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우석 감독의 데뷔작인 영화 '변호인'은 성공한 영화다. 개봉한 지 불과 한 달여 만에 관객 수가 1000만 명을 넘어섰다. 일반적인 서사 예술의 문법으로 봐도 변호인은 별다른 흠을 잡을 수 없는 영화다; 아니 흠을 잡을 필요가 없는 영화다. 학벌이나 환경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던 한 사내가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고, 그 다음에 보다 의미있는 일을 위해 사회적인 성공을 저버리는 이야기. 별로 새로울 것도 없다. 굳이 작은 흠을 찾자면 '속물 변호사' 송우석이 갑자기 '인권 변호사'가 되는 모습이 너무 급작스럽다는 점 정도가 될 것이지만 줄거리 자체는 수백 번도 더 들어본, 매끈한 것이다.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덧칠하는 순간 관객은 구름처럼 몰렸다.

지금까지 관객 1000만 명을 넘은 한국 영화는 모두 9편이지만, 그 가운데 감독의 데뷔작이었던 작품은 변호인 하나뿐이다. 이런 사실은 변호인이 이만큼 성공한 것이 단지 영화가 좋아서는 아닐 것 같다는 의심이 들게 한다. 노무현을 그리는 어떤 정치적 상황에 기댄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제작자인 최재훈 위더스필름 대표는 노컷뉴스와 인터뷰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 전제조건이 '노 전 대통령의 색깔을 최대한 빼자'는 거였"다고 밝히고 있고, 조이뉴스와 인터뷰에서 주연배우인 송강호도 언급했듯이 출연진도 영화 제작발표회에서 노 전 대통령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느 중학생들이 만해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에서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라는 싯귀에 밑줄을 긋고 태연히 '님'이라고 해답을 적듯이 사람들은 너나없이 변호인이라는 영화 제목 아래 밑줄을 긋고는 아무 의심 없이 노무현이라고 해답을 적었던 것이다.

감독도 배우들도 이내 그 '해답'에 화답했다. 양 감독은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왜 노 전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그가 청문회에서 보여줬던 모습과 1992년 3당합당 때의 기억 때문이라고 답했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출연진은 2014년 1월 23일 봉하마을을 방문해 노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했고 송강호는 방명록에 "영광이었습니다"라고 적었다.

제작진과 출연진은 이런 태도는 마치 변죽만 열심히 때리면서 관객이 직접 복판을 울리기를 기다린 것처럼 보인다. 한가운데는 놓아두고 둘레만 애무하는 것 같은 모양새다. 의도한 것이라면 뛰어난 마케팅이다. 홍문종 새누리당 사무총장조차 "변호인은 픽션 드라마이지 논픽션 드라마가 아니다"라고 발언해 영화사의 이런 마케팅에 도움을 준 셈이 됐다.

영화평론가 허지웅은 주간경향에 실은 글에서 "변호인을 감상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단점은 영화 외부로부터 발견된다"면서 변호인의 단점으로 '일베'의 존재와 '열성 노무현 팬덤'의 존재를 들었다. 영화는 충분히 재미있고 잘 만들어졌지만 영화 바깥의 '어른의 사정'이 걱정된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러나 사실 일베의 존재와 열성 노무현 팬덤의 존재는 이미 변호인이 보유한 상업적 장점이다. 그리고 '어른의 사정'은 이미 영화 속에 있다.

변호인에서 가장 중심이자 영화의 클라이막스가 되는 부분은 역시 재판이다. 조선일보는 부림사건을 수사했던 고영주 당시 부산지검 공안검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영화 변호인이 실제 사건과 얼마나 달랐는지를 하나하나 지목하려 했고, 한겨레는 부림사건 피해자들인 고호석 씨와 송병곤 씨와의 인터뷰에서 영화 변호인이 얼마나 실제 사건과 비슷한지를 보여주려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림사건이 실제 변호인과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가가 아니다. 실제 부림사건에서 문제가 됐던 책이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였든 무타이 리사쿠의 '현대의 휴머니즘'이었든, 내부고발자 군의관이 있었든 없었든, 국밥집 아들의 모델이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별로 상관 없다. 그 정도의 각색은 여느 영화에서나 다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노무현의 색깔을 최대한 빼려고 노력했다는 이 영화에서 노무현에 대한 미화가 있었다면 얘기가 다르다.

문학평론가 유종호(1998, 21-28)는 프랑스 시인 자끄 프레베르의 시 '위대한 사람'을 인용하면서 전기(자서전)을 고쳐 쓰는 일의 허영심을 지적한다. "내가 그를 만났던/ 돌 깎는 사람 집에서/ 그는 후세를 위하여/ 제 몸의 치수를 재고 있었다"는 '위대한 사람'처럼 제 몸의 치수 재기를 위해 자꾸 과거를 윤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유종호는 염상섭 만세전의 해방 이전 판본과 해방 이후 판본의 비교를 시도한다:

"요보말씀예요? 젊은 놈들은, 그래도 제법들이지만, 촌에 들어가면 대만의 생번(生蕃)보다 낫다면 나흘까, 인제 가서 보슈…… 하하하,"

'대만의 생번'이란 말에, 그 욕탕에 들어 앉었든 사람들이, 나만 빼어놓고는 모다 킥킥 웃었다. 나는 가만히 앉었다가 무심코 입살을 악물고 치어다 보았으나, 더운 김에 가리워서, 궐자(厥者)들에게는 자세히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말이지, 나는 그 우국의 지사는 아니다. 자기가 망국민족의 일분자이라는 사실은 자기도 간혹은 명료히 의식하는 바요, 따라서 고통을 감(感)하는 때가 없는 것은 아니나……

유종호는 이렇게 1924년판 만세전을 인용해놓고 1948년판과 비교하면서 "검열당국에겐 거슬리는 말이지만 그대로 나와 있고, 제4텍스트(1948년판)에서도 크게 바뀐 것은 없다"고 평가한다. 바꿔 말하면 해방 이전에도 할 말을 다 했고, 해방 이후에도 우국지사였던 양 윤색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장들은 어떨까: "증인이 말하는 국가는 이 나라 정권을 강제로 찬탈한 일부 군인들, 그 사람들 아니야?" "니는 애국자가 아이고, 죄 없고 선량한 국가를 병들게 하는 버러지고 군사정권의 하수인일 뿌이야."

부림사건의 희생자들이 당시 변호인이었던 노무현 변호사가 판사와 싸웠다는 증언을 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신군부의 서슬이 퍼렇던 1981년에, 모든 발언이 속기로 기록되는 재판장에서 노무현이 저런 단어까지 썼을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이런 발언은 이 영화가 1981년이 아니라 2013년에 개봉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대사이기가 쉽다. (더구나 극중 송우석은, 국밥집 난동 신에서 보듯, 저런 종류의 의식은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위험하다. 노무현은 분명 20세기말에서 21세기초 한국 사회의 한 문제적 개인이지만, '후세'가 알아서 그 몸의 치수를 다시 재서 윤색하는 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도 나쁘다.

이 작품이 만약 부림 사건 재판이라는 시공간을 이용해 신군부 초기의 어떤 시대적 진실을 내보이려 했다면 일부 각색이 있었더라도 대체로 좋은 영화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변호인은 부림사건으로 끝맺지 않고 1987년 노무현에 대한 구속적부심에서 변호사 99명이 공동변호인단을 꾸린 장면을 마지막으로 하고 있다.

양 감독은 이런 결말에 대해 "송우석이 7년 뒤에도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이유를 밝혔지만, 이 부분도 이 영화가 '부림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가 아니라 노무현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임을 드러내 주는 대목이다. 이 영화는 노무현의 색깔을 뺀 영화가 아니라 속속들이 노무현의 색깔로 채워진 영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전기영화는 대체로 흥행을 위해서 많은 사실을 각색하거나 윤색하고서는 영화 바깥에서는 '이 영화는 실화'라고 광고하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 그대로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노무현은 부림 사건을 나서서 맡고 재판장에서 열심히 싸운 것만으로 이미 훌륭한 변호사다. 적어도 그 시점 그 공간에서 노무현이라는 개인은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다. 거기에 대한 덧칠이나 개칠은 오히려 그 작품을 훼손하는 일이 될 성 싶다.

참고문헌:

유종호. 1998. 문학이란 무엇인가. 서울:민음사. 증보판.

슬로우뉴스에 실린 글.

Posted by 엔디

그래, 먼저 가만히 작고 어두운 영화관 하나를 떠올려보자. 시인 기형도가 죽었다던 허름한 종로의 극장도 좋고, 사람들이 데까메론을 알건 모르건 매년 그해의 '보카치오'를 동시상영으로 마구 틀어댔던 동네의 3류 극장도 좋다. 예술영화를 자주 틀어주는, 그래서 관객은 별로 없는 조용한 극장도 괜찮다. 사실 꼭 작고 어두운 극장일 필요도 없다. 푹신푹신한 의자에 음료 거치대까지 있는 최신식 멀티플렉스 영화관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내가, 당신이, 그리고 사람들이 영화를 본다는 것이다.

