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먼저 가만히 작고 어두운 영화관 하나를 떠올려보자. 시인 기형도가 죽었다던 허름한 종로의 극장도 좋고, 사람들이 데까메론을 알건 모르건 매년 그해의 '보카치오'를 동시상영으로 마구 틀어댔던 동네의 3류 극장도 좋다. 예술영화를 자주 틀어주는, 그래서 관객은 별로 없는 조용한 극장도 괜찮다. 사실 꼭 작고 어두운 극장일 필요도 없다. 푹신푹신한 의자에 음료 거치대까지 있는 최신식 멀티플렉스 영화관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내가, 당신이, 그리고 사람들이 영화를 본다는 것이다.

자, 영화가 끝났다. 영화란 건 늘 금세 끝나는 법이니까.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대다수 극장에서는 환하게 불도 켜준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어디로? 세상으로. 커다란 박스 속에 들어가 한두 시간을 어둠 속에 머물며 주인공과의 삼투현상을 경험했던 우리는 이제 다시 '나'로 돌아온다. 문득 궁금하다. 내가 잠시 사라진 동안 세상에는 별일이 없었나?

우리가 극장에 있는 그 한두 시간 동안 어쩌면 어머니는 감기에 드셨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는 눈이 더 침침해져 돋보기 안경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누이는 어디선가 휴대폰을 잃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시간 동안 대통령이 유명을 달리했을지도 모르고, 크레인에 올라갔던 한 노동자가 실신했을지도 모른다. 어딘가 요정에서는 정치인들의 킬킬거리는 소리가 새나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미국의 군대가 어느 민간인과 언론을 향해 총질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두운 극장 속에 있는 그 사이에.

출구없는 극장#

사건과 사고의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우리가 극장을 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래서도 안 되거니와 그럴 수도 없다; 우리는 누구나 극장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는 델리스파이스와 함께 출구 없는 극장을 노래하고 있다:

오 오 오 너는
오 오 오 너는
생의 무대 위 안락의자에 고양이처럼
차갑고 초연한 고양이처럼 앉아있지
출구 없는 극장 안에, 출구 없는 극장 안에

수많은 영화들 지나가네
웃기고 슬프고 외롭고 힘들고 대답없는
그런데 이 어두운 극장 밖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오 오 오 너는…
오 오 오 너는…

이를테면, 우리는 누구나 출구 없는 극장 안에 앉아 있다. 웃긴 영화와 슬픈 영화를 번갈아 보지만, 그것들 대부분은 우리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아침 지하철에서 봤던 신문지를 모으는 할아버지와 지하도 입구 앞에 앉아 손을 벌리고 있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장애인 사내를 보고서도 그저 '뻔하게 슬픈 영화로군' 하고 중얼거릴 뿐이다. 우리가 이 습한 극장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안 그랬을는지도 모른다. 지팡이를 짚고서 객차를 오가는 사람을 보고서도 조금쯤 눈물을 흘리고, 제 부모를 졸라 천원 한 장이라도 그 가벼운 바구니에 넣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기억은 모두 사라져 알 수 없다. 그 젖은 필름만 기억 속에 남아 이젠 거의 외울 수도 있을 정도가 됐다, 시인 김혜순이 「달력공장 공장장님 보세요」에서 "이 음악은 이제 너무 들었어요 지겨워요 / 열두 곡이 다 흐른 다음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잖아요?"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딱하지만, 나와는 관계 없는 영화들이다. 달력의 배경사진 같은 영화들.

하지만 순간 우리는 얼마간 외로워진다. 가령 어느날 지하철에 서 있던 나에게 급성위경련이 찾아왔다. 그래, 앉으면 조금쯤 안정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앞에 앉아있는 아저씨는 나에게 관심조차 없다. 입속에서는 역한 침이 나온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화장실로 뛰어간다. 요컨대 내가 만든 영화도 결국 그렇고 그런 영화일 뿐이었던 것이다. 다 보고 나서도 별로 기억나는 장면도 없는 영화 말이다. 아무리 내가 떠들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그제서야 이 극장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출구는 없다.

