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의 『회색인』에는 독고준이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하는 부분이 나온다. 아마도 작가 자신의 생각을 많이 투영하고 있을 그 평가는 이렇다:

그가 요즈음 읽고 있는 책은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였다. 유명한 소련 작가의 그 소설은 러시아 제정 끝무렵에서 시작하여 소비에트 혁명, 그 뒤를 이은 국내 전쟁을 통하여 한 소년이 어떤 모험과 결심, 교훈과 용기를 통해서 한 사람의 훌륭한 공산당원이 되었는가를 말한 일종의 성장소설(成長小說)이었다. 그러나 그가 공산당원이라든가 짜르 정부가 얼마나 혹독했는가는 아무래도 좋았다. 소설의 처음부터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주인공 소년의 익살스럽고 착한 성격이, 그리고 황폐해가는 농촌과 도시의 눈에 보이는 듯한 그림, 주인공의 바보같이 순진한 사랑, 그러한 것이 준의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집없는 아이』의 소비에트판 번안이었다.

- 최인훈,『회색인』재판, 문학과지성사, 1991, 38쪽.

회색인
최인훈 지음/문학과지성사

『집 없는 아이』의 번안이라는 표현은 독창적이면서도 충분히 타당한 비교일 수 있겠지만, 그러나 '성장소설'이라는 말과 같은 무게는 이 소설에서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이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더군다나 '성장소설'은 더욱 아니다. 성장소설은 독일어 Bildungsroman의 번역이고 Bildung을 '교양'이라고도 새긴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강철…』은 주인공인 꼬르차긴의 내적 갈등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훌륭한 소설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다. 주인공은 볼셰비끼 혁명이 일어나던 시기부터 이미 훌륭한 공산당이었고, 한 번도 그 입장은 변하지 않는다. 멘셰비끼의 입장에 선 적도 없고, 뜨로츠끼 파들에 대한 비판들이 제기되던 때도 그는 당연히 볼셰비끼의 편에 선다. 왜 그랬을까? 모른다. 책의 어디에도 그것은 나오지 않는다. 하긴 주인공이 나이가 기껏해야 스무 살 안팎이니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그는 소학교 3학년까지밖에 다니지 않아 제대로 된 러시아어 문법도 잘 모르는 수준이었으니까 말이다.

「꼬르차긴 동무! 당신에게는 대단한 자질이 있어요. 계속 이 일에 몰두한다면 당신은 앞으로 문학 일꾼이 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지금 당신은 철자법에 맞지 않게 쓰고 있어요. 논문으로 보건대 당신은 러시아어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

- 『강철…』, 열린책들, 1990, 492-493쪽.

결국 이 책은 하나의 이야기책에 불과한 정도의 글이 되어버렸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약간은 감상적이고 약간은 의욕적인, 훌륭한, 긴 글이다. 이것은 내가 이 책에 대해 하는 '혹평'이지만 오스뜨로프스끼의 입장에서 볼 때는 칭찬으로 들릴 지도 모른다.

오스뜨로프스끼에게 문학은 사회주의 혁명과 그 건설을 위한 투쟁에 복무하는 <무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 자기의 창작 보고서에 그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삶은 모든 전선에 걸쳐 공세로 나아가고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대열로 나를 복귀시킬 수 있는 새로운 무기를 확보하라는 과제를 내 앞에 제기하고 있었다.> 현역전사로서 사회주의 건설투쟁에 참여할 수 없었던 국내전의 전사는 결국 <문학>이라는 무기를 통해 그 뜨거운 열망을 성취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김규종, 「역자후기」, 『강철…』, 526-527쪽.


예술을 어떤 다른 목적에 종속시키려는 시도는 거의 필연적으로 그 예술성에 대한 상처를 생기게 하는 것이다.



특기할 점.

