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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됨'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이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기독교는 위험하다. 그리스도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언급했던 것은 두 사랑의 계명, 곧 여호와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사도 요한은 한 편지에서 다소 충격적인 발언을 한다(요일 4:20):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흔히 이웃 사랑에서 자주 인용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배울 필요가 있다. 도움이 필요한 소외된 자를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모범이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인이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돈을 스스로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여호와의 것 혹은 최소한 공동체의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정치가 한정된 재화를 어떻게 나누는가를 정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때, 기독교의 정치는 그 재화가 본래 여호와로부터 온 것이라는 철저한 인식 속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1. 기독교와 사유재산

쟝 깔뱅은 그리스도인의 사유재산을 포함한 여러 가지 자유를 인정했다. 모든 신자가 수도원의 탁발승처럼 살 필요는 없고, 각자 자신이 있는 곳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소중한 소명이며, 그로써 정당하게 번 재산은 신의 선물이라는 것이다(Calvin 1994, 332):

분명히 상아나 금이나 재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것이며,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허용되고 지정받기까지 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웃거나 배부르거나, 옛 조상의 재산에 새 것을 더하거나, 혹은 아름다운 가락을 즐기거나 포도주를 마시는 것들을 결코 금지당한 적이 없다.

이에 따라 막스 베버가 '독특한 부르조아 경제윤리'라고 부른 기독교 경제 윤리가 탄생한다(Weber 1987, 242-243):

그리하여 하나의 독특한 부르조아 경제윤리가 출현한 것이다. 부르조아 기업가는 신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 서서 그의 축복을 받고 있다고 느끼며, 그가 형식적인 올바름의 틀을 지키는 한, 그리고 그의 도덕생활이 깨끗하며 그의 재산이 온전하게 사용되는 한 금전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며, 또한 그가 그렇게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기독교의 측면에서 보면 그 사유재산이라는 것 역시 '나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을 맡아두고 있다는 의식이 중요하다. 이런 의식의 발전된 형태로 사도행전이 보고하는 위대한 기독교 공산주의 혁명을 들 수 있을 것이다(행 2:44-45; 4:32):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행전 1장은 다락에 모인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12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2장에서 성령이 임한 오순절 사건 이후 41절은 3000명의 제자가 늘었다고 보고 하고 있으며, 4장에서 말씀을 들은 자 가운데 5000명의 남자가 새로 믿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 당시에는 성인 남자만 세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보수적으로 잡아도 족히 2만 명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만 명의 공동체가 사유재산 없이 서로 필요에 따라 물건을 통용했던 것이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의 정치라면 이 정도의 이상은 꿈꾸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자본주의의 시대를 접고, 기독교 공산주의의 시대로 나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한국의 깔뱅주의 프로테스탄트라면 재산과 관련해서 세속 법이 규정하는 것 이상으로 엄격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가령 깔뱅 역시 사유재산은 인정했지만 무차별적인 재산권 행사의 자유는 그르다고 보았으며, 이자利子는 인정했지만 무차별적인 취리는 옳지 못하다고 보았다(손봉호, 칼빈의 사회 사상).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물론이고, 첫 내각의 상당수가 재산과 관련하여 엄청난 비리가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대학 등록금도 없던 이명박 대통령의 가계는 현대건설을 거치면서 믿을 수 없을 만큼 탄탄해졌다. 개발독재 시대의 건설사에 몸담고 있으면서 땅값의 시세차익으로 얻어진 부다. 그는 이 부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대통령 후보시절 선언했지만,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면 지키려는지 아직까지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한 장관 내정자는 땅 투기 의혹에 "땅을 사랑했을 뿐 투기는 아니다"라는 군색한 변명을 내밀었고, 다른 장관도 투기 의혹이 불거지자 한겨울에 트렉터를 끌고 밭을 가는 쇼를 했다. 굳이 헌법에 명시된 '밭 가는 자가 밭을 소유한다耕者有田'는 원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앞서 희년과 나그네됨: 이명박과 예레미야서 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런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율법 규정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수많은 노동자가 다치고 죽어가는 상황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명시적으로 부자를 위한 정치, 기업가를 위한 정치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 당선자 시절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전경련이라는 점이나, 최근 기업가들을 위한 직통 핫라인을 개설한 점 등만 봐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점이다. 이 땅의 나그네들을 소외시키고, 재산을 여호와의 것이 아니라 기업가의 것 혹은 자신의 것으로 고착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요컨대, 이명박이 펴려는 정치는 단순히 가진 자의 정치나 우파의 정치는 될 수 있어도 그리스도인의 정치라고는 결코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기대에 훨씬 못미쳤을 망정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가 (그들 자신의 종교와는 관계 없이) 그나마 더 여호와의 뜻에 합당한 정치였다.