그제서야 문득 궁금하다: 그런데, 이 어두운 극장 밖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한국에서의 학살#

참, 그렇지. 바깥에서는 학살이 있었다고 했어. 삐까쏘Picasso라든가 황석영, 이런 사람들이 그런 소문을 전했지. 삐까쏘는 「한국에서의 학살」로, 황석영은 『손님』으로. 신천 대학살이라고 했어. 처음엔 조금 놀랐고, 다음에는 의심했고, 이어 분노했지만, 곧 평온을 되찾았어. 그건, 그래, 예술성 짙은 좋은 영화였을 뿐이니까.

생각난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그 표현주의적인 면모가 뛰어났지. 「1808년 5월 3일」이라는 고야의 그림과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이란 마네 작품의 구도를 그대로 가져왔고. 마침 그러고보니 삐까쏘는 공산주의자였다지.

『손님』은 또 어떻고. 종래의 리얼리즘을 재편하겠다며 다성성多聲性을 들고 나온 황석영의 역작이었어. 다성성이란 건 그러니까 러시아의 문학평론가 바흐찐이 도스또예프스끼 시학에서 얘기했던 건데, 뭐 등장인물들이 작가의 목소리를 대변하기도 하고 작가에게 대들기도 하는 여러 목소리를 가진 거라고 하던가. 영어로는 폴리포니polyphony. 근데 『손님』을 읽어보니 꼭 그렇지도 않던걸. 여러 사람이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다 똑같은 말만 하던걸. 종래의 리얼리즘을 바꾼다는 황석영의 말을 차치하고, 어쨌든 좋은 작품이었지. 그러고보니 황석영은 북에도 갔다왔잖아. 내 기억이 맞다면,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벌건 표지의 책도 한권 냈을걸.

하지만 어쨌거나 이런 것들은 다들 옛날 얘기만 하잖아. 이젠 시대가 달라진 거 아니야? 극장 바깥은 아직도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뭐? 학살이 또 있었다고?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그래. 그러고보니 들은 적이 있었던 것도 같아. 하지만 이젠 학살이 하나 더 있고 덜 있고 간에 상관이 없는 그런 지경 아니야?

학살은 아우슈비츠에서도 있었고, 킬링필드에서도 있었어. 남미나 아프리카 같은 데선 한때 거의 일상적이었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원자폭탄도 떨어졌다구. 그리고 사실 빈민가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은 학살이 상시화된 거 아니야? 수많은 학살 가운데 하나가 더 있다고 해서 지금 무슨 차이가 있냐구.

작은 연못#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의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 위에 떠오르고
여린 살이 썩어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죠

하지만 학살로 사람들이 죽었어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죽었어요. 가끔씩 티격태격 다퉜고, 때로는 서로 흉도 보고 비웃기도 했지만, 그래도 함께 살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었어요.

순진하게 미군을 믿다가 죽고, 탈출하다 죽고, 말이 안 통해 죽고, 갓난 아이는 그저 울다가 죽고…….

지금껏 우리의 슬픔을 얘기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어요. 누구는 그럴리 없다고 했고, 누구는 전쟁 통이니 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했어요.


그래놓고, 이제와 또다시 전쟁을 하자고 해요. 우리를 죽인 사람들이 우리편이고, 우리를 구해준 사람이 적이래요.

그럼 우리는 누구인가요? 누가 우리인가요? 우리는 적인가요? 적은 우리인가요?

극장 밖#

비로소 출구가 열렸다.

어두운 극장을 나서서 바깥 세상으로 나왔다.

어떻게 나왔을까, 지금까지는 왜 출구가 안 보였을까.

바깥 세상은, 그러나, 극장 안과 마찬가지로, 어둡다.

지금이 몇 시인지 모르겠다, 사람들마다 다르게 말했다.

한 노인은 지금이 상쾌한 아침 10시라며 기지개를 켰고, 어떤 정치인은 지금은 새벽 5시임을 확신한다고 했다.

토끼를 키운다는 작가들은 지금이 25시라고 입을 모았고, 커다란 벽시계는 밤 11시5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문득 손목시계를 보니 뉴스를 할 시간이었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Posted by 엔디
US border fences 'an eco-danger'

미국에서 멕시코와의 국경선을 따라 담fences을 쌓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 담은 700마일(1125킬로미터)에 이르고, 센서나 강한 빛 등의 첨단 감시 장치도 달려 있을 거라는 것이다. 멕시코 환경부는 이 행동이 국경지대의 생태를 파괴한다고 반발했다. 그 국경지대 중에는 소노라Sonora 사막과 같이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막 생태계도 포함된다고 한다. 멕시코 정부는 이 건으로 국제 사법 재판소에의 재판 회부도 준비중이다.

