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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유종호가 보기에 한국 문학의 가장 큰 문제는 전통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결여의 인식은 단절의 인식에서 온다: "초서로부터 딜런 토머스까지의 앤솔로지에는 「청산별곡」에서 「청록집」까지의 앤솔로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적어도 근본적인 의미의 단절은 없다."(20쪽) 외적인 단절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청록집」의 시인들이 「청산별곡」을 전통으로 보지 않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화전민이 하듯이 전통이라는 새로운 밭을 일구어 나간다.

유종호가 일구려는 화전火田은, 의욕적인 그의 데뷔작에서부터 드러난다. 주로 저쪽의 문학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언어에 대한 자의식의 유곡幽谷"(157쪽)을 살펴본 뒤 그는 그 유곡이 "전통의 문제까지도"(158쪽) 포괄하는 근본적인 문제라고 선언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사조나 발표지를 중심으로 문학을 판단하던 선대의 비평가 그룹에서 벗어나 문학성을 판단하는 비평으로 직진할 수 있었다. 그가 전통의 결여를 뼈아프게 인식했던 이유는 그것이 우리 문학인들에게 "괴로운 자유"(21쪽)를 부과했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백지에서 출발함으로써 말라르메와는 다른 의미의 백지의 공포"를 느끼게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전통의 압력의 부재가 누구나 손쉽게 시를 쓸 수 있다는 무모성을 낳게 했"기 때문이다(22쪽).

5,60년대라고 전통 논의가 없었을 리 없다. 모르긴 몰라도, 서기보다도 단기를 애용했던 당시의 전통 논의는 오히려 더 뜨겁고 열정적이었을 것이다. 일례로 『한국문학사』(1949)를 쓴 조윤제는 그 서문에서 "실로 감개무량한 일이다. 나는 국문학사 강의의 첫 시간을 마치고 내 연구실로 들어가 뜨거운 눈물이 방울방울 내 옷깃에 떨어지고 있는 것을 뒤에 알았다"는 류의 애국애족의 센티멘틀리즘을 선보이면서, 그 센티멘틀을 "국문학사의 사명은 […] 그것이 현대국문학을 위함"이라는 전통-명제로 귀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유종호가 보기에 그런 전통론은 "명확한 개념규정 없이"(244쪽) 함부로 쓰여진 것이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1960년대의 문학의 과제가 소박한 전통개념의 수정과 이에 따른 시야의 확장에 있어야 한다고 믿고 싶다"(245쪽)고 고백한다. 그 수정과 확장은, 짐작 가능하듯이, 언어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한국어의 특색은 토착어와 (일산日産)한자어가 뚜렷이 구분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토착어가 그리는 전근대적 세계와 한자어가 그리는 근대적 모습 역시 뚜렷이 구분된다. 토착어가 가지는 심미적인 특색은 그가 계속해서 강조해오고 있는 부분이긴 하지만, 그는 이를 두고 "손쉬운 토착어의 조직과 세련은 결국 토착어의 전근대적 인간상의 형상에만 안주하게 될 위험성이 많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현대 한국의 진면목을 일실하고 일면적인 한국만을 고집하는 보수에의 길로만 일편단심 걸어가게 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오히려 그는 한국 문학의 가능성을 한자어에서 보았던 것 같다: "우리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은 토착어의 자리를 대치하여 가고 있는 생경한 언어군을 어떻게 예술적으로 형상해 가느냐는 점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송욱의 「하여지향何如之鄕」에 대한 그의 평가는 이와 같은 추론 과정에서 얻어진다. 「하여지향」이 주로 한자어를 통해서 씌어진 것을 두고 "우리말의 성격을 암시하는 중요한 사실"(71쪽)이라고 설명하는 그는 「하여지향」 속에서 엘리엇이 말한 '일상생활의 산문'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가 마지막까지 놓지 않는 시의 끈, 시의 존재이유raison d'être는 음악성이다: "그는 시의 음악성으로 산문에의 전락을 예방하고 있습니다."(64쪽) "김구용 씨에게서 보게 되는 산문에의 절대적인 굴종은 시의 영토를 확대해 보자는 의욕이 결국은 시 자체를 부정해 버리고 만 전형적인 예다."(309쪽) 그런 점에서 유종호는 시와 산문의 경계의 흩뜨림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그 사이의 경계를 더욱 분명히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언어의 자의식을 매개로 한 전통론의 하나가 되어있다.

유종호가 시와 산문의 경계로 언급한 음악성의 정체는 「산문정신고」에서 드러나 있다: "운율이나 리듬을 위해서 때로 현실의 사실의 왜곡이나 기피나 방기적放棄的 생략을 불사하는 정신, 바로 여기에 우리가 시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의 요체가 있다. 정말의 산문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현실 관찰의 내용이나 그 전달의 충실을 위해서 운율이나 리듬을 희생시키는 정신을 말한다. 아니 처음부터 운율을 개의치 않는 정신을 말한다."(162쪽) 이것은 시 작품이라는 "어떤 고립된 세계의 독자적 질서를 위해서 현실 사실들의 개입을 강력하게 거부"하는 것이 시요, 사회의 "전면적 진실"을 노리는 것이 산문이라는 설명으로(170-171쪽), 나아가서는 사례로 든 황순원의 시적 소설이 우수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산문정신과는 떨어진 것이라는 선언에까지 이어진다(174-175쪽).

