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fable란 동물에게 사람의 속성을 투영한 이야기로 일종의 알레고리allegorie이다(이상섭, 210-210). 그래서 논자에 따라서는 우화를 의인소설擬人小說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한용환, 333-336). 그런데 우화 가운데 인간이 등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럴 경우 대개 인간은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가령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인간은 사회주의 혁명 이전의 제정帝政 러시아를 의미한다. 또 안국선의 「금수회의록」은 좀더 직접적으로 옳지 못한 인간의 태도를 풍자하고 있다. 이처럼 동물이 등장인물인 이야기에서 인간이 쉽게 부정적으로 묘사된다는 것은, 적어도 문학적 상상력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의 감정을 동물에 이입했을 때 인간이 추악한 존재라고 느끼기 쉽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나는 다소 딱딱하게 우화에 대해서 설명했는데, 세뿔베다의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를 단순히 우화라고 이름붙이기는 좀 망설여진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알레고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직접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갈매기와 고양이는 진짜 갈매기와 고양이이지, 갈매기와 고양이의 어떤 특징을 가진 인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갈매기와 고양이는 고통받고 있다... 조금 길지만 책을 읽어보기로 하자(27-29):

켕가는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기 위해 날개를 쭉 폈다. 그러나 커다란 판도가 몸 전체를 덮어버렸다. 가까스로 물 위로 떠오른 켕가는 머리를 힘차게 흔들어 젖혔다. 눈앞이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인 듯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켕가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앞을 볼 수 없는 것은 오염된 바닷물의 기름 탓이라는 사실을.

켕가는 날개에 묻은 기름을 물에 씻어보려고 했다. 머리를 물 속에 담갔다 뺐다 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허공에서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댄 뒤 다시 눈을 떠보았다. 온통 석유 기름으로 뒤덮인 그의 망막 사이로 마침내 가느다란 햇살 몇 줄기가 비치기 시작했다. 끈끈한 얼룩의 검은 기름은 눈에만 붙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날개와 몸통에도 뒤덮여 날개가 몸통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켕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았다. 우선 검은 기름 띠의 한가운데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헤엄을 빨리 치기 위해 다리를 힘껏 움직이기 시작했다.

[...]

켕가의 날개는 몸에 딱 달라붙어 있어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이러한 상태의 갈매기들은 커다란 물고기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결국은 천천히 질식해 죽게 될 것이다. 석유 기름이 깃털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모든 기공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켕가의 운명이었다. 그래서 켕가는 생각했다. 차라리 커다란 물고기의 입 속으로 빨리 없어져 버리는 것이 더 나으리라고.

검은 물결. 검은 역신.

켕가는 죽음의 종말을 기다리며 인간들을 원망했다. 그 외에 특별한 방법도 없었다.

물론, 최근 충남 태안 반도에서 일어난 원유 유출 사고 이야기는 아니다. 갈매기 켕가는 지금 태안이 아니라 북해의 앨바 강 어귀에서 석유 오염물질을 뒤집어쓰고 허우적거리고 있다. 켕가는 있는 힘을 다해 뭍으로 날아서는 어느 검은 고양이가 살고 있는 집에 추락해서 하얀 알 하나를 낳고는 죽을 것이다; 인간이 켕가를 죽인 것이다.

기름을 뒤집어쓴 채 죽어가는 뿔논병아리Canon | Canon EOS 5D | Aperture priority | Multi-Segment | 1/200sec | f2.8 | 0EV | 14mm | ISO-800 | Compulsory Flash | 2007:12:08 17:14:26

ⓒ최예용, 환경운동연합


검은 고양이 소르바스Zorbas는 동료 고양이들과 함께 하얀 알이 부화해서 어엿한 갈매기가 될 때까지 키운다. 작가 세뿔베다는 인간 대신 고양이에게 한 온전한 한 생명을 맡긴 셈이다. 고양이는 영리하고, 용감하며, 책임감이 있다. 따라서 죽음 이후에 태어난 하나의 삶을 아름답게 할 수 있는 권능이 고양이에게 주어진 셈이다. 소르바스가 어떤 인간들이 불운하다고 여기는 검은 고양이인 것은(20), 인간들의 위선을 지칭함으로써 그 추악함을 더 드러내보인다. 인간들의 편견과 달리 소르바스는 불운한 고양이가 아니라 행운의 고양이이다. 그래서 소르바스가 키운 어린 갈매기는 '행운아'라는 뜻의 아포르뚜나다Afortunada라고 이름붙여진다.

소르바스가 켕가에게 약속한 것은 세 가지였다: 알을 먹지 않는다, 새끼가 태어날 때까지 알을 보호한다, 그리고 새끼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이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알을 먹지 않는 것은 조금의 자제만으로 되는 일이고 알을 보호하는 것은 인간에게 들키지 않도록 잘 행동하면 되는 일이지만, 나는 법은 고양이들도 잘 몰랐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들의 '백과사전'을 신봉하는 사벨로또도라는 박물관 고양이도 역시 알을 어떻게 보호하고 어떻게 품는지는 알려줄 수 있었지만, 비행술에 대해서는 백과사전에서 정말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127):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단 말야. 비행 이론은 최선을 다해서 완벽하게 조사했는데. 기체역학에 관한 모든 사전을 다 뒤져가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론과 비교도 했지.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도 매번 실패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고! 세상에! 어째 이런 일이!"

결국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것은 소르바스의 부탁을 받은 한 시인이었다. 비바람이 치는 날 시인은 갈매기를 산 미겔 성당의 탑으로 데려가 폭풍우를 온몸으로 느낌으로써 나는 방법을 체득하게 한다. 여기서 시인은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일종의 샤먼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야기 속에서는 고양이들이 자신들의 금기를 깨고 인간의 언어로 시인과 대화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실상 자연과 함께 숨쉬고 생활하는 시인의 샤먼적 특성을 동화적 또는 우화적 감수성으로 풀어낸 것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인의 언어다.

소르바스는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줄 사람으로 시인을 지목했다. 왜 그랬느냐는 질문에 소르바스는 이렇게 답한다(135-137):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섰을 뿐입니다. 전에 자신의 글을 직접 낭독하는 걸 들어본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럴 때마다 항상 즐거웠고, 계속해서 들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겁니다."

[…]

"새의 날개로 나는 것에 대해서는 아마 모를지도 모르지. 그러나 내가 그의 시를 들을 때면 항상 그의 시구를 타고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는 느낌이 들었어."

여기서 소르바스는 일종의 역동적 상상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시적 몽상에 대해 역동적 상상력l'imagination dynamique이라고 이름붙이면서, "역동적 상상력은 의지의 꿈이며, 꿈꾸는 의지인 것"이라고 말했다(Bachelard, 177). 여기서 우리는 갈매기란 왜 하늘을 날아야 하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갈매기는 갈매기이기 때문에 난다거나, 엄마 갈매기인 켕가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어린 갈매기가 날기를 원하기 때문에, 곧 그것이 어린 갈매기의 의지이기 때문이다(123-124):

아포르뚜나다는 전사의 모험담을 항상 재미있게 들었다. 그런데 그 날 따라 유난히 눈빛을 반짝이며 귀를 쫑긋 세우고 관심 있게 들었다.

"갈매기들은 진짜로 폭풍우 속에서도 날아다녀요?"

그가 질문했다.

"물론, 바다장어가 방전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말씀! 갈매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새지. 갈매기보다 더 잘 나는 새는 없다고."

바를로벤또가 확언했다.

바다 전사의 이야기는 아포르뚜나다의 가슴에 깊이 스며들었다. 그의 발은 공연스레 흙을 이리저리 파헤치고 있었고, 부리는 매우 예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꼬마 아가씨! 아가씨도 날고 싶어요?"

소르바스가 지나가는 투로 묻자, 아포르뚜나다는 고양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마침내 대답했다.

"그래, 좋아요! 내게 나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순간 고양이들은 너무 기뻐서 환호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들은 고양이 특유의 인내심을 발휘해서 어린 갈매기가 날고 싶다는 의지를 직접 드러낼 때까지 끈덕지게 기다렸던 것이다. 왜냐하면 난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결정에 달린 문제라는 것을 고양이들은 조상들이 일러준 교훈을 통해 이미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요나 억지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

어쨌든 백과사전 지식을 통해 나는 법을 가르치는 데 실패한 고양이들은 소르바스를 시인의 집으로 보낸다. 샤먼인 시인은 베르나르도 아트사가라는 시인의 시 한 편을 들려주는데, 여기서 소르바스는 시인을 온전히 신뢰하게 된다.

그의 작은 용기는
곡예사들의 그것과 같기에
늘 비를 가져오고
늘 해를 몰고 오는
저 어리석은 비 때문에
그토록 한숨을 쉬지는 않지요

갈매기는 이 시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라, 곡예사의 용기를 가지고 비 속에서도 자유롭게 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인은 이로써 샤먼의 역할을 끝내고 탑에서 내려간다. 샤먼이라 해도 결국은 인간이며, 인간은 자연 속에서 일반적으로 '방해'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세뿔베다의 글을 읽고 나서 세뿔뚜라를 떠올린다면 엉뚱할까? 세뿔베다의 이야기가 그래도 동화적인 외피를 갖고 따뜻하게 전개되다보니 그와 세뿔뚜라를 연결하기가 쉽지 않지만, 지구에 대한 문제의식은 둘이 함께 공유하는 것 같다. 칠레의 이야기꾼과 브라질의 스래시 메탈 밴드의 접합점은 단지 비슷한 이름뿐만은 아닌 것이다.

(▼ 잔인한 장면이 많으므로 주의하여 클릭하세요.)

(▲ 잔인한 장면이 많으므로 주의하여 클릭하세요.)

태안 반도의 원유 유출 사고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분명히 이것은 의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사고이지만, 인간이 석유라는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한 언제나 문제가 될 수 있었던 사고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화석 연료라고는 전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이용할 때에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사고가 났을 때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들 전체가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이다. (말하기가 조심스러운데, 책임이 인간들 전체라는 말은 책임의 분담分擔이 아니다; 모두가 태안 반도에 퍼진 원유 전체의 무게만큼의 짐이 있다는 것이다.)



