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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기억 속 재편되는 계급: 박주택 『시간의 동공』

최초의 시계, 최초의 달력은 사람의 눈이었다. 사람들은 태양과 달의 모양과 움직임, 물의 흐름을 보고 세월歲月과 시간時間과 촌음寸陰을 알았다. 박주택의 시집 『시간의 동공』은 시인의 눈을 따라 시간의 흐름을 꿰뚫어보고, 눈이 보았던 기억과 그 속에 숨어있는 계급을 살펴보는 시집이다. 시인의 눈은 먼저 "문을 닫은 지 오랜 상점"을 바라본다. 불빛이 없어 어두운 그곳에는 발가벗겨진 채 갇혀 있는 인형이 보인다. 시인은 문득 섬뜩함을 느낀다. 그리고 사뭇 달랐던, 처음 그곳에 갔을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때는 허리춤이 드러난 한 여자가 물을 뿌리며 창을 닦고 있었고, 사랑스러운 아이와 고요한 커피 잔도 시인의 눈에 들어왔다. 아마 인형도 그 때는 옷을 걸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인은 그 먼 기억..

타오르는책/詩 2009.11.09

시니피앙을 잃어버린 시

인터넷에서 수난받는 시작품들 별이 갈 길을 비추었던 서사시의 시대를 동경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의 시는 '향유'된다기보다는 '소비'되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나는 늘 절망한다. 나는 좋은 시는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재생산이란 하나의 시가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 속에 다른 울림을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재생산 과정에서 원래의 시가 가지고 있는 아우라는 사라지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그 시를 딛고 있는 다른 시를 낳기도 한다. 인터넷과 '미니홈피' 시대의 시의 '소비'는 좀 색다른 경향이 있어서, 시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고치거나 다른 사람의 시에 자신의 시를 덧붙이거나, 시를 마음껏 자기 것으로 이용한다. 그렇게 '가공'된 시는 원작의 분위기를 잃고 대개 감동적인 ..

천지인-어쨌든 우리는 살아가니까

고교 시절 은사님이 녹음해서 주셨던 천지인의 테이프를 처음 더블 데크에 걸었을 때 나온 노래가 "어쨌든 우리는 살아가니까"였다. 테이프가 늘어질까봐 아껴아껴 듣다가 최근에야 복각판 CD를 구매했는데... 어쨌든 대학에 들어가 기형도를 찬찬히 읽으면서 이 곡이 본래 그의 시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CD 어디에도 그런 이야기는 없는데...) 수백개의 명함을 읽으며 일일이 얼굴들을 기억할 순 없지 우리에겐 그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니까 한두시간 차이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생각할 정도로 우리에겐 그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니까 굳게 뚜껑이 닫힌 만년필처럼 서로에게 필요한 말만 던지고 10년이 지난 드라마처럼 어쨌든 우리는 살아가니까 풀어진 와이셔츠 단추 한개에 날선 칼라가 늘어져..

육중한 지구별 여행자: 조영석『선명한 유령』

시집을 통독한 것이 얼마만일까. 시 한 편을 읽을 여유도 없는 삶이 무척이나 삭막하다. 여유란 시간이 아니라, 마음이니까. 마음이 무겁다. 시를 읽는다는 것이 그렇게 누리는 호사는 아닐까.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1. 밤/잠 조영석의 시집 『선명한 유령』에서는 줄기차게 ‘밤/잠’이 등장한다. 시란 본래 꿈이고, 꿈은 대개 밤에 자면서 꾸는 것이니까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닐 수 있다. 통속적인 구분도 괜찮다면, 서정 시인은 밤에 시의 행을 늘려가고, 소설가는 낮에 ‘집필실’에서 원고지의 장수를 늘려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정 시인은 ‘밤’이라는 낱말을 지배한다. 시인은 골방에 들어가거나, 잠깐 눈을 감는 동안에도 밤을 불러낼 수 있는 것이다. 거기서 시인은 ‘지금/여기’가 아니라 ‘언젠가/다른 ..

타오르는책/詩 2007.01.12

소금인형

과거의 '시운동' 동인의 한 명이었던 안재찬이 어느 날 갑자기 류시화가 되었다. 상상력에 주목한 '시인동' 동인에서 명상가로 옮겨간 그를 보면 상상력이 명상과 얼마나 가까운지, 그리고 시가 명상으로 떨어지기가 얼마나 쉬운지 알 수 있다. 나는 명상을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라, 명상이란 본시 말을 벗어나는 것이므로 말을 붙잡아야 하는 시로서는 후퇴라고 말하는 것이다. 김현 선생은 안재찬이라는 시인을 주목하여 "그의 시세계를 받침하고 있는 것은 '나에게는 할 말이 없다'라는 쓰디쓴 자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의 담백하고 좋은 시 '소금인형'은 긴 말 하지 않는다. 워낙 담백한 시고, 그래서 독자는 일순 당황하지만 그 다음 자기-없음의 이 상태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안치환의 소금인형은 일반적인 노래의 길..