자, 영화가 끝났다. 영화란 건 늘 금세 끝나는 법이니까.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대다수 극장에서는 환하게 불도 켜준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어디로? 세상으로. 커다란 박스 속에 들어가 한두 시간을 어둠 속에 머물며 주인공과의 삼투현상을 경험했던 우리는 이제 다시 '나'로 돌아온다. 문득 궁금하다. 내가 잠시 사라진 동안 세상에는 별일이 없었나?

우리가 극장에 있는 그 한두 시간 동안 어쩌면 어머니는 감기에 드셨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는 눈이 더 침침해져 돋보기 안경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누이는 어디선가 휴대폰을 잃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시간 동안 대통령이 유명을 달리했을지도 모르고, 크레인에 올라갔던 한 노동자가 실신했을지도 모른다. 어딘가 요정에서는 정치인들의 킬킬거리는 소리가 새나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미국의 군대가 어느 민간인과 언론을 향해 총질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두운 극장 속에 있는 그 사이에.

출구없는 극장#

사건과 사고의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우리가 극장을 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래서도 안 되거니와 그럴 수도 없다; 우리는 누구나 극장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는 델리스파이스와 함께 출구 없는 극장을 노래하고 있다:

오 오 오 너는
오 오 오 너는
생의 무대 위 안락의자에 고양이처럼
차갑고 초연한 고양이처럼 앉아있지
출구 없는 극장 안에, 출구 없는 극장 안에

수많은 영화들 지나가네
웃기고 슬프고 외롭고 힘들고 대답없는
그런데 이 어두운 극장 밖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오 오 오 너는…
오 오 오 너는…

이를테면, 우리는 누구나 출구 없는 극장 안에 앉아 있다. 웃긴 영화와 슬픈 영화를 번갈아 보지만, 그것들 대부분은 우리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아침 지하철에서 봤던 신문지를 모으는 할아버지와 지하도 입구 앞에 앉아 손을 벌리고 있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장애인 사내를 보고서도 그저 '뻔하게 슬픈 영화로군' 하고 중얼거릴 뿐이다. 우리가 이 습한 극장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안 그랬을는지도 모른다. 지팡이를 짚고서 객차를 오가는 사람을 보고서도 조금쯤 눈물을 흘리고, 제 부모를 졸라 천원 한 장이라도 그 가벼운 바구니에 넣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기억은 모두 사라져 알 수 없다. 그 젖은 필름만 기억 속에 남아 이젠 거의 외울 수도 있을 정도가 됐다, 시인 김혜순이 「달력공장 공장장님 보세요」에서 "이 음악은 이제 너무 들었어요 지겨워요 / 열두 곡이 다 흐른 다음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잖아요?"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딱하지만, 나와는 관계 없는 영화들이다. 달력의 배경사진 같은 영화들.

하지만 순간 우리는 얼마간 외로워진다. 가령 어느날 지하철에 서 있던 나에게 급성위경련이 찾아왔다. 그래, 앉으면 조금쯤 안정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앞에 앉아있는 아저씨는 나에게 관심조차 없다. 입속에서는 역한 침이 나온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화장실로 뛰어간다. 요컨대 내가 만든 영화도 결국 그렇고 그런 영화일 뿐이었던 것이다. 다 보고 나서도 별로 기억나는 장면도 없는 영화 말이다. 아무리 내가 떠들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그제서야 이 극장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출구는 없다.

그제서야 문득 궁금하다: 그런데, 이 어두운 극장 밖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한국에서의 학살#

참, 그렇지. 바깥에서는 학살이 있었다고 했어. 삐까쏘Picasso라든가 황석영, 이런 사람들이 그런 소문을 전했지. 삐까쏘는 「한국에서의 학살」로, 황석영은 『손님』으로. 신천 대학살이라고 했어. 처음엔 조금 놀랐고, 다음에는 의심했고, 이어 분노했지만, 곧 평온을 되찾았어. 그건, 그래, 예술성 짙은 좋은 영화였을 뿐이니까.

생각난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그 표현주의적인 면모가 뛰어났지. 「1808년 5월 3일」이라는 고야의 그림과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이란 마네 작품의 구도를 그대로 가져왔고. 마침 그러고보니 삐까쏘는 공산주의자였다지.

『손님』은 또 어떻고. 종래의 리얼리즘을 재편하겠다며 다성성多聲性을 들고 나온 황석영의 역작이었어. 다성성이란 건 그러니까 러시아의 문학평론가 바흐찐이 도스또예프스끼 시학에서 얘기했던 건데, 뭐 등장인물들이 작가의 목소리를 대변하기도 하고 작가에게 대들기도 하는 여러 목소리를 가진 거라고 하던가. 영어로는 폴리포니polyphony. 근데 『손님』을 읽어보니 꼭 그렇지도 않던걸. 여러 사람이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다 똑같은 말만 하던걸. 종래의 리얼리즘을 바꾼다는 황석영의 말을 차치하고, 어쨌든 좋은 작품이었지. 그러고보니 황석영은 북에도 갔다왔잖아. 내 기억이 맞다면,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벌건 표지의 책도 한권 냈을걸.

하지만 어쨌거나 이런 것들은 다들 옛날 얘기만 하잖아. 이젠 시대가 달라진 거 아니야? 극장 바깥은 아직도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뭐? 학살이 또 있었다고?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그래. 그러고보니 들은 적이 있었던 것도 같아. 하지만 이젠 학살이 하나 더 있고 덜 있고 간에 상관이 없는 그런 지경 아니야?

학살은 아우슈비츠에서도 있었고, 킬링필드에서도 있었어. 남미나 아프리카 같은 데선 한때 거의 일상적이었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원자폭탄도 떨어졌다구. 그리고 사실 빈민가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은 학살이 상시화된 거 아니야? 수많은 학살 가운데 하나가 더 있다고 해서 지금 무슨 차이가 있냐구.

작은 연못#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의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 위에 떠오르고
여린 살이 썩어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죠

하지만 학살로 사람들이 죽었어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죽었어요. 가끔씩 티격태격 다퉜고, 때로는 서로 흉도 보고 비웃기도 했지만, 그래도 함께 살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었어요.

순진하게 미군을 믿다가 죽고, 탈출하다 죽고, 말이 안 통해 죽고, 갓난 아이는 그저 울다가 죽고…….

지금껏 우리의 슬픔을 얘기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어요. 누구는 그럴리 없다고 했고, 누구는 전쟁 통이니 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했어요.


그래놓고, 이제와 또다시 전쟁을 하자고 해요. 우리를 죽인 사람들이 우리편이고, 우리를 구해준 사람이 적이래요.

그럼 우리는 누구인가요? 누가 우리인가요? 우리는 적인가요? 적은 우리인가요?

극장 밖#

비로소 출구가 열렸다.

어두운 극장을 나서서 바깥 세상으로 나왔다.

어떻게 나왔을까, 지금까지는 왜 출구가 안 보였을까.

바깥 세상은, 그러나, 극장 안과 마찬가지로, 어둡다.

지금이 몇 시인지 모르겠다, 사람들마다 다르게 말했다.

한 노인은 지금이 상쾌한 아침 10시라며 기지개를 켰고, 어떤 정치인은 지금은 새벽 5시임을 확신한다고 했다.

토끼를 키운다는 작가들은 지금이 25시라고 입을 모았고, 커다란 벽시계는 밤 11시5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문득 손목시계를 보니 뉴스를 할 시간이었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Posted by 엔디

미투데이를 통해 보라 감독의 《로드 스쿨러》를 접하게 되었다. 흔히 '탈학교청소년' 또는 '홈스쿨러homeschooler'라고 불리는 이름을 거부하고 '로드 스쿨러roadschooler'라는 새 이름을 원하는 청소년-청년들의 이야기였다. 예술가들조차 거리를 버리는 이 시대에!

1

기형도는 한 시작詩作 메모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전집, 333):

「밤눈」을 쓰고 나서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만약 시 속에 존재와 삶의 비밀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단 몇 퍼센트만이라도 믿는다면, 우리는 이 '로드스쿨러'들을 주목해야 한다. 지금의 학교 교육은 기형도가 말한 '자연'과 '거리' 가운데 어느 하나도 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은 성장이 아니라 경쟁을 말하고, 믿음과 잠언이 아니라 암기暗記를 말한다. 나는 경쟁과 암기가 필요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그 나름대로 중요한 가치일 터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들 속에 매몰되는 다른 소중한 가치들이다.


