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fable란 동물에게 사람의 속성을 투영한 이야기로 일종의 알레고리allegorie이다(이상섭, 210-210). 그래서 논자에 따라서는 우화를 의인소설擬人小說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한용환, 333-336). 그런데 우화 가운데 인간이 등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럴 경우 대개 인간은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가령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인간은 사회주의 혁명 이전의 제정帝政 러시아를 의미한다. 또 안국선의 「금수회의록」은 좀더 직접적으로 옳지 못한 인간의 태도를 풍자하고 있다. 이처럼 동물이 등장인물인 이야기에서 인간이 쉽게 부정적으로 묘사된다는 것은, 적어도 문학적 상상력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의 감정을 동물에 이입했을 때 인간이 추악한 존재라고 느끼기 쉽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나는 다소 딱딱하게 우화에 대해서 설명했는데, 세뿔베다의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를 단순히 우화라고 이름붙이기는 좀 망설여진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알레고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직접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갈매기와 고양이는 진짜 갈매기와 고양이이지, 갈매기와 고양이의 어떤 특징을 가진 인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갈매기와 고양이는 고통받고 있다... 조금 길지만 책을 읽어보기로 하자(27-29):

켕가는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기 위해 날개를 쭉 폈다. 그러나 커다란 판도가 몸 전체를 덮어버렸다. 가까스로 물 위로 떠오른 켕가는 머리를 힘차게 흔들어 젖혔다. 눈앞이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인 듯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켕가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앞을 볼 수 없는 것은 오염된 바닷물의 기름 탓이라는 사실을.

켕가는 날개에 묻은 기름을 물에 씻어보려고 했다. 머리를 물 속에 담갔다 뺐다 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허공에서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댄 뒤 다시 눈을 떠보았다. 온통 석유 기름으로 뒤덮인 그의 망막 사이로 마침내 가느다란 햇살 몇 줄기가 비치기 시작했다. 끈끈한 얼룩의 검은 기름은 눈에만 붙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날개와 몸통에도 뒤덮여 날개가 몸통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켕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았다. 우선 검은 기름 띠의 한가운데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헤엄을 빨리 치기 위해 다리를 힘껏 움직이기 시작했다.

[...]

켕가의 날개는 몸에 딱 달라붙어 있어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이러한 상태의 갈매기들은 커다란 물고기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결국은 천천히 질식해 죽게 될 것이다. 석유 기름이 깃털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모든 기공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켕가의 운명이었다. 그래서 켕가는 생각했다. 차라리 커다란 물고기의 입 속으로 빨리 없어져 버리는 것이 더 나으리라고.

검은 물결. 검은 역신.

켕가는 죽음의 종말을 기다리며 인간들을 원망했다. 그 외에 특별한 방법도 없었다.

물론, 최근 충남 태안 반도에서 일어난 원유 유출 사고 이야기는 아니다. 갈매기 켕가는 지금 태안이 아니라 북해의 앨바 강 어귀에서 석유 오염물질을 뒤집어쓰고 허우적거리고 있다. 켕가는 있는 힘을 다해 뭍으로 날아서는 어느 검은 고양이가 살고 있는 집에 추락해서 하얀 알 하나를 낳고는 죽을 것이다; 인간이 켕가를 죽인 것이다.

기름을 뒤집어쓴 채 죽어가는 뿔논병아리Canon | Canon EOS 5D | Aperture priority | Multi-Segment | 1/200sec | f2.8 | 0EV | 14mm | ISO-800 | Compulsory Flash | 2007:12:08 17:14:26

ⓒ최예용, 환경운동연합


검은 고양이 소르바스Zorbas는 동료 고양이들과 함께 하얀 알이 부화해서 어엿한 갈매기가 될 때까지 키운다. 작가 세뿔베다는 인간 대신 고양이에게 한 온전한 한 생명을 맡긴 셈이다. 고양이는 영리하고, 용감하며, 책임감이 있다. 따라서 죽음 이후에 태어난 하나의 삶을 아름답게 할 수 있는 권능이 고양이에게 주어진 셈이다. 소르바스가 어떤 인간들이 불운하다고 여기는 검은 고양이인 것은(20), 인간들의 위선을 지칭함으로써 그 추악함을 더 드러내보인다. 인간들의 편견과 달리 소르바스는 불운한 고양이가 아니라 행운의 고양이이다. 그래서 소르바스가 키운 어린 갈매기는 '행운아'라는 뜻의 아포르뚜나다Afortunada라고 이름붙여진다.

소르바스가 켕가에게 약속한 것은 세 가지였다: 알을 먹지 않는다, 새끼가 태어날 때까지 알을 보호한다, 그리고 새끼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이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알을 먹지 않는 것은 조금의 자제만으로 되는 일이고 알을 보호하는 것은 인간에게 들키지 않도록 잘 행동하면 되는 일이지만, 나는 법은 고양이들도 잘 몰랐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들의 '백과사전'을 신봉하는 사벨로또도라는 박물관 고양이도 역시 알을 어떻게 보호하고 어떻게 품는지는 알려줄 수 있었지만, 비행술에 대해서는 백과사전에서 정말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127):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단 말야. 비행 이론은 최선을 다해서 완벽하게 조사했는데. 기체역학에 관한 모든 사전을 다 뒤져가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론과 비교도 했지.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도 매번 실패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고! 세상에! 어째 이런 일이!"

