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시계, 최초의 달력은 사람의 눈이었다. 사람들은 태양과 달의 모양과 움직임, 물의 흐름을 보고 세월歲月과 시간時間과 촌음寸陰을 알았다.

박주택의 시집 『시간의 동공』은 시인의 눈을 따라 시간의 흐름을 꿰뚫어보고, 눈이 보았던 기억과 그 속에 숨어있는 계급을 살펴보는 시집이다.

시인의 눈은 먼저 "문을 닫은 지 오랜 상점"을 바라본다. 불빛이 없어 어두운 그곳에는 발가벗겨진 채 갇혀 있는 인형이 보인다. 시인은 문득 섬뜩함을 느낀다. 그리고 사뭇 달랐던, 처음 그곳에 갔을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때는 허리춤이 드러난 한 여자가 물을 뿌리며 창을 닦고 있었고, 사랑스러운 아이와 고요한 커피 잔도 시인의 눈에 들어왔다. 아마 인형도 그 때는 옷을 걸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인은 그 먼 기억과 다른 괴기한 광경만 볼 뿐이다. 시 '폐점'의 내용이다.

기억은 시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무엇인가를 기억하는 행위는 과거와 지금이 같은지 다른지 비교하게 하고, 그 사이 수많은 시간의 물결과 주름을 알아보게 한다. 문제는 이 물결과 주름이 만드는 숫자의 흐름에는 어떤 정치적인 함의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간이란 계급을 재편성하는 과정이란 느낌이 들 때
햄버거는 입속에서 혈관을 터뜨리고 커피는 저녁처럼 어두워졌다
순환하는 인간들, 청춘은 중년이 되고 또 다른 청춘은
이곳을 가득 메우며 노년에 이르게 됨을 눈치채지 못한다

- 「강남역」부분.

여름 저녁 강남역 인근의 번화가를 지나다보면 젊음이 하나의 계급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땀 냄새가 가득한 그 청춘의, 여름의 계급은 「여름들」에서 보듯 자꾸 무엇인가를 소유하려고 하고, 무엇인가를 불러들이려 한다.

그러나 그 계급은 결국에는 부질없이 지고 마는 계급이다. 여름이었던 시간은 어느새 가을로, 가을이었던 시간은 금세 겨울로 변해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달은 것일까. 시인은 「여름 말 사전」에서 "여름이 갈 때 용서하자"고 노래한다. 이어 「가을 말 사전」에서는 "빈 들에 서서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본다." 이어 눈보라가 치고 종소리가 울리면 그제서야 "여름이 겨울처럼 늙어가 이제는 울음조차" 시인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소년이었을 때」).

사실 겨울이 지나면 이승에 남는 것은 없다.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성서의 예언처럼 모두 본래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

이제 남은 것들은 자신으로 돌아가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만 바다를 그리워한다

- 「시간의 동공」부분.

하지만 망각만이 남아 있을 것 같은 겨울 이후에도 여전히 기억은 끈질기게 깨어 있다. 시인은 그것을 '미련'이라고 부른다.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은 기억되려는 욕망 속에서 무덤이라는 것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곳은 미련의 둥지다
저마다 지붕을 틀고
게걸스러웠던 입을 다문 채 죽은 것처럼
누워, 햇빛을 쬔다
[...]
죽어서도, 끝끝내
버리지 못하는 미련의 노란 창문이다.

- 「묘지」부분

물론 이런 기억이 갖고 있는 미련은 마냥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땅 속에 묻힌 무덤은 뿌리이지만, 줄기와 여름의 꽃잎들은 한 나무의 가지가 되기 때문이다. 조선 3대 태종 부부와 23대 순조 부부가 나란히 묻힌 헌인릉에서 노는 아이와 부모들을 보고 반 세기를 살아온 1959년생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뿌리들은 어느 마음의 끝 땅속에 내려
이토록 질긴 목숨으로 얽혀 있을까
바람이 지나가면 그 흔들림만큼 흙 속을 엉켜드는
목숨들 두 번의 생이 있다면 아름다움이 다투어 묶이는
창문에 나가 동터오는 집의 입구를 바라볼 것이다

- 「헌인릉 가서」부분

삶의 성(城)은 언젠가 조금씩 몰락해가는 것이지만 계속해서 다시 지어지는 것이며, 그 모든 주름져가는 과정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듯하다.

시간의 동공 - 10점
박주택 지음/문학과지성사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Posted by 엔디
인터넷에서 수난받는 시작품들

별이 갈 길을 비추었던 서사시의 시대를 동경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의 시는 '향유'된다기보다는 '소비'되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나는 늘 절망한다. 나는 좋은 시는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재생산이란 하나의 시가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 속에 다른 울림을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재생산 과정에서 원래의 시가 가지고 있는 아우라는 사라지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그 시를 딛고 있는 다른 시를 낳기도 한다.

인터넷과 '미니홈피' 시대의 시의 '소비'는 좀 색다른 경향이 있어서, 시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고치거나 다른 사람의 시에 자신의 시를 덧붙이거나, 시를 마음껏 자기 것으로 이용한다. 그렇게 '가공'된 시는 원작의 분위기를 잃고 대개 감동적인 사랑이나 착한 도덕률의 삶을 설파하는 교과서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 순간 시가 잃어버리는 것은 시니피앙이다.

1

도종환 시인의 시는 「접시꽃 당신」 시절부터 수첩이나 다이어리에 적혀 회자되던 것이다. 그의 시는 서정윤이나 특정 시점 이후의 류시화의 시와 달리 삶에서 비어져나온 어떤 빛이 있는 시였다. 이를테면, 베개맡의 머리칼처럼 생명이 빠져나간다는 표현은 쓰기 쉬운 것이 아니다. 그 시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탁월한 성찰에 관한 시였다. 씨앗과 열매는 거의 자연스럽게 그 앞의 혹은 그 뒤의 꽃을 연상시키고 벌레는 수정受精을 떠올리게 하는데, 시인 부부가 섬겼던 농사일은 거기서 거의 확실한 삶의 은유가 되어 있다.

나는 이런 아픈 사랑의 시를 좋아하는데, 널리 알려진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나 또 이정록 시인의 「보석달」 같은 시는 읽을 때마다 조금 숙연해진다.

보석달

식 올린지 이년
삼개월 만에 결혼 패물을 판다
내 반지와 아내의 알반지 하나는
돈이 되지 않아 남기기로 한다
다행이다 이놈들마저 순금으로 장만했다면
흔적은 간 데 없고 추억만으로 서글플 텐데
외출해도 이제 집걱정 덜 되겠다며 아내는
부재와 평온을 혼돈하는 척, 나를 위로한다

농협빚 내어 장만해준 패물들

빨간 비단상자에서 꺼내어 마지막으로 쓰다듬고
양파껍질인 양 신문지에 둘둘 만다
버려야 할 쓰레기처럼 밀쳐놓고 화장을 한다
거울에 비친 허름한 저 사내는 누구인가
월급날이면 짜장면이 먹고 싶다던
그때처럼 화장시간이 길다
동창생을 만나러 나갈 때처럼
오늘의 화장은 서툴러 자꾸 지우곤 한다

김칫거리며 두루마리 화장지를
장식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돌아오는 길
자전거 꽁무니에 걸터앉아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콧노래 부르며 노을이 이쁘단다
금 판 돈 떼어 섭섭해 새로 산
알반지 하나를 쓰다듬으며 아내는
괜히 샀다고 괜히 샀다고
젖은 눈망울을 별빛에 씻는다
오래 한 화장이 지워지면서
아내가 보석달로 떠오른다

하지만 이 시들이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순간 이 시인들의 삶 역시 돈으로 살 수 있는 것FOR SALE이 되고 만다.

무서워라,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시詩라는 것이 존재할 이유는 없다...

2

뿐만 아니라, 시가 멋대로 바뀌어 회자된다면 장기적으로 상당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먼저 웹의 어떤 텍스트도 확정된 텍스트로 믿을 수 없고, 어떤 작가도 자신의 글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

시의 내용을 조금 바꾸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항변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확실히 세계에서 닳고 닳은 언어라는 질료는 다루기가 쉽지 않다. 다 빈치 작품 「모나리자」에 멋대로 덧칠을 해서 웹에 게시하면서 내가 무얼 잘못했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아니, 그렇다면 또 뒤샹의 「L.H.O.O.Q」에 대해 말할 사람이 있으려나. 모든 문학사와 미술사를 다시 써야 할 판이다.)

3

아니면 여기서 '저자의 죽음La mort de l'auteur'에 대해서 말해야 할까? 놀랍게도 텍스트가 마구 바뀌고 시의 형상이 훼손되는 그 가운데에서도 저자는 죽지 않았다. 저자의 이름은 훼손된 텍스트 앞에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가끔 도종환을 도종완으로 잘못 쓰는 경우는 있다.) 그 말은 웹에 올려진 텍스트가 저자의 권위에 호소하는 것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저자의 권위를 빌어 글을 쓰는 것이나 그 씌어진 글을 우리는 위작僞作이라고 부른다.