2. 이명박과 예레미야서

많은 교회가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선거 과정에서 알게 혹은 모르게 이명박을 지지했고,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감사 기도를 드린 곳도 많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적籍을 두고 있는 소망교회에서는 주일 낮 예배에 "이명박 장로를 대통령에 당선시켜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올리고, 매주 수요일에 이명박 대통령의 성공을 기원하는 기도회가 열린다(『한겨레21』 제699호).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생략된 것은 이명박이 과연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냐 하는 평가와 과연 항상 그리스도인이 대통령이 되는 것만이 여호와의 뜻인가 하는 판단이다. 이명박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인가 혹은 그의 정부가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정부인가 하는 문제의 해답은 앞서의 절을 통해서 어느 정도 밝혀졌다고 보고, 과연 항상 그리스도인이 대통령이 되는 것만이 여호와의 뜻인가 하는 판단에 대해서 살펴보자.

선지자 예레미야는 분열왕국 남유다가 망하는 것을 지켜본 예언자이다. 슬픔 가득한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언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남유다가 망할 것이며 다윗의 왕위가 폐하여질 것이고, 여호와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무너지리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예레미야가 남유다의 백성들에게 권고한 것은 여호와의 도성을 지키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바빌로니아에 항복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라는 것이다(렘 27:8-10).

그러니 바빌론 왕이 씌워주는 멍에를 메어라. 그 왕 느부갓네살을 섬겨라. 그러지 않는 민족과 나라가 있으면, 나는 그 민족을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벌하여서라도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주고 말 것이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너희의 예언자들과 박수들과 해몽가들과 점쟁이들과 마술사들이, 우리가 바빌론 왕을 섬기게 될 리 없다고 하더라도 곧이듣지 마라. 그자들이 하는 예언은 거짓이다. 그 말을 듣다가는 고향을 멀리 떠나게 되며, 나에게 쫓겨나 망하고 말 것이다.

남유다의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았고, 다윗의 왕위가 공고하리라는 거짓 예언만을 믿었다. 그러나 패역하고 여호와의 뜻에서 돌아선 남유다의 왕좌는 유지되지 못하였고, 바빌로니아에 결국 멸망하고 만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유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여호와가 그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구약의 세계관에서 바빌로니아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여호와는 바빌로니아의 왕을 종從이라고 부르며, 유다가 영원히 망할 것이 아니라 70년 후에 귀향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기도 하다(렘 25:9, 12):

나는 내 종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을 시켜 북녘의 모든 족속들을 거느리고 쳐들어와 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 주위에 있는 모든 민족을 전멸시키고 이 땅을 영원히 쑥밭으로 만들게 하리라. 사람마다 그 끔찍한 모습을 보고 빈정거리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 그 칠십 년이란 시한이 차면 나는 바빌론 왕과 그 민족의 죄를 벌하여 바빌론 땅을 영원히 쑥밭으로 만들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적어도 당시 남유다에게 있어서는 다윗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아니었고, 죄악의 상징 바빌로니아가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느 대통령 후보가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혹은 장로라고 해서 앞뒤 재지 않고 그에게 표를 주는 몰지각한 시민의식이 여호와의 관점에서도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태도는 솔로몬처럼 선과 악을 분별할 지혜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가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서는 안 되고, 여호와의 뜻에 합당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이 부분을 혼동하면 예레미야 시절의 남유다 백성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게 되고 만다.


보유

이명박 장로는 결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절차와 의혹이야 어떻든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이것 역시 여호와의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체념하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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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손봉호. '칼빈의 사회 사상'. 실린 곳: http://lloydjones.org.
Calvin, Jean. 1994. 『기독교 강요(초판)』. 12판. 세계기독교고전14. 양낙흥 옮김. 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
Weber, Max. 1987.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학술총서1. 박종선 옮김. 서울:두리.

