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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됨'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이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기독교는 위험하다. 그리스도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언급했던 것은 두 사랑의 계명, 곧 여호와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사도 요한은 한 편지에서 다소 충격적인 발언을 한다(요일 4:20):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흔히 이웃 사랑에서 자주 인용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배울 필요가 있다. 도움이 필요한 소외된 자를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모범이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인이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돈을 스스로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여호와의 것 혹은 최소한 공동체의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정치가 한정된 재화를 어떻게 나누는가를 정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때, 기독교의 정치는 그 재화가 본래 여호와로부터 온 것이라는 철저한 인식 속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1. 기독교와 사유재산

쟝 깔뱅은 그리스도인의 사유재산을 포함한 여러 가지 자유를 인정했다. 모든 신자가 수도원의 탁발승처럼 살 필요는 없고, 각자 자신이 있는 곳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소중한 소명이며, 그로써 정당하게 번 재산은 신의 선물이라는 것이다(Calvin 1994, 332):

분명히 상아나 금이나 재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것이며,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허용되고 지정받기까지 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웃거나 배부르거나, 옛 조상의 재산에 새 것을 더하거나, 혹은 아름다운 가락을 즐기거나 포도주를 마시는 것들을 결코 금지당한 적이 없다.

이에 따라 막스 베버가 '독특한 부르조아 경제윤리'라고 부른 기독교 경제 윤리가 탄생한다(Weber 1987, 242-243):

그리하여 하나의 독특한 부르조아 경제윤리가 출현한 것이다. 부르조아 기업가는 신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 서서 그의 축복을 받고 있다고 느끼며, 그가 형식적인 올바름의 틀을 지키는 한, 그리고 그의 도덕생활이 깨끗하며 그의 재산이 온전하게 사용되는 한 금전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며, 또한 그가 그렇게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기독교의 측면에서 보면 그 사유재산이라는 것 역시 '나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을 맡아두고 있다는 의식이 중요하다. 이런 의식의 발전된 형태로 사도행전이 보고하는 위대한 기독교 공산주의 혁명을 들 수 있을 것이다(행 2:44-45; 4:32):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행전 1장은 다락에 모인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12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2장에서 성령이 임한 오순절 사건 이후 41절은 3000명의 제자가 늘었다고 보고 하고 있으며, 4장에서 말씀을 들은 자 가운데 5000명의 남자가 새로 믿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 당시에는 성인 남자만 세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보수적으로 잡아도 족히 2만 명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만 명의 공동체가 사유재산 없이 서로 필요에 따라 물건을 통용했던 것이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의 정치라면 이 정도의 이상은 꿈꾸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자본주의의 시대를 접고, 기독교 공산주의의 시대로 나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한국의 깔뱅주의 프로테스탄트라면 재산과 관련해서 세속 법이 규정하는 것 이상으로 엄격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가령 깔뱅 역시 사유재산은 인정했지만 무차별적인 재산권 행사의 자유는 그르다고 보았으며, 이자利子는 인정했지만 무차별적인 취리는 옳지 못하다고 보았다(손봉호, 칼빈의 사회 사상).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물론이고, 첫 내각의 상당수가 재산과 관련하여 엄청난 비리가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대학 등록금도 없던 이명박 대통령의 가계는 현대건설을 거치면서 믿을 수 없을 만큼 탄탄해졌다. 개발독재 시대의 건설사에 몸담고 있으면서 땅값의 시세차익으로 얻어진 부다. 그는 이 부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대통령 후보시절 선언했지만,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면 지키려는지 아직까지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한 장관 내정자는 땅 투기 의혹에 "땅을 사랑했을 뿐 투기는 아니다"라는 군색한 변명을 내밀었고, 다른 장관도 투기 의혹이 불거지자 한겨울에 트렉터를 끌고 밭을 가는 쇼를 했다. 굳이 헌법에 명시된 '밭 가는 자가 밭을 소유한다耕者有田'는 원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앞서 희년과 나그네됨: 이명박과 예레미야서 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런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율법 규정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수많은 노동자가 다치고 죽어가는 상황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명시적으로 부자를 위한 정치, 기업가를 위한 정치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 당선자 시절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전경련이라는 점이나, 최근 기업가들을 위한 직통 핫라인을 개설한 점 등만 봐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점이다. 이 땅의 나그네들을 소외시키고, 재산을 여호와의 것이 아니라 기업가의 것 혹은 자신의 것으로 고착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요컨대, 이명박이 펴려는 정치는 단순히 가진 자의 정치나 우파의 정치는 될 수 있어도 그리스도인의 정치라고는 결코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기대에 훨씬 못미쳤을 망정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가 (그들 자신의 종교와는 관계 없이) 그나마 더 여호와의 뜻에 합당한 정치였다.