롤랑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을 말했을 때 그는 '작품에서 텍스트로de l'œuvre au texte'를 말했다. 글의 주인은 저자가 아니라 독자라고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본다. 하지만 '소비'되는 글들은 여전히 텍스트가 아니라 작품으로 기능하고 있다. 바르트는 "저자는 합리적인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웹에서 떠돌아다니는 훼손된 텍스트들은 철저한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Posted by 엔디
고교 시절 은사님이 녹음해서 주셨던 천지인의 테이프를 처음 더블 데크에 걸었을 때 나온 노래가 "어쨌든 우리는 살아가니까"였다. 테이프가 늘어질까봐 아껴아껴 듣다가 최근에야 복각판 CD를 구매했는데...

어쨌든 대학에 들어가 기형도를 찬찬히 읽으면서 이 곡이 본래 그의 시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CD 어디에도 그런 이야기는 없는데...)


천지인-어쨌든 우리는 살아가니까 (보기)


기형도의 시가 좀더 사색적이고, 사실적이지만
이 경우, 록의 매력은 직선적인 것이 아닐까.

종이달 - 기형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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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엔디
   시집을 통독한 것이 얼마만일까. 시 한 편을 읽을 여유도 없는 삶이 무척이나 삭막하다. 여유란 시간이 아니라, 마음이니까. 마음이 무겁다. 시를 읽는다는 것이 그렇게 누리는 호사는 아닐까.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1. 밤/잠

  조영석의 시집 『선명한 유령』에서는 줄기차게 ‘밤/잠’이 등장한다. 시란 본래 꿈이고, 꿈은 대개 밤에 자면서 꾸는 것이니까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닐 수 있다. 통속적인 구분도 괜찮다면, 서정 시인은 밤에 시의 행을 늘려가고, 소설가는 낮에 ‘집필실’에서 원고지의 장수를 늘려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정 시인은 ‘밤’이라는 낱말을 지배한다. 시인은 골방에 들어가거나, 잠깐 눈을 감는 동안에도 밤을 불러낼 수 있는 것이다. 거기서 시인은 ‘지금/여기’가 아니라 ‘언젠가/다른 곳에서’를 상상할 수 있다: 밤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조영석의 시에서 밤은 불러서 오는 것이 아니고, 잠은 수동적인 것이다. “날이 새면 또 먼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39). 어디로 가는지 독자는 알 수 없다; 아마 시인도 모르기가 쉽다. 이인성이 “그때, 그가 돌아오려 했던 곳은 어디인가? 여기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그가 여전히 돌아가려 했던 곳은 어디인가?”라고 인상적인 첫 연작 소설을 시작했던 것처럼, 그리고 프로스트R. Frost가 “Miles to go before I sleep, /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이라고 되풀이하여 되뇌었던 것처럼. 서정 시인들이 ‘밤’을 불러내어 ‘다른 곳’을 상상한다면, 조영석에게 ‘밤’은 오는 것이고, ‘다른 곳’은 가야 할 곳이다; 그의 시는 쓴 것이 아니라 쓰인 것이다. 그러므로 때로 그에게 잠은 ‘졸음’의 형태로 나타난다(42-43). 한국어의 관용구에서 나타나듯이 졸음은 ‘오는’ 것이다. 시인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그곳은 도달할 수 있는 곳일까?


2. 죽음

  잠과 죽음의 차이는 어느 정도일까? 열왕기는 왕의 죽음을 묘사하면서 “자다sleep”라는 움직씨動詞를 즐겨 사용한다: “다윗이 그 열조와 함께 누워자서 다윗성에 장사되니So David slept with his fathers, and was buried in the city of David(개역한글판/KJV).” 잠과 죽음의 유사성에 주목한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그리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잠과 죽음의 가장 큰 공통점은 ‘오는 것’이라는 점, 곧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시 「거대한 잠」은 시간에 묻혀 죽은 두 공룡에 대한 이야기이다: “육식 공룡 두 마리 / 얼굴을 마주 보며 잠들어간다.”라는 행들과 “그들만의 긴 빙하기 속으로 / 쓸쓸한 공룡 두 마리 얼어간다.”라는 행들은 분명히 같은 위상을 점하고 있다. 백악기가 끝나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등장하는 시기, 한 시대의 죽음을 시인은 그리고 있는 것이다. 공룡이 등장한 이유는 ‘지금/여기’에는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시집 전체를 통해 공룡의 변형을 우리는 많이 찾을 수 있다: 가령 시베리안허스키가 그렇다(30-31). 허스키는 거기서 아이를 죽인 죄로 처형된다. 허스키가 아장아장 다가온 아이를 물어 죽인 이유는 무엇일까? 햇볕이 너무 강렬해서? (그리하여 이방견은 삶의 부조리를 발견하고 끝내 처형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조영석의 시에서 죽음은 화장火葬이나 풍장風葬이 아니라 매장埋葬이다; 화장이 영혼을 자유롭게 날려 보내는 것이고, 풍장이--황동규에게서 보이듯이--삶/죽음의 경계를 지워 죽음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것이라면, 매장은 일종의 가두는 행위이다. 사람은 죽는 순간 수인囚人이 되는 것이다: 땅의 수인. 그러므로 “매일 이 땅의 주인에게 사표를” 쓰지만 그 사표는 수리되지 않는다. 수리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스스로 찢어버린다(64-65).


3. 하강下降

  조영석의 시에서 죽음이란 매장이므로, 죽음이 하강의 이미지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불어에서 무덤tombe은 떨어지다tomber와 닮았다.) 앞에서 고찰한 잠에 대해 말하더라도, 한국어의 ‘곯아떨어지다’나 영어의 ‘fall asleep’에서 우리는 잠이 갖는 하강의 이미지를 밝히 알 수 있다. 그의 시는 바슐라르가 말하는 만큼 ‘역동적dynamique’이지 않다. 그의 시는 침잠하고 있다. “누이의 연애는 아름다워도 될까 /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때때로 상승을 뜻하는 낱말이 발견되지만, 오히려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올라가는 것과 날아가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다”(29), “주인 사내가 그물로 놈을 건져 올린다”(35), “씹다 버린 풀들이 바람에 실려 날아가고”(41), “살얼음을 깨고 썩지 않은 시체를 건져 올리는 날이면”(59), “뿌리를 통해 꾸역꾸역 올라오는 검은 물들이 보인다”(74). 그리고 날아오르는 것들은 결국 땅에 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물이 솟았다 떨어진다.”(110) 궁극적으로 상승을 가능케 하는 것, 모든 운동 에너지의 원천인 태양빛부터 적敵으로 설정되어 있다(30, 80).

  하강의 이미지는 무거움에 대한 상상력이다. 시집 맨 처음을 열면 생生이 얼마나 무거운가 하는 뼈아픈 자각이 있다. 작은 새를 보고, 불쌍히 여겨 새의 무게만큼 자기 몸을 내어주고 새를 살리려던 이가, 결국 자신의 온몸을 다 올리고서야 새와의 천칭의 균형이 맞았다는 불교의 설화를 우리는 알고 있다. 조영석의 시에서 새가 잠자리로 대치되어 있지만, 결국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생의 무게라는 것을 우리는 역시 알고 있다.

  시인이 이 생의 무게를 민감하게 느끼는 것은 그가 다른 별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는 본래 “지구보다 조금 가벼운 별”에서 살았다. 만유인력 인데, 여기서 G는 만유인력 상수이고 시인의 질량(m)은 같기 때문에, 만유인력 F는 행성 또는 별의 질량(M)에 비례한다. 지구보다 가벼운 별에서 살았다면 시인이 느끼는 만유인력의 크기는 아마 지금보다 작았을 것이다. 시인은 행성 지구에 살게 되면서 전에 없던 무거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결국 수인이다(43). 나는 처음에 조영석에게 시는 쓴 것이 아니라 쓰인 것이라고 말했다. 수인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쑥과 마늘을 100일 동안 먹어야 하는가(69). 소행성으로 돌아가야 하는가(65). 아니, 시를 써야 한다. 조영석에게 시는 인간으로서의 존재 이유raison d’être에 해당하는 것이다.


4. 무거움

  시인은 무거움을 항상 느낀다. 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돈에 대한 인식이다. 돈은 인간의 존재를 무겁게 만들며, 인간을 자기 아래에 복속시키고 수인으로 만든다(18, 29, 36-37, 89). 무거운 것은 값이 싸다(67). 시인은 이제 무거움의 사회적 차원을 느낀다. 돈에 의해 승부가 결정되는 사회는 권투와도 같은 경쟁 사회이다(88-90). 사실 권투는 쇼다; 각본이 정해져 있다는 뜻에서 쇼라는 것이 아니라, 그 경기 결과가 직접적으로 만드는 사회 현상이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시인이 “이것은 쇼가 아니다”라고 두 번 강조한 것은 그 권투가 달이 아니라 손가락이라는 뜻이다. 경쟁 사회에서는 ‘나’는 없고, 오로지 ‘조직’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돈이 나오기 때문에 ‘조직’의 쓴맛을 보면서도 꾹 참고 경쟁한다. 조영석의 시에 때로 ‘가장家長’이 등장하는 이유도, 실제로 아직까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가부장제 아래에서는, 가장의 죽음이야말로 가장 작은 사회--가족--의 죽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94-95).

