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습작을 쓸 때마다 나는 늘 무슨 말을 더할까를 생각했다. 내 몸 속에 왜 이다지도 말이 없을까 안달했다. 부족한 나의 시--그 중 나은 시들은, 그러나, 말의 뺄셈에서 나왔다는 것이 내 솔직한 고백이다, 지금. …가령, 이것저것들을 주워섬겨 아날로지analogie를 형성하면서도 정작 복판은 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나를 잘 알고 있거나, 나의 시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치지 않은 복판의 울림을 들을 것이라고.

신까이 마꼬또新海誠 감독의 단편 연작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를 보면서, 내가 계속 생각한 것도 말의 뺄셈이었다. 확실히 이 작품은 말을 아끼는 작품이고, 말하지 않은 것으로 말하는 작품이다. 이 말은 나오는 인물들의 대사가 적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은 줄곧 길고 긴 독백을 하고 있다. 타카키는 아카리에게 할 말이 몸 속에 한가득 있다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 작품이 말의 뺄셈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말과 말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를 찾도록 하는 작품이라는 뜻이다. 잃어버린 고리를 찾는 일은 의외로 어렵지 않고, 찾았을 때의 기쁨은 크다. 그 고리를 찾는 힘을 나는 공감sym-pathie이라고 부르고 싶다.

(합법적으로 블로그에 노래를 틀 수 있을 때까지 노래 잠시 내립니다. 2008년 3월 24일. 신까이 마꼬또,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

초속5센티미터

"들어주길 바라는 말이 내겐 정말 한가득 있었다."



I

타카키는 멋진 표현의 독백을 구사한다. "귀가 아플 정도로 갖다댄 수화기", "눈 내리는 날 도시 특유의 냄새", "시간은 뚜렷한 악의를 가지고 내 위를 천천히 흘렀다", "그 순간 영원, 마음, 영혼 같은 것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따위의 표현은 쉽게 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순간'에 온 신경을 집중했을 때 비로소 기억할 수 있는, 맡을 수 있는, 그리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애니메이션이 13세 소년의 이야기이지만, 다른 연령대의 사람들까지 쉽사리 공감할 수 있는 원인은 바로 타카키의 순간에 대한 집중력 덕분이다.

초속5센티미터

"아카리가 상처 받는 모습이 손으로 만져질듯이 와 닿았다."


타카키가 순간의 묘사에 주력하는 동안, 보는 이들은 그 순간이 얼마나 중요하고 아픈 순간인지를 알게 된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경험에서 우러난 공감 때문인데, 가령 "귀가 아플 정도로 갖다댄 수화기"라는 표현에서 우리가 쉽사리 공감하는 것은 누구나가 심야통화와 같은 어릴 적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정현종이

1
별들은 연기를 뿜고
달은 폭음을 내며 날아요
그야 내가 미쳤죠
아주 우주적인 공포예요

2
어둠이 촛불에 몸 씻듯이
깊은 밤 속에 잠겨 있으면
귀밝아오노니
지하수 같은 울음 소리……

- 정현종, 「심야 통화 3」全文

와 같이 노래했을 때, 밤에 통화하는 것과 우주의 공포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우리는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나만의 못난 경험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체험이라는 것을 아는 데에서 공감sym-pathie은 출발하는데, 그 공감을 통해서 말은 복판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II

시든 소설이든 영화든 애니메이션이든 서사 문학은 결국 말로 이루어진 예술이다. 영화나 뮤지컬을 '종합 예술'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지만, 역시 거기에서도 눈요깃거리만 제공하는 시간 죽이기용 제품이 아닌 이상 말의 우위가 두드러진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말의 암호는 결국 말로 풀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초속5센티미터


타카키가 "13년간의 삶을 서로 나눈 것 같았다"고 말했을 때 웃은 사람이 있었을지 모르겠다. 열세 살의 사랑이라니, 우습다 내지는 귀엽다 같은 이야기를 혹시 꺼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음 순간 타카키는 "우리의 앞에는 너무나 거대한 인생이, 아득한 시간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가로놓여 있었다"라고 털어놓는다. 일종의 시간의 역계산이다.

팔십 노인이 "우리의 앞에는 너무나 거대한 인생이 ……" 운운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팔십 노인의 사랑은 그래서 쿨하다. 그러나 어느 쪽이냐 하면 숫기가 없는 타카키는 13년 간의 자기 삶에 대비하여 자기 앞에 놓여진 남은 알파의 삶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초속5센티미터

"견딜 수 없이 슬퍼졌다."


말의 암호는 두 개의 변죽을 울려 함께 울리는 복판의 소리를 들음으로써 복호화decoding할 수 있다.


