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는 없다"고 누군가가 자신의 '삼국지' 번역본 서문에서 말했다. '삼국지'는 홍수처럼 많이 출간되지만 진짜 '삼국지'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문열, 김홍신을 대표로 하여 정비석, 박종화, 조성기는 물론이고 멀리는 박태원 가까이는 황석영까지 당대의 글쟁이와 문장가는 삼국지 번역을 한 번씩 해보려는 욕심이 있는 모양이다. 이문열이 그 서문에서 말한 의미로 "쓸모없는 노력의 중복"이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 모두는 '역자 서문'에서 출간의 변辨을 한 마디씩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출간의 변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번역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이다. 이문열은 '평역 삼국지' 서문에서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를 "거의 대역이 가능할 정도로" 모본을 충실히 따랐다고 하고 있고, 조성기는 "삼국지는 없다"고 쓰면서도 이례적으로 하나의 예외를 두고 있다. 그만큼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는 시기적으로도 선구적이지만, 내용의 충실도에 있어서도 결코 이후의 번역본에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앞선다.

솔판 『삼국지연의』의 표지를 열면 진수의 '삼국지'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는 글이 나온다.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역사'가 아니라 '역사소설'이라는 점이다. 그 조어造語는 '역사'보다 '소설'에 방점을 찍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렇다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모름지기 한 편의 문학작품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가 응당 대접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번역의 대상인 원텍스트를 아무런 가감加減없이 그대로 옮겼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가 '삼국지연의'를 하나의 문학작품이라고 보는 이상 우리는 그것의 완전성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다른 모든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삼국지연의'의 텍스트도 열려있다. 그러나 그 열림은 외부로 향한 열림이지 내부로 역류하는 열림은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삼국지'의 첫머리에 나오는 고조참백사高祖斬白蛇의 고사만 해도 그렇다. "한나라는 한 고조가 흰 뱀을 죽이고 대의를 일으킨 데서 시작하여 마침내 천하를 통일한 것"이라는 역사인식은 '삼국지연의'의 전개에서는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수의 '삼국지'와의 근본적인 차이점, 촉한정통론을 담보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당수의 다른 번역본에서는 이 중요한 부분이 삭제되어 있거나 대체되어 있다. 우리는 유비가 사금을 모아 산 차茶를 강에다 내다 버리는 유비의 어머니 이야기에 알게모르게 길들여져 있다. 이문열의 삼국지에서도 '고조참백사'의 장면은 아예 없고, 상황 설정도 무척 자의적이다.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는 '삼국지연의'의 보다 정확한 이해를 담보시켜 줄 것이다. 그것은 어지러운 홍수의 흙탕물 속에 하나의 정수가 되어 줄 것이다.

삼국지연의 1
나관중 지음, 김구용 옮김/솔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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