  여기에 이르러 조영석은 ‘지금/여기’의 문제로 되돌아오는 셈이다. 시 한 편을 읽을 여유도 없는 삭막한 삶이 조영석의 시 옆에서 추문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또다른, 시인의 존재 이유이다, 시를 쓸 이유이다.


선명한 유령
조영석 지음/실천문학사

Posted by 엔디
과거의 '시운동' 동인의 한 명이었던 안재찬이 어느 날 갑자기 류시화가 되었다. 상상력에 주목한 '시인동' 동인에서 명상가로 옮겨간 그를 보면 상상력이 명상과 얼마나 가까운지, 그리고 시가 명상으로 떨어지기가 얼마나 쉬운지 알 수 있다.

나는 명상을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라, 명상이란 본시 말을 벗어나는 것이므로 말을 붙잡아야 하는 시로서는 후퇴라고 말하는 것이다.

김현 선생은 안재찬이라는 시인을 주목하여 "그의 시세계를 받침하고 있는 것은 '나에게는 할 말이 없다'라는 쓰디쓴 자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의 담백하고 좋은 시 '소금인형'은 긴 말 하지 않는다. 워낙 담백한 시고, 그래서 독자는 일순 당황하지만 그 다음 자기-없음의 이 상태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안치환의 소금인형은 일반적인 노래의 길이에 맞추어 반복을 통해 가사를 늘렸지만, 그럼으로써 이 시를 얼마간 애처롭게 만들어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자기-없음의 상태가 극적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좋은 노래라고 생각한다.


소금인형 - 류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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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엔디

빛과 소금의 샴푸의 요정이다.

장정일의 시를 잘 변형하여 만든 이 노래를 오래 좋아했다. 다소 몽환적인 분위기를 즐겼던 것일까?

항상 노래와 영화를 대할 때면 시와 소설을 생각했다. 현대의 대표적인 서정 문학은 시가 아니라 노래이며, 현대 서사문학은 소설이 아니며 영화가 아닐까? 하지만 나는 거기에 쉽게 녹아들 수가 없었다. 노래에 대해 시의 우위를, 영화에 대해 소설의 우위를 항상 느꼈기 때문이다.

가령, 빛과 소금의 '샴푸의 요정'에는 장정일의 시에서 볼 수 있는 이율배반적인 애증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매트릭스 안의 모든 것이 조작된 것임을 알면서도 매트릭스를 동경하는 것으로, 나는 키치Kitsch 시인들 모두에게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노래나 영화에서는 볼 수가 없다.


샴푸의 요정 - 장정일



장정일의 시 '샴푸의 요정'에서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사내'라는 호칭이 1연 4행에서 '나'로 3연 3행에서 '우리'로 바뀐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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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엔디
짧게 쓴다.

"오오 노시인들이란 늙기까지 시를 쓰는 사람들, 늙기까지 시를 쓰다니! 늙도록 시를 쓰다니!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쳤던 건 서른 살의 정현종이었다. (김현에 따르면) 그는 김광섭 선생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선생의 시제詩祭에 찾아갔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제 이렇게 말한다: "의외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저절로 쓰게 됐다. 시란 이런 것이다. 절실하면 터져나오는 것이다. 앞 부분 대여섯 행에서 몇몇 표현만 다듬었다." 시를 쓰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도대체 시인이 시를 어떻게 보는 것인가. 절실해서 터져나왔다는 그 시란, '핵실험에 부쳐'라는 부제를 단 「무엇을 바라는가」라는 글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글을 마주할 때마다 임화를 생각한다. 임화의 시를 넘어섰는가를 생각한다. 늘 회의적이다.

정현종은 후배 문인들에게 '침묵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나는 주제 넘게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은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침묵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Posted by 엔디
원제는 그저 Metamorphoses일 뿐이다. 변신이야기라는 제목은 아마도 일본어판인 『轉身物語』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인 신화학자 중에는 가장 유명한 이윤기가 펭귄판으로부터 옮겨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판을 읽었다. 이윤기는 일러두기에서 몇 가지를 고백하고 있는데, 먼저 라틴어 원문은 2인칭이며 운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어판은 3인칭 산문으로 되어 있다.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대신, 해석은 매끄러웠고 모난 곳은 없었다. (단국대 천병희 선생이 번역한 『변신이야기』가 작년에 나왔다. 라틴어에서 바로 옮겼고, 행갈이를 하여 운문의 형태를 하고 있다.)



1

1권과 달리 2권은 좀 지루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아이네이아스나 로물루스-레무스 이야기, 그리고 왠지 낯간지러운 카에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직접적인 아부 때문만은 아니다. 1부에서 등장한 신들의 이야기가 점차 영웅의 이야기나 인간의 이야기로 옮겨오면서 '변신'의 사례가 줄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다. 원문의 문제인지 펭귄판의 문제인지 이윤기의 문제인지 한 문단의 길이는 점점 길어졌고, 산문화한 것은 똑같지만 그 안에서 아직 감지할 수 있었던 운문의 맛은 줄었기 때문이다. 1권이 산문시에 가깝다면 2권은 그냥 산문에 가깝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1권의 첫 서사序詞는 거의 시라고 해도 무방하다.

마음의 원願에 쫓기어 여기 만물의 변신 이야기를 펼치려 하오니, 바라건대 신들이시여, 만물을 이렇듯이 변신하게 한 이들이 곧 신들이시니 내 뜻을 어여쁘게 보시어 우주가 개벽할 적부터 내가 사는 이날 이때까지의 이야기를 온전하게 풀어갈 수 있도록 힘을 빌려주소서. (1:15)

이 부분은 본래 기도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지만, 다음 인용하는 구절들은 번역의 거름망을 통과하고 있는 시적 성취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아폴로가 이런 약속을 하자 월계수는 가지를 앞으로 구부리고 잎을 흔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듯이…… (1:49)


나르키소스는 푸른 풀을 베고 누웠다. 곧 죽음이 찾아와 아름답던 그의 눈이 감기었다. 사자死者들의 나라로 간 뒤에도 그는 계속해서 스튁스 강에 비치는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케피소스 강 요정들은 동생인 나르키소스의 죽음을 애도하느라 머리를 모두 깎아 그의 죽음에 바쳤다. 숲의 요정들도 울었다. 에코는 이들의 울음소리를 숲 하나 가득하게 되울렸다. (1:138)

반면 2권은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글이 무척 산문적이다. 묘사적인 부분을 일부러 찾아봐도 그렇다.

이윽고 신사神蛇는 빛나는 신전 계단을 기어내려와 뒤를 돌아다보았다. 떠나기에 앞서 정든 제단을 뒤돌아본 것이었다. 정들었던 집인 신전과 작별 인사를 나눈 이 거대한 신사는 자기에게 바쳐진 무수한 꽃다발 위를 기어 도시 한복판을 지나 방파제 있는 곳으로 갔다. 방파제에 이르렀을 때는 고개를 돌려 군중을 바라보았다. 배웅하러 나온 군중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산사는 이탈리아 배에 올랐다. 배는 신사의 무게가 무거웠던지 용골이 잠길 정도로 내려앉았다. (2:326)

짧은 문단에 '이윽고'를 두 번이나 썼다든가, 이별의 모습이 지나치게 장황하여 연설을 듣는 것 같다든가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은 잘 다듬으면 훌륭한 시적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도, 아쉬움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2

한편 아부에 관해서라면, 나는 색다른 실망감을 맛보았다: 로마 최고 시인 반열에 오른 오비디우스의 아부 실력을 보고 싶었지만, 그런 것은 나타나 있지 않았다. 최고 시인의 아부는 무척 거칠고 직접적이어서 왠지 불쌍해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역자 후기에서 이윤기는 이 아부를 용비어천가에 빗대고 있지만,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용가는 두줄 남짓한 글귀 속에서 중국 고사와 이성계 가문을 잘 맞대면서 훌륭한 시적 성취를 드러내고 있다;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지라도 시적으로는 최고의 찬사를 받아 아깝지 않다. 고교 시절 배웠던 용가의 발췌문들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참신한 울림을 주고 있다.