시 「밤눈」이 묘사하고 있는 거리는 만만치 않다. 시인은 밤눈에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고 말해준다. 거리는 겨울이고, 그곳에 눈보라가 친다. 사시나무가 떨고 있고, 썩은 가지들은 엎드려 있다. 은실들은 엉켜 울고 있다. 그러나 밤눈은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 또 다른 사랑을 꿈꾸"고 있다. 그러면서 밤눈은 춤을 춘다. 시인은 궁금하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이를테면 로드스쿨러들은, 약간은 무책임한 비유이지만, 그 겨울과 눈보라 속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이다. 길의 지식과 거리의 지혜는 눈보라와 무관치 않다. 고통에 기반한 이 아름다운 지혜들은 삶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통 속에서도 춤을 출 수 있고, 그 속에서도 사랑을 꿈꿀 수 있다. 이런 춤과 사랑이 특이하게 보인다면, 오랜 인류의 삶을 조금만 더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본래 모든 축제란 슬픔 속에서, 고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내 생각에, 보라 감독의 인도 기행은 아마 그 고통과 축제가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볼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야위어 있거나 물에 잠겨 있었으며, 그들은 느릿느릿 살고 있었고 자유로웠다. 보라 감독은 그들을 "친근했다"고 하고 "행복의 속도"에 대해 말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적용될 행복의 공식을 알고 있었고, 그 공식이 옳다는 것을 믿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행복했다. 그것이 거리의 지혜였을 것이다.


거리의 지혜는 자유롭지만, 마찬가지로 책임이 따른다. 보라 감독이 말하고 싶어하는 로드스쿨러는 기성 권력에 반대하는 단순한 우상파괴주의자가 아니다. 그들은 남들이 유예한 자유를 미리 '쟁취'하면서 자유에 따른 책임 역시 함께 '쟁취'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지치면 서가에서 소설을 찾아 읽거나 멀티미디어실에서 영화를 본다는 로드스쿨러도 있었다. 책과 영화 속에 공부한 내용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들은 자유가 분명 통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문예창작, 사회과학, 만화, 애니메이션……. 그들이 하고자 하는 공부의 목록 일부다. 그들은 학교를 뛰쳐 나왔지만, 학업의 목표를 위해 수능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도 한다. 물론 이와 같은 '성실 모드'로만 이들을 평가하는 것은 성급하다. 아직 길을 찾고 있는 로드스쿨러도 있고, 모르긴 해도 잠깐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거리에서 삶과 직접 부딪혀 본 그들이 오히려 더 '책임'에 민감하고, 더 고민을 거듭하는 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밤눈이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듯이.

로드스쿨러들이 명성이나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보라 감독은 책을 출간함으로서 사회적 시선의 방패막이를 하려고 했고, 산은 대학에 감으로써 주변의 시선을 극복하려 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나로서는 이것이 로드스쿨러들의 어쩔 수 없는 인식이라기보다는 아직까지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인식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로서는 그들 가운데 많은 숫자가 대학에 갔으면 좋겠다. 다름을 용인하지 않고, 올바름을 고민하지 않는 이 사회의 주목을 끌면서 그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길을 그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얼마 전부터 공부한답시고 다시 찾아간 대학은 '캠퍼스 리쿠르팅'이 한창이었다. 보라 감독이 말하는 '취업 준비소'의 가장 첨예한 모습이다. 그 가운데 '동아리 리쿠르팅'도 보였다. 후배에게 물었다:

"아니, 동아리도 리쿠르팅을 하나?"
"요즘 신입생 잡기가 얼마나 힘든데요."
"그래? 요새 애들은 동아리를 잘 안 하나 보지?"
"아뇨, 하긴 하는데,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동아리는 잘 하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이 로드스쿨러들이 대학에 적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해보건대 그래도 대학은 사회 다른 부분보다 더 순수한 곳이었고, 세계를 바꾸기 위해서는 대학부터 순수의 모습을 찾아가야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4·19를 믿고, 68을 믿는다. 그래도 거리와 자연의 힘이 살이 있는 곳이라는 말이다.

3

다큐멘터리가 조금만 더 친절했으면 좋겠다. 굳이 단락를 나눌 필요는 없지만, 대략 주제가 어떻게 흘러간다는 정도만은 자막으로 살려 줬으면 어떨까.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Posted by 엔디

도스또예프스끼는 병에 걸린 상태에서 꾸는 꿈은 무척이나 선명하고 강렬해서 뿌쉬낀이나 똘스또이 같은 작가들이라도 평상시에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라고 말했다(Dostoevskii 2002a, 85; 2002b, 1116). 이를 뒷받침하듯 프로이트는 일관되게 꿈은 소원성취라고 말했다(Freud 2003, 162). 그에 따르면 꿈의 유일한 목적은 소원성취이며, 그것도 순전히 이기적인 소원성취라는 것이다(Freud 2003, 384). 그렇다면 병에 걸린 사람처럼 현실에 불만이 많고, 고통을 많이 겪는 사람일수록 꿈도 강렬하고 생생할 것이다. 꿈은 현실을 뛰어넘고자 하는 ‘나’의 소원이나 욕망에서 비롯된다.

글쓰기 또한 이런 소원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청준은 언어사회학서설 연작의 「지배와 해방」에서 작중 인물의 입을 통해 글쓰기의 시작이 ‘복수’라고 언급하고 있다(이청준 2000, 107-118). 복수라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이 현실에서 대개 패배자라는 것이고, 그렇다면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 역시 프로이트가 앞서 꿈에 대해 언급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글쓰기--넓게 보아 작품 활동--의 목적은 소원성취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소년, 스떼판#

불행한 현실의 세계를 벗어나 충족적인 꿈의 세계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나’의 삶은 행복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여기 여섯 살 때부터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스떼판이라는 소년이 있다. 그의 삶은 가령 이런 식이다:

어머니 “스떼판, 오늘 왜 일하러 회사에 가지 않았니?”
스떼판 “일 했는걸요.”
어머니 “뿌셰씨가 전화를 했단다.”
스떼판 “일 했다니까요. 하루종일 일을 했어요……. 꿈 속에서요dans mon rêve.”

수면의 과학Not defined | Unknown | 0sec | f0 | 0EV | 0mm | ISO-0 | Unknown Flash:65529

꿈과 현실의 삼투. 영화 《수면의 과학》은 이 특이한 스떼판의 일상을 따라가면서 소망 내지 욕망으로서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 우리가 기쁨의 순간에 흔히 내뱉는 탄성은 이미 프로이트의 주장이 사실임을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이게 꿈이냐 생시냐”라고 묻고 자신의 팔뚝이나 허벅지를 꼬집는다. 이 “꿈이냐 생시냐”라는 말에서 우리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고, 그것의 삼투 현상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약간의 착란 증세만 있다면 스떼판처럼 그 둘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한데, 이렇게 꿈과 현실의 경계를 지워나가는 이야기는, 프로이트의 명제를 뒤따라가 보면, 결국 현실 속에서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이루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꿈과 현실이 삼투되면서 현실에다가 꿈에서 성취된 소원을 하나씩 끼워넣는 것이다. 이 기묘한 나르시즘은 영화의 수용자로 하여금 스떼판이라는 이를 결코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스떼판은 결국 자신이라는 사실을--그것을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하든 간에--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스떼판은 멕시코인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가 살고 있는 프랑스로 돌아온다. 어머니는 뿌셰 씨에게 부탁하여 달력 만드는 회사에 그를 취직시킨다. 그러나 자신이 무척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일을 하는 줄로 알았던 스떼판은 실망하고 만다. 벌거벗은 여인의 사진이 붙은 ‘바보같은’ 달력에 들어갈 글자를 풀칠하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는 ‘재앙력Disastrology’이라는 황당한 달력 그림을 사장에게 가지고 가지만, 사장은 이를 출판하기를 거절한다. “스떼판 씨, 농담이시죠?” 그 때 회사 동료는 스떼판을 위로하는 척하면서 “좋은 면도기를 쓰느냐”고 묻는다.

스떼판의 손#

스떼판은 하루종일 손으로 단순 노동을 하는 일에 무척 지치고 실망한다. 그는 거대한 손으로 동료들과 사장에게 복수하는 꿈을 꾼다. 스떼판의 면도기는 거미처럼 기어가서 사장에게 지저분한 수염을 넝마주이의 그것처럼 덥수룩하게 달아놓는다. 사장을 쫓아낸 후, 그는 사장실에 자신의 거대한 작품 ‘재양력’을 걸어둔다. 그리고 복사기 위에서 마르띤과 섹스를 한 다음, 물 속인지 공중인지 잘 구분되지 않는 빠리 시내를 날아다닌다.