옮긴이 김규종은 책 뒷부분의 약력에 따르면 책이 출간될 당시인 1990년에 베를린 자유대학 슬라브학과 박사과정에 있던 학생인데, 그가 책의 중간중간에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단 역자주석의 논조를 보면 그는 레닌주의와 스딸린주의를 충실히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주가 아닌) 그가 단 주석의 상당수는 글의 전개와 크게 관계있지 않은, 그의 '주장'이 담긴 글이었던 것이다.

예)
[…] 따라서 스딸린을 오늘날의 <실존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발생하고 있는 모든 문제의 정점으로 매도하는 것은 피상적인 관점으로 비판받아야 마땅하리라 생각된다. 결국 <빛>과 <어둠>, <긍정>과 <부정>, <선>과 <악>은 일면적이거나 단선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 모든 것은 언제나 <쥐포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적인 맥락없는 스딸린 비판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강철…』, 508-509, 난하주.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니꼴라이 오스뜨로프스끼 지음, 김규종 옮김/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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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카멘친트』는 헤세의 데뷔작이다. 나는 그래서 이 작품이 정돈되기 보다는 거칠은 어떤 것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그런 것을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작품은 깨끗했다.

데뷔작에서부터 우리가 흔히 '헤세적'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잘 드러나고 있었다. 가령 자연 친화, 기독교적 신의 거부, 민중적 삶에 대한 애착 등이 여기서 페터 카멘친트라는 인물을 통해 제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아마 이것들은 이미 그의 유년기에 형성된 것이기가 쉽다. 인도 선교사였던 그의 아버지와 동양학자였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상상해 볼 수 있겠다.

카멘친트는 '촌뜨기'다. 그는 도회지에서 사교생활을 해보지만 결국 그는 촌뜨기로서 시골로 돌아간다. 줄거리만 가지고는 『수레바퀴 아래서』와 비슷한 면이 있는, 소박한 소설인듯 싶지만 실제로는 교양소설이나 예술가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을 정도로 카멘친트의 생각의 궤적들이 잘 형상화되어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헤세와 화해할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 곧 '시골주의'를 발견해냈다. 『수레바퀴 아래서』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보여준 그런 생각들이 여기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이 소설은 그의 가장 도시적인 소설이라 할 수 있는 『황야의 이리』와는 대척점에 있었다. 가령 그가

산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은 오랫동안 철학과 자연 과학을 공부해서 옛날의 신을 다시 버렸을지라도, 푄을 다시 한 번 느끼거나 눈사태가 나무를 부러뜨리는 소시를 듣게 되면, 그는 가슴이 철렁 떨리고 다시 신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법이다. (19쪽)

라고 말할 때, 나는 이를 인정하고 수긍하면서도 '그렇다면 소설은 도회지 삶에 대한 도피처 정도로 되고 말 수도 있다, 소설은 오히려 사람들의 삶을 더 드러내야 한다'고 아직은 어설픈 반대입장을 내놓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적 신에 대한 그의 입장은 변한 적이 없는데, 내 입장은 자꾸 변했다. 처음에는 그토록 적대시한 그의 신관神觀을 나는 이제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

언젠가 헤세는 중고생용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나는 거기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노벨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소설에 담긴 그의 사상들은 현재까지도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는 점은 다른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그의 깊은 사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페터 카멘친트
헤르만 헤세 지음, 원당희 옮김/민음사



인상깊은 구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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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이고 밤이고 혼자였던 시절, 외로움이든 무엇이든 밀려오면 소설을 읽었었다. 으례 소설은 읽히는 것으로 여겼었고, 그 예외라면 스토리 위주가 아닌 『낯선 시간 속으로』정도를 들었다.

이문구의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는 스토리 위주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스토리가 상당히 살아있는 단편집인데도 나를 오래도록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책 뒷표지를 보았다. "여기에서 말은 이미 말 이상이다." 말이 말보다 윗길에 있다면 그의 소설이 시詩라는 말이 된다. 이문구는 시를 썼던가.