『변신』의 아부는 그렇지 아니하니, 가령 다음 구절을 보자:

…… 그러나 카에사르는 당신의 나라에서 신이 되신 분이시다. 마르스 신의 직분인 전쟁은 물론이고 평화를 정착시키신 것은, 이 분께서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셨고, 평화시에는 많은 업적을 쌓으셨으며 엄청난 명성을 얻으셨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옳다. 카에사르의 공적 가운데 이 분을 아드님으로 삼으신 것 이상으로 빛나는 공적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329)

여기서는 죽어 혜성이 된 카이사르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양자인 아우구스투스를 대놓고 칭찬하고 있다. 카이사르의 수많은 업적보다 "프린캡스 폐하"의 존재 자체가 더 훌륭하다는 투다. 카이사르 대 아우구스투스의 관계가 사투르누스와 유피테르의 관계와 같다는 식의 표현도 등장한다. 그뿐이 아니다. 영원한 아부의 소재, 장수長壽 역시 빠뜨리지 않는다:

신들께 기도를 드리오니, 아우구스투스 폐하께서, 당신께서 다스리시던 이 땅을 떠나 하늘에 오르시고, 그 높은 곳에서 인자하시게도 저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루어지게 하시는 날이 더디오게 하소서, 다음 세기에나 오게 하소서. (2:336)

오비디우스의 꿈은, 그러나 당대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변신』의 결사結詞는 이렇게 끝난다:

내 육체밖에는 앗아가지 못할 운명의 날은 언제든 나를 찾아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내 이승의 삶을 앗아갈 것이다.
그러나 육체보다 귀한 내 영혼은 죽지 않고 별 위로 날아오를 것이며 내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로마가 정복하는 땅이면 그 땅이 어느 땅이건, 백성들은 내 시를 읽을 것이다.
시인의 예감이 그르지 않다면 단언하기니와, 명성을 통하여 불사不死를 얻은 나는 영원히 살 것이다. (2:336)

그러고보면 카이사르가 신이 되었다든가, 아우구스투스가 신이 되었다는 그의 표현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들은 지금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살고 있다. 오비디우스 역시 그런 영생을 누린다. 그는 무사이 여신들에게 늘 빌고 있지만, 지금 그 스스로가 시신詩神이 되어 수많은 시인들에게 다시금 영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신'은 과거 신화의 시대에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변신 이야기 1
오비디우스 지음, 이윤기 옮김/민음사

Posted by 엔디
자신을 '바람'이라고 부르던 兄이 있었다. 그는 발소리도 없이 나타났다가, 인기척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그는 어쩌면 자유로웠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제 '바람'으로서의 그가 많이 외로웠으리라고 짐작한다. 겨울의 문턱 즈음에 태어난 그가 스스로를 '바람'이라고 부를 때, 산뜻한 봄바람이 연상되는 경우는 없었다. 나는 매년 가을 경에 요절한 시인의 시비詩碑에 앉아 시를 읽곤 했다. 그때마다, 그때마다, 바람이 불었다.


황동규에게 '바람'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그의 시는 항상 바람 부는 곳에서 있고, 그 바람은 또한 항상 비바람 아니면 눈보라다. 때문에 그의 바람은 "산 위에서 부는" 시원한 바람도, 더운 여름날 여자들의 치마 끝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는 가벼운 바람도 아니다. 그의 바람은 늘 습윤濕潤하고, 그러므로 무겁다. '바람의 시인'으로서 황동규는, 또다른 '바람의 시인' 정현종과는 아주 대조적인 시를 보여준다. 정현종의 바람이 율동을 통해 발레리나의 발을 대지에서 띄워준다면, 황동규의 바람은 발레리나의 발을 다시 땅에 붙박게 만든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황동규는 땅으로의 발디딤을 통해서 오히려 자유로워지려고 더 노력한다. 우리는 황동규의 구속과 자유를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볼 것이다. 먼저 그의 「풍장風葬」 연작의 첫 일절을 보자.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이것은 「풍장1」의 첫 부분이다. 여기서 "아주 춥지는 않게" 위에 윗점을 좀 찍어보면 어떨까. 그는 그의 죽음이 아주 추울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옷도 입고 있고 전자시계도 차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죽음은 그의 생生과 구분된 것이 아니다. 시계가 "가는 채로" 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삶의 시간과 죽음의 시간이 나뉘지 않는다는 인식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삶이 그토록 차가운 생이었는가, 우리는 그의 초기시를 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그의 데뷔작인 「시월」을 보자. 「시월」에 바람은 싸늘히 불고,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려진다. 바람은 빈 가지를 흔드는 존재이고, 낡은 단청 밖으로 이는 존재이며, 비와 함께 낙엽을 떨어뜨리는 존재이다. 그 계절 속에서 '나'는 "한 잎의 낙엽으로 좀더 낮은 곳으로" 내려지기를 원한다; 「즐거운 편지」에서는 '내'가 눈이 퍼붓는 골짜기에서 기다리는 존재로 표상된다.

시인에게 있어 데뷔작이 갖는 의미는 크다. 데뷔작은 그 시인을 시인되게 한 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데뷔작은 일정한 방향성方向性을 가지고 있다. 시인의 지향이 삶을 통해서 변모한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시인은 자신의 데뷔작으로부터 항시 자유롭지 못하다. 황동규의 시를 둘러보면 그의 시가, 겨울 장면이 하나도 없었다는 어떤 이상한 영화와는 달리, 가을이나 겨울, 혹은 그 언저리에 자리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시는 또한 비바람이나 눈보라 속에서 씌어지고 있으며, '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너의 마음 가에 바람소리 바람소리 - 「겨울 노래」
귀 기울이지 않아도 바람소리 바람소리 - 「겨울 노래」
문을 닫아도 바람소리 바람소리 - 「겨울밤 노래」
내 잠시 생각하는 동안에 눈이 내려 눈이 내려 생각이 끝났을 땐 눈보라 무겁게 치는 밤이었다 - 「기도」
소리 없이 바람은 불고 - 「이것은 괴로움인가 기쁨인가」
밤새 눈 속에 부는 바람 - 「어떤 개인 날」
포장 속에 우는 어두운 바람소리 - 「悲歌 제7가」
길게 부는 寒地의 바람 /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 「기항지 1」
마당에는 은행나무가 바람에 잡혀 / 조심스런 첫 잎을 떨구고 있었다 - 「세 개의 정적」
우리 願의 오랜 물결 / 사면에 바람은 분다 - 「비망기」
폭풍경보의 바다 / 바람의 속도 속에 보이지 않는 해 - 「북해」
눈떠라 눈떠라 참담한 시대가 온다. / 동편도 서편도 치닫는 바람 - 「전봉준」
바람 속에 남아 있는 우리의 얼굴 - 「입술들」
바람에서 다른 바람으로 끌려가며 - 「더 조그만 사랑노래」
빗소리 속에도 바람이 부는지 / 풀들이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 「김수영 무덤」

되는대로 뽑아본 『三南에 내리는 눈』(이하 『三南』) 속에서의 바람의 등장모습들이다. 부분부분 인용된 것들을 쓱 훑어만 보아도 황동규의 '바람' 인식을 금새 알아차릴 수 있다: "문을 닫아도" 들리는 바람은 "밤새 눈 속에 부는" 바람, "무겁게 치는" 눈보라이며, 그것은 다시 "참담한 시대"를 암시하는 "폭풍경보"의 바람이다. 그런데 시 속에서 보이는 '내'가 그 바람 속에서 취하는 행동은 좀 놀랍다. 황동규, 혹은 황동규 시의 '나'는 그 바람 속에서 웃는다.

황동규 시에서 웃음은 놀라운 상황에서의 인식과 대응이다. 그 웃음은 그 안에 모든 것을 초탈해서 무의미화하려는 신비주의의 웃음이 아니라, 습윤한 인생의 한가운데를 관통하여 '나'의 모든 감정을 한 순간에 드러내는 웃음이다. 그러므로 그 웃음은 순수하지 않다. 가령 「겨울밤 노래」의 첫머리에서

조금이라도 남은 기쁨은 버리지를 못하던
해 지는 언덕을 오를 때면 서로 잡고 웃던
해서 눈물겹던 사내여 오라.

고 했을 때, "서로 잡고 웃"는 행위는 그 안에 많은 표현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 웃음이 다만 차가운 바람 속에서만 있을 수 있는 복합적인 것임을 밝혀주는 구절로는 「얼음의 비밀」의 1련, "헐벗은 옷 틈새의 웃음소리, 내민 살의 내민 살의 웃음소리."를 들 수 있다; 「갈매기」에서는 "나는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웃음을 울고 싶었다"고 노래함으로써 그 웃음의 정체를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황동규 시에서 역시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새'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두자. 제목만으로 본다면 「갈매기」, 「들기러기」, 「철새」, 「바다새들」과 『三南』과 같은 시기에 씌어진 시들을 수록하고 있는,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이하 『바퀴』)의 「새들」이 있다. 다른 제목 아래 씌어진 새들의 숫자까지 합하면 훨씬 많다. 황동규가 기르는 이 수많은 새들은 기본적으로 '바람'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시행에 있어서는 바람보다 더 처절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늘을 날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소원이라고 했을 때, 새는 그 소원이 있게 한 동물이다. 그러므로 새를 바라보면서 자유나 탈출, 혹은 도주逃走를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도주기」에서 그는 죽음을 암시하는 도주를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바로 다음에 수록된 기러기는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날아 내[리]"고 있으며, 들기러기들의 삶은 "다섯 달 겨울"로 설정된다. 떠남의 모티프는 「기항지1」에서도 보인다.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지만, "정박중의 어두운 龍骨들"은 모두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것이 이 시의 뼈대를 이룬다. '그'의 떠남은 번번이 좌절되는 것이다. 결국 그는 "행해를 단념한다." (「남해안에서」) '그'는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어디로 떠나고자 하는 것일까.