샴푸의 요정

빛과 소금의 샴푸의 요정이다. 장정일의 시를 잘 변형하여 만든 이 노래를 오래 좋아했다. 다소 몽환적인 분위기를 즐겼던 것일까? 항상 노래와 영화를 대할 때면 시와 소설을 생각했다. 현대의 대표적인 서정 문학은 시가 아니라 노래이며, 현대 서사문학은 소설이 아니며 영화가 아닐까? 하지만 나는 거기에 쉽게 녹아들 수가 없었다. 노래에 대해 시의 우위를, 영화에 대해 소설의 우위를 항상 느꼈기 때문이다. 가령, 빛과 소금의 '샴푸의 요정'에는 장정일의 시에서 볼 수 있는 이율배반적인 애증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매트릭스 안의 모든 것이 조작된 것임을 알면서도 매트릭스를 동경하는 것으로, 나는 키치Kitsch 시인들 모두에게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노래나 영화에서는 볼 수가 없다...

노시인老詩人의 오만: 정현종의 북핵 시

짧게 쓴다. "오오 노시인들이란 늙기까지 시를 쓰는 사람들, 늙기까지 시를 쓰다니! 늙도록 시를 쓰다니!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쳤던 건 서른 살의 정현종이었다. (김현에 따르면) 그는 김광섭 선생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선생의 시제詩祭에 찾아갔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제 이렇게 말한다: "의외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저절로 쓰게 됐다. 시란 이런 것이다. 절실하면 터져나오는 것이다. 앞 부분 대여섯 행에서 몇몇 표현만 다듬었다." 시를 쓰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도대체 시인이 시를 어떻게 보는 것인가. 절실해서 터져나왔다는 그 시란, '핵실험에 부쳐'라는 부제를 단 「무엇을 바라는가」라는 글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글을 마주할 때마다 임화를 생각한다. 임화의 시를..

타오르는책/詩 2006.10.29

현재 진행형의 변신: Ovidius『변신 이야기』

원제는 그저 Metamorphoses일 뿐이다. 변신이야기라는 제목은 아마도 일본어판인 『轉身物語』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인 신화학자 중에는 가장 유명한 이윤기가 펭귄판으로부터 옮겨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판을 읽었다. 이윤기는 일러두기에서 몇 가지를 고백하고 있는데, 먼저 라틴어 원문은 2인칭이며 운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어판은 3인칭 산문으로 되어 있다.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대신, 해석은 매끄러웠고 모난 곳은 없었다. (단국대 천병희 선생이 번역한 『변신이야기』가 작년에 나왔다. 라틴어에서 바로 옮겼고, 행갈이를 하여 운문의 형태를 하고 있다.) 1 1권과 달리 2권은 좀 지루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아이네이아스나 로물루스-레무스 이야기, 그리고 왠지 낯간지러운 카에사르와 아우..

타오르는책/詩 2006.07.31

눈보라와 기다림, 그 가능성: 황동규의 초기시

자신을 '바람'이라고 부르던 兄이 있었다. 그는 발소리도 없이 나타났다가, 인기척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그는 어쩌면 자유로웠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제 '바람'으로서의 그가 많이 외로웠으리라고 짐작한다. 겨울의 문턱 즈음에 태어난 그가 스스로를 '바람'이라고 부를 때, 산뜻한 봄바람이 연상되는 경우는 없었다. 나는 매년 가을 경에 요절한 시인의 시비詩碑에 앉아 시를 읽곤 했다. 그때마다, 그때마다, 바람이 불었다. 황동규에게 '바람'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그의 시는 항상 바람 부는 곳에서 있고, 그 바람은 또한 항상 비바람 아니면 눈보라다. 때문에 그의 바람은 "산 위에서 부는" 시원한 바람도, 더운 여름날 여자들의 치마 끝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는 가벼운 바람도 아니다. 그의 바람은 늘 습윤濕潤하고,..

타오르는책/詩 2005.09.26

경계의 시: 김록『광기의 다이아몬드』

흼과 검음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물과 뭍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아니, 어제와 오늘의 사이엔, 말과 말없음의 사이엔, 있음과 없음의 사이엔, 처음과 끝의 사이엔, 아니아니, 삶과 죽음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대답할 수 없다, 그렇다면, 검음과 흼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뭍과 물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아니, 오늘과 어제의 사이엔, 말없음과 말의 사이엔, 없음과 있음의 사이엔, 끝과 처음의 사이엔, 아니아니, 죽음과 삶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말장난. 옳다, 하지만 당신들은 삶의 상징인(,) 혀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관찰해본 일이 있는가. 한 번도 시집을 거꾸로 읽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 물구나무서기를 해도 좋다. 「99.999999999」(158)는 100이 아니다. 곧,..

타오르는책/詩 2005.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