가끔 사람들은 삶이란 영화와는 다르다고 말한다. 아마 그건 영화가 삶과 유리되어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영화는 공감을 이끌어낼 수 없고, 동경이나 환상만 제조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멜로는 SF나 무협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멜로가 아닌, 사랑 이야기는 그렇지 않다.

이제 사랑을 찾아갈 때다; 초속5센티미터의 공감의 스피드를 함께 나눌 사랑을, 불가능한 것은 이제 없으니까. 그런 점에서 《초속5센티미터》가 「소나기」류의 아련한 과거에 대한 작품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타카키는 버려진 존재이거나 혹은 (능동적으로) 버린 존재이지만, 그는 초속5센티미터의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태양계의 끝까지 나아가는 우주선처럼.

이 땅에는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확실히 사랑은 눈雪처럼 쉽게 변하고 쉬 사라지는 것이지만--그 변화는 나 혼자의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의 변화이다--, 우리 무거운 인생은 경험과 공감이 쌓인 만큼 짐을 벗고 오히려 홀가분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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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속 5센티미터 (초회한정판)
신카이 마코토 감독/태원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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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飜譯語成立事情』
『번역어성립사정』
柳父章, 서혜영 옮김, 일빛.
2003년 4월 1일 초판.

<ㅉ=5>글머리에

이 책에서 다루는 '사회' '개인' '근대' 등의 번역어는 학문과 사상의 기본 용어이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나 신문지면 등에도 자주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도 가정의 거실에서 가족들끼리 또는 직장 동료들끼리 편하게 대화를 할 때에는, 이런 말은 보통 사용하지 않는다. 상당히 교육 정도가 높은 사람의 가정이라 하더라도 그럴 것이다. 만약 편안한 자리에서 누군가가 이러한 말을 입에 올린다면, 주위 사람들이 얼른 자세를 고쳐 앉거나 자리가 썰렁해질지도 모른다. 즉 이런 말은 사용되는 장소가 한정돼 있어서, 일상 생활의 장에서가 아니라, 학교나 활자 속의 세계 혹은 집안이라 해도 공부방에서만 사용된다. 일상어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다른 세계의 말이다. 우리들은 생활 속에서 각각의 장면에 따라 이러한 말을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난해한 책을 많이 읽은 젊은이라 하더라도 교실이나 친구와 토론하는 자리에서는 어렵고 딱딱한 어감의 말을 자주 입에 올릴지 몰라도, 어머니 앞에서는 그런 말투를 사용하지 않는다.

일본의 학문과 사상의 기본 용어가 일상어와 따로 놀면서 이 책 곳곳에서 지적한 바 여러 가지 왜곡이 따르게 되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이렇게 언어가 따로 놀게 된 데에는 한자를 수용하기 시작한 이래 형성된 뿌리 깊은 배경이 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번역어가 일상어와 동떨어져 있는 덕에 근대 이후 서<ㅉ=6>구 문명의 학문과 사상 등을 빨리 받아들일 수 있었던 측면도 있다.

이와 같은 우리들의 숙명적인 사실을 놓고 좋으냐 나쁘냐를 가르기보다는, 우선 사실 그 자체를 알았으면 한다. 그것은 의외로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책을 쓴 이유이다.

이 책 앞부분에서 다룬 여섯 개의 용어인 '사회' '개인' '근대' '미' '연애' '존재'는 바쿠후(幕府) 말기에서 메이지(明治) 시대에 걸쳐 번역 과정에서 만들어진 신조어이다. 혹은 실질적으로 신조어와 동등한 말이다. 그 뒤에 다른 네 개의 용어, 즉 '자연' '권리' '자유' '그' ('그녀'는 신조어)는 원래부터 사용되던 일본어로 일상어 속에 살아 있던 말인데, 번역어로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 것들이다. 이상 두 가지 경우 번역어가 갖는 문제는 서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특히 후자와 같이 전래된 일본어를 번역어로 사용했을 경우에는, 서로 다른 뜻이 혼재하면서 상호 충돌하는 문제가 생긴다. 하지만 양자 모두 번역어 특유의 효과로 인해 뜻을 알기 힘들거나 의미를 혼동하게 하는 등의 문제를 똑같이 안고 있다.

번역어의 문제를 다루는 나의 기본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본문 속의 여러 곳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을 모두 모아 '근대'의 제2절 부분에서 종합하여 설명하였다.

이 책에서 다룬 번역어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에서도 이야기를 한 바 있다. 그 중 이 책에서 다룬 주제가 처음 나온 문헌은 다음과 같다.