자, 아래의 사이트에서 힘이든 돈이든 보태도록 하자. 우리가 시인처럼 한 갈매기를 날도록 하기는 힘들지만, 앞으로의 갈매기들이 날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 마침 곧 크리스마스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이 땅에 인간과 온갖 동식물과의 평화도 함께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태안 원유 유출 사고 관련 사이트:
환경운동연합
충청남도청
태안군청
Daum 희망모금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루이스 세뿔베다 지음/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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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섭. 1997. 『문학비평용어사전』. 신장판. 민음사.
한용환. 1992. 『소설학사전』. 고려원.
Bachelard, Gaston. 2000. 『공기와 꿈: 운동에 관한 상상력』. 정영란 옮김. 이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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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들은 왜 이야기를 읽을까? 또 왜 이야기를 쓸까? 내게 항상 관심을 끄는 말은 이런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쓰면 소설책 몇 권은 된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술에 취해 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의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어쨌든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참 많다. 블로그나 까페가 붐비고, 인터넷 댓글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다. 술에 취한 것처럼 다들 자기 이야기를 내뱉고,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는 욕을 '씨부리'는 것이다.

이청준은 일찍이 언어사회학서설이라는 연작 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 가운데 한 편은 「자서전들 쓰십시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코미디언 피문오 씨의 자서전 대필 작가 윤지욱이 자서전 쓰기를 그만두는 이야기를 골격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자서전 대필 작가는'글팔이'로 묘사된다(이청준, 85):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지욱을 마음내키는 대로 매도해 대다 말고 피문오 씨는 무슨 생각을 해냈는지 갑자기 목을 잔뜩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청승맞도록 능청스런 목소리로 허공을 향해 외쳐대기 시작했다.

"고장난 시계나 라디오들 고칩니다아― 채권 삽니다아― 부서진 우산이나 빈 병 삽니다아― 자서전이나 회고록들 쓰십시다아―."

자서전 대필. 이 묘한 이율배반의 어구語句는, 지욱의 소설에서의 자괴와는 상관 없이, 지금 이 땅에서는 산문시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누구도 유명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자서전을 직접 썼다고 믿는 일이 없다.


2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자동기술법l'automatisme이라는 것을 말했다. 무의식(의 가능성)을 발견한 예술가들이 이성理性의 통제를 받지 않은 무의식을 그대로 원고지에 옮겨적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자동기술법이야말로 대필의 가장 완전한 대척점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자동기술법은 자주 '자아의 확대'라는 면에 초점이 맞추어져서 낭만주의와 쉽사리 연결된다. 실제로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에서 낭만주의란 '영혼'이라는 예술가의 자아가 너무 커서 '현실'과 불일치한 것을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다(Lukács, 146):

19세기의 소설에서는, 영혼과 현실 사이가 어쩔 수 없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관계를 갖는 또 다른 유형이 한층 더 중요하게 된다. 영혼과 현실 사이의 이러한 불일치성은, 영혼이 삶의 운명보다 더 넓고 더 크기 때문에 생겨나게 된다. […] 따라서 내적 현실과 외적 현실 사이의 동일성을 실현하려는 삶의 시도가 실패로 끝난다는 것이 이러한 소설 유형이 다루는 대상이 되고 있다.

확실히 이런 예술가의 자아가 가장 화려하게 펼쳐진 것은 20세기 후반이었던 것이 아닐까. 적어도 지금은 더 이상 아닌 것 같다.


3

예술이 계량화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돈을 주고 나만의 이야기를 살 수 있게 된다. 글쓰기가 가내 수공업처럼 판매되던 '대필 작가 시대'가 20세기 말 ~ 21세기 초라면, 앞으로 대량생산 레디메이드 이야기가 언젠가 나오지 않을까. 사람마다 삶과 경험이 다르지 않은가, 하고 반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34년 이후로 우리네 삶은 모두 '레디메이드 인생'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지고한 예술이 과연 돈으로 계량화될 것인가라고 묻는 사람은 있을까? 역시 회의적이다. 심심찮게 나오는 소더비서울옥션의 미술품 경매장 소식을 보자. 그리고 오규원의 다음 시를 보자:

―― MENU ――
샤를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이브 본느프와



1,000원
에리카 종



1,000원
 




가스통 바쉴라르



1,200원
이하브 핫산



1,200원
제레미 리프킨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 오규원, 「프란츠 카프카」

소설도 언젠가 자판기처럼 몇 글자 입력하면 완제품이 나오는 구조가 될 것이다. 인터넷에서 뭔가 미칠듯이 간지나는 이야기는 만든 사람이나 이용하는 사람이나 짧게 그 유치함을 비웃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혐의가 짙지만, 미래의 입장에서 볼 때 소설 자판기의 시조始祖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TV 드라마는 처음 몇 회만 보면 전체 구조를 대략 짐작할 수 있고, 미소년과 얽히는 여주인공--꼭 여주인공이라야 한다--의 이야기도 쉽게 구조화·유형화가 가능하다. 이 시대에 프로프V. Propp같은 사람이 있다면 아주 쉽게 TV 드라마와 트렌디 소설을 분석해 몇 개의 요소로 나눌 것이다.

기술복제된 예술작품에는 아우라Aura가 없다고 베냐민W. Benjamin이 말했다고 하는데, 이 자판기용 소설은 처음 시작부터 아우라 따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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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2000. 『자서전들 쓰십시다』. 이청준 문학전집 연작소설1. 열림원.
Lukács, Georg. 1989. 『소설의 이론』. 중판. 반성완 옮김. 심설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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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욕망이란 이 곳에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 실재로서 현재하는 것을 바란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면 사실 '그대'는 곁에 없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 봐야 한다.

삶의 영원한 항등식처럼, 모든 사람이 바라는 것은 행복한 삶이다. 여기까지 인정한다면, 그 다음 행복의 각론에서 저마다의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 순서가 남아 있다. 뒤라스의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 안 데바레드 부인이 바랐던 것은 그가 속한 곳의 정원과 무도회와 파티에는 없는 것이었다. 데바레드 부인의 행복이란 무엇이었을까. 데바레드 부인은 무엇을 바랐고, 무엇을 욕망했을까.


2

르네 지라르는 모든 욕망은 주체와 대상 이외에 또다른 타자가 있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중세의 기사들은 자신들의 롤 모델role model인 기사 이외에 스스로 숭배하는 부인dame이 제각기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시각각 자신의 승전보와 결투 결과를 부인에게 인편으로 알리기에 바빴던 기사들에게 있어서 부인이라는 타자는 무척 중요한 삼각형의 꼭짓점이 되는 것이다.

데바레드 부인에게 있어서 자신의 집은 감옥과 같은 것이다. 데바레드 부인은 그것을 약간 알고 있었다. '약간'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그가 아주 미약한 방법으로 그 감옥에서의 정기적인 탈주를 실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매일같이 엄마와 함께 그 도시를 돌아다니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데바레드 부인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감옥이라고 느낀 보다 정확한 계기는 아이가 모데라토 칸타빌레로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 있었던 사건이다.아마 어떤 치정 사건에 관계된 살인 사건임이 분명한데, 어쨌든 이것이 삼각형의 한 꼭짓점이 되어 데바레드 부인의 곳의 감옥에 대한 자의식을 성장시키게 된다.

(여성의 자의식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샬롯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의 「누런 벽지The Yellow Wallpaper를 알고 있다.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의 데바레드 부인은 안락한 삶 속에서 '누런 벽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3

『모데라토 칸타빌레』가 아름다운 것은 한 부르주아 부인의 일탈이 온전히 말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부인은 한 사내에게 자신의 감옥에서의 일상을 말하고, 자신이 있는 감옥이 얼마나 아름답고 무서운지를 이야기한다(65-66):

"나무가 없는 도시에서 살아야만 해요 바람이 불면 나무들이 울부짖어요 여긴 언제나 줄곧 바람이 불죠 1년에 이틀을 빼놓곤 말이에요 제가 당신이라면 그래요 떠나가겠어요 여기 머물지 않겠어요 폭풍우가 지나간 뒤 바닷가에 죽어 있는 새들은 거의 다 바다새들이죠 폭풍우가 그치면 나무는 더 이상 울부짖지 않아요 목이 졸리는 것처럼 꽥꽥 비명을 지르는 새소리가 해변에서 들려와요 아이들은 무서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지만 전 아니에요 떠나가야겠어요."

마침표도 없이 이어진 문장에서 부인이 말하는 것은 자신의 감옥이다. 그것은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맺고 있으며, 더 이상의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부인의 생각은 끊임없이 피와 죽음과 사랑의 일탈로 치닫는데, 그걸 알아챈 쇼뱅이라는 사내는 이렇게 묻는다(66):

"혹시" 하고 그가 말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는 더 일찍 그 여자를 죽이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이미 말입니다. 말씀해보세요."



4

여자의 감옥은 7장에 가서 절정이 된다. 거기에서는 만찬이 벌어지고 있었고, 10년 동안 남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없는 여자는 술에 취해 만찬에 늦게 도착한다.

7장에서는, 다른 장에서와 달리, 여자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파티란 원래 그런 것이기도 하겠거니와, 여자의 변화나 그 날 밤의 이상한 행동들이 금세 소문이 되어 퍼지는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106-107):

안 데바레드는 조금 전 오리 요리를 사양했다. 그렇지만 음식 접시는 아직 그 여자 앞에 멈추어 있고, 그 짧은 순간은 추문이 시작되기에 충분하다. 그 여자는 예전에 배운 대로 거절 의사를 분명히 알리기 위해 손을 치켜든다. 더 이상 권하지 않는다. 식탁 주변에 침묵이 자리잡는다.

[…]

주방에서는 그 여자가 오렌지 소스를 곁들인 오리 요리를 거절했고, 몸이 아프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5

여자의 일탈은 소설 마지막에 와서 완성된다; 여자는 자신을, 죽은 여자와 동일시한다. 두려움 속에서 그 여자가 한 일은 한 남자와 입을 맞추고는 언어적으로 죽는 일이다(118-120):

"전 두려워요." 안 데바레드가 속삭였다.
쇼뱅은 테이블로 다가가 그 여자를 더듬어 찾았다. 찾다가 포기해버렸다.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을 그 여자가 했다. 여자는 입술이 서로 닿을 만큼 가까이 남자에게 다가갔다. 차디찬 그들의 입술은 조금 전 그들의 손과 같이 죽음의 의식을 따라 서로 포개진 채 떨면서 그렇게 머물렀다. 이루어졌다.