책을 다 읽고 나서의 자답自答은 '그렇다'였다. 그가 충청지방의 토속어로 소설을 썼다, 고 대체로 말하겠지만 사실은 그가 충청지방의 토속어를 썼더니 그것이 소설이 되었다고 하는 게 더 옳을지도 모를 정도로 그의 소설은 말과 동화되어있다. '내용과 형식'이라는 상투적인 낱말을 빌려 설명하자면, '그의 소설의 내용은 바로 그 형식'이라는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가령 "성님이사 워디가 워떠시간 그류, 아녈 말루 우루과이라운드라구 해두 좋구 새 신미앵요라고 해두 좋구, 좌우간 핑계 하나 딱 부러지는 짐에 그 지긋지긋한 늠의 지게공학과 좀 졸업해번지구 남은 여생일랑 여벌처럼 사시면 구만이신디."에서 충청도 사투리를 빼면 "형님이 어디가 어떠셔서 그러세요? 우루과이 라운드든 새 신미양요든 이 참에 농사 그만 두시고 여생은 여벌처럼 사세요."가 되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충청도 사투리를 빼면 남는 것은 백지가 남는다. 내가 엉터리로 옮긴 표준어표기와 원문을 대조해 읽어보라. 표준어표기에 '내용'이라는 것이 담겨있는가를.

요컨대, 이문구의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에서의 토속어는 그것 자체가 하나의 화구畵具인 것이다.

또, 이 책은 대체로 '나무 연작'을 싣고, 「더더대를 찾아서」를 덧붙인 형태이다. 여기 나무는 한 눈에 알 수 있듯이 모두 쓸모없는 나무이다. 장자의 「材之患」은 무용無用의 용用을 말하고 있다. 장자의 어감과는 좀 다르더라도 무용한 듯 무용하지 않은 소중한 개개의 나무들을 이문구는 하나씩 하나씩 형상화하고 있으며, 그 형상화된 개개의 나무들은 모두 토속어이다.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 왔다
이문구 지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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쯔지 히또나리의 『냉정과 열정사이』도 결국 얼마간 연애소설을 벗어난 체하는 트랜디 연애소설일 뿐인 것 같다. 쥰세이의 직업이 독특해서 몇몇 전문적인 단어들이 등장하고 그것이 소설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이 소설의 축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하나의 지엽으로 그칠 뿐이다.

작기는 때로 神에 비견된다. 소설은 사실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고 소설의 등장인물 역시 실제로는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작가는 신이어서는 안 된다. 상상력은 망상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신의 거짓말'처럼 본래부터 모순되는 개념이다.

소설은 삶을 담아야 한다. 그러나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몇 달, 몇 년, …, 몇십 년까지 다루는 소설에서 삶의 세목들을 모두 다룰 수는 없다. 작가는 무엇을 더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뺄 것인가를 더 주의깊게 생각해야 한다. 밥을 먹었다, 화장실에 갔다, 잠을 잤다는 것이 세세하게 묘사된다고 생각해보라.

조반나의 이야기, 메미의 아버지, 쥰세이의 어린시절은 소설의 줏대되는 이야기에 그다지 개입하지 못하고 떠돌고 있다. 그런 것들은 '밥을 먹었다'와 그리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냉정과 열정사이 - Blu
쓰지 히토나리 지음, 양억관 옮김/소담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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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문열'의 이름이 씌어진 소설을 사는 것은 내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옛적에 읽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나 「금시조」따위의 소설들의 화려한 내용들 사이에서도 상상력을 결한 그의 작품들은 내게 관념을 주입하기에는 이로웠을 지 모를 정도의 소설이었다. 실제로 「금시조」를 가지고 '미학입문'강의에서 B정도의 학점을 따낸 기말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매 수업시간마다 잠을 자고 노트필기는 커녕 교재도 제대로 읽지 않은데다가 기말시험에 30분이나 늦었던 것을 헤아린다면 내 보고서가 강의자의 마음에 썩 비켜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 보고서는 하드디스크 오류로 사라져버렸다.)