Posted by 엔디

성경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므두셀라다. 이 땅에서의 수명에 대해 관심이 많은 우리 인간들은 므두셀라에 대해 참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사실 창세기를 들여다보면 창세기 기자記者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창 5:21-27):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다음 삼백 년 동안 하느님과 함께 살면서 아들딸을 더 낳았다. 에녹은 모두 삼백육십오 년을 살았다.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데려가신 것이다.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다.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은 다음 칠백팔십이 년 동안 살면서 아들딸을 더 낳았다. 므두셀라는 모두 구백육십구 년을 살고 죽었다.

성경에 므두셀라가 등장하는 것은 이 일곱 절 두 문단이 전부다. 창세기는 아담의 후손에 대해 긴 족보를 열거하고 있으며, 그 바로 앞에는 므두셀라보다 훨씬 중요하고 소중한 에녹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의 눈은 에녹보다는 므두셀라에 대한 소개 쪽에 치우쳐 있는 듯하다. 정말 969년을 이 땅에서 살고 싶은 것일까? 그러나 (그 자신은 120년을 산) 모세는 이런 시를 남기고 있다(시 90:10-12):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야 팔십 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에 젖은 것, 날아가듯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누가 당신 분노의 힘을 알 수 있으며, 당신 노기의 그 두려움을 알겠습니까?
우리에게 날수를 제대로 헤아릴 줄 알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지혜에 이르게 하소서.

최근에는 므두셀라 증후군Methuselah Syndrome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므두셀라 증후군이란 과거를 아름답고 찬란했던 것으로만 기억하려고 하는 경향을 말한다고 한다. 아마도 나이가 들수록 현세를 긍정하게 되고 이 땅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인간의 한계를 반영한 작명인 듯하다.


1. 므두셀라, 그가 죽을 때 심판이 온다?

그런데 성경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므두셀라가 죽은 해에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다. 창세기 8장 11-12절은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십칠일, 바로 그 날 땅 밑에 있는 큰 물줄기가 모두 터지고 하늘은 구멍이 뚫렸다. 그래서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땅 위에 폭우가 쏟아졌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단순한 산술 계산만으로 187+182+600=969를 얻을 수 있다. 곧, 므두셀라는 우리가 '노아의 홍수'라고 불리는 사건이 있던 해에 세상을 떠났던 것이 확실하다.

이를 두고 창조과학회에서는 이것이 여호와의 은혜라고 홍보한다. 미국 창조과학회the Institute of Creation Research의 학회장president인 존 D. 모리스John D. Morris 박사는 므두셀라는 어떻게 죽었을까? How Did Methuselah Die? 제하의 글을 통해 므두셀라의 장수長壽는 여호와의 인내였다고 쓰고 있다. 그에 따르면 므두셀라라는 이름이 '그가 죽을 때 심판이 온다when he dies, judgment'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므두셀라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였던 하나님의 사람 에녹은 아들의 이름을 “그가 죽을 때 심판이 온다”라는 의미를 가진 ‘므두셀라’로 지었다. 그는 아마도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예언적으로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매우 흥미롭게도 므두셀라는 하나님이 노아의 대홍수로 타락한 세상을 심판하셨던 바로 그 해에 죽었다.
[…]
그리고 이것이 므두셀라에게 일어났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는 마지막 순교자였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살해되었을 때, 하나님의 인내는 끝났던 것이다. 인류를 보존하시기 위해서, 특별히 장차 구속주가 오시게 될 여자의 후손을 남겨놓기 위해서, 하나님의 정의는 마침내 촉발되었던 것이다.

When Methuselah was born, his godly father must have prophetically known of coming things for his son's name means "when he dies, judgment," and interestingly enough, Methuselah died in the same year God judged the sinful world with the great Flood of Noah's day.
[…]
And this may have been what happened to Methuselah. Perhaps he was the last martyr, and when he was killed, God's patience was over. In order to preserve mankind, and in particular Eve's lineage through whom the Redeemer would one day come, God's justice was finally unleashed.

말하자면 여호와는 므두셀라가 죽을 때 이 땅을 심판하기로 하였지만, 오래 참고 인내함으로 인간들에게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포악한 인간들이 므두셀라마저 죽이자 여호와는 므두셀라가 태어날 때 스스로와 인류에게 한 약속을 지켜 '의로운 자'였던 노아의 가족들만 남기고 나머지 인류를 홍수로 심판하였다는 것이다.