꿈은 과장과 합리화의 소산이다. 스떼판의 거대한 손은 자신이 하는 실망스러운 풀칠 작업에 대한 불만과 그런 일을 강요하는 사장과 동료들에 대한 복수심이 함께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동료가 잠깐 말한 면도기에 대한 말도 꿈 속에서 놓치지 않는다. 사장을 수염 덥수룩하도록 만드는 것은 이를테면 ‘내 수염에 그렇게 지저분하다고? 너희들은 어떤가 보자.’하는 유아기적인 복수심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하늘을 난다. 프로이트는 이 하늘을 나는 꿈이 유아기의 운동성과 관계가 있다고 단언한다(Freud 2003, 329): “아이를 안은 팔을 높이 들어올린 채 방안을 뛰어다녀 날게 하지 않은 삼촌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이 꿈은 동시에 흔히 “성적 감각”을 일깨우기도 한다는 것이다(Freud 2003, 330).

아니나다를까, 영화는 곧 아버지와 함께 장난을 하는 어린 시절의 스떼판을 비춰준다. 스떼판은, 마치 아침 잠이 많아 깼다가 다시 잠드는 일이 많은 우리들 중 일부처럼, 잠시 꿈에서 깬 듯하더니 다시 꿈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아무런 고통이 없는 듯한, 홈비디오 화질의 영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꿈이 끝나자마자 요란한 드릴 소리를 내며 그의 운명의 여인이 나타난다. 옆집으로 스떼파니가 이사 오는 소리다. 스떼판은 얼결에 스떼파니의 피아노를 옮기다가 그만 손을 찧는다.

스떼판의 손은 ‘거대한 손의 꿈’에서 보았듯 스떼판에게 있어서 무척 가슴아픈 존재다. 작품 활동을 하는 대신 열심히 풀칠이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손이 매개가 되어 치료를 핑계삼아 그는 마음껏 스떼파니의 방에 들어선다. 실은 스떼파니가 그를 자신의 방으로 초대한 것이다: “세탁소는 나중에 들르고, 지금은 제가 당신 손을 봐 드릴게요.”

전망의 공간, 방#

영화에서 두 사람 사이의 모든 중요한 사건은 이 방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그는 손을 치료받고, 여기서 자신의 발명품들을 스떼파니에게 보여주고 선물한다. 여기서 그는 바다를 찾아다니는 배를 만들고, 여기서 “골든 더 포니 보이Golden the pony boy”라는 말 인형을 발견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방Zimmer’은 ‘여자Frauenzimmer’의 상징적 묘사에 사용된다(Freud 2003, 418). 우리는 스떼판이 스떼파니의 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에로스는 거의 소원을 성취했다고 말할 수 있다. ‘방’에 들어서는 것은 ‘여자’에게로 들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집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Bachelard 1990, 115): “집이란 세계 안의 우리들의 구석인 것이다. 집이란--흔히들 말했지만--우리들의 최초의 세계이다. 그것은 정녕 하나의 우주이다. 우주라는 말의 모든 뜻으로 우주이다. 내밀하게 파악될 때, 더할 수 없이 비천한 거소라도 아름답지 않겠는가?” 집이 내밀하다면 보다 개인적인 공간인 방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런 내밀한 공간 속에서 바다를 찾고자 하는, 숲을 안은 배를 함께 만들 때 그것은 그 두 사람이 하나의 전망을 갖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원 성취, 그리고 꿈과 현실의 삼투#

그러나 어쨌든 전망은 아주 미래적인 것이고, 현재로서는 불충족적인 것이다. 스떼판은 자신의 꿈 속에 스떼파니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가 경멸하는, 어머니의 새 애인으로부터 REM에 대해 들은 후 그는 소리친다. “이제 더 이상 나는 잠의 노예가 아니야. 꿈을 조절할 수 있어.” REM이란 rapid eye movement, 곧 꿈을 꿀 때 눈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는 잠을 잘 때 눈에 어떤 장치를 해놓음으로써 꿈을 조절하고자 한다.

이것은 프로이트를 따라간다면 무척이나 기묘한 일이다. 꿈은 현재 이루지 못한 소원을 충족하는 기제인데, 스떼판은 꿈을 통제함으로써 현실의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다시피 스떼판은 꿈과 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독특한 꿈과 현실의 삼투 현상을 이용하여, 꿈의 통제를 통해 자신의 현실을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현실 속에서 어떤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스떼판의 소원은 온 세계가 자신의 작품‘재앙력’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스떼파니와의 사랑이다.

영화는 스떼판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데, 영화의 수용자 역시 스떼판처럼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스떼판의 꿈인지, 어디서부터가 생시인지 알 수가 없다. 영화는 주인공의 꿈과 현실을 흩뜨려놓음으로써 수용자의 꿈과 현실도 흩뜨려버릴 수 있는 어떤 권능을 행사하는 셈이다. 그만큼 수용자들은 스떼판이라는 캐릭터에 몰입하게 되는데, 그 몰입은 다름이 아니라 스떼판의 소원을 공유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연출의 힘이라고 하기 힘들다. 우리 모두 스떼판과 같은 소원을 이미 우리 속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프로이트가 『햄릿』을 분석하면서,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햄릿』을 썼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1년 후에 『햄릿』을 해독하고 있기 때문이다(Bergez 1997, 86). 여기서 작가와 작중 인물과 수용자는 모두 하나의 소원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꿈: 나르시즘과 글쓰기#

영화는 그렇게 어디까지가 꿈인지 어디서부터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끝난다. 스떼판은 멕시코로 다시 떠나려다가 스떼파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그 방으로 다시 들어간다. 말했다시피 스떼파니의 방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스떼파니에게로 다시 돌아간다는 뜻이다. 스떼파니의 방에서 2층 침대가 완성된 것을 본 스떼판은 그 2층 침대로 올라간다. 그곳이 자신의 자리라는 듯이. 거기서 그는 완성된 배와 자신이 선물한 발명품들을 본다. 그리고 꿈으로 다시 빠져든다. 스떼파니는 스떼판을 부른다.

현실에서 스떼판의 소원이 이루어졌는지 아닌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꿈 속에서 사는 행복을 스떼판은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스떼판은 꿈 속에서 스떼파니와 함께 진짜 ‘골든 더 포니 보이’를 타고, 숲을 안은 배에 오른다. 배는 드디어 바다를 찾았다. 스떼파니가 말하듯 바다mer는 곧 어머니mère이기도 한 것이다. 이 동음이의어는 '그들'의 꿈이 전적으로 언어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언어는 곧 글쓰기이다. 《수면의 과학》은 글쓰기가 나르시즘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면서, 글쓰기의 행복감에 대해서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이청준. 2000. 『자서전들 쓰십시다』. 이청준 문학전집 연작소설1. 서울:열림원.
Bachelard, Gaston. 1990. 『공간의 시학』. 곽광수 옮김. 이데아총서21. 서울:민음사.
Bergez, Daniel et al. 1996. 『문학비평방법론』. 민혜숙 옮김. 문예신서121. 서울:동문선.
Dostoevskii, Fyodor Mikhailovich. 2002a. 『죄와 벌』. 상. 신판. 홍대화 옮김.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서울:열린책들.
---. 2002b.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하. 신판. 이대우 옮김.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서울:열린책들.
Freud, Sigmund. 2003. 『꿈의 해석』. 재간. 김인순 옮김. 프로이트 전집 4. 서울:열린책들.

Posted by 엔디

홍상수의 영화는 '리얼'하다; 이창동의 영화가 현실의 비루함을 드러내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간직한 것과는 달리 홍상수의 영화는 습기 가득찬 현실을 그대로 비춰줄 뿐이다. 그러므로 시작할 때부터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영화는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가진 한 중요한 장점이다. 우리는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박은 그의 영화를 보면서, 현재 습도를 정확하게 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짧은 글에서 우리는 최근작인 《밤과 낮》의 한 주제thème를 이루는 죄의식에 대해 살펴보자.

According to the Wikimedea Commons, this image has been released into the public domain by its author, Carroy. This applies worldwide.