전문가들과 미국·멕시코 양국의 생태 활동가들이 멕시코 정부를 위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그 담이 동물들을 보다 작은 그룹으로 묶게 되어 유전적 다양성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이다. 재규어나 멕시코 흑곰, 영양의 일종인 소노라 가지뿔영양Sonora Pronghorn이 영향을 받는 동물들에 포함된다.

보고서는 환경적인 데미지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녹색 회랑green corridors"을 제안했는데, 이것은 길 없는 황무지를 만들어 사람들은 쉽게 오가지 못하지만 동물들은 자유로이 오갈 수 있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다른 제안으로는 선인장을 통해 '살아 있는' 울타리fences를 만들자는 것과, 물이나 벌레, 꽃가루 등이 투과할 수 있는 담을 만들자는 것 등이 있었다.

하지만, 미국 국토안보부 장관 마이클 처토프Michael Chertoff는 담장화가 필요하다고 답했고, 리오 그란데 강이 적절한 장벽이 되어 준다는 논리를 일축시켰다고 한다.
Posted by 엔디

1

어린 시절, 누구나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살아있다고 믿는다. 내가 자고 있을 때 내 장난감들이나 인형이 살아 움직일 것이라는 상상력은 상당히 많은 동화나 만화의 기본적인 설정으로 되어 있다. 특히 철강과 거대 기계가 찬양받던 지난 세기에는 일단 무엇이든 로봇으로 변하는 독특한 생각이 만화영화의 기반 상상력이 되었다. 전투기나 탱크에서 라이터까지 로봇으로 변신했고, 초능력으로 불러내는 존재도 귀여운 여자친구나 다정한 말벗이기보다는 로봇이었다.

언젠가부터 만화 영화들은 거대 로봇 만들기를 그쳤다. (아마도 일본) 경제에서 '중후장대重厚長大' 시대가 가고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시대가 온 탓이다. 워크맨이라고 불리는 소형 카세트라디오가 그 신호탄이었다면 작고 가벼운 mp3 플레이어와 얇은 휴대전화는 나름대로 그 문화의 첨단이라고 할 만하다.

영화 《트랜스포머》가 나온 건 그 시점이다. 이 영화는 나오자마자 '키덜트 무비kidult movie'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변신 로봇이 나오는 영화가 어째서 '키드 무비kid movie'가 아니라 '키덜트 무비'일까.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간단하다: 경박단소 키드의 머릿속에는 저런 변신로봇이 없기 때문이며, 장난감으로 이제 자동차를 소유한 '마이카my car' 족들을 명백한 타겟으로 정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엉뚱하게도 나는 이 영화에서 미국의 정신을 좀 찾아보고 싶다. 250년 동안 미국을 키운 건 '팔할'이 강철왕 카네기와 자동차왕 포드였고, 미국이 경제 대국이 된 것은 유럽 대륙의 큰 전쟁에 군수 기계와 물자를 대면서였던 것이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일본은 자동차와 전투기로 변신하는 로봇 '트랜스포머' 장난감을 만들어 거대 시장 미국에 팔았던 것이다. 영화 속에서 "분명히 일제일 거야."라는 대사가 있다.) 그래서 이들 '트랜스포머'와 미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각별한 사이가 되어 있다.

2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은 주술 신앙이다. 주술 신앙은 합리주의와도 다르고 마법과도 크게 다른데, 근본적으로 상대를 대화의 대상으로 여기고 하나의 인격으로 대한다는 점이 바로 차이점이다. 가령 우리가 시계를 사서 손목에 차고 다니면서, 그것을 시각을 알려주는 기계라고만 생각해버리면 우리는 일종의 합리주의적 사고를 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시계를 자신의 종이나 거래의 당사자로 여기고 시계에게 주문spell을 외거나 시계--또는 시계(시간)의 신--에게 영혼을 판다면 우리는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주술은 대상을 신이나 대화 상대자로 여기는데 기우제를 지낼 때 하늘에 대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기도를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트랜스포머》에서 나타나는 주술 신앙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일어나는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범블비가 아직 로봇이 되기 전, 샘 윗위키가 미카엘라를 태우고 가다가 멈추는 상황에서 그렇다. 윗위키는 자동차에게 부탁ask을 한다: 제발 움직여라. 범블비는 그 부탁에 반응하고, 그래서인지 그날의 데이트(?)는 꽤나 성공적이게 된다. 누구나 한두 번쯤 겪음직한 이 일은 이 영화가 근본적으로 주술적인 신앙에 기대고 있다는 증거로 꽤나 중요한 것이다. ('고물차' 운운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3