<ㅉ=7>'사회'  저서 『번역이란 무엇인가』, 호세 대학(法政大學) 출판부. 1976년.

'개인'  『문학』1980년 12월호,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근대'  『도서』1981년 1~3월호, 이와나미쇼텐

'미'     『도서』1981년 5~7월호

'연애'  『번역의 세계』1979년 10월호, 일본번역가양성센터

'존재'  『번역의 세계』1980년 8~9월호

'자연'  저서 『번역의 사상』, 헤이본샤(平凡社), 1977년

'권리' '자유' '그, 그녀'  저서『번역이란 무엇인가』

이 책에서는 나의 번역론에서 단어론을 총정리한다는 생각으로 각각의 논문을 상당 부분 손질했다. 또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쓰기 위해 노력했다.

이 책이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기까지는, 이와나미쇼텐 편집부의 사카마키 카츠미(坂卷克巳) 씨께 도움 받은 바가 크다.

1982년 1월
야나부 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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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의 마리아는 호메로스의 나우지카에서 사랑의 표본을 찾는다.

「옛날에는 달랐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호머가 나우지카 같은 사랑스럽고 건강하며 섬세한 여인을 만들어 낼 수 있었겠어요? […] 오늘날의 시인이라면 나우지카를 여자 베르테르로 만들어 버렸겠지요 […] 사람들은 오로지 취하게만 하는 묘약만 알 뿐, 생기를 주는 사랑의 샘물을 모르는 걸까요?」

-막스 뮐러『독일인의 사랑』신역판, 차경아 옮김, 문예출판사, 1987, 84-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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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은 다르지만 미야자끼의 애니메이션에서도 그 본질적인 것은 다르지 않다. 결국은 '사랑없음'이 모든 문제의 발단이고 '사랑'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사랑이 진부한가? 아니다. 사랑이 진부하다면 성교性交도 식사食事도 수면睡眠도 모두 진부하다. 하야오가 굳이 '나우시카'라는 이름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그럴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표현하려는 사랑은 인간과 자연간의 사랑이다. 인간이 인간끼리의 사랑만을 강조하고 자연과의 사이에 금을 긋기 시작하면서 문제는 시작되었다. 영화에서 가장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이념이 휴머니즘이라는 것을 보면 그것은 확실하다. 그런 휴머니즘은 영화에 등장하는 세 마을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다. '거신병'을 '테크노피아'의 알레고리로 파악하는 데서 토르메키아를 더 비난하고, '오무'의 유충을 미끼로 '오무'를 마을 파괴에 이용하는 페지테를 더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바람계곡의 사람들도 실은 그런 비난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영화 중반에 삽입된 회상 씬에서 나우시카는 아버지 지루에게 '오무'의 유충을 빼앗긴다.

(큰 나무를 등지고 필사적으로 외치는 나우시카. 그러나 그녀의 발 사이로 오무의 유충이 기어나온다)
나우시카 나오지 마!!
오무의 유충입니다.
역시 곤충에게 홀려있었구나… 이리 다오 나우시카!
나우시카 싫어!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어요!!
곤충과 인간은 같은 세계에서 살 수 없단다! (뺏어간다)
나우시카아앗--!! 제발!! 죽이지 말아요!! 제발…


인간과 곤충이 함께 살 수 없다는 인식을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이상, 불을 많이 사용하든 적게 사용하든 결국은 마찬가지다.

그 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언급할 내용은, 불을 사용하는 이들은 모두 남자들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나우시카 자신도 여자이고, 페지테의 비행선에서 탈출하려는 나우시카를 도와준 것은 아스벨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자이고, 눈먼 예언자인 할머니도 여자이다. 결국은 거신병을 택하긴 하지만 계속해서 공격을 망설이고, 유보했던 크샤나도 여자이다.

나희덕 시인은 「생태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그리고 시」라는 제목의 글에서 김혜순 시인의 「잘 익은 사과」를 인용하며

이 시에서처럼 존재를 태운 자전거 바퀴가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을 때마다 그녀는 그만큼 고향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고향에서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는 모습은 대지의 어머니 가이아(Gaia)를 연상시킨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여성성에 대한 강한 자의식과 환유적 문체를 결합한 김혜순의 최근 시들이 생태적인 세계와 자연스럽게 만나는 한 지점을 보여준다.

- 나희덕「생태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그리고 시」, 『창작과 비평』2000년 겨울호, 61쪽.