여기 '인류의 기원L'origine du monde'이라는 그림이 있다. 19세기 사실주의 화가 귀스따브 꾸르베Gustave Courbet는 얼굴을 가린 한 여성의 하체를 그리고 '인류의 기원'이라는 제목을 붙여놓았다. 이 그림을 보고 《밤과 낮》에 등장하는 한 남자와 한 여자는 대략 이런 대화를 나눈다:

성남 "좀 이상하지 않아요?"
현주 "인류의 기원을 그린 그림인데 뭐가 이상해요?"
성남 "그건 그렇지만......"
현주 "예술인데 경건한 마음이 들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성남 "그렇긴 한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인류의 기원'이라는 그림은 두 가지 면에서 성스럽다. 먼저는 인류를 잉태한 여성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그것이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그 그림을 대하는 사람은 알 수 없는 죄의식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것은 아름답고 성스러운 것을 보고 죄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현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Gustave Coubet, L'origine du monde, 1866, Huile sur toile, 55cm x 46cm, Musée d'Orsay

굴을 먹으며 유정을 발을 보는 성남(꿈). 밤과 낮.Canon | Canon EOS 5D | Manual | Spot | 1/200sec | f2.8 | 0EV | 37mm | ISO-640 | No Flash | 2007:08:21 22:28:29
그런 상황은 다시 모든 모든 인간이 죄 속에서 태어났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모두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것을 밝혀주지만, 홍상수는 그런 원죄 이외에도 우리 스스로가 죄에 약하고 민감한 존재라는 것을 그림 한 장으로 보여준다. 성스럽고 아름다운 대상을 두고 죄의식에 빠지고야 마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성남에게 꾸르베의 그림은 구체적인 죄악의 예고이기도 했다: 성남은 현주의 룸메이트인 유정의 발을 보고 참 예쁘다고 생각한다. 그의 발에 입을 맞추는 꿈을 꾸기도 한다. 화면으로만 보면 유정의 두 발을 잡는 카메라의 구도는 꾸르베의 그림과 닮아 있다. 이것은 성남이 느낄 죄의식의 표상이다. 이후 성남이 유정과 헤어지면서 유정이 임신 가능성을 언급하자, 성남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모두 내 탓이다'라고 말한다. 성남에게 유정과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죄악의 관계였다.

사실 영화 《밤과 낮》은 죄에 관해 무척 많이 말하고 있다. 먼저 성남이 한국에서 프랑스 빠리로 도피하게 된 것부터가 호기심에 단 한 번 손댔던 대마초 때문이었다. 겁이 많은 성남은 함께 있었던 누군가가 자백했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빠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이다. 이것이 영화의 시작이다.

옛 애인 민선을 우연히 만난 성남. 밤과 낮.Canon | Canon EOS 5D | Manual | Spot | 1/160sec | f5 | 0EV | 120mm | ISO-160 | No Flash | 2007:08:11 19:31:22
빠리에서 생활한 지 얼마 안 되어 옛 애인 민선을 만난 성남은 그가 결혼했으며 오늘 자기를 만나러 나온다고 프랑스인 남편에게 이야기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벌벌 떤다. 잠자리를 함께 하자는 민선의 유혹에 그는 짐짓 산상수훈의 일절을 인용하며 민선을 설득한다(마 5:29-30):

오른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던져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또 오른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던져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한편, 우연히 참석하게 된 파티에서 평양에서 왔다는 사람을 만난 성남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고 자리를 뜬다. 돌아오면서 그는 생각한다: '큰일났다. 북한 사람을 만났다. 자수해야 하나? 대사관에 신고해야 하나?'

영화에서 성남의 죄의식은 이를테면 겁쟁이의 죄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죄악 그 자체를 미워한다기보다는 그 죄로 인해서 자기가 지게 될 멍에를 두려워한다; 경찰을 두려워하며, 옛 애인의 남편을 두려워하고, 또 북한 사람과 접촉해서 자신에게 닥칠지도 모를 불행을 두려워한다. 얼마 후, 민선의 죽음을 계기로 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는 민박집 주인을 붙잡고 "내가 죄인이에요."라며 오래 운다.

성당에 가서 기도하다 잠든 성남. 밤과 낮.Canon | Canon EOS 5D | Manual | Spot | 1/125sec | f2.8 | 0EV | 62mm | ISO-1600 | No Flash | 2007:09:11 01:03:35
홍상수는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구원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비록 성남이 느끼는 죄의식이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그가 구원을 바란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이것이 인류의 근본적인 속성이다. 종교사학자 엘리아데는 『성聖과 속俗Das Heilige und das Profane』에서 고대인들에 비해 비종교적인 것으로 보이는 현대인들도 여전히 성스럽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망과 의식ritual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현대인들도 여전히 구원을 바란다.

그러나 성남의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영화에서는 엉뚱하게도 성남의 빠리 도피가 아내의 거짓말로 끝난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를 끌어안고 침실에 들지만, 빠리에는 어쩌면 아이를 가졌을지도 모르는 유정이 남아 있고, 꿈에서는 자신이 또다른 누군가와 재혼해 있다. 영화는 돌아옴이 진정한 구원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남의 진정한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디에서 올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그 답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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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 알레그레토 (지휘: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Posted by 엔디
1. 천재 이야기

나는 천재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는다. 매번 대선에 출마하는 누군가가 "IQ 430인 나의 공약은 보통의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재가 만약에 있다고 해도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천재는 우리 같은 범인凡人에게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일 뿐이다. 가령 살리에리가 정말 모차르트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다. 아인슈타인이 도서관에서 얼마나 긴 시간을 보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범인들은 늘 천재 이야기에 열광하고 그 이야기를 가슴 깊이 믿는다. 그럼으로써 자기의 현재 상황에 대해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하는 것일까.

어거스트 러시 포스터
사람들이 좋아하는 천재는 아인슈타인과 같은 이미지의 천재가 아니라, 모차르트나 랭보와 같은 이미지의 천재를 좋아한다: 즉 신동 말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외모에 대해서도 열광한다. 특히 미소년 랭보의 모습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겹쳐져서인지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광고계에서 3B라고 하면 미인Beauty, 아기Baby, 동물Beast이라고 하는데, 이런 미소년 신동들은 아름다운 아기beautiful baby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그들이 보이는 기행奇行에 대해서는 은근히 반감을 갖기도 한다. 모차르트의 기행이나 랭보의 동성애는 두고두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런 기행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상상적 인물caractère imaginaire은 영화 《향수》에서 후각의 천재였던 장-밥띠스뜨 그르누이다. 세례 요한이라는 그의 이름과 달리 그는 영화에서 후각에 대한 메시아였다. 그를 해치려는 자들은 다 죽었고, 형장에서 사람들을 열락悅樂의 구원으로 이끌고 갔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가 얼마나 특이한 천재인가는 어떤 동정심도 어떤 인간적인 마음도 없었고, 오로지 냄새에 대한 열정만 갖고 있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아마 그를 보고 섬짓했을 것이다.




2. 표백된 천재, 에반

에반 aka. 어거스트 러시
《어거스트 러시》의 에반은 미소년 천재의 계보를 잇는 극중 인물이다. 그는 미소년이고 천재이지만, 흔히 신동들이 갖고 있는 기이한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소리에 대한 엄청난 감각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모차르트처럼 출세나 돈벌이에 이용하는 것은 서툴다. 그는 오로지 동화적 감수성을 가지고, 자신이 내는 소리를 본 적도 없는 그 부모가 들을 수 있을 것이란 신앙만으로 살아간다. 어떤 기행도 벌이지 않는다. 게다가 정말 착해서,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아서를 구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기도 한다.

게다가 그는 천애고아다. 부모를 한 번도 본 적도 없으면서, 부모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고아원의 아이, 허름한 침대에서 잠들면서도 자신을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는 아이다. 사람들이 애정어린 동정을 보낼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면서, 사람들이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어두운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3. 반복되는 우연과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의 행동



서사를 즐기는 사람들이 할리우드 영화에서 받는 거부감은 역시 그 스토리의 비합리성에 있다. 《어거스트 러시》에서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먼저 에반이 잉태되는 과정부터가 보름달이 비춰주는 옥상에서의 하룻밤으로 꽤 낭만적이지만 전적으로 우연의 산물이다. 라일라 노바첵Lyla Novacek은 이전에 결코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여자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보름달이 수태를 상징하고, 앞서의 장면에서 록 공연과 첼로 솔로 연주의 오버랩이 이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여기서 이 장면에 면죄부를 주더라도 《어거스트 러시》의 스토리는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성 투성이다. (면죄부는 주더라도, 천재 영화에서는  대체로 이런 '출생의 비밀' 모티프가 등장한다는 점은 짚어 주어야 하겠다.)

가령, 라일라 노바첵은 뉴욕 필과의 협연을 제의받을 만큼 꽤 촉망받는 첼리스트인 듯한데, 루이스 코넬리Louis Connelly가 그를 찾아다닌다며 몇 년이 되도록 이를 인지하지 못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더구나 노바첵이 누구인지 인터넷 뉴스를 통해 알아낸 후 거주하는 곳까지 찾아가는 열정을 보이면서, 정작 뉴욕에서는 온 시내를 뒤덮은 플래카드 속에서 그의 이름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이 경우는 영화 후반의 가족 상봉을 극적으로 그리기 위해 연출자가 의도적으로 합리성을 무시한 것이다.