실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가진 허무함 때문에 오랫동안 이문열 독서를 기피해왔었다. 그것은 내게 어떤 빚으로 자리잡았던 것 같다. 이문열에 대한 가당찮은 칭찬이 나올 때에도 나는 그에 동의하지 못하면서도 반론을 내지 못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시를 쓰는 한 학우와의 대화 중에 이문열에 대한 칭찬이 들릴때에 나는 평소 자주 논리성을 결한 채 발설되는 그의 말을 이래저래 반박한 적이 있었는데, 그 학위가 내세운 당위의 방패는 이런 것이었다. "읽고 말하라."

그래서 숨책에서 『젊은날의 초상』신판을 발견했을 때, 부랴부랴 사두었던 것이다. 그러고서도 건드리고 싶지 않아 두었다가 어느 날 역시 시를 쓰는, 내가 늘 아까의 학우와 닮았다고 느끼는 후배에게 심심풀이로, '무얼 읽을까'하고 물었던 것인데 대답이 이 책이었다.

그러나 학우의 당위의 방패를 넘으려는 부지중의 내 노력이 있었는지, 내 성에의 이문열의 위상은 그대로이다. 내가 보기에 『젊은날의 초상』은 작가가 자신의 관점에 대해 늘어놓는 장광설의 변辯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있어, 이러이러한 일과 이러이러한 일과 이러이러한 일을 겪고서 이러이러한 것을 겪었으니 당연히 그 사람은 이러이러한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겠는가."를 길고 흥미롭게 늘여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한데, 그것은 참 위험한 생각이다. 위험하다 함은, 작가가 그 작품 구성을 언제부터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작품을 쓸 당시에는 자기 나름의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립한 후이기 때문이다. 다들 알겠지만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기란 생각과는 달리 엄청나게 힘들다. 소소한 문제, 이를테면 미감味感취향에 있어서도 자신의 자기에 대한 생각은 그다지 옳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생각에 자신을 갖고만다. '나는 생선을 싫어해'라는 거듭된 자기 암시는 진실로 그를 생선혐오자로 만들어버린다. (이건 내 경우이다. 어릴 적부터 가자미와 갈치를 좋아했던 나는 어느 때부터인가 이유없이 저런 자기암시를 걸었고 지금의 나는 회를 제외한 생선은 거의 먹지 않는다.)

일종의 연작소설로 볼 수 있는 『젊은날의 초상』은 「그해 겨울」의 발표 연후에 「하구」→「우리 기쁜 젊은 날」의 순으로 발표된 것이다. 발표연대순으로 읽으면 현재 자신의 관점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경치를 먼저 보여 독자들의 끄덕임을 이끌어내면서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그 성급함을 보완하려고 앞의 소설들을 발표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신세이야기를 즐기는 어떤 사람이 이러저러한 말을 내뱉고나서, 누군가의 어떤 지적에 "아, 맞다, 이걸 빼먹었다."하며 앞의 이야기를 그제사 던져주는 모습말이다. 실은 이것은 나처럼 말재주없는 사람의 전유물인데 이문열은 그걸 아주 훌륭하게 흉내내고 있다. 게다가 그걸 줄거리순으로 주욱 꿰었을 때에 주는 느낌은 더욱 강렬하다.

허망함. 이 주였다, 작품의 꼬리에 붙일 말이란.

다만, 책의 뒷편에 더부살이하는 중편「들소」는--물론 몇 가지 한계를 접어준다는 전제하에서--아주 흥미로웠다. 앞의 세 작품에서 느끼지 못했던 상상력이 거기에는 보였다. 실상을 말하면 「금시조」도 여기 뭉뚱그려 비판받을 그런 작품은 아니다. 훌륭하다.

젊은 날의 초상
이문열 지음/민음사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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