[…]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쇼뱅이 말했다.
"그대로 되었어요." 안 데바레드가 말했다.

장-자끄 아노 감독의 영화 탓에 메콩 강가의 '독신자의 방'과도 오버랩되는 이 장면은, 하지만 이미 좀더 위험하고 에로틱한 분위기를 띄고 있다. 따옴표 안과 밖을 삼투시키는 문장 "그대로 되었다"는 역시 그대로 창세기의 첫 장을 연출하고 있다: "그대로 되니라."

세계의 시작과 소설의 끝, 그 지점에서 어떤 욕망은 끝나고 다른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모데라토 칸타빌레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문학과지성사
Posted by 엔디
『어린 왕자』의 여러 한국어판 번역본들과 불어판 또는 영어판을 비교해 보면 조금 이상한 부분을 찾을 수 있다. (아마도 쓸쓸했던 날의) 어린 왕자가 자기 행성 B612에서 본 해넘이의 수가 한국어판과 불어판 또는 영어판이 다른 것이다 한국어판은 대개 마흔세 번으로, 영어나 불어판은 마흔네 번으로 기록하고 있다:
« Un jour, j'ai vu le soleil se coucher quarante-quatre fois! »
-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 폴리오folio 문고판, 31쪽. (1999년 문고판 간행)

"One day," you said to me, "I saw the sunset forty-four times!"
- 하비스트북A Harvest Book하코트 브레이스Harcourt Brace판 캐서린 우즈Katherine Woods 옮김본, 21쪽.

"언젠가는 마흔 세 번이나 해지는 걸 봤지."
- 구舊 문예출판사판 김현 옮김본, 32쪽. (1973년 초판 간행)

「어느 날, 난 마흔 세번이나 석양을 보았어!」
- 혜림출판사판 황현산 옮김본, 29쪽. (1986년 초판 간행)

「어느 날인가는, 해 지는 걸 마흔 세 번이나 봤지요!」
- 고려원판 오증자 옮김본, 28쪽. (1987년 초판 간행)

"어느 날 나는 해가 지는 걸 마흔세 번이나 보았어!"
- 신新 문예출판사판 전성자 옮김본, 26쪽. (1999년 간행)

"어느 날은 해 지는 걸 마흔세 번이나 본 적도 있어."
- 문학동네판 김화영 옮김본, 35쪽. (2007년 간행)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1999년 출간된 갈리마르 출판사의 폴리오folio 문고판에는 이런 일러두기avertissement가 붙어 있다: "우리는, 앙뚜안 갈리마르와 함께, 폴리오 문고판의 하나로 출간하게 되어서, 그리고 어린 왕자의 완전판l'édition intégrale을 처음으로 출간하게 되어서 기쁘다." ...무슨 소리인가. 『어린 왕자』는 1943년 작가가 살아 있을 당시에 이미 초판이 간행되었는데!

1943년 쌩떽쥐뻬리는 미국에 있었고, 아마 전시戰時였기 때문이겠지만 프랑스 출판 편집자들과는 연락을 취할 길이 없었다. 해서 그는 '레이날과 히치콕Reynal & Hitchcock'이라는 출판사에서 『어린 왕자』의 초판을 발간하게 된다. 정작 프랑스에서는 약 3년 뒤 1945년에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첫 판이 발간된다. 문제는 이 때 갈리마르에서는 작가의 원본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상태에서 작업했다는 것이다.

폴리오 문고판의 일러두기는 그래서 그간 불어판에 있었던 오류의 목록을 보여주고 있다: 천문학자가 망원경을 통해 바라보는 별이 사라져 있고, 사업가와 천문학자의 노트나 그림에 차이가 있으며, 어린 왕자 목도리의 윤곽에서부터 꽃들의 꽃잎과 꽃받침, 가로등 아래의 태양 광선, 바오밥 나무의 뿌리에서부터 야자수의 가지가 다르다; 또한 어린 왕자가 본 해넘이의 횟수가 다르다.

한편, The Publication History of The Little Prince는 각국의 번역 판본들과 떽스뜨, 이미지의 차이를 상세하면서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폴리오 문고판에서 지적하지 않은 두 가지 사항들을 더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어린왕자가 입은 가운의 색깔이 초록색green이냐, 어두운 파랑dark blue이냐, 아니면 바다색navy blue이냐 하는 논란이 있어왔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소행성 B612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천문학자들이 별에 이름을 붙이는 방식을 설명하면서 '소행성325'를 예로 드는데 이 숫자가 일부에서는 '소행성3251'로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린왕자의 가운 색깔

불어판과 영어판, 그리고 두 한국어역본 사이의 가운 색깔이 모두 다르다


Il l'appelle par exemple : « l'astéroïde 325 ».
- 갈리마르 출판사 폴리오 문고판, 22쪽.

He might call it, for exemple, "Asteroid 325."
- 하코트 브레이스판 캐서린 우즈 옮김본, 11쪽.

예를 들자면 <소혹성(小惑星) 3251>하는 식으로 부르는 것이다.
- 구舊 문예출판사판 김현 옮김본, 23쪽.

이를테면, '소혹성 3251호'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이다.
- 신新 문예출판사판 전성자 옮김본, 17쪽.

가령, '소혹성 제325호'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이다.
- 문학동네판 김화영 옮김본, 23쪽.

어린 왕자가 해가 지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는가와 '나'가 예로 든 소행성 이름이 무엇이었는가는 그래도 단순한 편집 판본 상의 차이일 뿐이다: 마흔 세 번과 마흔 네 번이라는 차이가 작품 내에서 유의미한 변화를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상한 일은 '신원'이라는 출판사에서 내 놓은 책은 엉뚱하게도 어린 왕자가 본 해넘이의 수를 "46번"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민한 작가가 언젠가 고쳐 쓴 뒤 어느 판본에 적용을 하지 않았거나 무던한 편집자가 실수를 했거나 했을 것이다. 물론, 어린 왕자에게 있어서 해넘이가 갖는 의미는 무척 각별하다. 슬픈 날에 마흔 몇 번이나 해넘이를 보았다는 것이나, 왕이 소원을 빌라고 하자 망설임 없이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싶다고 한 것, 그리고 24시간 동안 해가 1440번 진다는 이유로 점등인의 별을 떠나고자 하지 않은 점, 그리고 조종사인 '나'에게 해지는 것을 보러 가자고 무의식 중에 떼를 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텍스트를 자세히 살펴보면 어린 왕자가 해넘이를 43번이 아니라 44번 보았다는 것을 확정해주는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어린 왕자는 별들이 즉각 복종한다는 왕의 권능을 부러워하며 이렇게 생각했다고 화자는 전한다:

어린 왕자는 그토록 대단한 권능에 감탄했다. 만약 자기에게도 이러한 권능이 있었다면 의자를 뒤로 물려놓을 것도 없이 해지는 광경을 하루 마흔네 번만이 아니라 일흔두 번, 아니 백 번 이백 번이라도 구경할 수 있었을 것 아닌가!
(문학동네판 김화영 옮김본, 55쪽.)

그럼에도 이것은 작자가 처음에 의도한 해넘이의 숫자를 밝혀주는 것일 뿐 44라는 숫자 자체가 어떤 고도의 시적 울림이나 상징성을 가진 유의미한 것이 아님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에 있어서는 문제가 좀 다르다: 그림이 좀더 바랜 것에서 시작해서 그림 자체에 있어야 할 것이 빠진 것도 있다. 이는 작가의 원판 그림이 미국 출판사들에서 프랑스 출판사들로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문학자①"

천문학자가 망원경을 통해 별을 보고 있는 것이 맞는 그림인데, 별이 아예 빠져서 편집되어 있다.

"천문학자

천문학자가 설명하는 칠판의 도형이 조금 다르다. 가령 원의 중점에서 1사분면으로 나가는 선의 각도가 누락되어 있다.

"바오밥나무"

바오밥나무의 뿌리가 좀더 단순화되어 있다.

"점등인"

가로등 아래의 태양광선 하나가 없다.

서점에서 살펴본 결과, 해넘이 떽스뜨와는 달리 대부분의 책에서 작가가 그린 그림의 문제는 없었다. 몇몇 번역 판본이 예전 그림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어린 왕자가 해넘이를 마흔세 번 보았나 마흔네 번 보았나가 아니라, 어린 왕자의 떽스뜨가 어떻게 정확히 확정될 것인가이다. 마흔세 번과 마흔네 번이 갖는 차이는 크지 않겠지만, 어린 왕자가 느꼈을 쓸쓸함을 표현하기 위해 마흔 몇 번을 100번이나 200번으로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어린 왕자 - 8점
생 텍쥐페리 지음, 김화영 옮김/문학동네

어린왕자 - 8점
생 텍쥐페리 지음, 전성자 옮김/문예출판사

Posted by 엔디
80년대에 대학을 다녔어야 했다고, 스스로에게 늘 확인시키곤 했다.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걸쳐서, 혹은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에 걸쳐서 후다닥 해치운 대학 생활에 대한 약간의 자괴 같은 것도 있었다. 대학 생활이 내게 준 것은 무척 많았지만, 살펴보면 대개 지나간 것이나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이 함께 끼어 있었다.

맑스도 레닌도 제대로 읽지 못했고, 노동자의 삶을 위해 시위도 한 번 한 일도 없다. 그렇다고 학문을 깊이 탐구한 것도 아니다. 나는 늘 주위만을 기웃거렸을 뿐이다. 맑스-레닌을 읽기에 나는 너무 늦게 대학엘 들어왔고, 학문 탐구를 위해서는 너무 일찍 대학에 들어온 셈이다. 콤플렉스 탓일까. 내 책장에는 책들이 쌓이어 갔고, 그 책들은 다시금 내게 부담 혹은 콤플렉스로 다가왔던 것이다.