에반을 찾아 뉴욕을 헤매는 제프리스에게 '마법사Wizard'가 미국 사회복지 행정에 대한 쓴소리를 하는 것처럼 어색한 장면이 또 있을까? '마법사' 역시 고아였기 쉽다는 점에서 이해하려 해도, '어거스트 러시'를 빼돌려 장사를 하고자 하는 그가 그토록 주목받을 행동을 하는 것은 역시 어색하다. 예상대로 곧바로 제프리스는 경찰력을 동원해 '마법사' 패거리의 은거처를 습격하고 '마법사'는 '어거스트 러시'와 헤어지고 만다.

에반이 어느 교회에 들어가서 희망Hope이란 이름을 가진 소녀에게 악보에 대해 20초간 배운 뒤, 온 벽을 악보로 채우는 부분도 실은 말도 안 된다. 리듬과 음정에 대한 감각은 타고날 수 있고, 다른 사람보다 소질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악보는 수천년 동안 전해내려오는 일종의 약속이다. 그건 선천적으로 재능이 있을 수 없으며, 독보법은 따로 배워야 한다. 우리야 높은음자리표나 낮은음자리표가 그려진 오선지에 익숙하므로 악보라곤 그것밖에 없는 줄로 알고 있으니, 그걸 순식간에 터득한 에반이 천재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에반이 정간보의 수많은 약속들을 순식간에 터득하는 장면이 있다면 그만큼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을까?

정간보井間譜

정간보井間譜, ⓒ국립국악원


마찬가지로 모두 같은 시기에 뉴욕을 향해 세 가족이 모인다는 설정도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아이가 들을 것 같다", "그녀가 들을 것 같다"는 라일라와 루이스의 이야기는 영화 전반에 흐르는 어떤 우주적 울림에 관한 신앙이고, 그런 신앙이야말로 영화를 지탱하는 유일한 힘이므로 문제삼을 것이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하필 같은 시기에 다시 음악을 시작하고 그때 마침 '어거스트 러시'가 된 에반의 곡이 뉴욕에 울려퍼지는 이 우연의 일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거슬러 올라가면, 성공한 비즈니스맨이 된 루이스가 마침 옛 밴드 동료의 택시에 올라타는 것도 우연이요, 때맞춰 라일라의 아버지가 죽고 라일라가 진실을 알게 되는 것도 우연이다.


4. 미약한 캐릭터

이 영화에는 사실 루이스, 라일라, 에반 외에 다른 등장인물은 없다고 봐도 좋다. 사회복지과의 리처드 제프리스Richard Jeffries는 사실 라일라를 거의 도와주지 못하며, '마법사'Maxwell "Wizard" Wallace는 단지 에반에게 '어거스트 러시'라는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서만 등장하는 것 같다.

제프리스가 에반의 파일을 찾았을 때 라일라는 이미 게시판에서 에반의 얼굴만 보고 자신의 아들인 줄 알았으며, 제프리스가 '어거스트 러시'가 에반인 줄 알고 뛰어갔을 때 라일라는 이미 자기 아들의 공연을 보고 있었다. '마법사'는 에반에게 음악에 대해 모든 것을 가르쳐주겠다고 했지만, 그런 장면은 나와 있지 않다. 사실 에반의 모든 기타 연주 가운데 교회에서의 앰프와 코러스 계열 이펙터만 가지고 연주한 태핑 연주만큼 감동적인 것은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즉, 극중에서 에반은 '마법사'에게 배우기 전에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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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를 치며 기뻐하는 에반에반의 태핑 기타 연주

오히려 '마법사'가 기억에 남는 것은 마지막의 짧은 하모니카 연주 때문인데, 그것조차 편집된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의미있을 만큼 길지 않다.


5. 엄마 찾아 삼만 리

재미있는 것은 역시 이번에도 에반이 남자라는 점이다. 에반 정도의 신동이 여자라면 영화가 좀더 재미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제작진은 남자 아이를 택했다. 그 편이 여러 모로 편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남자 아이가 갖고 있는 부모에 대한 결핍을 그려내기가 쉽다. 엄마와 아들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역시 성모 마리아와 예수라면, 신동의 대표적인 이미지도 실은 성서의 예수다(표준새번역, 눅 2:41-50):

예수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갔다. 예수가 열두 살이 되는 해에도 그들은 절기관습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러 올라갔다. 그런데 그들이 절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그의 부모는 이것을 모르고,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다음에, 비로소 그들의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그를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은 그를 찾으려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사흘 뒤에야 그들은 성전에서 예수를 찾았는데,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

그의 부모는 예수를 보고 놀랐다. 어머니가 예수에게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가 부모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예수가 자기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이렇게 에반은 예수의 이미지를 쉽게 전유專有하는데, 그 전유의 끝은 가족의 상봉이다. 음악이라는 거창한 우주적 메시지를 말하던 영화는 어느 사이 한 가족의 가정사로 축소되어 구원의 의미를 축소하고, 마지막 오케스트라를 통해 세계에 평화와 구원이 왔음을 천명한다.

어쨌거나 순진하고 순수한 남자 아이의 이미지는 여자 아이의 이미지보다 가족의 상봉이라는 구원사에 보다 접근하기 쉬운데, 그것은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이 보다 더 뜨겁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에서 루이스는 (아들의 존재를 몰라서 그렇겠지만) 아들보다는 라일라를 찾고 있고, 라일라는 왜인지 모르지만 루이스는 안중에 없고 잃은 아들을 찾고자 하는 열정에 가득차 있다. 실제로 구글 검색 결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거스트 러쉬를 본 많은 블로거들은 이를 「엄마 찾아 삼만 리」와 연관시키고 있다. 즉, 관객들의 심리 속에서는, 여기서 아버지란 존재는 지워지고 없다. (오히려 아버지의 역할은 불완전하고도 불합리하게 '마법사'가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엄마의 포근하고 따뜻한 이미지야말로 이 영화가 기대고 있는 음악의 우주적 울림이 갖는 포근함의 비밀이기 때문이다.


6. 영화와 음악

영화 내용은 그저 그래도 음악만은 좋다는 평이 많았을 때, 한 팝 칼럼니스트가 <어거스트 러쉬> 그렇다고 음악은 훌륭해?라는 포스팅을 통해 음악도 실은 형편없다는 견해를 밝혀 블로거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었다. 사실 그가 지적한 대로 영화를 전반적으로 밀고 나가는 음악이 없다시피하고, 음악의 편성이 지나치게 단순 반복적이었다는 것은 맞다. 사실 나는 위 포스팅의 의견에 거의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앞서 불합리한 장면의 하나로 지적했던 악보해독 장면과 달리, 교회에서의 에반의 기타 연주는 놀라운 데가 있었다. 일단 기타는 각 현이 대체로 5도 정도로 떨어져 있고, 각 플랫은 반음 간격이므로 처음 기타를 접하는 음악 천재가 다루기 힘든 악기는 아니다. 더구나 굉장한 연습이 필요한 속주 연주가 아니면서, 기타를 장난감 다루듯이 현을 때리며 우연인 듯 아닌 듯 나오는 태핑 멜로디는 꽤나 아름다우면서도 음악적 합리성을 취득한 장면인 것이다. 기타 하나로 리듬, 멜로디, 화음이 모두 이루어지는 이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볼 만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훈련받지 않은 음악 천재가 선보일 수 있는 개연성을 가진 , 수준 높은 기타 연주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트 러시》가 '음악 영화'라는 태그를 받기에 불완전하다 해도 최소한 음악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영화라는 점은 맞다.

그러나 영화인들이 자랑스럽게 영화를 종합 예술이라고 부를 때는, 어떤 영화든 어느 특정 요소로만 떨어져버린다면 실패한 영화라는 점을 자인한 셈이다. 음악은 좋다, 는 말은 영활르 보느니 OST를 사겠다, 는 말과 바꿔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OST를 들어도 기억에 남는 곡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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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누구나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살아있다고 믿는다. 내가 자고 있을 때 내 장난감들이나 인형이 살아 움직일 것이라는 상상력은 상당히 많은 동화나 만화의 기본적인 설정으로 되어 있다. 특히 철강과 거대 기계가 찬양받던 지난 세기에는 일단 무엇이든 로봇으로 변하는 독특한 생각이 만화영화의 기반 상상력이 되었다. 전투기나 탱크에서 라이터까지 로봇으로 변신했고, 초능력으로 불러내는 존재도 귀여운 여자친구나 다정한 말벗이기보다는 로봇이었다.

언젠가부터 만화 영화들은 거대 로봇 만들기를 그쳤다. (아마도 일본) 경제에서 '중후장대重厚長大' 시대가 가고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시대가 온 탓이다. 워크맨이라고 불리는 소형 카세트라디오가 그 신호탄이었다면 작고 가벼운 mp3 플레이어와 얇은 휴대전화는 나름대로 그 문화의 첨단이라고 할 만하다.