백운대 교회 김선기 목사는 이와 비슷하게 므두셀라가 므두와 셀라(샬라흐: 보내다)로서 "이 아이가 죽을 때 홍수를 보내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므두셀라와 홍수를 극적으로 연관시킨 이 이야기는 이형異形variation이 있다.


2. 므두셀라, 창 던지는 자?

삼성교회 한인종 목사는 므두셀라의 뜻을 "창 던지는 자"라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고대 세계에서 '창 던지는 자'란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센 용사로, 그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그 마을의 전멸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에녹이 65세 되던 해에 므두셀라를 얻었습니다.이 아들을 얻고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녹은 이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은 '창 던지는 자' 라는 뜻입니다.
신학자 뉴우 베리에 의하면 고대 시대 각 마을에는 그 마을을 지키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그는 그 마을에서 가장 힘이 좋은 용사로 그가 죽으면 그 마을은 곧 적에게 점령당하고 말았습니다.
'창 던지는 자'가 죽는다는 것은 그 마을, 그 부족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그래서 '므두셀라'는 '죽음 뒤에는 심판이 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므두셀라가 죽은 해에 노아 홍수의 심판이 왔습니다.즉,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므두셀라를 주신 것은 종말에 대한 메시지였습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하나님께로부터 얻은 순간 바로 이 땅에 종말이 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므두셀라를 낳자마자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합니다.이것이 에녹의 지혜요, 믿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경고를 수없이 받았습니다.성경은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고, 그리고 우리 눈앞에 그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므두셀라에 대한 평가는 다르지만, 은평교회의 이병돈 목사도 므두셀라의 뜻을 "대확장" 또는 "창 던지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3. 므두셀라, 라 신의 사람?

미국 IVP에서 발간한 『새성경사전New Bible Dictionary』은 므두셀라의 뜻을 다르게 풀이하고 있다(F. F. Bruce et al. eds. 1996, 544):

므두셀라 METHUSELAH (히. 메투쉘라흐 מְתוּשָׁלַח, '라<Lach> 신의 사람'이라는 뜻이 분명하다). 창세기 5장의 계보에 열거되어 있는 8번째 족장이다. 그는 에녹의 아들이요 노아의 손자였다. 히브리어 역본과 LXX에 따르면, 그는 969세까지 살았다(사마리아 역본에 따르면 그는 720살까지 산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므두셀라에 대한 다른 언급이 없이 그 이름의 뜻이 '라 신의 사람'이라고만 적고 있다. ("노아의 손자"라고 되어 있는 것은 원문의 실수이거나 번역자의 실수일 것이다.)


4. 조작된 은혜의 방정식

신의 은혜는 신에게서 오는 것이다. 조작된 이야기이든 아니든 그 이야기를 듣고 은혜와 감동을 받을 수는 있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와 공동체가 속한 사회에 일정 부분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진리라는 방정식의 해가 하나 뿐이라고 믿는 기독교인으로서 작은 진실부터 규명하지 않으면 그들이 믿는 은혜는 껍데기에 불과하게 되고 말 것이다. 조작된 은혜의 무서운 점은 그것이 성경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여기에서 므두셀라의 뜻이 '라 신의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므두셀라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확인이 있기까지 우리가 쉽게 은혜라는 감정에 휩싸이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이지, 이 목사와 저 목사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는 아니다.

신약의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가장 훌륭한 전도자인 바울로부터 가장 기쁜 소식인 복음을 전해 들으면서도 끊임없이 그 방정식의 해가 옳게 구해진 것인지 확인했던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다(표준새번역, 행 17:11):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보다 더 고결한 사람들이어서, 아주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곧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어떠한 은혜도 쉽사리 사상누각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깨닫고, 해가 없거나 해가 많다고 주장하는 조작된 은혜를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적인 태도이자, 논리적인 태도이며, 또한 과학적인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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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Bruce, F. F. et al. ed. 1996. 『새성경사전』. 나용화·김의원 옮김.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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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선교의 중요성