「어떤 개인 날」은 "아무래도 나는 무엇엔가 얽매여 살 것 같으다"는 자조적인 예언을 담고 있다. 「새벽 빛」에서는 "진실로 같은 틀로 나고 끝남을 알게 된다면, / 다시 나고 싶지 않으리라 / 이끼풀까지도, / 다시 살고 싶지 않으리라"고 보다 명확하게 이를 밝혀주고 있다. "해탈처럼 쉬운 건 없지 / 매일밤 해탈에 脫皮까지 하고 / 아침이면 한 바퀴 돌아 / 제자리에 와 있더라"라는 「네 개의 황혼」에서의 통탄할 인식은 이 얽매임이 무엇보다도 근원적이고 치유불가능한 것임을 고통스럽게 보여준다. 그래서 '그'은 의문을 표시한다. "같이 쫓기며 누리는 허황되지 않은 자유가 있을까." (「북해」)

역설적이게도 '그'의 자유는 단단함 혹은 땅의 단단함 속에서 찾아진다. 인도 시인에게 부쳐진 『바퀴』의 「편지․1」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이번 여름에는 미칠 듯 가을을 기다릴 것 같고
가을에는 또 꽝꽝한 얼음장이나 기다리며 살겠읍니다.

그것은 뜸[浮上]에서 자유가 아니라 두려움을 찾은 사람의 상상력이다. 항우의 고사를 연상시키는 「楚歌」라는 제목의 시는 "미치는 것도 미치지 않고 잔구름처럼 떠 있는 것도 두렵잖아요"라고 노래하고 있으니 말이다. 「김수영 무덤」은 김수영의 「풀」에 대한 독서讀書로 보이는데, "젖은 마음을 잠시 땅 위에 뉘어놓"는 행위나 "이 악물고 그대가 흔들리고 / 마지막으로 다시 풀들이 흔들[리]"는 묘사에서, 땅이 주는 휴식과 땅에 붙어 있으려는 의지를 볼 수 있다. 여기서 이중의 역설이 발생한다. 땅에 발 디딘 자만이 마음껏 떠날 수 있고, 마음껏 죽을 수 있다는 사소한 진리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정감록 주제에 의한 다섯 개의 변주」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아버지가 명당마다 타오른다.
명당이 죽은 후 명당이 우리 자리에 타오른다.
우리가 죽은 후 우리가 흰 옷 입은 도적이 되어 타오른다.
흰 옷 입은 도적들, 빨래 같은, 도처에 흰 천들.

죽음이 저질러졌다. 바람소리들이 되돌아왔다. 던진 돌도 되돌아오고 깨어진 머리들도 되돌아왔다. 삭제된 문장들도 삭제된 채 되돌아왔다. 골목에 파수 세우고 문서 태우고 우리가 습격하는 우리의 집들, 소리 소리 우리.

이 즈음에서 황동규는 바람에 얽힌, 눈에 얽힌 비밀을 털어놓는다. '金炳翼에게'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바퀴』의 시 「성긴 눈」에서 우리는 놀랍게도 "한두 마디씩 내리는 성긴 눈발"이라는 시구를 찾아볼 수 있고, 「더 조그만 사랑노래」에서는 "아직 멎지 않은 / 몇 편의 바람"이라는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고보면 『바퀴』에 실린 「새들」에서 "할 말을 않고 있는 새들"을, 「세 줌의 흙」에서 "몇 마디 아픈 말이 뱉어지지 않는다"는 쓰라린 고백을 찾아볼 수 있다. 말할 수 없음은 말하고 싶음과 긴밀히 연결된다. 그것이 「手話」를 부른다. 나중에 이성복에 의해서 「口話」로 발전할 이 시에서 시인은 삭발-눈발, "웃음 그 얼음 낀 벗음"과 같은 음성적 유사성에 의한 언어 유용과 "이건 […]", "저건 […]"의 반복을 통한 말배움을, 그리고 '조지다' '오입' 등과 같은 비속어를 통해서 새로운 말을 찾는 그의 치열함을 볼 수 있다. 그의 생을 괴롭히는 바람과 눈이 사실은 말[言]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구원도 말로부터 올 수밖에 없다는 인식으로 전환될 수 있다. 바람처럼 날아오는 말, 눈처럼 내려쌓이는 말을 우리는 삶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황동규의 연애시는 편지로부터 시작한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썼다는 「즐거운 편지」도 바람처럼 날아오고 눈처럼 쌓이는 한 통의 편지이며, 「조그만 사랑노래」와 「더 조그만 사랑노래」, 「더욱더 조그만 사랑노래」들도 "어제를 동여맨 편지"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사랑노래는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신뢰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나'의 능동적인 기다림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편지이다. 그러나 그런 기다림의 가능성을 '그'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조그만 사랑노래」에서는 흩날리는 눈발을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으로 묘사하고 있고, 「더 조그만 사랑노래」에서는 "한 바람에서 다른 바람으로 끌려[간]"다는 표현까지도 등장한다. 그 어디에도 기다림에 대한 믿음의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기다림에 앞서서 황동규의 현실 인식을 먼저 보자. 황동규는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 혹은 사람을 기다리는 사랑의 처지와 한국 혹은 한민족의 처지를 같은 것으로 보려고 하고 있다. 그것은 「태평가」에서 자세히 나타난다. 약소민족의 난해한 사랑 같은 것을 황동규는 계속해서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느끼고 있다. 에든버러에서 쓴 것으로 되어 있는 「낙법」은 "主語가 없는 그대와 나. // 칼날처럼 벗은 우리 조국"을 부르고 있고, 「虎口」에서는 "조국은 닫혀 있다"는 명제를 내세우기도 한다. 「정감록 주제에 의한 다섯 개의 변주」에서는 "축소된다, 모든 것이, 가족도 친구도 / 국가도, 그 엄청나게 큰 것들, 그들 손에 들려진 채찍도," 라고 선언하고 있고, 「돌을 주제로 한 다섯 번의 흔들림」에서는 "드디어 <너>도 <나>도 지워진다.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라. 어느샌가 <우리>만 남아, 아 항상 더불어 같이 살아야 할"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보여준다. 다음 단계는 그러한 의식을 역사 속에서 찾는 단계다. (시인이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했던 사람은 T. S. 엘리엇이었다.) 「전봉준」 시편들과 「허균」 시편들, 「열하일기」 시편들을 제시함으로써 황동규는 '그'의 기다림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봉준이"의 "일자무식"한 혁명이 '그'에게 있어서는 「手話」의 말의 혁명으로, 일자무식의 새로운 말배움으로 환치되고 있는 것이다.


황동규의 시 속에서 우리는 구원의 모습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구원은 여전히 '시-안'이 아니라 '시-바깥'에 있다. 시는 구원이 아니다. 이성복의 지적대로 문학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하나의 신비화이다. 그러나 문학은 기다림의 가능성을 알려줄 수 있다. 왜 우리는 소용없는 줄을 알면서도 "빛이 있으라"라고 목이 쉬도록 외쳐야 하는가.

잠언: 『三南』에서 보이는 시작의 발전과정을 다시 한 번 참조 해볼 것.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
황동규/민음사

Posted by 엔디
흼과 검음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물과 뭍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아니, 어제와 오늘의 사이엔, 말과 말없음의 사이엔, 있음과 없음의 사이엔, 처음과 끝의 사이엔, 아니아니, 삶과 죽음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대답할 수 없다, 그렇다면,

검음과 흼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뭍과 물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아니, 오늘과 어제의 사이엔, 말없음과 말의 사이엔, 없음과 있음의 사이엔, 끝과 처음의 사이엔, 아니아니, 죽음과 삶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말장난. 옳다, 하지만 당신들은 삶의 상징인(,) 혀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관찰해본 일이 있는가. 한 번도 시집을 거꾸로 읽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 물구나무서기를 해도 좋다.

「99.999999999」(158)는 100이 아니다. 곧, 99.로 한없이 가다가 좀 쉬자는 말이다. 이곳은 말하자면 경계의 땅이다. 레떼의 한가운데라고 생각해도 좋다. 시인은 "무언가를 위해 / 여기에 홀로 남아 있는 사람"을 언급한다. 그 사람은 털을 하나씩 뽑고 있는데, 어쩌면 자신의 생장生長을 뽑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식목일엔 그의 털을 심다."(156) 그러니까 삶과 죽음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거기서 그 사람과 자신의 거리를 지운다. 그러므로 경계이다.