'태초'라는 낱말로 시작되는 텍스트는 언제나 그만큼의 무게와 부담감을 갖게 마련이다. 그런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신앙심이 강한 사람이거나 어린 아이다. 이 이야기는 어린 아이 같은 감성과 똑 그만큼의 지성을 갖춘 윗위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 속에 아직도 미국을 닮아가려는 욕망이 있다. 특히 거대한 군수 기계들이나 자동차를 보면서 미국의 힘에 혀를 내두르는 일은 적지 않다. (MS나 구글, 애플과 같은 회사에 대한 동경은 좀 별개의 문제이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일종의 미국교에 대한 영화이다. 미국은 이 영화를 통해 자동차를 비롯한 많은 기계가 자신들로부터 만들어졌다고 공포한다. 거대화, 대형화라는 미국의 이데올로기가 여기서 주술 신앙으로 바뀌어 사람들에게 이식되는 것이다.

Posted by 엔디
창비주간논평


언젠가 나는, 마이클 무어의 《화씨911》을 보면서, 공화당이 불만이면 민주당, 민주당이 불만이면 공화당으로 갈 수밖에 없는 미국인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두 정당으로부터 '표밭'으로만 인식되지 '국민'이나 '시민'으로 인식되는 것 같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공화당에게 실망한 미국인들이 민주당으로 몰려드는 모습은 마치 레밍쥐들의 이동 같았다.

하지만 한국의 실정은 또 어떤가. 내 보기에 한국의 정당 정치에는 전통이라는 게 없다. 김수영은 "전통傳統은 아무리 더러운 傳統이라도 좋다"고 했는데, 한국의 정당 정치에는 그 전통이라는 것이 도무지 없다. 말장난을 하자면, 전통이 없다는 것이 전통일 정도다.

여당은 야당을 끌어모아 합당하거나 표지갈이만 한 신당을 창당하고, 대통령은 어느 사이 그 신당에 참여하지만 임기 말이 되면 어김없이 탈당이라는 절차를 거친다. 그 모든 과정의 목적은 단 하나: 책임회피다.

가령 지금의 한나라당이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에서 이어지는 독재정권의 계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지금의 한나라당에게 12.12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한나라당이 12.12의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좀더 정교한 정치적·역사적 분석을 필요로 할 것이다. 다만, 앞으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면피하려는 정치 세력에 대해서는, 우리가 시민으로서 대처해야 마땅하다는 것뿐이다.

열린우리당은 워낙 기움투성이의 정당이라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면 쪼개질 것이라는 예상이 컸고, 한나라당 역시 이념적 스펙트럼이 너무 넓어 당내 불화도 상당한 만큼 어떤 계기를 만나면 이합집산할 공산이 크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기대는 역시 확실한 정책을 가진 이념 정당이다.

이념 정당은 확실한 색깔이 있는 만큼 그 특성상 당의 간판을 바꾸더라도 책임을 회피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이념 정당은 자신의 이념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개발에 매진하게 되어 있다. 이념이라는 '원칙'이 있기 때문에 쉽사리 포퓰리즘에 빠질 염려도 없다.

무엇보다도 이념이란 단순한 '정권 창출'보다는 호흡이 길어 전통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정당의 목적은 단순한 '정권 창출'이 아니다. 정당의 목적이 '정권 창출'이라면 왜 모든 정당을 다 하나로 합당하지 않을까? 그것은 정당의 목적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정권을 창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상당히 오랜 기간 정권 창출의 신화를 이룬 독일 녹색당이 창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전통을 가꿀 수 있는 것은 확실한 정체성 때문이다.