고 적고 있다. 여성성은 모성성을 빼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여성이 남성보다 더 생명의 근원에 가까이 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 영화에서 나우시카를 페지테의 비행선에서 탈출시키는 일의 주동자가 죽은 라스텔의 '어머니'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중의 작품인 《모노노케 히메》가 좀더 인간에 대한 혐오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산의 입을 빌려 "인간은 싫어."라는 직설을 내뱉게 하는 데 반해 나우시카는 인간을 비롯한 무릇 생명을 모두 소중히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마 그런 차이는, 산은 인간이라고 말하기가 껄끄러운 이력을 갖고 있는 반면 나우시카는 두말 할 것 없이 인간이라는 근본적인 다름의 결과이겠지만, 또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분노한 자연과 인간을 이어줄 다리는 결국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감독의 인식이 표현된 것일 수도 있다.

흔히 "깨끗한 환경은 후손들에게서 빌려온 것"이라는 말로 자연보호와 환경보존의 당위성을 말하지만, 사실 그 말 역시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우시카처럼 자연에 직접 손을 내미는 것이다. 테토처럼 손가락을 조금 물다가 말수도 있고 '오무'처럼 '희생'을 요구할 수도 있지만, 인간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선택은 정해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덧) 《모노노케 히메》가 흔히 비판받는 대로 여기서도 일본색을 강조했다고 비판하려면 못할 것은 없다. 거신병을 원폭의 알레고리로 토르메키아를 미국의 알레고리로 볼 수 있으며, 페지테 역시 열강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바람을 특히 중요시하고 불을 싫어하는 부분은 카미카제神風와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빤한 알레고리를 이용한 해석의 시도는 훌륭한 작품을 정교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망가뜨리는데 일조할 뿐이다.

덧2) 그림이 코난 류와 무척 비슷하다든가, 나우시카의 천진한 웃음소리가 어딘지 가식적으로 들린다든가, 페지테 비행선에서의 유파의 검술의 우스꽝스러움은 시대의 반영일까.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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쯔지 히또나리의 『냉정과 열정사이』도 결국 얼마간 연애소설을 벗어난 체하는 트랜디 연애소설일 뿐인 것 같다. 쥰세이의 직업이 독특해서 몇몇 전문적인 단어들이 등장하고 그것이 소설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이 소설의 축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하나의 지엽으로 그칠 뿐이다.

작기는 때로 神에 비견된다. 소설은 사실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고 소설의 등장인물 역시 실제로는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작가는 신이어서는 안 된다. 상상력은 망상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신의 거짓말'처럼 본래부터 모순되는 개념이다.

소설은 삶을 담아야 한다. 그러나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몇 달, 몇 년, …, 몇십 년까지 다루는 소설에서 삶의 세목들을 모두 다룰 수는 없다. 작가는 무엇을 더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뺄 것인가를 더 주의깊게 생각해야 한다. 밥을 먹었다, 화장실에 갔다, 잠을 잤다는 것이 세세하게 묘사된다고 생각해보라.

조반나의 이야기, 메미의 아버지, 쥰세이의 어린시절은 소설의 줏대되는 이야기에 그다지 개입하지 못하고 떠돌고 있다. 그런 것들은 '밥을 먹었다'와 그리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냉정과 열정사이 - Blu
쓰지 히토나리 지음, 양억관 옮김/소담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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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령공주》의 우리나라 개봉일이었다. 연인과 함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았고, 어제는 《이웃집 토토로》를 보았다. 《센》이나 《토토로》에서는 조금 약화되거나 암시적으로만 있고, 《원령공주》나 《나우시카》에서는 좀 더 주제의식이 명확하다는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미야자끼 하야오 감독은 '생태'를 그 가운데 두고 있다고 생각된다. "인간과 숲이 함께 살아갈 수는 없나요?"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


인간의 추악하고 역겨움, 그건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되지 않을 때 이미 예견된 일이 아니었을까? 신들이나 자연이 인간을 역겨워 하거나 증오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자연보다 위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새것 콤플렉스와 성장발전의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들은 '에보시'가 왜 단죄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이르는 대로, 여자들이 속편히 살 수 있는 곳을 만들어주고 나병환자들까지 수용한다. 그는 철저한 인본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 자체가 늘 죄이듯 인본주의는 자연과의 대립을 낳기가 쉬울 것 같다. 아시타카나 산은 노한 자연과 인간의 가운데에 있는 이들이다. 시시 신의 분노는 얼마쯤 대홍수 모티프를 닮아있다. 홍수 모티프에는 늘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아시타카와 산이다. 데우칼리온과 퓌라가 등 뒤로 돌을 던졌듯 아시타가와 산은 시시 신의 머리를 돌려준다. 그리고 대자연에 새로운 싹이 돋는다... 시종 영화에 끌려다니기만 했다. 그만큼 미야자끼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흡인력이 있다. 그래서 영화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게 한다.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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