거리를 지운다, 그것은 종종 사랑을 뜻한다.

그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집 안에서 살면서 집 밖에서 산답니다
모두들 너무나 사랑해서 그래요
그 마을 사람들 살을 보셨어요?
만지면 살짝 지워져요 만지는 사람을 받아들이느라고 그래요
그리곤 다시 생겨나요 다시 주기 위해서요

- 김정란, 「눈 내리는 마을」부분

그러므로 '당신'과 '나' 사이의 경계는 또한 '당신'과 '나'의 일부이기도 하다. 「졸음」(131)에서 시인은 사랑으로 경계를 이해한다. 경계선에 분명히 누군가 있었는데, 금세 사라진다. 아무래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무슨 이상한 논리가 있는 것일까. 잠깐. 제목이 졸음이다. 데까르뜨 선생님, 우리가 존다면 졸고 '있는' 우리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지만,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인가요 죽어 '있는' 것인가요. (데까르뜨: "놀-고 '있'네.") 어쨌든 졸음은 깸과 잠의 사이에 있고, 잠은 다시 삶과 죽음의 사이에 있다. 기이한 것은 여기에서도 '털'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숫거웃은 눈꺼풀처럼 얌전을 떨고 있다. '삶'인 성기를 둘러싼, 생장의 상징인 털이 얌전하게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성교는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것이 아니던가. "당신도 아다시피 교수형을 당하는 사람들은 숨이 끊어지는 순간 힘차게 발기해서 사정을 하지." 이것은 조르쥬 바따이유의 소설 『눈 이야기』에 나오는 대사다. 바따이유는 『에로티슴』에서도 '생식과 죽음의 친화성'이라는 장章을 따로 두어 이렇게 언급한다: "시체 앞에서의 공포감은 우리가 배설해 내는 배설물 앞에서의 느낌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외설스러운 성행위 앞에서도 이맛살을 찌푸리며 외면한다. 성기도 배설물을 배설한다. 우리는 그곳을 수치스러운 곳이라고 부르며, 항문도 거기에 포함시킨다. 성 어거스틴은 성기의 외설성과 생식의 기능에 대한 언급에서, '우리는 똥과 오줌 사이에서 태어난다'는 통렬한 말을 한 바 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괴로워하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즉시 사방에서 많은 산파들이 달려와서 밑을 만져보고, 나쁜 냄새가 나는 살덩어리를 발견하고는 그것이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내장요리를 너무 많이 먹은 탓으로 (여러분이 항문에 붙은 창자라고 부르는) 직장이 늘어나며 그녀에게서 빠져버린 항문이었다.

- 라블레, 『가르강뛰아/빵따그뤼엘』에서

우리는 똥과 오줌 사이에서 태어난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현대의 병원에서는 출산 전에 모두 관장을 시켜준다.)

그런데 시인은 그 죽음 속에서 말言語을 발견한 것 같다. 「졸음」에서 "너에게서 멀어질수록 빗소리에 민감해진다"고 말했던 시인은 보다 앞의 「상상력은 상상한다」(83)에서 "그대 있다 / 빗소리가 처음 시작된 곳에서"라고 노래했었다. 「상상력은 상상한다」에서 드러난 기이한 구강성교口腔性交의 묘사를 죽음을 노래하는 시로 보아도 될까. 이를테면 "성기가 내 혀를 빼앗는다(喝喝)"는 장면은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죽음의 침범 같은 것이 아닐까. 한두 연 앞으로 가보면 좀더 자세하다. "사타구니가 자라난다 / 어서 핥아라 어서 / 핥아 죽여라"(강조는 인용자).

혀langue는 그대로 말이다. "쓰라린 그 말 한마디 / 외치고 싶다"(98). 하지만 말할 수 없다. 그것이 중요하다, 말이란 일종의 금기이기 때문이다. 삶/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치명적인 독"(78)을 두려워한다면, 모두 입을 닫자. 이상하게도 시집 중간에 버티고 있는 「自序 : 말할 필요」(119-21)를 보자.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일을 알았다고 해도 그것은 기억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논의의 결론은 정해져 있다. 시인이 시집을 낸 이상, 시인은 이미 무언가를 말한 것이다. 제목부터 '말할 필요'다. "나는 저항한다. 나는 말한다. 참다운 모든 인연들에게 나는 나의 마왕을 빌려주리라."

시인은 아주 통속적으로 말하려 한다. 이를테면 "어린애가 앙앙 / 쥐가 끽끽 / 구두가 삐꺽삐꺽" 하는 소리 말이다. 이렇게도 말한다: "찌그러뜨린 말 / 일러바치는 광기 / 본뜬 익살"로도 말한다. 그것은 벌레같은 말이다. 이 시집에는 벌레와 관련된 시가 몇 있는데, 「벌레에 대한 변호」에는 '벌레'란 "벌레스크(burlesque)의 약어"라는 각주가 붙어 있다.

벌레스크는 원텍스트의 진지한 형식과 어조를 모방하면서 그 원텍스트와 부합하지 않는 하찮은 내용을 삽입하거나 이와는 반대로 원텍스트의 진지한 내용을 모방하면서 그에 걸맞지 않는 천박한 형식을 부여한다. 이로써, 기존의 문학이나 모든 문학장르 나아가 기존의 도덕적 관습까지도 익살스럽게 만들어버리는 대표적인 풍자양식이다.
-
정끝별, 『패러디 시학』

「위악」(118)이라는 시가 있다. 내용으로 보아 '위악僞惡'으로 읽어야 하겠다. "회문(回文)으로 만든 善"이라니, 이게 무슨 소린가. 회문이란 거꾸로 읽어도 같은 문장을 말한다. 시인은 여기서 선과 악의 사이를 '익살스럽게 만들어버린다.' 「행동하는 마음」(150)이나 「단속적인 절망들 간의 실험」(52)과 같은 시에서의 교묘한 바꿔치기를 볼 것이다. 해답은 「다른 계절」(48)에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 어느 때인지 모르겠다 / 이곳에 누가 있는지 모르겠다 // […] 말이 왜 이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11) (나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시의 증명을 해낼 수 있으나, A4용지가 좁아 이 발제에서는 생략한다.)

생각해볼 문제: 왜 시집 제목이 『광기의 다이아몬드』일까에 대해서 생각해도 좋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도 좋지만, 아무 것도 생각 안 해도 좋다.


광기의 다이아몬드
김록 지음/열림원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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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서 오랫동안 잠자던 시집을 한 권 꺼내본 적이 있는가. 종이가 바스러질까 조심스럽게 꺼내서, 어딘지 색이 바랜 것 같은 모습에 눈을 껌뻑거린다. 그리고는 촛불 끄는 시늉을 하듯 조용히 입김을 불어본다. 더께앉은 먼지가 날아오르면서 눈을 따갑게 한다. 그렇게 한참을 눈을 비비고 나면, 별 무늬도 없는 장정인데도 제 색을 찾은 시집은, 미켈란젤로의 천정화처럼, 선명하게 윤기가 흐른다. 그러나 그 윤기를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선연하게 물이 흐른 흔적이 있다.



1


제비가 떠난 다음날 시누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제비집을 헐었다. 흙가루와 함께 알 수 없는
제비가 품다 간 만큼의 먼지와 비듬,
보드랍게 가슴털이 떨어진다. 제비는 어쩌면
떠나기 전에 집을 확인할지 모른다.
마음이 약한 제비는 생각하겠지.
전깃줄에 떼지어 앉아 다수결을 정한 다음날
버리는 것이 빼앗기는 것보다 어려운 줄 아는
제비떼가, 하늘 높이 까맣게 날아간다.

- 「제비집」全文

시인은 곳곳에서 먼지 앉은 시집을 발견한다. 그 위에 얹힌 먼지의 두께는 시집이 견딘 시간의 무게를 의미한다. "만큼"이라는 말이 의비하는 바가 그것이다. 그리고 "품다"나 "가슴털"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삶은 따뜻한 삶이다. "마음이 약한 제비"가 아마도 미련을 갖고 몇 번이고 둘러본 제비집의 모습이다. 집이란 기억을 담는 장소이고, 이를테면 몽상의 고향이다. 그리고, 기억은 먼지, 비듬, 터럭, 그리고 가루와 같은 입자로 등장한다.