낮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이삼십 권의 책을 쌓아놓고 꽃에서 꽃으로 옮겨다니듯,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독법으로 책을 읽었다.
책에서 가장 관심 가는 부분은 저자의 약력인 것이다. 약력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장 주네처럼 도둑이었던 사람, 생 텍쥐페리처럼 비행기 조종사였던 사람, 랭보처럼 스무 살 때까지만 시를 쓴 사람, […]
저자의 살아온 삶을 읽고 난 뒤에는 책의 목차를 본다. 그리고 발행 날짜와 몇 판째 인쇄된 것인지를 본다. 제법 영악하게 책을 대하는 것이다. 목차를 보고 우선 당장 호기심이 가는 부분만 본다. 지금 당장에는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면 한쪽으로 치운다. 책 한 권의 소화는 그렇게 수월하게 끝난다.
(34-35쪽)

그러나, 팔십년대라고 해서 내가 '그곳'에 몸을 맡길 수 있었을까. 나는 집단이 개인을 가장 필요로 할 때 집단을 저버렸다.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개인주의자이고, 리버럴하며, 소부르주아였다.

그러나 끝내 라라는 뛰어난 조직 인자도, 투쟁적인 노동자도 될 수 없었다. 20년 동안 몸에 배인 그녀의 리버럴한 면과 소부르주아 근성이, 팜플렛 몇 권과 몇 달 동안의 단파 라디오 주체사상 강좌로 청산되지는 않았다. 그녀는 조직의 선전 대오에서 이탈되었고 당적을 박탈당했다. 그 후, 그녀는 문학이라는 나약한 인문주의적 덕성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숨기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그러나 그녀는 문학판에서도 회의와 갈등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
라라가 죽었다.
(54-55쪽)

소설은 라라가 등장하는 1부와 디디가 등장하는 2,3부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라라와 디디를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한 사람을 시기에 따라 둘로 나누어 놓은 것 같다. 라라는 디디가 되기 위하여 죽었다. 디디는 '살아남은' 주인공과 달리 그 죽음을 담보로 하여 90년대적 삶에 당당한 것이다. (이렇게 보지 않는다면, 놀랍도록 라라의 것과 닮은 디디의 80년대가 이해되지 않는다.)

빨간 라디오! 하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
이럴 수가 있다니!
나는 지금 디디의 얼굴에서 라라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이다.
(224쪽)

'살아남은' 것은 주인공만은 아니다. 한 번도 폐간당하지 않은 『현대문학』이나, 일제 협력에도 독재 협력에도 앞장선 미당, 그리고 스스로의 신념을 저버린 386세대 정치인들만이 손가락질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죄는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원죄original sin요, 경제적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연대책임 같은 것이다. 나는 베트남의 라이따이한들에게 미안한 것처럼 이 땅의 노동자들에게 미안한 것이다.

나는 80년대를 아무 것도 모른 채 다녔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노동자를 억압했으며, 아무 것도 모른 채 분단 체제 유지에 기여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미국을 찬양하고 제3세계를 비난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숨이 막힌다. 사실 이 시절에 대한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 말이 무서운 것이다: "It's not my fault."


살아남은 자의 슬픔
박일문 지음/민음사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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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기억의 축적이다. 기억들은 오늘을 받치는 토양으로 삶의 기저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그 기억들을 나름의 순서로 재구성하는 것이 소설을 비롯한 글의 목적이다. 문제는 흔히 그 기억들은 현실의 힘에 밀리고 눌려 쉽사리 지각변동을 겪게 된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하면,  본래 사람이 가진 기억이라는 것이 사실 온전하지 않아서 우리가 기댈 만한 것이 못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기억하는 행위 그 자체는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지만 그 기억의 내용은 우리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건을 대할 때 기억에만 의존한다면 우리는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결과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황석영의 소설 『손님』에는 이러한, 기억이 갖는 문제점들이 엿보인다. 황해도 신천의 학살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는 이 소설은 그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작가의 후기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객관성'의 문제에 대한 한 해결방안으로써 주관-객관의 비분리, 시점의 교차 등을 택하여 얻은 효과로 흔히 지적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는 쉽사리 윤색된다는 것을 잊은 것일까, 『손님』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과거를 제대로 재구성해내지 못하고 있다.


『손님』이 소재로 삼은 사건을 드러내는 방식은 무척 독특하다. '객관성'에 대한 고민의 한 결과로 작가가 내어놓은 결과는 빈번한 시점의 이동-교차이다. 하나의 시점을 택하여 이야기를 줄곧 내어놓는 다른 소설들과는 달리 『손님』은 하나의 이야기를 삼인칭을 포함한 여러 화자가 나누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진실에 보다 다가갈 수 있는 한 방편으로 이해된다. 어느 한 사람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 개인의 현실의 힘에 눌린 왜곡된 기억의 창으로 바라보는 것이므로 진실과 가깝다고 하기 힘들다. 따라서 빈번한 시점 이동을 통해 진정한 다성성多聲性을 획득하게 되기만 하면 보다 진실성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법정에서 하듯 원고와 피고, 그리고 여러 증인의 입장에서 한 사건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진실에 보다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소설 속에서도 이런 시점 이동이 가장 두드러지는 곳이 여덟째 마당 '시왕-심판마당'인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손님』이 보여주는 '다성성'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다성성이 아니다. 여기서의 다성성은 형식, 다시 말해 겉보기만 다성적일 뿐 내용적인 면에서는 단지 하나의 줄기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시점은 여럿이지만 관점은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손님』의 전체 구조 속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여덟째, 심판마당에서도 학살 사건을 각자의 시점에서 서술하는 인물들(주로 죽은 이들) 사이에 어떠한 관점 차이나 의견 대립을 목격할 수 없다.

'신천 학살 사건'은 서로가 각자의 신념을 좇아 행동함에 따라 생긴 사건이므로, 그 당사자들 사이에 의견대립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소싯적부터 사타구니에 거웃이 날 때까지 한 마을에서 뒹굴어온 놈들>(124쪽)끼리의, 거의 근친살해에 육박하는 큰 사건을 겪은 뒤에는 부지중에 죄의식을 덮기 위한 자기합리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자기합리화는, 이 소설 속에서는, 죽기 직전의 류요한 장로에게서 잠깐 관찰되는 듯 하더니,¹ 그의 사후에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북측 정부가 내세운 증인들의 증언(108-111쪽)이 모조리 윤색된 과거인 것과 비교하면² 여기서의 관점의 일치가 무척 투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¹ <“내가 왜 용서를 빌어? 우린 십자군이댔다. 빨갱이들은 루시퍼의 새끼들이야. (…)”>, 22쪽.
*² <그들은 모두 미군이라고 고쳐서 말했지만>, 108쪽.

그렇다면 그 투명성은 어느 평자의 말대로 죽은 자의 말이기 때문에 획득된 투명성¹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죽은 자'의 유언에는 거짓이 없다는 통념>과 나란히 우리는 또한 '망자亡者의 넋이 한恨을 풀지 못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러고보면 죽은 자의 말이 투명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죽은 자들의 불투명성 때문에 이 소설이 씌어지게 된 것이 아닌가. 어디에서도 그토록 투명한 관점의 일치는 불가능한 것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의 투명성은 작가가 전지적全知的인 관점에서 서술할 것을 각각의 등장인물의 시점으로 교묘히 환원시키는 과정에서 겉으로 보이는 투명성에 불과하다.

*¹ 오창은, 「억압된 기억의 꿈」, 경향신문 2002년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작.

작가는 후기에서 기독교와 맑시즘이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오는 동안에 우리가 자생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타의에 의하여 지니게 된 모더니티>(261쪽)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선사문명에서 고대로, 고대에서 중세로 가는 길에 각각 불교와 유교의 '수입'이 있었던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근대로의 전환기에 기독교와 맑시즘이 '수입'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 시기에 우리 사회는 이미 내부의 모순이 점차로 드러나는 과정에 있었다. 그것은 서학西學에 대한 일정한 반발로서 나타났지만 인내천人乃天 사상 등을 통해 '평등'을 내보여 서민층에 널리 퍼졌던 동학東學을 보면 알 수 있다. 실제로 동학이 서민층에 강한 인력引力을 가졌던 요인은 당시 기독교 역시 가지고 있었던 <반봉건 자주의식>¹에 대한 끌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맑시즘 역시 하층민에게 '해방'의 비젼을 보이며 접근하였던 것이다. 기독교와 맑시즘은 당시 사회 내부의 모순 때문에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¹ 강만길, 『고쳐쓴 한국근대사』, 창작과비평사, 1994, 296쪽.

만약 <식민지와 분단> 때문에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다고 말하려면, 왜 우리가 식민지와 분단을 겪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 또한 필요하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 이유도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데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작가는 자생적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규정 아래 우리 사회가 나아갈 이상향을 엉뚱한 곳에서 구하고 있다.

그는 새처럼 화면의 위로 날아가고 있다. 아래로 연이은 언덕과 실개천이 지나간다. 멀리서 소 우는 소리며 목에 걸린 워낭이 딸그랑대는 소리도 들리고 닭이 알을 낳고 꼬꼬댁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들판에는 사람들이 논에서 모심기를 하면서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린다. 풍물을 치는 빠른 북소리에 꽹매기 두드리는 경쾌한 쇳소리가 얹혀있다. 어머니가 아이를 부르는 소리도 들려온다.

얘들아, 밥먹어라. (257쪽)

『손님』의 마무리 넋반 대목에서 작가가 제시하는 '이상적 공동체'이다. 무척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이런 평화로움이나 아름다움이 근대 이전의, 자기 모순에 의해 붕괴된 전근대 사회를 묘사하는 것임은 쉽게 알 수 있다. 과연 소작농들이 이런 시각을 가질 수 있었을까, 머슴들이 이런 시각을 가질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이것이 전근대 사회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묘사라는 것은 쉽게 밝혀진다. 전근대 사회를 이상적 공동체로 제시한다는 것 자체가 '윤색된 과거'를 그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과거의 삶을 쉬임없이 참고하는 것은 역사를 하는 궁극적인 목적과도 부합하는 일일 테지만, 무턱대고 과거를 미화하는 것은 일종의 신비화에 빠지고 마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해방이지 과거의 회복이 아니기 때문이다.¹

*¹ 도정일,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민음사, 1994, 167쪽 참조.