미국은 공화당과 민주당 단 두 정당밖에 없지만, 두 정당이 확실한 이념적 정체성을 가지고 스펙트럼을 나누어 점유하고 있다. 어쩌면 미국인들을 그토록 단순하게 평가한 내가 레밍쥐처럼 사고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인들은 한 정당이 싫어지만 다른 정당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두 이념 중에서 취사선택하여 장점을 뽑으려고 긴 세월동안 노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Posted by 엔디
TAG 미국,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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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무어Michael Moore의 «화씨 911»은 다 알다시피 깐느에서 처음으로 황금종려상la palme d'or을 받은 첫 기록documentaire 영화다. 드림웍스의 야심작 «슈렉»조차 빈 손으로 돌려보낸 '오만한' 깐느가 선택한 기록 영화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그 속에 엄청나게 극적인dramatique 폭로가 있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만들 정도일까. 혹은 이라크 침공의 도덕적·절차적 문제를 조목조목 파고들어 부시 대통령이 직접 그 영화를 보더라도 승복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을까.

아니다. 이 영화에 가득찬 것은 반어와 풍자다. 여러 번 기사화된 무어 감독의 발언에서 짐작할 수 있는 그의 비판방식 그대로를 이 영화에 담은 것이다. 그리고, 그 비판방식은 사실 길고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에서 몰리에르를 거쳐 지금까지 내려온 이 흥미로운 양식은, 그러나 신뢰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것이니, 꼭 민감한 폭발물같은 것이다. 가령 우리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에 동의하기 힘든 것이다.



무어 감독은 여기서 20세기 후반 이후에야 생각해낼 수 있는 방법-비디오 편집을 사용하는데, 이것이 특히 미국의 대통령과 행정부에 대한 비판에 무척 적절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보이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찍은 수많은 홍보비디오나 기자회견, 국무위원들의 답변, 보좌관의 발언, 국제회의에서의 주장 등의 자료 수집은 그 자체로 비판의 일부로 기능했다. 왜냐하면 부시 행정부가 너무도 자주 말을 바꾸고 있음을, 그 자료는 여실如實히, 아니 사실 그 자체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 풍자 양식은 ‘그들’의 양복에 담긴 권위주의적 신뢰성을 무너뜨리는 데도 상당부분 공헌하고 있다. 양복을 입은 채 기자회견실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signifié와 상관없이 어떤 특정한 모양signfiant을 갖는다. 우리에게 신뢰감을 주는 것은 그 모양이다. 그러므로 권위주의적인 그 모양을 깨기 위해서는 그 내용을 특정한 발화상황과 떼어놓고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풍자는 여기서 큰 힘을 발휘한다.

이상하게도 실패하지 않았던 사업가로서의 조지 W. 부시와 미국의 대통령으로서의 조지 W. 부시 사이의 '유착관계' 역시 감독이 공들여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는 의혹제기 수준이므로 결코 성공적이랄 수는 없다. 풍자 영화는 바로 이런 부분에서 조심해야 한다. 부시 반대파들끼리 웃고 즐기려고 영화를 만든 게 아니라면, 이건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설득은 오히려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건 이 영화의 장점이자 약점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이라크전 참전 군인들에 대한, 그리고 이라크전 전사자의 가족들에 대한 인터뷰다. 이 인터뷰들은 상당히 감정적이어서 감독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조차도 스스로의 입장을 지킬 수 없게 만드는 면이 있고, 더구나 거대담론에 흡수되어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을 개개인의 이야기를 영화를 통해 복원해서, 보다 삶에 밀착한 관점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더구나 그것이 부시의 관점이 아니라는 점까지도 말이다. “부모나 형제, 또는 친척을 잃는 슬픔이 어떤 것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 ……슬프군요it pains me.”

그러나 이 영화의 기법과 방식은 무척 단순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영화에 관심이 많은 대학생들조차 돈만 있다면 만들 수 있는 수준의 영화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의 이 평가가 이 영화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는 내 스스로의 평가를 보며 오히려 대학생들의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대학생 때의 정신으로 돌아간다면. 무어 감독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이 영화는 내게 내가 오래 간직하고 싶은 대학생 정신l’esprit universitaire을 생각나게 하는 영화였다.

덧. 이 영화에서 가장 가슴아픈 부분은, 미국의 ‘대량살상무기’에 의해 숨진 이라크 아기의 모습도, 전사한 미군의 모습도 아니다. 세계무역센터 빌딩의 희생자도, 희생자 가족도 아니다. 전쟁에 참전해 전쟁의 실상을 알게 된, 스스로를 오랫동안 공화당지지자였던 사람이라고 소개한 한 상이 군인이, 앞으로는 민주당 열성당원이 되겠다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기자에게 다짐하는 부분이었다. 그에게는 그 둘 외에 다른 선택이 없는 것이다. Où se trouve la démocratie?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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