보면 외래적인 것이므로 자생적이지 않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¹ 때문에 작가로서는 가장 토착적이고 자생적인 것으로 널리 알려진 샤머니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¹ 성민엽, 「이데올로기 너머의 화해와 그 원리」, 『창작과 비평』 2001년 겨울, 244쪽.

그런 샤머니즘의 선택은,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고 오로지 지우는 데에만 기능하고 있다. 본래 <넋굿은 망자로 하여금 생전에 있었던 모든 맺힌 한을 풀어버리고 자유롭게 저 세상으로 떠날 수 있도록 돕는 데>¹ 그 목적이 있다. 때문에 넋굿은 어떤 의미에서 체념을 위한 의식이다. <한을 풀어버>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망자에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고 삶에서 있었던 좋지 않은 사건들에 대한 감정을 버리고 체념하기를 권고하는 것이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도 순남이 아저씨는 <죽으문 자잘못이 다 사라지디만 짚어넌 보구 가야디>(194쪽)라며 문제를 해결하는데 애쓰기보다는 문제를 지우자는 취지의 말을 하고 있다.

*¹ 차옥숭, 『한국인의 종교경험․巫敎』, 서광사, 1997, 272쪽.

해서 『손님』은 한 판의 넋굿을 통해 모든 한恨을 풀고(지우고) 모든 외래의 것을 물리친다. 그런 굿판 끝에,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전근대적인 유토피아요, 그 등장인물들의, 실제로는 불가능할 투명한 말들이다. 샤머니즘의 세계관은 치열한 현실 인식 속에서 사건을 바라보지 못하고, 굿이라는 형식을 통해 죄책감을 씻으려는 의식주의儀式主義ritualism의 성향이 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떠한가? 앞에서 기독교가 서민과 민중들에게 깊이 파고들 수 있었던 이유는 평등과 기회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손님』에서의 기독교는 전혀 민중적이지 않고 평등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그것은 이북에서의 부흥기에 기독교가 전혀 다른 기능을 했기 때문이다. 스펜서 J. 파머는 이북의 초창기 기독교 선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독교는 최초의 支持를 北韓지역에서 강하게 받았다. 거기에서 기독교는, 서울에 있는 양반에 대한 그 지역 사람들의 오랜 不平을 이용할 수 있었다. 儒敎原理는 평양에서 그다지 존숭되지 않았다. 이 지역에 있어서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강하게 긍정적으로 반응해간 이유는, 그들이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확고한 旣得的인 利權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부분적으로 의거한다. 또한 기독교는, 서울에 있어서 儒敎의 규칙이 너무나 융통성이 없고 형식적이어서 현대적인 문제에 적용할 수 없다고 느끼고서, 그것을 따라가기 어렵게 생각하는 상당수의 귀족젊은이들의 마음을 끌었다. 이 젊은 양반 개혁자들은 권력의 座에 앉기 위하여 그리고 외국, 특히 미국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하여 이 外國 信仰과 연결되는 것이 이롭다고 생각하는 保守主義者들이었다.¹

*¹ 스펜서 J. 파머, 「東洋社會와 基督敎」, 『思想界』 1966년 12월, 89쪽; 강만길(295쪽)도 <개신교는 당초 서북지방의 자립적 중산층을 중심으로 수용되어 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지극히 기복적祈福的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신앙의 양태는 사실 올바른 믿음의 본보기라 할 수는 없다. 종교학자 윤이흠 교수는 믿음을 기복형, 구도형, 개벽형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그 첫째인 기복형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 유형은 생존의 동기를 갖는 믿음으로 이러한 유형은 일률적인 행동 양식과 현세적 조건의 만족에 머물기 때문에 극단적 보수주의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¹

*¹ 김주연, 「사랑의 문화를 위하여」, 김주연 엮음, 『현대문학과 기독교』, 문학과지성사, 1984, 14쪽에서 재인용.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손님』에서 보이는 기독교는 보수주의자들의 기득권유지의 한 방편으로 볼 수 있다. 가령 류요한이 <우리 군에 인민위원회가 생겨난 뒤에 가보니 정말 한심하더라. 어중이 떠중이에 머슴 건달 떠돌이 따위들인데 누가 보아도 제 고장에서 대접 못 받던 놈들을 긁어모은 것이라.>(119쪽)고 했을 때, 류요한의 어머니가 박일랑(이찌로)에게 <“네 이 배은망덕헌 놈 겉으니. 감히 누굴 치느냐?”>(135쪽)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기독교적 평등개념은 찾아볼 수가 없다.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길 것이고 <어중이 떠중이>를 모은 공산주의자들은 축복받지 못한, 사탄의 자식으로 여길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처음부터 그들을 영혼이 있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처음부터 기독교로 이끌림받지 못했다. 순남이 아저씨는 이렇게 말한다.

기러구 보니께 우리집 주인덜 가족이 다니넌 광명교회에 나 겉은 사람언 한번두 얼씬얼 못해서. 소작인이라두 제 식구가 있넌 이덜언 서루 권하구 이끌어서 교회에 더러 나가댔다. 우리 겉은 일꾼덜이나 머슴덜언 일년 사시사철 일만 하거나 하다못해 꼴얼 베구 나무럴 하구 소 멕이기두 하구 있대서. 그낭 먼발치서 예비당에서 들레오넌 종소리나 찬송가 소리럴 듣기만 했대서. (79쪽)

본래 종교가 기복적 성격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여러 성격 중에서 어느 한 편만 강조되는 것은 건강한 신앙이 아닐 것이다. 흔히 한국의 기독교가 샤머나이즈 되었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기복적 성격만 지나치게 강조되어왔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사실 기독교가 한국에서 널리 퍼진 이유를 그것의 샤머니즘과의 유사성에서 찾는 이도 있다.¹

*¹ 파머, 위의 글, 85-86쪽.

작품에서 류요한 등이 보여주는 기독교는 보수적인, 기복형의 기독교인데, 그것은 샤머니즘화된 것으로 알려진 한국의 불교와 마찬가지로 샤머나이즈 되어 이미 어떤 면에서는, 이른바 '자생성'을 획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십자군 전쟁'도 잃었던 기득권을 되찾기 위한 것이었을 뿐, 사회 개혁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류요한이 박일랑을 체포한 직후 <너 이새끼 우리 땅 뺏구 천년만년 리당위원장 해먹을 줄 알았네?>(213쪽)라고 하는데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손님』에서 보이는 초기 이북의 기독교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도 샤머니즘적 기복신앙으로 변질된 측면이 많다. 샤머니즘은 개인의 현세적 고민(기억)들을 지우는 데에만 기능하고 있다. 기복신앙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샤머니즘이 그렇듯이 그것이 가진 이기주의적인 발상 때문이다. 마가복음 12장 13절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런 이기주의적인 기복신앙을 극복하라는 말씀이다. 그러한 극복이 이루어지지 않은 기복적 기독교신앙은, 앞서 생각해보았던 샤머니즘이 그렇듯이 한을 푸는(지우는) 데에만 기능하는 의식주의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참된 믿음은 이상사회와 현존질서의 괴리를 각성하고 그 괴리를 메우기 위해 진실된 기억을 토대로 하여 현세적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개인과 공동체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차츰 그 행복을 다져가게 될 것이다.


손님
황석영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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