2. 이명박과 예레미야서

많은 교회가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선거 과정에서 알게 혹은 모르게 이명박을 지지했고,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감사 기도를 드린 곳도 많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적籍을 두고 있는 소망교회에서는 주일 낮 예배에 "이명박 장로를 대통령에 당선시켜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올리고, 매주 수요일에 이명박 대통령의 성공을 기원하는 기도회가 열린다(『한겨레21』 제699호).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생략된 것은 이명박이 과연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냐 하는 평가와 과연 항상 그리스도인이 대통령이 되는 것만이 여호와의 뜻인가 하는 판단이다. 이명박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인가 혹은 그의 정부가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정부인가 하는 문제의 해답은 앞서의 절을 통해서 어느 정도 밝혀졌다고 보고, 과연 항상 그리스도인이 대통령이 되는 것만이 여호와의 뜻인가 하는 판단에 대해서 살펴보자.

선지자 예레미야는 분열왕국 남유다가 망하는 것을 지켜본 예언자이다. 슬픔 가득한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언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남유다가 망할 것이며 다윗의 왕위가 폐하여질 것이고, 여호와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무너지리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예레미야가 남유다의 백성들에게 권고한 것은 여호와의 도성을 지키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바빌로니아에 항복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라는 것이다(렘 27:8-10).

그러니 바빌론 왕이 씌워주는 멍에를 메어라. 그 왕 느부갓네살을 섬겨라. 그러지 않는 민족과 나라가 있으면, 나는 그 민족을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벌하여서라도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주고 말 것이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너희의 예언자들과 박수들과 해몽가들과 점쟁이들과 마술사들이, 우리가 바빌론 왕을 섬기게 될 리 없다고 하더라도 곧이듣지 마라. 그자들이 하는 예언은 거짓이다. 그 말을 듣다가는 고향을 멀리 떠나게 되며, 나에게 쫓겨나 망하고 말 것이다.

남유다의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았고, 다윗의 왕위가 공고하리라는 거짓 예언만을 믿었다. 그러나 패역하고 여호와의 뜻에서 돌아선 남유다의 왕좌는 유지되지 못하였고, 바빌로니아에 결국 멸망하고 만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유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여호와가 그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구약의 세계관에서 바빌로니아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여호와는 바빌로니아의 왕을 종從이라고 부르며, 유다가 영원히 망할 것이 아니라 70년 후에 귀향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기도 하다(렘 25:9, 12):

나는 내 종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을 시켜 북녘의 모든 족속들을 거느리고 쳐들어와 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 주위에 있는 모든 민족을 전멸시키고 이 땅을 영원히 쑥밭으로 만들게 하리라. 사람마다 그 끔찍한 모습을 보고 빈정거리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 그 칠십 년이란 시한이 차면 나는 바빌론 왕과 그 민족의 죄를 벌하여 바빌론 땅을 영원히 쑥밭으로 만들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적어도 당시 남유다에게 있어서는 다윗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아니었고, 죄악의 상징 바빌로니아가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느 대통령 후보가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혹은 장로라고 해서 앞뒤 재지 않고 그에게 표를 주는 몰지각한 시민의식이 여호와의 관점에서도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태도는 솔로몬처럼 선과 악을 분별할 지혜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가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서는 안 되고, 여호와의 뜻에 합당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이 부분을 혼동하면 예레미야 시절의 남유다 백성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게 되고 만다.


보유

이명박 장로는 결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절차와 의혹이야 어떻든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이것 역시 여호와의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체념하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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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손봉호. '칼빈의 사회 사상'. 실린 곳: http://lloydjones.org.
Calvin, Jean. 1994. 『기독교 강요(초판)』. 12판. 세계기독교고전14. 양낙흥 옮김. 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
Weber, Max. 1987.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학술총서1. 박종선 옮김. 서울: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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