영화 《트랜스포머》가 나온 건 그 시점이다. 이 영화는 나오자마자 '키덜트 무비kidult movie'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변신 로봇이 나오는 영화가 어째서 '키드 무비kid movie'가 아니라 '키덜트 무비'일까.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간단하다: 경박단소 키드의 머릿속에는 저런 변신로봇이 없기 때문이며, 장난감으로 이제 자동차를 소유한 '마이카my car' 족들을 명백한 타겟으로 정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엉뚱하게도 나는 이 영화에서 미국의 정신을 좀 찾아보고 싶다. 250년 동안 미국을 키운 건 '팔할'이 강철왕 카네기와 자동차왕 포드였고, 미국이 경제 대국이 된 것은 유럽 대륙의 큰 전쟁에 군수 기계와 물자를 대면서였던 것이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일본은 자동차와 전투기로 변신하는 로봇 '트랜스포머' 장난감을 만들어 거대 시장 미국에 팔았던 것이다. 영화 속에서 "분명히 일제일 거야."라는 대사가 있다.) 그래서 이들 '트랜스포머'와 미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각별한 사이가 되어 있다.

2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은 주술 신앙이다. 주술 신앙은 합리주의와도 다르고 마법과도 크게 다른데, 근본적으로 상대를 대화의 대상으로 여기고 하나의 인격으로 대한다는 점이 바로 차이점이다. 가령 우리가 시계를 사서 손목에 차고 다니면서, 그것을 시각을 알려주는 기계라고만 생각해버리면 우리는 일종의 합리주의적 사고를 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시계를 자신의 종이나 거래의 당사자로 여기고 시계에게 주문spell을 외거나 시계--또는 시계(시간)의 신--에게 영혼을 판다면 우리는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주술은 대상을 신이나 대화 상대자로 여기는데 기우제를 지낼 때 하늘에 대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기도를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트랜스포머》에서 나타나는 주술 신앙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일어나는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범블비가 아직 로봇이 되기 전, 샘 윗위키가 미카엘라를 태우고 가다가 멈추는 상황에서 그렇다. 윗위키는 자동차에게 부탁ask을 한다: 제발 움직여라. 범블비는 그 부탁에 반응하고, 그래서인지 그날의 데이트(?)는 꽤나 성공적이게 된다. 누구나 한두 번쯤 겪음직한 이 일은 이 영화가 근본적으로 주술적인 신앙에 기대고 있다는 증거로 꽤나 중요한 것이다. ('고물차' 운운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3

'태초'라는 낱말로 시작되는 텍스트는 언제나 그만큼의 무게와 부담감을 갖게 마련이다. 그런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신앙심이 강한 사람이거나 어린 아이다. 이 이야기는 어린 아이 같은 감성과 똑 그만큼의 지성을 갖춘 윗위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 속에 아직도 미국을 닮아가려는 욕망이 있다. 특히 거대한 군수 기계들이나 자동차를 보면서 미국의 힘에 혀를 내두르는 일은 적지 않다. (MS나 구글, 애플과 같은 회사에 대한 동경은 좀 별개의 문제이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일종의 미국교에 대한 영화이다. 미국은 이 영화를 통해 자동차를 비롯한 많은 기계가 자신들로부터 만들어졌다고 공포한다. 거대화, 대형화라는 미국의 이데올로기가 여기서 주술 신앙으로 바뀌어 사람들에게 이식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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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 ! Rien de rien.
Non ! Je ne regrette rien.
Car ma vie, car mes joies
aujourd'hui, ça commence avec toi!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요,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내 삶도, 내 기쁨도
오늘, 시작되었으니까요, 당신과 함께!

아녜스 쟈우이Agnès Jaoui 감독의 첫 작품인 《타인의 취향Le goût des autres》의 대단원을 이루는 노래, 에디뜨 삐아프의 '아니요,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다. 그러나 그 영화 속에서 정작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은, 다른 사람의 취향goût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다. 《타인의 취향》은 아주 많은 걸 말하고 있지만 여전히 말하지 않은 부분을 남겨둔 영화였고, 그 말하지 않은 부분은 신비로 남을 것이었다. 물론 그 신비는 인간을 허무하게 만드는 신비가 아니라, 인간을 보다 진정한 행복으로 이끄는 신비가 된다. 그러므로 《타인의 취향》에서 취향보다 중요한 것은 삶과 기쁨, '당신'과 함께 시작된 삶과 기쁨이다. 어쩌면 취향은 거기에 얼마쯤 종속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취향》은 관계에 대한, 보수적인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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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우이 감독의 두 번째 영화 《환영처럼comme une image(번역 제목: 룩앳미)》은 《타인의 취향》의 연장선상에서 관계에 대해서 다시 고찰한다. 다만 첫 번째 영화가 취향을 문제삼았다면, 이번 영화는 성격caractère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극 예술이 성격에 초점을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랜 시간동안 그래왔다. 그래서 우리는 극에 등장하는 인물을 성격caractère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역사주의 비평과 자연주의naturalisme가 믿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시간temps과 종족race, 그리고 환경milieu에서 형성되는 사람의 성격과 그 성격들이 부딪히는 세계였다. 졸라의 루공-마까르 총서Rougon-Macquart는 바로 그 지점에 위치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연주의자들은 문학 작품을 쓰면서도 스스로 과학자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녜스 쟈우이는 말한다: 성격도 변한다. "에디뜨는 당신들이 변했다고 하던데요." 우리는 에띠엔 꺄사르Étienne Cassard의 글과 그의 정신esprit를 보고, 그의 성격의 형성을 짐작할 수 있다, 롤리따 꺄사르Lolita Cassard와 그 가족들을 보고 그의 성격의 형성을 짐작할 수 있다. 실비아와 삐에르 밀레 Sylvia et Pierre Millet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딱딱한 자연주의가 신비의 탈을 쓰게 되는 것은 이 시점이다. 그래서 세바스띠앙Sébastien이 등장한다. 우리는 꺄사르 씨의 위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실감할 것이다. (성격의 변화가 왜 중요한 이유는, 말 그대로, 한 사람의 성격이 바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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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말. 시안화칼륨의 치사량은 0.15 그램이다.

덧말2. 영화의 자막은 중역되었다. 꺄사르Cassard가 카사드로 옮겨지다니, 서양인들이 나를 Quan Ning Dian으로 부른다면 나는 기분이 좋지 않을 텐데. 거기다가 영화 속에서 모든 도량형은 원래는 미터법으로 이야기하는데, 자막은 철저하게 인치와 피트를 사용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미국영화, 곧 원래 인치와 피트를 사용하는 영화도 자막에서는 가능하다면 미터법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오히려 거꾸로였다.

덧말3. 아네스 자우이는 이상한 표기다. Agnès Jaoui의 발음은 아마도 [aɲεs ʒawi] 일 것이므로 이 국제음성기호를 최대한 비슷하게 한글로 고치면 아냬(녜)스 쟈위가 된다. 외래어 표기법에 맞춰서 쓴다면 아녜스 자우이가 된다. 아네스 자우이는 원음에 최대한 가깝게 표시된 것도 아니고, 외래어 표기법에 맞춰서 쓴 것도 아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건 당연히 [ɲ] 소리인데, 아녜스를 아네스로 바꾸는 건 에스빠냐를 에스빠나로 바꾸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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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기 위해 적어두는 경구:

Yvette:
Non, c'est triste, mais je ne suis pas responsable.

Nana:

On se croit qu'on est toujours responsable des ce qu'on fait, et libre.
Je lève la main-Je suis responsable.
Je tourne la tête à droite-Je suis responsable.
Je suis malheureuse-Je suis responsable.
Je fume une cigarette-Je suis responsable.
Je ferme mes yeux-Je suis responsable.
J'oublie que Je suis responsable, mais je le suis.

- Jean-Luc Godard, Vivre sa vie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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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뜨:
아니, 슬프지. 하지만 내겐 책임이 없어.

나나:

내 생각엔, 우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책임이 있어, 그리고 자유롭지.
내가 손을 든다-내게 책임이 있어.
내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내게 책임이 있어.
내가 불행하다-내게 책임이 있어.
내가 담배를 피운다-내게 책임이 있어.
내가 눈을 감는다-내게 책임이 있어.
난 그 사실을 잊어버리지만, 실은 내게 책임이 있는 거지.