그런데 과거가 쉽게 윤색된다는 사실을 잊은 데서 비롯한 이들 '겉보기만의 다성성'과 '과거 회귀 경향'은 이 소설의 형식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이 작품은 '황해도 진지노귀굿' 열두 마당을 기본 얼개로 하여 씌어졌다.>(262쪽) 작가의 입장을 따라 본다면 넋굿 형식을 채용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소설의 취지가 류요한으로 대표되는 학살 사건 당사자의 죄를 씻기고 그들이 저승으로 떠날 수 있게 하는 데에 있는 만큼 어떤 종교적인 의식은 필연적이다.

류요한의 죄가 문제시되는 것은 소설 초반부에 제시되는 박명선의 회고(45-49쪽)와 <“머 종교야 어두운 시절의 미신이니깐 다 좋다 말입니다. 반동이던 앞잡이던 기것두 거저 넘어갈 수 이서요. 사람은 왜 죽입네까?”>(94쪽)하는 류단열의 항변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죄가 살인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살인이 죄가 되는 이유는 아마도 사람이 사람의 생명의 여탈권을 갖는 것이 옳지 않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살인죄를 씻는 데도 역시 사람의 힘을 능가하는 어떤 존재의 힘을 빌려 씻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의 생명에 대한 여탈권을 쥐지 않았다는 말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도 역시 갖지 않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의 입장에서는 기독교는 자생적인 것이 아니므로 그 죄를 씻는데 적합하지 않다. 또, 유교와 불교 등의 종교도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보면 외래적인 것이므로 자생적이지 않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¹ 때문에 작가로서는 가장 토착적이고 자생적인 것으로 널리 알려진 샤머니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¹ 성민엽, 「이데올로기 너머의 화해와 그 원리」, 『창작과 비평』 2001년 겨울, 244쪽.

그런 샤머니즘의 선택은,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고 오로지 지우는 데에만 기능하고 있다. 본래 <넋굿은 망자로 하여금 생전에 있었던 모든 맺힌 한을 풀어버리고 자유롭게 저 세상으로 떠날 수 있도록 돕는 데>¹ 그 목적이 있다. 때문에 넋굿은 어떤 의미에서 체념을 위한 의식이다. <한을 풀어버>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망자에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고 삶에서 있었던 좋지 않은 사건들에 대한 감정을 버리고 체념하기를 권고하는 것이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도 순남이 아저씨는 <죽으문 자잘못이 다 사라지디만 짚어넌 보구 가야디>(194쪽)라며 문제를 해결하는데 애쓰기보다는 문제를 지우자는 취지의 말을 하고 있다.

*¹ 차옥숭, 『한국인의 종교경험․巫敎』, 서광사, 1997, 272쪽.

해서 『손님』은 한 판의 넋굿을 통해 모든 한恨을 풀고(지우고) 모든 외래의 것을 물리친다. 그런 굿판 끝에,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전근대적인 유토피아요, 그 등장인물들의, 실제로는 불가능할 투명한 말들이다. 샤머니즘의 세계관은 치열한 현실 인식 속에서 사건을 바라보지 못하고, 굿이라는 형식을 통해 죄책감을 씻으려는 의식주의儀式主義ritualism의 성향이 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떠한가? 앞에서 기독교가 서민과 민중들에게 깊이 파고들 수 있었던 이유는 평등과 기회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손님』에서의 기독교는 전혀 민중적이지 않고 평등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그것은 이북에서의 부흥기에 기독교가 전혀 다른 기능을 했기 때문이다. 스펜서 J. 파머는 이북의 초창기 기독교 선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독교는 최초의 支持를 北韓지역에서 강하게 받았다. 거기에서 기독교는, 서울에 있는 양반에 대한 그 지역 사람들의 오랜 不平을 이용할 수 있었다. 儒敎原理는 평양에서 그다지 존숭되지 않았다. 이 지역에 있어서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강하게 긍정적으로 반응해간 이유는, 그들이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확고한 旣得的인 利權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부분적으로 의거한다. 또한 기독교는, 서울에 있어서 儒敎의 규칙이 너무나 융통성이 없고 형식적이어서 현대적인 문제에 적용할 수 없다고 느끼고서, 그것을 따라가기 어렵게 생각하는 상당수의 귀족젊은이들의 마음을 끌었다. 이 젊은 양반 개혁자들은 권력의 座에 앉기 위하여 그리고 외국, 특히 미국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하여 이 外國 信仰과 연결되는 것이 이롭다고 생각하는 保守主義者들이었다.¹

*¹ 스펜서 J. 파머, 「東洋社會와 基督敎」, 『思想界』 1966년 12월, 89쪽; 강만길(295쪽)도 <개신교는 당초 서북지방의 자립적 중산층을 중심으로 수용되어 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지극히 기복적祈福的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신앙의 양태는 사실 올바른 믿음의 본보기라 할 수는 없다. 종교학자 윤이흠 교수는 믿음을 기복형, 구도형, 개벽형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그 첫째인 기복형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 유형은 생존의 동기를 갖는 믿음으로 이러한 유형은 일률적인 행동 양식과 현세적 조건의 만족에 머물기 때문에 극단적 보수주의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¹

*¹ 김주연, 「사랑의 문화를 위하여」, 김주연 엮음, 『현대문학과 기독교』, 문학과지성사, 1984, 14쪽에서 재인용.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손님』에서 보이는 기독교는 보수주의자들의 기득권유지의 한 방편으로 볼 수 있다. 가령 류요한이 <우리 군에 인민위원회가 생겨난 뒤에 가보니 정말 한심하더라. 어중이 떠중이에 머슴 건달 떠돌이 따위들인데 누가 보아도 제 고장에서 대접 못 받던 놈들을 긁어모은 것이라.>(119쪽)고 했을 때, 류요한의 어머니가 박일랑(이찌로)에게 <“네 이 배은망덕헌 놈 겉으니. 감히 누굴 치느냐?”>(135쪽)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기독교적 평등개념은 찾아볼 수가 없다.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길 것이고 <어중이 떠중이>를 모은 공산주의자들은 축복받지 못한, 사탄의 자식으로 여길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처음부터 그들을 영혼이 있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처음부터 기독교로 이끌림받지 못했다. 순남이 아저씨는 이렇게 말한다.

기러구 보니께 우리집 주인덜 가족이 다니넌 광명교회에 나 겉은 사람언 한번두 얼씬얼 못해서. 소작인이라두 제 식구가 있넌 이덜언 서루 권하구 이끌어서 교회에 더러 나가댔다. 우리 겉은 일꾼덜이나 머슴덜언 일년 사시사철 일만 하거나 하다못해 꼴얼 베구 나무럴 하구 소 멕이기두 하구 있대서. 그낭 먼발치서 예비당에서 들레오넌 종소리나 찬송가 소리럴 듣기만 했대서. (79쪽)

본래 종교가 기복적 성격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여러 성격 중에서 어느 한 편만 강조되는 것은 건강한 신앙이 아닐 것이다. 흔히 한국의 기독교가 샤머나이즈 되었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기복적 성격만 지나치게 강조되어왔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사실 기독교가 한국에서 널리 퍼진 이유를 그것의 샤머니즘과의 유사성에서 찾는 이도 있다.¹

*¹ 파머, 위의 글, 85-86쪽.

작품에서 류요한 등이 보여주는 기독교는 보수적인, 기복형의 기독교인데, 그것은 샤머니즘화된 것으로 알려진 한국의 불교와 마찬가지로 샤머나이즈 되어 이미 어떤 면에서는, 이른바 '자생성'을 획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십자군 전쟁'도 잃었던 기득권을 되찾기 위한 것이었을 뿐, 사회 개혁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류요한이 박일랑을 체포한 직후 <너 이새끼 우리 땅 뺏구 천년만년 리당위원장 해먹을 줄 알았네?>(213쪽)라고 하는데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손님』에서 보이는 초기 이북의 기독교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도 샤머니즘적 기복신앙으로 변질된 측면이 많다. 샤머니즘은 개인의 현세적 고민(기억)들을 지우는 데에만 기능하고 있다. 기복신앙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샤머니즘이 그렇듯이 그것이 가진 이기주의적인 발상 때문이다. 마가복음 12장 13절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런 이기주의적인 기복신앙을 극복하라는 말씀이다. 그러한 극복이 이루어지지 않은 기복적 기독교신앙은, 앞서 생각해보았던 샤머니즘이 그렇듯이 한을 푸는(지우는) 데에만 기능하는 의식주의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참된 믿음은 이상사회와 현존질서의 괴리를 각성하고 그 괴리를 메우기 위해 진실된 기억을 토대로 하여 현세적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개인과 공동체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차츰 그 행복을 다져가게 될 것이다.


손님
황석영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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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서평, 소설
어린왕자가 지구로 다시 돌아왔다. 그의 별에 어쩌다 호랑이가 머물게 되었고, 호랑이 때문에 양과 장미가 위협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린왕자는 호랑이 사냥꾼을 찾고 있다.

워낙 쌩떽쥐뻬리의 『어린왕자』는 동화로 씌어진 것이다. 동화가 소설보다 수준낮은 것이라는 생각은 큰 오산이리라. 쌩떽쥐뻬리는 심지어 『어린왕자』를 어른인 레옹 베르뜨에게 헌정하는 것을 어린이들에게 사과하고 있기까지 하다. 쌩떽쥐뻬리가, 혹은 그의 어린왕자가 경멸했던 것은 '버섯'같은 어른들의 사고방식이다.

『다시 만난 어린왕자』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어린왕자는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별(사실은 행성)을 떠나 지구로 오는 길에 만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려지는지를 보면 금방 나타난다. 어린왕자는 차례로 환경주의자, 광고기획자, 통계학자, 관리인, 편갈라 싸우는 사람, 그리고 소녀, 지구에 와서는 문학평론가를 만난다. 물론, 소녀를 빼고는 모두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그건 쌩떽쥐뻬리의 플롯을 그대로 따온 것이지만, 다비뜨의 묘사는 보다 우리 시대에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다.

