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많은 판타지 소설이 그렇듯이, 리처드 애덤스의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아이들의 요구에서 시작된다. 애덤스의 아이들은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않은' 길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원했다. 아이 때는 누구나 이야기를 원한다. 삶의 언어, 언어로 표현된 삶이 인간에게 본래적인 즐거움을 가져다준다는 증거이다.

허구虛構를 뜻하는 '소설fiction'이라는 말에 환상幻想을 뜻하는 '판타지fantasy'라는 말이 덧붙여졌을 때, 그 말의 파괴력은 절정에 달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거짓'의 극한極限이다. 그런데, 놀라워라, 판타지 소설의 독자는 그 '거짓'을 '거짓' 그대로 믿게 된다. 이름에서 보자면 허구의 끝으로 달려가는 것이 판타지소설인데도 판타지소설의 독자는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아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톨킨도 그런 맥락에서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불가능한 것을 믿을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 판타지라고 정의내렸던 것이다.

『워터십 다운』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판타지다. 판타지는, 외부적인 해석 없이, 내재적으로 사실성reality을 갖는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현실 세계와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부질없을 때가 많다. 판타지를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것은, 그래서 온당치 않기가 쉽다. 그런 알레고리는 오히려 판타지의 사실성을 약화시킨다. 현실과 일대일 대응시키려는 노력 속에는 '이것은 거짓이다, 거짓이다, 거짓이다'라는 자기암시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 복잡하고도 사실적인 텍스트의 전승을 설명하면서 리얼리티를 획득했다면 『워터십 다운』은 1권 첫머리에 밝혔듯이 실존하는 장소를 배경으로 제시하면서 사실성을 갖게 된다. 더구나 토끼의 생태를 연구한 연구서를 숙독하면서 사실에 기초한 토끼들의 삶을 재구성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다 알다시피 문학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가 새로운 세계의 창조이다.

또 한편으로는 상세하고 자세하면서도 정형화定型化의 위험에 빠지지 않은 캐릭터들의 묘사에서도 사실성은 드러난다. 작가는 「서문」에서 헤이즐이 "조용하고 겸손하고 분별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운드워트가 "상냥함이나 온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토끼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의 인물 요약과는 상관없이 토끼들은 작가가 설정한 성격의 틀에서 조금씩 일탈하기도 하는데, 바로 그것이 사실성의 중요한 밑거름인 것이다.

가령 운드워트에 대해서도 4부의 43장 말미에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운드워트 장군은 스스로 생각하듯이 자신이 앞날을 내다보는 비범한 지도자인지, 아니면 해적의 용기와 교활함을 가진 폭군에 지나지 않는지 판가름할 중요한 순간을 맞이했다. 맥박이 한 번 뛰는 동안, 절름발이 토끼가 제시한 미래상이 눈앞에 환하게 펼쳐졌다. 운드워트는 그것을 이해하고 의미를 깨달았다. 하지만 곧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맥박이 한 번 뛰는 동안"의 망설임이다. 운드워트는 바로 이러한 망설임에 힘입어 폭군의 이미지를 잠시 벗을 수 있으며, 또한 이어 "그 생각을 떨쳐 버"리는 부분에서도 오히려 온정-자신을 향한-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워터십 다운』을 읽고 난 후에는 한 번 자문自問해봐야 한다. 내가 이 토끼 이야기를 진실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고. 실제로 나는 이 책을 읽고 한동안 토끼들의 행군 모습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상상 속의 토끼들은 질서정연하지도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았다. 토끼는 거기(상상 속)에 사실로 있었다.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리처드 애덤스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사계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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