서정주의 「新婦」에서 우리는 이미 이 '입자의 상상력'을 보았다. 우리는 "매운재"가 "초록 재"나 "다홍 재"와 다소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을 때로 받지만, 매운재의 사전적 정의가 "진한 잿물을 내릴 수 있는 독한 재"라는 것을 상기하면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가 견디어야 했던 시간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고, 거기서부터 매운재의 말맛을 다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리의 새가 죽어갔다. 한 가지 표정으로
굳어 있다. 응달에 흩어져 있는 새가 남긴 털들
한때는 새털이었던 털들이 흩어지고
털을 잃은 몸이 웅크리고 있다. 털들은 더 넓은 곳으로
흩어지고, 새의 죽음은 더 넓은 곳으로 퍼진다.
오그라든, 틀이 안 맞는 발가락들, 빛을 잃은 발톱들이 남긴
검은 그림자, 높은 곳에서 반들거리던 털들이 흩어지고
새 가슴에 구멍이 뚫렸다. 문을 열고 줄지어, 뿔뿔이 흩어지는
수십 마리의 구더기…… 검은 점을 하나씩 달고…… 날아다니던
구더기, 엉금엉금 기어간다. 너무 오래 갇혀 지냈다.

- 「구더기」全文

하나의 삶이 다만 많은 입자들로 바뀌어버리는 이 놀라운 환원은, 그 흩어짐을 통해서 더욱 세상에 편재하는omniprésent 것이 된다.

그런데 화자話者는 그 제비집을 헐었다고 했다. 제비가 몇 번이고 아쉬워했던, 자신의 몸을 품어주었던 제비집을 화자는 떠난 다음날 헐어버린다. 여기서 그가 빗자루를 들고 제비집을 허는 이유를 설명해야 할까. 그의 빗자루는 흙가루와 먼지와 비듬, 그리고 제비의 가슴털을 위한 것이다. 그는 마음이 약한 제비의 "상처", 그 기억들을 쓸어버린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비집은 사라지지 않는다. 화자가 제비집을 헐어버렸는지 모르지만, 제비의 기억은 화자가 쓸어버린 제비집 속에 남아있다. 다만 흩어질 뿐이다.


나는 매달려 생을 다 허비하고 말 거야
[…]
나를 가두는 것이 있다면
밑으로 끌어내리는 힘이었다. 알 수 없는 끝내 느낄 수도 없는
시간이었다. 나는 천천히 지워져갔다 단단해지면서.

- 「좀약」부분

좀약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흩어지지만 좀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죽어가는 좀약은 자신의 몸뚱아리를 흩으면서 자신의 몸을 퍼뜨린다. 이 시는 「구더기」와 함께 죽음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 시로서 중요성을 가진다. 시간이 우리를 지운다는 것은 쉽게 인식 가능하지만, 지움으로써 단단해진다는 것은 얼핏 이해하기 힘든 명제다.

봉현이 형은 방위병이었다. 그는 한 마리 개구리였다.
죽은 다음에 강해졌다. 강해지기 위해
죽었다. 입을 닫고 눈을 부릅떴다. 살아 남은 者는
약하다, 그래서 울음 주머니가 필요하다


- 「개구리」부분

「개구리」에서도 그와 같은 역설이 나타나고 있다. "죽은 다음에 강해졌다"는 진술은 그 다음 행의 "입을 닫고 눈을 부릅떴다"는 근거를 딛고 있다. 그는 이제 더이상 울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좀약은, 좀약은 죽음으로써 다만 사라져 없어지지 않는가. 그러나 오래된 장롱을 열었을 때 흠씬 풍겨오는 좀약 냄새를 생각해보자. 그 좀약은 기화氣化됨으로써 더욱 단단해진 것이 아닌지.

「그 노인」에서는 제비가 노인으로 바뀌어 다시 등장하고 있다. 노인이 살던 집 처마끝의 제비집에 시선을 멈춘 화자는, 거기서 다시 노인의 생전 모습을 그려본다.

봄이 왔다. 담쟁이넝쿨 뻗어나와 그 집
흙벽을 덮는다. 봄에 얼어 죽은 노인이 살던 집
처마끝 제비집, 바람에 검불들 흔들린다. 백발의 노인은
꺼칠한 수염을 달고, 마루 끝에 서서 먼 산을 바라보곤 했다.


- 「그 노인」부분

읽는이들는 그 집이 흙벽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유심히 볼 일이다. 흙벽은 그 이름부터가 옛집古家을 연상시킨다. 게다가 그 입자인 흙을 쌓아 만들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퇴적형의 기억을 생각하게 된다. 노인이 얼어죽자 담쟁이덩굴은 그 기억의 흙벽을 덮어버린다. 덩굴은, 보아뱀처럼, 기억의 흙벽을 자신의 몸 속으로 완전히 소화시킨다.

우리는 시의 마지막에서 그 노인이 평생을 홀아비로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시의 앞부분에 제시된 폐가閉家의 모습으로 봤을 때, 그 노인에게는 후사後嗣가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무도 따지 않는 열매들 붉어져갔다."가 갖는 명백한 생식生殖의 의미도 여기서 풀린다. 그 노인은 어쩌면 스스로를 구더기라고 생각했을까.

구덩이에서 알을 깔 수는 없었다
더러운 生을 물려줄 수는 없었다


- 「구더기의 꿈」부분

노인이 얼어죽었다는 데서, 우리는 안락함을 주지 못하는 집의 존재를 새롭게 깨닫는다. 바슐라르의 행복한 상상력과는 달리, 때로는 집도 아무런 구원이 되지 못한다. 자기 집을 얹고 사는 동물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들의 집은 그들에게 힘겨움은 주면서도 진정한 휴식은 되지 못한다.

집이 되지 않았다 도피처가 되지도 않았다

- 「달팽이의 꿈」부분




2

시인에게 진정한 휴식은 오로지 죽음으로만 가능하다. 노인의 죽음 혹은 그 죽음의 공간, 그도 아니면 그 죽음의 기억을 덮은 담쟁이덩굴에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다. 또, 하늘나라를 가리킨다 하더라도 어색하지 않은 따뜻한 남쪽나라를 향해 날아간 제비집에서도 그것은 발견된다. 죽음이 휴식이 된다는 것은, 흔히 지적되듯이 물화物化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물화는, 시인에게는, 결코 어둠에 속한 것이 아니다. 시인이 묘사하는 삶의 모습들이 오히려 어두움에 속한 것이다.

이제 그 눈물 속에서 보낸 밤들을 돌려보낸다
흐르는 강물아, 썩어 흐르는 강물아 그 깊은 밤들은 이제
끝이다
[…]
이제는 추억을 버려야 살 것 같다
[…]
강둑에 앉아 마른
풀을 만지며 흘러가지 않는 구름들을 본다, 전할 말 없느냐


- 「沙金」부분


화자는 눈물 속에서 밤을 보냈다고 고백한다. 흐르는 강물에게 밤의 작별을 고하는 것은, 그 강이 밤과 같은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강물은 추억을, 썩어 흐르는 강물은 썩은 추억을 가리킨다. 앞서 인용했던 「구더기」로 돌아가 다시 생각해보자. 새가 죽고 나서 날아다니던 수십마리의 구더기가 새 가슴의 문을 열고 흩어졌다고 시인은 적고 있다. 사체死體에 파리가 쉬를 슬면 구더기가 나타난다는 인식을 시인은 뒤집고 있는 것이다. 구더기는 살아 있을 때 그 몸 속에 있다가, 새가 죽자 거기서 나와 흩어진다. 시인에게서는 삶과 죽음이 역전되어 있다.

한편 화자는 지금 구름을 동경하고 있다. 그 구름은 이를테면 보들레르의 이방인이 "나는 저 구름을 사랑하오... J'aime les nuages..."라고 고백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이 시의 구름은 고정되어 있다. 흘러가지 않는다. 그 흐르지 않음이 강물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는 것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전할 말 없느냐"는 의문문의 객체가 강물인지 독자인지 밝히기는 힘들지만, 확실한 것은 화자는 이제 곧 구름으로 지칭되는 다른 곳으로 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가 가려고 하는 곳은 과거가 없는 곳이다.

몇몇은 사생아를 낳고
과거 없는 곳으로 떠났다.

- 「1985년」부분


과거가 없다면 그곳은 미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사생아를 낳았기 때문이다. 과거가 없는 곳이란 없으며, 다만 현재화된 과거, 물화된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새하얀 구름이 받쳐주는 색채의 감각에 힘입어 그곳은 밝은 곳이다. 밤의 추억들을 버리고 시인은 밝은 곳으로 떠나고자 한다.

나는 언젠가 이 무거운 몸을 버리고
환해질 것이다
그때는 아무것도 아닐
움직이지 않는 내 몸을 덮어줄 먼지들이
내 주위엔 얼마든지 있다

- 「솜공장에서―먼지」부분


죽으면 그 죽음을 덮어줄 수 있다. 그러면 그 먼지 안에서, 담쟁이덩굴 안에서, 그리고 흩어지면서 죽음은 환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그 죽음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생식을 부정한다는 면에서 삶에의 부정, 세상에의 부정에 다름 아니다. 시인은 시간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죽음 속에서 시간은 더이상 흐르지 않는다.