김정란은 해설에서 쌩떽쥐뻬리의 '모던'함과 다비뜨의 '포스트모던'함이 어디서 차이를 보이는지 세목들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로 다비뜨의 글에서 '모던'에 대한 반발이 많이 읽히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생텍쥐페리 선생님, 선생님께서 전에 출간하신 책을 읽어보니까, 선생님께선 비행사의 피를 가지고 계셨더군요. 선생님이셨다면, 그냥 휙 날아가셨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공기보다 더 무거운 걸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게 별로 내키질 않아요. 하늘 높이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세상은 너무나 조그마해서, 마치 지도가 펼쳐지는 것같이 느껴지지요. 어떨 때는 지도를 보는 것보다도 못해요. 풍경은 양떼처럼 흩어져버리고, 형태를 알 수 없는 구름 낀 산정밖엔 보이질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구체적인 것입니다. 물과 땅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 그들과 하나가 되는 것, 제가 원하는 건 그런 것입니다. (12-13쪽)

그러나 이 책의 단점을 꼽으라면, 그것은 내가 보기에 아주 치명적인 단점인데, 어린이보다는 어른을 위한 글이라는 점이다. 광고기획자나 편갈라 싸우는 사람 정도는 어린이가 읽어서 이해할만하다고 볼 수 있지만, 환경주의자나 통계학자, 지구의 문학평론가에 대한 내용을 어린이들이 읽어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오히려, 뻔한 사실을 '어린이'의 입장에서 본다는 의미의 '낯설게 하기'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말이다. 『어린왕자』와 비교해보면 그런 차이는 한눈에 보인다. 해서 결과적으로는, '지식인'과 '무식쟁이'의 경계를 허물고 '고급'과 '저급'의 갈림을 모호하게 만드는 '포스트모던'한 글쓰기로서는 어느 정도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다시 만난 어린왕자
장 피에르 다비트 지음, 김정란 옮김/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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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크게 보아 '구원의 역사'이다. 아담의 첫 범죄sin 이후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때를 거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구원'이 올 때까지의. '구원'이 있기까지는 '죄'가 있어야 하므로 성서는 또한 '죄'의 역사이다. 그러나 '죄'가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누구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다. 누구든 "신(神)이 부과한 명령을 어기는 것"이 죄라고 주장하려는 이는 '왜 카인이 십계명이 생기기도 전에 스스로를 괴롭게 해야 했는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그 '죄의 역사'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죄의 개념을 보다 명확히 하고 있다. 대개 사람들에게는 죄가 선험성Apriotät을 지니고 나타난다면,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 속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구체Konkretum'를 지니고 나타난다. 여기서 '구체'가 왜 중요한가 하면, 법과 도덕이 항용 만나는 것이 바로 이 '구체'이기 때문이다. '구체'란 늘 법과 도덕의 '반증'으로서 그것들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것들을 '시험'하여 보다 과학적이도록 만든다. 칼 포퍼의 말을 빌리자면, '구체'가 법과 도덕의 '반증가능성'이 되는 것이다. 또한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이 '구체'라는 것은 그것이 다만 개별적인 특수 체험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 소설이 가진 상징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풀어 말하면 이 소설이 법제도가 아니라 그 뿌리를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법제도를 문제삼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법제도를 대신하는 잣대로서는 종교가 가장 유력하다. 그것은 세 명의 까라마조프가 갈라지는 분수령이 바로 종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관점에서 조시마 장로와 관련된 두 가지 에피소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곧 이 소설의 종교관·윤리관과 직접적으로 닿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추악한 지경에까지 이른 장면은 너무나 뜻밖의 상황으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다. 장로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장로 때문에, 그리고 다른 사람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혀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던 알료샤는 겨우 장로의 한 팔을 부축할 수 있었다. 장로는 드미뜨리 표도로비치를 향해 걸음을 옮겼고, 그에게 다가가자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알료샤는 장로가 기력이 쇠진하여 쓰러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장로는 드미뜨리 표도로비치 앞에 무릎을 꿇더니 그의 발에 대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완전히 조아리며 분명히 의식적으로 절을 했다. 알료샤는 그가 일어날 때 부축하는 것조차 잊을 만큼 얼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장로의 입가에는 가냘픈 미소가 가늘게 빛나고 있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모든 것을 용서해 주세요!」
(140쪽)

장로는 임종하기 직전에 "어제 난 앞으로 그에게 닥칠 위대한 고난을 향해 절했던 것이란다"(504쪽)라고 알료샤에게 일러준다. 장로는 '위대한 고난'이라고 말했다. 드미뜨리가 존속살해의 누명을 쓰고 20년형을 받은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누명을 쓴 것은 '고난'은 될 수 있어도 '위대한 고난'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고난 정도는 되어야 그 말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드미뜨리의 고난 속에 그리스도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 된다.

사실 드미뜨리의 이미지는 소설 내내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이를테면 때때로 알료샤를 만나 선과 악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는 것이라든지, 누구와도 완전한 심정적 교류에 이르지 못하고 혼자서 표류하고 있다든지 하는 것은 그리스도 생애의 닮은꼴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결과적으로는 드미뜨리의 누명이 소설의 뼈대되는 줄거리라는 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드미뜨리의 누명이 단순한 누명이 아니라 '위대한 고난'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희생'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차근차근 소설을 되짚어보면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미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복음서를 인용하여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의 복음서 12장 24절"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만인의 구원'을 가져왔다면, 드미뜨리의 '희생'은 사람들에게 직관적 양심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두드러지게 받아들인 이는 알료샤다.

인간의 모든 죄를 떠맡고 그 책임자가 되십시오. 벗이여, 바로 그것이 옳은 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에 대하여 만인에 대하여 진정으로 그 책임자로서 처신한다면 그때 여러분은 그것이 진정으로 사실이며, 당신이야말로 만인에 대해, 모든 죄에 대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570쪽)

기적 따위는 일어나지 않아도 좋고, 기적이 입증되지도 않고 기대했던 일이 당장 실현되지 않아도 좋다. 하지면 어째서 이런 불명예를, 이런 모욕을 받아야 하며, 어째서 못된 수도사들이 말하듯이 <자연의 법칙을 벗어난> 빠른 부패가 일어난 것일까? (602쪽)

알료샤는 조시마 장로의 아끼는 제자였고, 그래서 소설이 시작할 때부터 이미 종교관이 정립되어 있었다. 이반에게 "반드시 논리 이전에라야만 의미를 깨닫게"(410쪽) 된다고 강조하고 조시마 장로의 연설도 꼼꼼하게 메모하는 알료샤의 모습은 종교적인 측면을 강하게 내보인다. 그는 논리 이전에 그 의미를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조시마 장로가 죽은 후, 그 시체에서 '썩는 냄새'가 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순간부터 알료샤에게서 종교적인 의무감은 사라져버린다. 처음으로 알료샤는 '왜(어째서)'라는 말을 꺼냈다. 그러나 거기에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결국은 알료샤 자신이 찾아나서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이유는, 알료샤 자신이 잘 알고 있듯이 논리가 아닌 직관을 통해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짧게는 근대주의, 길게는 계몽주의까지 포괄하는 이성(理性)주의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이성에 복속시키고 감성 등의 지표를 소홀히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국에 가서 '죄'의 문제까지를 이성 아래 위치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조시마 장로나 드미뜨리가 보기에 죄는 이성과 전혀 관계없는 것이다. 이성은 죄의 반대자이며, 죄의 은폐자이다. 이성의 입장에서 보면 죄라는 것은 오히려 쉽게 사라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죄를 충분히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논리를 두고 상대를 굴복시킬 수는 있어도 설득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성은 죄의식의 논리에 굴복당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새로운 논리를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는 이 이성주의의 최후를 소설 후반부에서 이반의 모습을 통해 볼 수 있다. 이반은 섬망증이라는 일종의 정신병을 앓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반에게 섬망증이 나타난 경위를 생각해보면, 무신론자의 이성주의가 얼마나 사상누각(砂上樓閣)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섬망증은 두말할 것 없이 이반의 죄의식에서 오는 것이다. 이반이 실제로 아버지 표도르를 죽인 사실이 없다는 것은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렇듯 직관이란 항상 논리보다 선행하기 때문에 가장 철저한 이성주의자였던 이반까지도 어쩔 수 없이 스스로의 직관에 종속적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죄는 이성보다도 마음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드미뜨리는 알료샤에게

이성의 눈에는 치욕으로 보이는 것도 마음의 눈에는 끊임없이 아름다움으로 보이니까. 그러니 아름다움은 소돔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아름다움은 소돔 속에 자리잡고 있는데, 넌 그 비밀을 알고 있니? 아름다움이란 무시무시한 것일 뿐 아니라 비밀스러운 것이란 사실은 정말 끔찍스러워. 거기에서는 악마가 신과 싸움을 벌이고 있고 그 싸움터는 다름아닌 인간들의 마음이지. (198쪽)

여기서 아름다움은 '치욕'이나 '죄'와 지나치게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이성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에 아름다움으로 비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소돔" 속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선악의 싸움터에서의 죄를 말하는 것인데, 그 싸움터란 "다름아닌 인간들의 마음"이라고 드미뜨리는 규정한다. 이 철학적인 내용은 드미뜨리가 논리적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떠올린 것이다.

그런 직관은 결국 꿈과 같은 것이다. 실제로 드미뜨리는 판결 직전에 가서 '아귀(餓鬼)'와 관련된 꿈을 꾼다. 여기서 '아귀'의 꿈을 다른 사람이 아닌 드미뜨리가 꾸었다는 점은 상당히 중요한 기능을 한다. 가령 이반이나 알료샤가 '아귀'의 꿈을 꾸었다면, 소설의 전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갔을 것임에 틀림없다.

만약 이반이 '아귀'의 꿈을 꾸었다면 그는 오히려 그것을 바탕으로 신없음을 증명하려 들 것이다. 혹은 최소한 무관심한 신(해서 쓸모없는 신)을 상정하려고 할 것이다. 또 만약 알료샤가 '아귀'의 꿈을 꾸었다면 그는 여전히 의심과 고민에 빠져 있을 것이다. 조시마 장로의 임종 이후에 알료샤가 '왜'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던졌음은 아까 지적한 바이지만, 그런 알료샤의 심경은 아직까지도 극복되지 못하고 '경험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미뜨리는 직관과 행동이 사고보다 항상 앞서는 사람이다. 드미뜨리는 그 꿈 속에서 직관적으로 "지금부터는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무언가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890쪽)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드미뜨리가 그들보다 위에 군림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자신을 나눔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일찍이 조시마 장로가 "인간의 모든 죄를 떠맡"(570쪽)으라는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드미뜨리에 이르러 몸으로 (꿈에서나마) 실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드미뜨리는 '희생'했다. 드미뜨리의 희생은 누구보다 알료샤에게 특히 의미있는 것이었다. 신의 존재와 종교의 규율에 대한 알료샤의 풀리지 않던 호기심은 드미뜨리의 희생에 이르러 말끔히 씻겨진다. 알료샤에게 모든 것은 지금껏 선험적으로 존재해왔지만 여기서부터는 경험적으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예전의 알료샤는 "어쩌면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지도 모릅니다"(393쪽)라는 식의 불명확한 모습을 보였다. 선험적으로 주어져있던 진리는 스스로를 주장하지 못하므로 항상 '의심'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 데까르뜨의 회의(懷疑)도 '방법적 회의'라고는 하지만, 그의 전존재의 고민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데까르뜨의 경우는 그래도 신뢰할 '이성'이 있었지만 알료샤는 그보다 더 막막한 지경이었다.