결국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것은 소르바스의 부탁을 받은 한 시인이었다. 비바람이 치는 날 시인은 갈매기를 산 미겔 성당의 탑으로 데려가 폭풍우를 온몸으로 느낌으로써 나는 방법을 체득하게 한다. 여기서 시인은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일종의 샤먼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야기 속에서는 고양이들이 자신들의 금기를 깨고 인간의 언어로 시인과 대화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실상 자연과 함께 숨쉬고 생활하는 시인의 샤먼적 특성을 동화적 또는 우화적 감수성으로 풀어낸 것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인의 언어다.

소르바스는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줄 사람으로 시인을 지목했다. 왜 그랬느냐는 질문에 소르바스는 이렇게 답한다(135-137):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섰을 뿐입니다. 전에 자신의 글을 직접 낭독하는 걸 들어본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럴 때마다 항상 즐거웠고, 계속해서 들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겁니다."

[…]

"새의 날개로 나는 것에 대해서는 아마 모를지도 모르지. 그러나 내가 그의 시를 들을 때면 항상 그의 시구를 타고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는 느낌이 들었어."

여기서 소르바스는 일종의 역동적 상상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시적 몽상에 대해 역동적 상상력l'imagination dynamique이라고 이름붙이면서, "역동적 상상력은 의지의 꿈이며, 꿈꾸는 의지인 것"이라고 말했다(Bachelard, 177). 여기서 우리는 갈매기란 왜 하늘을 날아야 하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갈매기는 갈매기이기 때문에 난다거나, 엄마 갈매기인 켕가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어린 갈매기가 날기를 원하기 때문에, 곧 그것이 어린 갈매기의 의지이기 때문이다(123-124):

아포르뚜나다는 전사의 모험담을 항상 재미있게 들었다. 그런데 그 날 따라 유난히 눈빛을 반짝이며 귀를 쫑긋 세우고 관심 있게 들었다.

"갈매기들은 진짜로 폭풍우 속에서도 날아다녀요?"

그가 질문했다.

"물론, 바다장어가 방전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말씀! 갈매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새지. 갈매기보다 더 잘 나는 새는 없다고."

바를로벤또가 확언했다.

바다 전사의 이야기는 아포르뚜나다의 가슴에 깊이 스며들었다. 그의 발은 공연스레 흙을 이리저리 파헤치고 있었고, 부리는 매우 예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꼬마 아가씨! 아가씨도 날고 싶어요?"

소르바스가 지나가는 투로 묻자, 아포르뚜나다는 고양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마침내 대답했다.

"그래, 좋아요! 내게 나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순간 고양이들은 너무 기뻐서 환호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들은 고양이 특유의 인내심을 발휘해서 어린 갈매기가 날고 싶다는 의지를 직접 드러낼 때까지 끈덕지게 기다렸던 것이다. 왜냐하면 난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결정에 달린 문제라는 것을 고양이들은 조상들이 일러준 교훈을 통해 이미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요나 억지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

어쨌든 백과사전 지식을 통해 나는 법을 가르치는 데 실패한 고양이들은 소르바스를 시인의 집으로 보낸다. 샤먼인 시인은 베르나르도 아트사가라는 시인의 시 한 편을 들려주는데, 여기서 소르바스는 시인을 온전히 신뢰하게 된다.

그의 작은 용기는
곡예사들의 그것과 같기에
늘 비를 가져오고
늘 해를 몰고 오는
저 어리석은 비 때문에
그토록 한숨을 쉬지는 않지요

갈매기는 이 시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라, 곡예사의 용기를 가지고 비 속에서도 자유롭게 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인은 이로써 샤먼의 역할을 끝내고 탑에서 내려간다. 샤먼이라 해도 결국은 인간이며, 인간은 자연 속에서 일반적으로 '방해'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세뿔베다의 글을 읽고 나서 세뿔뚜라를 떠올린다면 엉뚱할까? 세뿔베다의 이야기가 그래도 동화적인 외피를 갖고 따뜻하게 전개되다보니 그와 세뿔뚜라를 연결하기가 쉽지 않지만, 지구에 대한 문제의식은 둘이 함께 공유하는 것 같다. 칠레의 이야기꾼과 브라질의 스래시 메탈 밴드의 접합점은 단지 비슷한 이름뿐만은 아닌 것이다.

(▼ 잔인한 장면이 많으므로 주의하여 클릭하세요.)

(▲ 잔인한 장면이 많으므로 주의하여 클릭하세요.)

태안 반도의 원유 유출 사고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분명히 이것은 의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사고이지만, 인간이 석유라는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한 언제나 문제가 될 수 있었던 사고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화석 연료라고는 전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이용할 때에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사고가 났을 때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들 전체가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이다. (말하기가 조심스러운데, 책임이 인간들 전체라는 말은 책임의 분담分擔이 아니다; 모두가 태안 반도에 퍼진 원유 전체의 무게만큼의 짐이 있다는 것이다.)



자, 아래의 사이트에서 힘이든 돈이든 보태도록 하자. 우리가 시인처럼 한 갈매기를 날도록 하기는 힘들지만, 앞으로의 갈매기들이 날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 마침 곧 크리스마스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이 땅에 인간과 온갖 동식물과의 평화도 함께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태안 원유 유출 사고 관련 사이트:
환경운동연합
충청남도청
태안군청
Daum 희망모금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루이스 세뿔베다 지음/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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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섭. 1997. 『문학비평용어사전』. 신장판. 민음사.
한용환. 1992. 『소설학사전』. 고려원.
Bachelard, Gaston. 2000. 『공기와 꿈: 운동에 관한 상상력』. 정영란 옮김. 이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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