죽음이란, 단지, 물러가지 않는 어느
튼튼한 벽과 영원히 만나
날개를 가두는 것이라고,

- 「바퀴벌레의 춤」부분

아아아아, 입만 크게 벌리고 있다
갈 곳을 잊고 있다 쓸쓸하고 변하지 않는
공기가 한 줌, 그 크게 벌린 입 안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

- 「죽음, 변하지 않는―노가리」부분

더듬어 무덤 하나를 찾고 있다, 타버린 돌들로 뒤덮인 작은 무덤. 죽음은 늙지 않는 것이리.

- 「판교리2―무덤」부분


그러므로 시인에게 있어 죽음은 없어짐은 아니다. 죽음은 그대로 있음이다. 아, 이제 드러났다. 시인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을 송두리째 가두고 싶은 것이다. 가엾은 사랑을 빈집에 가두는 몸짓으로, 시인은 자신의 사랑의 기억을 가둔다.

앞으로도 그런 배꽃은 피지 않을
거다. 배꽃은 녹지 않는 눈이다. 내리지 않는 눈이다. 그리고
배꽃은, 배나무집 女子가 안겨주는 작은 혹이다. 눈 한 번
맞추지 못한 女子, 나 혼자 쳐다보고 感電된 그 女子의 먼
눈이다.

- 「배나무집 女子」부분





3

크로노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이다. 그는 자식을 낳는 족족 잡아먹었다. 크로노스는 시간이라는 뜻이므로 대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것은 시간'이라는 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크로노스의 막내 아들인 제우스가 어머니 레토와 함께 크로노스를 속여 죽인 다음, 배를 갈랐더니 거기에서 하데스와 포세이돈을 비롯한 그의 형제·자매들이 뛰쳐나왔다는 사실은 모두 간과하고 있다. 시간은 모든 것을 삼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은 그 삼킨 것을 그 안에 보존한다. 시간에 의해 소화된 과거는, 현재로서의 과거이다. 하데스와 포세이돈이 제우스보다 형임에도 제우스가 맏형 노릇을 하게 된 것은, 크로노스의 뱃속에 있었던 그들이 갓난아이의 모습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그점을 보다 명확하게 해 준다.

먼지의 집에서 먼지 속에 쌓여 있던 모든 것들은, 그러므로 항상 부활의 조짐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그곳에 죽어 있음에 틀림없지만, 그럼으로써 보존된 것이다. 이를테면, 「그 노인」은 노인이 평생 홀아비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끝나고는 있지만, 그 바로 앞 연에서 까치가 집을 지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까치는 텃새라는 점에서나 노인이 죽은 다음 덩굴과 함께 들어왔다는 점에서나 노인의 적자嫡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미 부활의 단초가 보이고 있다. 특히 시집 뒤편에 실린 나무 시편들에서 그런 부활의 모습은 쉽사리 관찰된다.

그가 온다, 밤이 되기 전에 와서
가시가 되는 것이다. 두툼한 가시가
기다림의 가시가, 그대로 있다. 그가
다녀간 흔적들이, 혹 같은 열매들이
맺혀 있다.
 
불 속에서만 타오르는 연기의 냄새를 숨기고,
늙고 병든 여자가 숨어산다.
숨어산 지 오래 되었다.


- 「향나무」全文


열매와 불이 사실은 하나임을 지각하고, 여자가 타오른다는 진술을 잘 생각해보면 이 시는 부활의 시편이 되는 것이다. 향나무, 그 여자는 그를 기다리며 혹 같은 열매를 맺으며 숨어산다. 향나무의 향내를 생각해보자. 그것이야말로 죽음으로 단단해진 좀약의 인식이 아닌가. 그러므로 향나무의 향내야말로 부활이 아닌가 말이다.

참아보거라 참아보거라, 검은 흙에서 싹이 돋아나고
깍지를 풀고 콩이 커진다.

- 「측백나무1」부분


코로 숨쉬면 아픈 기억이 생생하고 입을 벌리면 썩은 이의 아픔이 구역질을 내는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어머니는 담에 걸렸다. 그러나 이토록 어려운 시절과 함께 화자는 식물이 가진 생명력에 주목한다. 흙은 세월에 썩은 검은 입자이지만, 거기에서 콩은 더욱 잘 자라는 것이다. 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열매는 저 혼자 떨어지고, 그 안의 씨는 또다른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다.

나는 죽지 않았다. 나는 자식을 낳았다. 검은 피부의 아버지가
불쌍해졌다.
[…]
나는 죽을 순 없어, 베어져도 남길 것이
있어, 다시 살아나야 할 이유가 있어.
잘린 부분에서 자, 새로 태어나는
싹을, 두 눈 꼭 감고 지켜보아라.

- 「측백나무4」부분


늘 푸른나무인 측백나무는 시간 속에 갖힌 것처럼 늘 같은 색이다. 시간이 덮어버린 탓일까. '나'는 죽지 않고 자식을 낳았다. "검은 피부의 아버지"가 '나' 자신을 지칭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나면, 그 고통스러운 삶이 실은 부활의 삶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두 눈 꼭 감고 지켜본다.

그 아이 돌아오지 않고 기다렸네
[…]
그 아이 무덤 위에
억센 조선잔디 보름처럼 입히고 싶었네
그 자리 억새 사이 빛 고운
잔디씨, 누런 봉투 가득 훑어
나만 홀로 학교에 갔었네


- 「잔디씨」부분


두 눈 꼭 감고 지켜보았다. 기다려보았다. 그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긴 그렇다. '나'는 노란 단무지처럼 늘 아팠고, 어머니는 담이 결렸다. 그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아이 무덤 위에서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거기에는 억센 조선잔디가 있다. 누런 봉투 가득히 그 고운 잔디씨를 받아가는 '나'. '나'가 시인이 된다면 분명히 이 입자의 크로놀로지chronologie를 한 권의 시집으로 써내지 않을까.


먼지의 집
이윤학 지음/문학과지성사


Posted by 엔디
―보들레르에 관한 몇 가지 모티프와 그 이성복 초기시를 향한 영향관계 소고小考


1921년 안서의 번역시집 『오뇌懊惱의 무도舞蹈』를 통해 처음으로 소개되고, 1941년 미당의 『화사집花史集』에 실린 「수대동시水帶洞詩」에서 "샤알·보오드레―르처럼 설ㅅ고 괴로운 서울女子를 / 아조 아조 인제는 잊어버려"라고 노래된 보들레르는 프랑스 상징주의의 시조始祖로서 여러 가지 층위로 한국시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시적 영향이라는 것은 마치 복류伏流하는 물과도 같아서 시집으로 묶여 출간된 '땅위'의 결실만으로는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결실을 비교함으로써 그 사이의 근친관계parenté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 중에서도 이성복의 경우는 보들레르와의 관계가 표면적으로 상당부분 드러난 경우에 속한다. 그것은 '이성복적 풍경' 속에서 보들레르가, 이성복 시의 가구家具로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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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을 대신하여

한 도시가 다른 도시의 과거로 완전히 함몰될 수 없듯이, 한 시인도 다른 시인의 과거로 환원될 수는 없다. 이성복을 이루는 요소는 보들레르 이외에도 많다. 가령 이성복의 또다른 스승은 카프카였다. 둘 사이의 유사성을 고찰해 보는 것은, 필연적으로 둘 사이의 차이점을 밝히는 일에 골몰하게 만든다. 그러나 보들레르가 이성복 시의 기본적 토양을 마련해주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둘 사이의 차이점이 있다면 '가족'의 문제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성복은 스스로의 시적 여정을 또한 '아버지―어머니―당신'의 세계로 압축시킨 일도 있는 반면에, 보들레르는 가족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근의 이성복은 보들레르에게 이렇게 잔소리한다:

수레바퀴가 돌아도 중심은 돌지 않는다. 테두리가 돌면 중심 축은 나아간다. 중요한 건 이뿐, 테두리가 중심 축 폼을 잡아서는 안 된다. 테두리가 돌기에 중심 축이 나아가는 게 아니라, 중심 축이 나아가기에 테두리는 도는 것. 우리는 모른다, 누가 이 수레를 어디로, 언제까지 끌고 가는지. 영원한 수레는 나아가고 헛되이 바퀴는 돌고 도는 것. 아 미치겠다 보들레르야, 보채지 좀 마라. 네 헛소리가 자갈밭 구르는 수레바퀴 소리보다 크구나. 어째 넌 그리 말귀를 못 알아듣냐.

- 이성복, 「보채지 좀 마라」 전문全文

그 잔소리의 근거는 보들레르의 「독자에게」의 두 줄이다: "우리 숨쉴 때마다, 안 보이는 강물처럼 죽음은 / 희미한 탄식 소리 지르며 허파 속으로 내려간다" 이성복이 얻은 세계관이 보들레르보다 더욱 현세지향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곳에서 알 수 있다. 그것이 가족주의와 '음양'의 힘이다.

그러나 도시의 삶을 통해 근대성을 추구하고, 그것을 아름다운 시로 형상화하는 모습은 두 사람이 같다는 것은 기억해두어야 한다. 새로운 시는 아마도 거기서 올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열기)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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