그러나 드미뜨리의 '희생'은 알료샤에게 모든 것을 분명하게 만들어주었다. 왜냐하면 드미뜨리는 모두가 서로에 대해서 죄인이라는 조시마 장로의 설교를 몸으로 체현해냈기 때문이다. 드미뜨리적인 몸의 진리는 조시마적인 말의 진리보다 훨씬 명확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거기서 조시마 장로가 드미뜨리에게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했던 이유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라고 봤을 때, 죄와 더불어 꼭 필요한 개념은 사랑이다. 드미뜨리와 까쩨리나가 서로 '사랑한다'고 하는 대목이나 이 소설의 또 하나의 줄기였던 꼬마들이 일류샤를 잊지 않겠다고 하는 부분은 결국 '사랑'과 연관될 수밖에 없는 몸이다. 그러나 사랑은 논리로 환원되지도, 추상으로 떨어지지도 않는 구체적인 어떤 것이다. '사랑'은 어디까지나 직관적이면서 경험적인 것이다. 여기에 와서야 얄료샤는 드디어 "그래, 우린 틀림없이 부활할 거야. 그리고 다시 만나 기쁘고 즐거웠던 지난날을 이야기하게 될 거야!"(1354쪽)라고 확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카인이 인류 첫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스스로의 직관으로 그것이 죄임을 깨달았던 것과 유사한 것이다. '죄의 역사'로서의 성서의 역사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보다 직관적이고 경험적인 역사로 바뀐 데서, 우리는 이 책이 지니는 윤리·도덕적 의의를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열린책들

Posted by 엔디
과감하게 중편이나, 장편이라도 좀더 짧게 압축시킬 수 있는 작품이다. 수많은 옛날 헐리우드 영화가 우리 눈을 어지럽히고, 그 배우들의 이름에 휘둘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그 많은 영화제목을 빼고 나면, 이 작품은 그저 옛날엔 참 좋았지 류의 과거를 아름답게 재구성하는 회고소설에 불과해질 것이다.

회고소설? 하긴 어떤 이는 이 소설을 회고소설이라고 부를 것이고 어떤 이는 이 소설을 표절에 대한 소설이라고 부를 것이지만, 이 소설은 기실 그 아무 것과도 관련이 없다. 영화가 삶의 한 부분이었던 그 당시를 애정어린 손길로 재구성해내고 있으면서도, 항상 '지금-여기maintenant-ici'를 잊지 않고있는 작가의 펜은 헐리우드 키드가 느꼈던 '고스트幽靈 현상'과는 정반대되는 방향을 가지는 것이다.

꿈을 이야기하면서 현실을 생각하는 '나'와 현실을 살면서 꿈만을 생각하는 헐리우드 키드의 삶 중에 어느 삶이 더 훌륭하다거나 위대하다거나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어째서 '나'는 현실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헐리우드 키드는 어째서 현실을 무시하지도 못하면서 애써 도외시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보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덧) 권성우 씨가 붙인 책끝의 해설은 그야말로 불필요한 해설이다. 초등학생 독후감처럼 줄거리 재구성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1993. 1. 9
안정효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민족과 문학사, 1992)를 읽다. 이 소설의 문제점은 주인공 임병석이 어떻게 '헐리우드' 방식의 삶과 '키드' 상태를 벗어나느냐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환상과 실제를 구분하지 못하여, 어른이 되어 현실의 삶을 대변하고 책임지지 않으려는 임병석이 어떻게 어두컴컴한 극장(환상과 도피)을 나와 집(현실과 책임)으로 돌아오는가 보여주는 것이 이 소설의 관건이다. 작가는 그러나 '패스티스pastiche'된 시나리오 한 편을 짜깁기해놓고 임병석을 죽이는 것으로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마감시킨다. 그러므로 임병석이 '헐리우드' 방식의 삶과 '키드' 상태를 벗어났느냐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자명해진다. '패스티시'란 '헐리우드' 특유의 문법이며, '패스티스' 자체가 아직은 예술가로 독립하지 못한 상태 즉 '키드'의 예술이겠기 때문이다.



헐리우드키드의 생애
안정효/오늘


Posted by 엔디
TAG 서평, 소설
다른 많은 판타지 소설이 그렇듯이, 리처드 애덤스의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아이들의 요구에서 시작된다. 애덤스의 아이들은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않은' 길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원했다. 아이 때는 누구나 이야기를 원한다. 삶의 언어, 언어로 표현된 삶이 인간에게 본래적인 즐거움을 가져다준다는 증거이다.

허구虛構를 뜻하는 '소설fiction'이라는 말에 환상幻想을 뜻하는 '판타지fantasy'라는 말이 덧붙여졌을 때, 그 말의 파괴력은 절정에 달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거짓'의 극한極限이다. 그런데, 놀라워라, 판타지 소설의 독자는 그 '거짓'을 '거짓' 그대로 믿게 된다. 이름에서 보자면 허구의 끝으로 달려가는 것이 판타지소설인데도 판타지소설의 독자는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아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톨킨도 그런 맥락에서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불가능한 것을 믿을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 판타지라고 정의내렸던 것이다.

『워터십 다운』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판타지다. 판타지는, 외부적인 해석 없이, 내재적으로 사실성reality을 갖는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현실 세계와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부질없을 때가 많다. 판타지를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것은, 그래서 온당치 않기가 쉽다. 그런 알레고리는 오히려 판타지의 사실성을 약화시킨다. 현실과 일대일 대응시키려는 노력 속에는 '이것은 거짓이다, 거짓이다, 거짓이다'라는 자기암시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 복잡하고도 사실적인 텍스트의 전승을 설명하면서 리얼리티를 획득했다면 『워터십 다운』은 1권 첫머리에 밝혔듯이 실존하는 장소를 배경으로 제시하면서 사실성을 갖게 된다. 더구나 토끼의 생태를 연구한 연구서를 숙독하면서 사실에 기초한 토끼들의 삶을 재구성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다 알다시피 문학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가 새로운 세계의 창조이다.

또 한편으로는 상세하고 자세하면서도 정형화定型化의 위험에 빠지지 않은 캐릭터들의 묘사에서도 사실성은 드러난다. 작가는 「서문」에서 헤이즐이 "조용하고 겸손하고 분별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운드워트가 "상냥함이나 온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토끼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의 인물 요약과는 상관없이 토끼들은 작가가 설정한 성격의 틀에서 조금씩 일탈하기도 하는데, 바로 그것이 사실성의 중요한 밑거름인 것이다.

가령 운드워트에 대해서도 4부의 43장 말미에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운드워트 장군은 스스로 생각하듯이 자신이 앞날을 내다보는 비범한 지도자인지, 아니면 해적의 용기와 교활함을 가진 폭군에 지나지 않는지 판가름할 중요한 순간을 맞이했다. 맥박이 한 번 뛰는 동안, 절름발이 토끼가 제시한 미래상이 눈앞에 환하게 펼쳐졌다. 운드워트는 그것을 이해하고 의미를 깨달았다. 하지만 곧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맥박이 한 번 뛰는 동안"의 망설임이다. 운드워트는 바로 이러한 망설임에 힘입어 폭군의 이미지를 잠시 벗을 수 있으며, 또한 이어 "그 생각을 떨쳐 버"리는 부분에서도 오히려 온정-자신을 향한-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워터십 다운』을 읽고 난 후에는 한 번 자문自問해봐야 한다. 내가 이 토끼 이야기를 진실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고. 실제로 나는 이 책을 읽고 한동안 토끼들의 행군 모습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상상 속의 토끼들은 질서정연하지도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았다. 토끼는 거기(상상 속)에 사실로 있었다.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리처드 애덤스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사계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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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도 유행을 따르는 것 같다. 아니, 내가 헤아려 보건대 출판이야말로 유행에 가장 민감한 분야 중 하나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셜록홈즈 전집이나 뤼팽 전집이 시일에 큰 차이를 두지 않고 두세 출판사에서 중복 출판된 것이 하나의 예가 될 것이며, 또 얼마 전의 '쥘 베른'의 중복 출판도 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유행은 '삼국지'다. 소설가 황석영이 『삼국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질 때 즈음하여 다른 출판사들은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섰다. 『삼국지』로 가장 많은 상업적 성공을 본 민음사나 정역正譯의 자부심이 넘치는 솔출판사의 온-오프라인 서점 마케팅은 꽤나 살벌했다. 그 와중에 나는 글 한편 '이링공 뎌링공' 만들어 '당첨'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기분은 그렇게 깔끔하고 깨끗하지 않다. '삼국지'라…. 상식적인 것부터 잠시 보자면 우리가 흔히 '삼국지'라 불리는 것은 진수가 쓴 동명同名의 역사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나관중이 각색한 『삼국지연의』를 말하는 것인데, 『삼국지연의』는 『수호지』, 『서유기』(혹은 『홍루몽』), 『금병매』 등과 함께 중국의 4대기서四大奇書의 하나다. 다시 말해 재미있는 소설작품이다. 그 안에서 삶의 지혜나 처세의 능란함을 배우기도 한다. 재미있으면서 지혜나 능란함을 배울 수 있다면 분명히 좋은 책이다. 그런데, 그것도 정도程度문제다.