- Jean-Luc Godard, 그녀의 삶을 살다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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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는 황당한 제목으로 개봉한 영화다. 원제는 《번역에서 잃어버리는 것들Lost in Translation》 정도가 맞겠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 영화가 좋다고 추천들이었다. 영화를 소개하는 인터넷 사이트들은 두 상처입은 영혼의 만남 어쩌고 하면서 떠들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를 '영혼의 만남' 운운하며 극찬하는 것이야말로 번역 과정에서 많은 걸 잃어버린 주제 같다. 영화평론가들의 문제점은, 항상 현실을 보지 않고 이데아를 보려고만 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번역에서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고 있긴 하지만, 그냥 '로맨스' 영화다. 밥Bob과 샤를롯Charlotte이 상처입은 영혼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그냥 그뿐이다. 그런 정도의 상처라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상처이며, 그 정도의 상처를 우리는 그냥 우리 속에서 짓누르고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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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상처가 극대화 혹은 가시화되는 것은 단지 그곳이 뉴욕이라 LA가 아니라, 도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이 집이 아니라 호텔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호텔은 임시로 쓰는 방이고, 그런 만큼 거기서는 청소도 식사준비도 할 필요가 없다. 할 일이라고는 음악을 듣거나, 창밖을 바라보거나, 자기 몸을 씻고 화장하는 일 뿐이다. 끝없이 나르시스트가 될 수 있는 곳이 호텔이다. 호텔에서는, 바에 내려가 누군가에게 술을 한 잔 선물할 수도 있고, 문틈 아래로 쪽지를 전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끝없이 리버럴할 수 있는 곳이 호텔이다. 모든 만남은 더 우연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 공간은 로맨스의 공간이다. 그뿐이다. 상처의 치료라고? 그렇지 않다. 두 영혼의 상처는 영원히 남을 것이고, 그들은 잠시 상처를 잊었을 뿐이다. 물론, 그것이 의미있기는 하다. 상처라는 건 가끔씩 잠시만 잊어주어야 버틸 수 있는 것이니까.

이 영화를 구원해주는 것이 있다면 밥이 샤를롯에게 속삭이는 마지막 장면이다. (음모론적으로 말한다면 2편을 위한 포석일 수 있겠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속삭인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속삭이고 나서 서로 제 갈 길을 간다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면서 서로를 끊임없이 돌아본다는 것이 중요하다. 상처라는 것은, 그렇게 무디어져 가는 것이니까.

도중에 멈추지 않고 끝까지 영화를 보게 만든 스칼렛 요한슨의 아름다움에 졸문을 바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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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ion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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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무어Michael Moore의 «화씨 911»은 다 알다시피 깐느에서 처음으로 황금종려상la palme d'or을 받은 첫 기록documentaire 영화다. 드림웍스의 야심작 «슈렉»조차 빈 손으로 돌려보낸 '오만한' 깐느가 선택한 기록 영화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그 속에 엄청나게 극적인dramatique 폭로가 있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만들 정도일까. 혹은 이라크 침공의 도덕적·절차적 문제를 조목조목 파고들어 부시 대통령이 직접 그 영화를 보더라도 승복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을까.

아니다. 이 영화에 가득찬 것은 반어와 풍자다. 여러 번 기사화된 무어 감독의 발언에서 짐작할 수 있는 그의 비판방식 그대로를 이 영화에 담은 것이다. 그리고, 그 비판방식은 사실 길고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에서 몰리에르를 거쳐 지금까지 내려온 이 흥미로운 양식은, 그러나 신뢰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것이니, 꼭 민감한 폭발물같은 것이다. 가령 우리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에 동의하기 힘든 것이다.



무어 감독은 여기서 20세기 후반 이후에야 생각해낼 수 있는 방법-비디오 편집을 사용하는데, 이것이 특히 미국의 대통령과 행정부에 대한 비판에 무척 적절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보이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찍은 수많은 홍보비디오나 기자회견, 국무위원들의 답변, 보좌관의 발언, 국제회의에서의 주장 등의 자료 수집은 그 자체로 비판의 일부로 기능했다. 왜냐하면 부시 행정부가 너무도 자주 말을 바꾸고 있음을, 그 자료는 여실如實히, 아니 사실 그 자체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 풍자 양식은 ‘그들’의 양복에 담긴 권위주의적 신뢰성을 무너뜨리는 데도 상당부분 공헌하고 있다. 양복을 입은 채 기자회견실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signifié와 상관없이 어떤 특정한 모양signfiant을 갖는다. 우리에게 신뢰감을 주는 것은 그 모양이다. 그러므로 권위주의적인 그 모양을 깨기 위해서는 그 내용을 특정한 발화상황과 떼어놓고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풍자는 여기서 큰 힘을 발휘한다.

이상하게도 실패하지 않았던 사업가로서의 조지 W. 부시와 미국의 대통령으로서의 조지 W. 부시 사이의 '유착관계' 역시 감독이 공들여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는 의혹제기 수준이므로 결코 성공적이랄 수는 없다. 풍자 영화는 바로 이런 부분에서 조심해야 한다. 부시 반대파들끼리 웃고 즐기려고 영화를 만든 게 아니라면, 이건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설득은 오히려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건 이 영화의 장점이자 약점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이라크전 참전 군인들에 대한, 그리고 이라크전 전사자의 가족들에 대한 인터뷰다. 이 인터뷰들은 상당히 감정적이어서 감독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조차도 스스로의 입장을 지킬 수 없게 만드는 면이 있고, 더구나 거대담론에 흡수되어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을 개개인의 이야기를 영화를 통해 복원해서, 보다 삶에 밀착한 관점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더구나 그것이 부시의 관점이 아니라는 점까지도 말이다. “부모나 형제, 또는 친척을 잃는 슬픔이 어떤 것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 ……슬프군요it pains me.”

그러나 이 영화의 기법과 방식은 무척 단순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영화에 관심이 많은 대학생들조차 돈만 있다면 만들 수 있는 수준의 영화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의 이 평가가 이 영화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는 내 스스로의 평가를 보며 오히려 대학생들의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대학생 때의 정신으로 돌아간다면. 무어 감독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이 영화는 내게 내가 오래 간직하고 싶은 대학생 정신l’esprit universitaire을 생각나게 하는 영화였다.

덧. 이 영화에서 가장 가슴아픈 부분은, 미국의 ‘대량살상무기’에 의해 숨진 이라크 아기의 모습도, 전사한 미군의 모습도 아니다. 세계무역센터 빌딩의 희생자도, 희생자 가족도 아니다. 전쟁에 참전해 전쟁의 실상을 알게 된, 스스로를 오랫동안 공화당지지자였던 사람이라고 소개한 한 상이 군인이, 앞으로는 민주당 열성당원이 되겠다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기자에게 다짐하는 부분이었다. 그에게는 그 둘 외에 다른 선택이 없는 것이다. Où se trouve la démocratie?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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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영화는 건조하다. 영화가 줄거리삼은 것들이 결코 건조하지 않고 오히려 '질펀'하거나 축축한데도 건조하게 느껴지는 것은 '홍상수 어법'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야기를 푸는 방식탓이다. 식당에서 날아드는 파리를 쫓는 모습이나 금붕어에게 가만가만 먹이를 주는 모습같이 아무렇지 않은 행동들 하나하나가 한 편의 영화를 지탱하는 힘이 되는 것 같다. 실제로 세밀한 언행, 혹은 그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오! 수정》은 이어서 보다 자세히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부터 이미 홍상수 감독의 중요한 관심거리였음이 분명하다.

《강원도의 힘》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공간이다. 직소퍼즐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우리는 그 영화를 짜맞추어야 한다.

하지만 어법도 공간의 상상력도 사실은 인물에 초점을 두고 펼쳐졌다는 생각을 나는 아직도 떨칠 수가 없다. 영화 속의 지숙은 매우 답답한, 매력적인 캐릭터다. 상권도 현실 속에 파묻혀버린, 어떤 소꿉장난의 기억을 가진, 할 말 많은 캐릭터다. 그런데 상권과 지숙의 모습은 상권-지숙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에 잘게 쪼개져 여러 공간 속에 '건조'하게 퍼져있는 것이다. 가장 눈에 잘 띄는 '숨은 그림'은 절벽에서 남자가 여자를 민 것으로 추정되는 커플과 금붕어다. 그들이 지숙과 상권을 속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런 '형국形局'이라는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가 흔히 '사실주의'라고 평가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같다. 홍상수의 영화가 '객관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의 영화는 냉정하다. 일테면 교수인 후배가 비행기를 타고 떠나버린다든지, 항공사 직원이 뒤이어 떠난다든지, 아직 살아있는 생물을 산 채로 묻는 모습이라든지, 하는 세부적인 것에서부터 그 배경까지가 어떤 주관적 개입도 없는 냉정함의 주관성을 통해서 구성되어 있다.

시간 순서대로 구성하면 술안주감도 안 될 이야기가 능히 한 편의 영화가 되는 것은 그 냉정함을 바탕으로 한 무개입의 주관성이 일관되게 유지되기 때문이다.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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