주지하다시피 기독교에서의 선교란 무척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다. 마태복음 28장에서, 그리고 사도행전 1장에서 그리스도는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이를 지상至上 명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이후, 기독교의 역사는 선교의 역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개개의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보낸 선교사라고 보아야 옳다. 흔히 '임무'의 뜻으로도 쓰이는 mission은 본래 예수회Jésuite가 해외로 선교사를 파송할 때 사용했던 말로 '보내다'라는 뜻의 라띤어 'mittere'에서 나왔다고 한다. 선교사를 보내는 일, 선교사로 가는 일은 기독교의 임무mission인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영혼의 구원이 기독교의 존재 이유는 아니라는 점이다. 기독교의 존재 이유는 영혼 구원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광이다. 따라서 영혼 구원만을 목적으로 여호와의 영광을 가리는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대개의 경우 영혼이 구원받는 자리에서 영광도 드높아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과 이를 둘러싼 국내외적 상황을 살펴본다면 영혼 구원 혹은 영혼 구원을 위한 행동이 여호와의 영광과 항등식을 이루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이 짧은 글은 아프가니스탄 단기 선교에 대한 평가를 위해 단기 선교가 무엇인지 간략히 살펴보고 보다 지혜로운 선교를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위해 쓴 것이다.

(합법적으로 블로그에 노래를 틀 수 있을 때까지 노래 잠시 내립니다. 2008년 3월 24일. 조환곤, 선교지로 향하며)

1. 장기 선교와 단기 선교

선교를 구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그 길이를 기준으로 장기 선교와 단기 선교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장기 선교는 몇 년에서 몇 십년, 혹은 일생을 바쳐서 어느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일하는 것이고, 단기 선교는 며칠, 몇 주, 몇 달, 혹은 대략 한두 해 정도의 사역 기간을 갖는다.

장기 선교와 단기 선교를 나눈 기준은 기간이지만, 그 둘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먼저 선교사들이 선교에 임하는 자세가 다를 것이다. 또, 선교를 위한 준비 기간 역시 다를 것이다. 또한 선교사들의 신분이나 연령 등이 다를 것이며, 선교사들의 숫자도 다를 가능성이 높다: 아무래도 장기 선교를 떠나는 사람은 보다 비장한 각오를 하고 보다 더 치밀하게 준비할 것이며, 평신도이기보다는 신학을 공부한 교역자이기가 쉽고 아주 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장기 선교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가기보다는 혼자, 혹은 부부나 일가족 정도가 떠나는 것이 보통이다.

단기 선교는 교역자들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짧은 시간 복음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 떠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청소년이나 청년들이 방학을 이용해서 떠나는 여행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두 종류의 단기 선교를 《선교타임즈》에서는 각각 '비전 트립vision trip'과 '미션 트립mission trip'으로 '미션 트립mission trip'과 '비전 트립vision trip'으로 적절하게 구분한 바 있다. (단기선교, 이것만은 알고 가자) 모든 '비전 트립'은 '미션 트립'으로 이어져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전 트립'이 '미션 트립'보다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아주 작은 일에도 우리는 선교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데, 가령 선교지에서 선교사님 집 청소를 도와주는 일만 했다고 해도 우리는 선교를 한 셈이다. 그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롬8:28)는 세계관으로 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게다가 '비전 트립'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선교사의 방을 닦으면서 자신의 삶 속에서 선교를 실천하는 각오를 다질 수도 있고 선교사가 되고자 하는 꿈을 키울 수도 있다.


2 뱀과 비둘기

단기 선교를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기도라고 할 것이지만, 그밖에도 선교지에 대한 자세한 공부와 언어 및 문화에 대한 숙지가 필요하고 때에 따라서는 특수한 훈련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고 명령한 적이 있다. 영어로는 and, 불어로는 et로 연결된 두 구절은 어느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상반절에 나와 있듯이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파송하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기 때문이다. 이 말이 제자들을 택한 백성인 유태인에게 보내면서 했던 말인 것을 생각해보면 이슬람이나 토착 종교권으로 선교를 갈 때에 얼마나 더 큰 준비가 필요한지 알 수 있다.