다른 글에도 내가 썼듯이, 무명의 번역자가 옮긴 것이나 아동용 다이제스트판, 번역자도 표시되지 않은 '해적판' 등을 제외하고 중국문학자나 문인, 적어도 문文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의 번역만도 열을 헤아린다. 박태원, 이문열(민음사), 김홍신(대산출판사), 구용 김영탁(솔), 김동리·황순원·허윤석(박영사), 장정일(문화일보 연재), 황병국(범우사), 월탄 박종화(어문각/대현출판사), 정비석(고려원), 조성기(열림원), 연변대학삼국연의번역조(청년사)까지.

10여 개의 번역본을 헤아리면서 누구인들 한 가지 의심 하나 가지지 않을 수 있으랴. 모두가 정역正譯을 뽑내고, 자신의 『삼국지』가 진짜 '삼국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차라리 이문열은 "쓸모없는 노력의 중복"을 막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많이 반영시켜 평역評譯을 한다고 밝혔으니, 그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솔직하다고 하겠다.

황석영의 『삼국지』가 나온 것은 바로 이 시점이다. 듣자하니 창비의 수장(?) 백낙청 교수까지 황석영을 독려하여 번역작업을 진착시켰다고 한다. 입술 끝에서 씁쓸함을 느꼈던 것은 그 말을 듣고서가 아니었나 싶다.

황석영 자신도 중복출판에 대한 부담감은 그대로 떠앉지 않았을까 싶다. 모든 '삼국지' 번역자가 그러하듯이 황석영도 변명조의 역자 서문을 실었다. 역자는 말한다.

『삼국지』의 줄거리는 원래 정통역사서에서 출발해 여러 시대에 걸친 민중들의 구전설화와 재담, 연희·연극 등의 공연예술, 작가·문인들의 창작이 덧붙여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열 중에 일곱이 사실이라면 나머지 셋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이 나머지 셋이야말로 각 시대를 통해 끈질기게 이어져내려온 민중들의 꿈과 소망이 반영되어 있는 부분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보다 더욱 중요한 역사의식이다.

특히 원작자인 나관중의 정치적 입장은 당대 민중의 인의론(仁義論)과 한족 정통성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나관중은 이민족 원나라에 항거하는 농민봉기에도 가담했으며, 그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장사성(張士誠)과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천하통일의 기초가 된 조조의 위나라보다 유비의 촉한을 중심으로 줄거리가 서술되고 있는 당연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조조는 귀족이었고 손권도 강남 명문제후의 후손이었지만, 촉한의 유비·관우·장비는 물론 제갈량까지도 당대 백성들과 거의 같은 몰락한 선비거나 지방 무뢰배에 지나지 않았다. 유비가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의리를 지키느라고 여포에게 여러 차례 시달린다든가, 세력의 근거지가 될 한중땅을 단번에 차지할 수 있는데도 도덕적 대의명분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가까스로 기반을 마련하는 과정을 보면 『삼국지』가 당대 민중들과 더불어 추구하려 했던 가치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관운장이 온갖 영예를 뿌리치고 조조를 떠나 필마단기로 유비를 찾아가는 과정이나 선주 유비와의 약속 때문에 어리석은 유선을 보좌하다가 위나라 정벌을 떠나기에 앞서 제갈량이 「출사표」를 올리는 대목 등에서 우리는 뜨거운 감동과 함께 눈물에 젖는다. 그러나 인덕과 의리를 추구한 유비 삼형제와 제갈량 등의 촉한은 실패한다.

의(義)를 추구했지만 현실에서 실패하고 좌절한 영웅을 기리는 백성들의 풍조는 동서고금이 다 같은데, 일본에서는 오히려 조조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때로는 그를 중심으로 『삼국지』의 기본 줄거리를 전개하는 작품도 있다. 이는 패권과 현실에서의 힘을 추구하는 가치관에서 비롯한 것이다. 나는 저러한 이른바 '현대적 해석'에 대해서 백성들의 보편적인 염원을 훨씬 중요하게 여기는 축이다. 따라서 나는 원본의 관점과 흐름에 적극 찬동했고, 이것이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의 『삼국지』에 대한 일관된 애정의 원천이기도 하다.

고전은 무엇보다도 원문대로 전달이 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누구나 그것을 읽고 나름대로의 가치관에 따라 해석하고 비판하고 재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고전의 정신이야말로 무한한 재생산의 보고이다. 『삼국지』의 형성과정이 그렇듯이, 천여년 동안 여러 시대와 나라를 거치면서 투영된 당대 백성들의 소망이며 꿈은 역사적으로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변명과 추측이 난무하여 일관성을 결하고 있는 이 옮긴이의 말은 『장길산』작가의 번역이라는 이미지에 그야말로 밀려나고 있다. 그는 나관중이 원에 항거하는 농민봉기와 그 지도자인 장사성과 관계가 있다는 '설說'을 근거랍시고 들며 "위나라보다 유비의 촉한을 중심으로 줄거리가 서술되고 있는 당연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하고, "인의론(仁義論)과 한족 정통성"에 근거를 둔 정치적 입장을 견지했다고 하다가 유비 등이 "무뢰배"였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민중과의 유대는 황석영이 '힘'의 심볼로만 파악한 조조의 위魏나라에서 더 잘 보인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위진남북조시대'라고 부를 때, 우리는 촉蜀과 오吳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동양사학계가 '위'를 삼국의 대표격으로 본 이유는, 조비가 헌제의 양위를 받았다는 것도 작용했겠지만, 역사의 정통성을 당대 민중과의 유대와 민중을 위한 정책의 유무로 판단하기도 하는 사정 때문이다. 당시 위는 한나라 때부터 있었던 '둔전제'를 발전시킨 '전농부 둔전제'를 시행하였는데, 빈농貧農에게는 토지뿐만 아니라 밭갈이 소와 농기구, 그리고 종자까지 대여해 허창 주변에서 둔전시키기도 하였다.

더구나 인의론이란 무엇인가. 『삼국지연의』의 서두에 등장하는 '고조참백사'는 유劉씨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내포를 담고 있다. 유비가 결국 황제가 된 것도 (적어도 명분상으로는) 백성들의 열망과 염원과는 별 관계없이 그가 옛 왕족의 후손이라는 것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보편적인 염원을 훨씬 중요하게 여기는 축"이라서 나관중의 역사인식에 찬동한다는 것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무지의 소치所致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고전은 원문대로 전달되어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그의 변辨에 대해서도 우리는 충분히 반박할 수 있다. 그것은 『월탄 삼국지』나 '이문열『삼국지』'는 또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정역正譯을 표방하며 나왔고 어느 정도 인정도 받고 있는 '구용『삼국지』'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구용『삼국지』'의 비교우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럴 뜻도 없지만 그럴 능력도 없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황석영이 구용의 작품이 있음에도 새롭게 '삼국지'를 낸다면 구용의 작품에 대해서도 어떤 입장 정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황석영 삼국지에 의의가 전혀 없지는 않다. 중국 고대 인물화의 권위자라는 왕훙시의 삽화를 실었다는 점 이외에도 흔히 번역대본으로 삼는 '모종강본'을 버리고 원본인 '나관중본'을 번역텍스트로 삼았다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창작과비평사'와 같은 출판사가 『삼국지』를 출간하는 것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민음사 관계자가 "본래 영웅사관에 입각해 있는 삼국지는 '민중작가' 황석영과는 어울리지 않는 측면이 있다"고 말한 것은, 더구나 그 지면이 조선일보이고 보면, 속이 뒤틀리는 대목이긴 하지만 어쨌든 맞긴 맞는 이야기다. 『삼국지』의 원본이 여기 있는데, 창비의 원본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삼국지 1
나관중 지음, 황석영 옮김, 왕훙시 그림/창비(창작과비평사)

Posted by 엔디
"'삼국지'는 없다"고 누군가가 자신의 '삼국지' 번역본 서문에서 말했다. '삼국지'는 홍수처럼 많이 출간되지만 진짜 '삼국지'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문열, 김홍신을 대표로 하여 정비석, 박종화, 조성기는 물론이고 멀리는 박태원 가까이는 황석영까지 당대의 글쟁이와 문장가는 삼국지 번역을 한 번씩 해보려는 욕심이 있는 모양이다. 이문열이 그 서문에서 말한 의미로 "쓸모없는 노력의 중복"이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 모두는 '역자 서문'에서 출간의 변辨을 한 마디씩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출간의 변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번역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이다. 이문열은 '평역 삼국지' 서문에서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를 "거의 대역이 가능할 정도로" 모본을 충실히 따랐다고 하고 있고, 조성기는 "삼국지는 없다"고 쓰면서도 이례적으로 하나의 예외를 두고 있다. 그만큼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는 시기적으로도 선구적이지만, 내용의 충실도에 있어서도 결코 이후의 번역본에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앞선다.

솔판 『삼국지연의』의 표지를 열면 진수의 '삼국지'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는 글이 나온다.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역사'가 아니라 '역사소설'이라는 점이다. 그 조어造語는 '역사'보다 '소설'에 방점을 찍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렇다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모름지기 한 편의 문학작품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가 응당 대접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번역의 대상인 원텍스트를 아무런 가감加減없이 그대로 옮겼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가 '삼국지연의'를 하나의 문학작품이라고 보는 이상 우리는 그것의 완전성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다른 모든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삼국지연의'의 텍스트도 열려있다. 그러나 그 열림은 외부로 향한 열림이지 내부로 역류하는 열림은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삼국지'의 첫머리에 나오는 고조참백사高祖斬白蛇의 고사만 해도 그렇다. "한나라는 한 고조가 흰 뱀을 죽이고 대의를 일으킨 데서 시작하여 마침내 천하를 통일한 것"이라는 역사인식은 '삼국지연의'의 전개에서는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수의 '삼국지'와의 근본적인 차이점, 촉한정통론을 담보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당수의 다른 번역본에서는 이 중요한 부분이 삭제되어 있거나 대체되어 있다. 우리는 유비가 사금을 모아 산 차茶를 강에다 내다 버리는 유비의 어머니 이야기에 알게모르게 길들여져 있다. 이문열의 삼국지에서도 '고조참백사'의 장면은 아예 없고, 상황 설정도 무척 자의적이다.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는 '삼국지연의'의 보다 정확한 이해를 담보시켜 줄 것이다. 그것은 어지러운 홍수의 흙탕물 속에 하나의 정수가 되어 줄 것이다.

삼국지연의 1
나관중 지음, 김구용 옮김/솔출판사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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