그런데 한달 이하의 비전 트립 형식의 단기 선교를 간다고 했을 때, 이와 같은 준비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기도로 준비하는 것은 기본이자 베이스가 되겠지만, 전공자가 아닌 이상 언어를 익힌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문화에 대한 공부도 소홀히 하기가 쉽다. 때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나 선교사라는 것을 숨겨야 할 때도 있는데, 이것도 훈련을 받고 늘 긴장하면서 살지 않으면 쉬운 일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위험 지역이나 선교 불가 지역으로의 비전 트립은 최대한으로 자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아프가니스탄으로 단기 선교를 떠난 분당 S교회 팀은 그런 의미에서 조심성이 없었고, 준비가 부족했다. 아니, 비전 트립 형식으로 아프간으로 떠났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신앙적 오만이었다고 생각한다. 아프간 정도 되는 곳이라면, 적어도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선교사가 의료 봉사나 교육 봉사 등의 사역을 겸하면서 (필요하다면) 가명까지 쓰면서 조심스럽게 사역을 해야 하는 곳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차인표 씨의 아래 글은 잘못된 비유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악어들이 득실거리는 어느 강가에 "위험"이라는 푯말이 서 있습니다. 강을 건너던 작은 배가 뒤집혀 아이들이 빠져서 허우적거립니다. 그들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죽어가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한 무리의 어른들이 강으로 뛰어 듭니다. 아이들을 한명, 두명 구하던 그 어른들은 이내 악어의 공격을 받아 피투성이가 되기 시작합니다.
차인표 씨의 미니홈피

어린이가 나쁜 일을 당하고자 하면 구하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맹자가 '우물에 빠지려는 어린 아이'의 비유孺子入井說를 든 이후로, 오랜 전통을 가진 예시문인 셈이다. 하지만 이번 아프간 사건에서의 문제는 (비유로 이야기하자면) 아이들이 빠져 허우적거리는 곳에 아이들이 들어갔다는 점이다. 그곳에는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수영 선수나 구조원이 들어가야 옳고, 물 밖의 아이들은 단기적으로는 그런 수영 선수나 구조원을 찾아다니고 장기적으로는 수영 선수나 구조원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어야 옳은 것이다.


3 단기 선교의 세부적인 주의점: S교회 아프간 단기선교팀의 행동과 관련하여

선교가 반드시 심각하기만 하고 재미라고는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선교는 재미보다는 어려움과 힘듦, 심지어 삶의 위협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밤에 숨죽이고 찬양을 부르는 사람들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S교회 단기 선교단은 그곳 모스크와 이슬람 성지와 같은 곳에서 예배와 워십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디시인사이드 갤로그) 이와 같은 행동은 이슬람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올린 것으로 보이는 글들의 문체에서 그들의 기쁨이 잘 드러나 있는데, 이 역시 무척이나 실망스러운 모습이다. 복음화가 절실한 곳에서 워십과 예배를 드릴 때의 슬픔이나 무거움이 완전히 표백된 기쁨에 찬 그 글을 보면서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찬양이 진실로 여호와를 기리고 영광을 돌리는 것인지, 아니면 일종의 '신앙 고수'의 이벤트인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행동은 비기독교인들에게 커다란 반발을 일으킨다. 개신교도들이 흔히 하는 오해 중에는 비기독교인들의 비난이 거센 것을 자신들의 행동이 옳은 증거로 여기는 것이다. 비기독교인들의 비난은 개신교도들이 신앙의 윤리대로 사는 것을 두고 하는 몰이해의 비난일 수도 있고, 개신교도들이 정말 잘못하는 것을 두고 하는 준엄한 비난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비난 그 자체만을 가지고 가치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개신교도의 준거는 성경이어야 하지, 비기독교인들의 반응이어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반발을 사는 행동도 없어야 한다. 세상의 법과 도덕에 맞추어도 신앙적 및 신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에는 세상의 법과 도덕을 따르는 것이 좋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막12:17) 돌려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칫 여호와의 영광을 가리는 행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 사태로 인해 욕을 먹은 것은 개신교도만이 아니라, 여호와와 그리스도도 마찬가지다. 이런 가슴아픈 사태는 없으면 없을수록 좋다.

'떡과 복음'이라는 말이 있다. 기아대책이라는 선교 단체의 슬로건이다. 생각해보면 현재 아프가니스탄 선교만큼이나 어려웠을 식민지 조선에서의 선교는 저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다. 한국 복음화의 두 축인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젤러가 각각 의사, 교육자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시 조선은 의사와 교육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조선의 비폭력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유관순 역시 선교사가 세운 이화학당 출신이다. 아프가니스탄도 지금 교육과 의료라는 떡이 필요하다. 이는 아프가니스탄 선교의 '문'을 열기 위해 꼭 필요하다. 피랍 여성 가운데 처음 미국 방송사 CBS와 육성 통화를 한 임현주 씨는 실제로 그 문을 위해 오래도록 아프간에서 봉사 활동을 한 분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토록 오래 '떡'으로 섬겨서 조금씩 열리고 있는 아프간 선교의 문이 이번 단기 선교 이벤트로 인해 닫혀버린 것이다. (모기불 통신)

그밖에 국내외 정세에 개신교도들이 너무 어두운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4 조심스러운 제언

단기 선교는 비교적 재정 여력이 있는 나라의 그러한 교회에서 주로 기획해서 간다. 그런 단기 선교를 이벤트성 행사나 선교를 명목으로 한 여행이 아니라 보다 의미 있는 비전 선포식으로 바꾸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또는 해외가 아니라 국내의 미자립 교회 등에 찾아가서 개척의 어려움도 듣고 봉사활동도 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활동도 변질되면 무서운 암세포가 될 수도 있다:

도시 교회 수련회나 봉사활동으로 온 사람들로 인해 농촌 교역자들을 골머리를 썩히고 있다는 것이다. 도시교회에서 조금한 시골교회에서 찾아와서 자신들의 여름 수련회을 농어촌 교회 지역봉사를 섬기겠다고 찾아와서는 봉사하는 것이 오히려 농촌 교회 교역자를 얘를 먹이고 있다고 리서치 하는 우리들을 붙잡고 하소연 하시는 것을 교역자님과의 인터뷰 가운데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 안하시면 되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런 행사 유치를 통해 조그마한 교회재정에 도움을 얻고 또 도시지역의 협력하는 교회에서  부탁을 하는데 어떻게 안들어 줄 수 있느냐며 저희에게 되물으셨다. 그것도 제 날짜에 와 주면 감사하다고 하시며 온다고 해서 다 준비해 놓았더니 약속한 날, 몇일 전에 갑자기 취소하면 이처럼 씁쓸한 일이 없다고 저희에게 토로하시는 것을 보게 되었다.
여호수아 프로젝트

결국 우리는 늘 순결하고 지혜롭도록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1:5)

그리스도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7:1)고 했다. 나는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분당 S교회 단기 선교팀을 비판한 셈이다. 나 자신 그들보다 나은 점이 없고 결코 그들을 판단할 만한 위치에 있지는 않다. 다만, 악하고 게으른 종이지만 조금이나마 선교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짧은 글이나마 적어 본다.

◎ 현재 파랍된 아프가니스탄 단기선교 팀 모두의 무사 귀환을 기원합니다.
Posted by 엔디
탈레반, 피랍여성 울먹이는 육성 공개

탈레반에 피랍된 임현주 씨의 육성을 공개한 것을 두고 언론에서는 '고도의 심리전'이라고 난리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피랍자들의 육성을 들려주는 것은 저런 국제적으로 알려진 단체뿐 아니라 우발적으로 어린이를 유괴하는 유괴범들도 다 하는 기본적인 '협상' 방법이다.

상대를 잘 경계하고, 상대의 방법을 분석해야지 상대를 과장하는 것은 좋지 않다. 상대를 과장하는 과정에서 쓸데없이 감정이 들어갈 수 있고, 이 사안에는 또 민족주의가 개입할 가능성도 있다. 또 현재 사회에 만연한 개신교에 대한 반발심리도 커질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고인이 되기는 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이라도 건강하게 무사히 돌아오기를 빈다. 그리고, 개신교도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 개신교가 제발 좀 정신차리기를 빈다.
Posted by 엔디
이랜드 사태가 점점 심각한 상태로 빠져든다.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오십년대 평양에서 '빨갱이'들을 악마라고 불렀고, 칠팔십년대에 학생운동하고 노동운동하던 사람들을 마귀라고 불렀고, 오늘날 노조 간부들을 사탄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우구스띠누스가 받아들인 플라톤주의의 쉬운 2분법이 기됵교에게 익숙할 수밖에 없지만, 저런 명칭은 지나치게 정치적이라서 더 부끄럽다: 일단 상대를 사탄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 상대에 대한 모든 인식은 닫혀버리고 만다. 종교도 정치처럼 언어예술이자 립서비스로 변하는 순간이다.

이럴 때 개신교인임이 무척이나 부끄럽다, 슬프다.

이랜드 사내 메일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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