그가 세우려는 전통의 윤곽은 여기서 좀더 분명해진다. 그가 바라는 전통이란, 시와 산문이 '음악성'이라는 기준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정도를 지키면서 균형을 잡아가는 모습이다. 그것은 당시의 "시단에는 시도 산문도 될 수 없는 문자의 집단이 너무나 많이 범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구용의 실험이 갖는 의미에 공감하면서도 그것을 문제삼고, 김승옥의 소설을 상찬하다가도 마지막에서 우려를 표명하고, 서정인의 소설을 상찬하다가도 마지막에서 걱정의 한두 마디를 삽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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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유종호의 또다른 빛나는 부분은 그의 휴머니즘의 거부에서 드러난다. 「인간 부재―한국 문학에서의 휴머니즘」, 「오열하는 휴머니즘―한 상투 문구에의 의혹」 등의 두 글은 휴머니즘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고 있고, 「화해의 거부―하근찬」는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휴머니즘으로 경도되지 않은 하근찬을 상찬하는 글로 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의 휴머니즘은 도식적이고 편견적인 휴머니즘이다. 그는 한국 문학에서의 휴머니즘은 ① 일편단심 선의의 인간 ② 그 배율背律로서의 악한 ③ '돌아온 탕자'의 셋 가운데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고 설명한다.

편견적이고 도식적인 휴머니즘이 지닌 가장 큰 문제점은 조잡한 "예정조화"(420쪽)에 있다. 모든 갈등과 번민은 다가올 "예정조화"를 위한 장치일 뿐인 것이다. 이것은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문학이 사회의 문제를 진지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거짓으로 잠시 해결해버리려는데서 그 문제점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동족방뇨凍足放尿식 해결은 사회의 문제가 기실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달려 있다는 식으로 쉽게 전이된다. 이 사이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세계관을 우리는 근대 초부터 일찍이 겪어왔던 것이다: "이광수가 똘스또이를 통해서 휴머니즘을 표방한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그의 똘스또이 이해는 어쨌든 '자기의 곤궁상태의 원인이 자기들 자신 속에 있지 않고 외부의 여러 조건 속에 있다는 생각처럼 인간에게 유해한 것은 없다'는 수긍할 수 없는 똘스또이 만년의 명제를 그대로 채용하고 있음은 사실이다."(362쪽)

이것은 특히 지식인들이 갖는 특질이다. 지식인들이 항시 모델로 삼은 것은 일본이나 일본을 통해 본 서구였기 때문에 그들은 서구와 한국(조선)의 "낙차"가 절망적인 낙차로 보인다(366쪽). 여기서 지도자적인 면모를 띠는 사람은 이광수류의 '민족'론자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효석류의 '초속주의'로 떨어진다는 것이다(362쪽). 이 묘한 새것 콤플렉스는 지식인이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요지이다.

3

그러나 생각해보자. "동양 최고의 고전의 하나인 『시경』이 민요를 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나 사관仕官으로 실패한 서생이 전란의 시대에 남긴 단장斷腸의 시편들"(456쪽)을 들어 사르트르류의 시 인식을 거부하고 시와 참여의 문제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비교적 뒤의 입장과 비교해보자. 서구의 문학자들을 계속해서 바라보아 얻어낸 '언어의 자각'이나(「언어의 유곡」), "우리의 당장의 의무는 오히려 저쪽에서 시험이 끝난 것이라 할지라도 한번쯤 완벽의 극치까지 가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247쪽)는 식으로 지각생을 자인하면서 전통을 마련하려는 조바심을 내는 모습은 새것 콤플렉스의 다른 모습이 아닌가. 그렇게 본다면 청년 유종호의 전통 확립의 의욕과 새것 콤플렉스의 경계는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혹은 우리는 그것을 4월 혁명 이후의, 유종호의 변모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휴머니즘에 관한 두 편의 글은 1961-62년에 씌어진 것이고 지식인론과 하근찬론은 모두 둘째 책인 『문학과 현실』에 실린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로 현재까지의 그가 보여주는 완강한 시의 옹호는 그 같은 가설을 세우기 힘들게 하는 측면이 있다.
Posted by 엔디
TAG 비평, 서평
現代詩는 낭만을 배반합니다. 近代의 詩는 낭만을 긍정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면서 이중적인 태도를 취해 왔지만, 현대시에서 그런 것은 통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제 똑.똑.해졌기 때문이죠. 센티멘틀이 바로 낭만임을 알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낭만, 즉 로망roman이란 말은, 사실 불어에서는 소설, 즉 이야기란 뜻이거든요.

낭만은 통속적 이야기, 전개가 뻔한 이야기, 그것입니다. 삶은, 삶은 그것과 어떤 관계일까요. 그것은 인환의 말대로 "(인생이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것일까요?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이 대목에서 인환에게 박수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인환은 그렇다면 이미 시인은 아닙니다.

詩는 새로운 삶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혁.명.시.란 419, 518, 1789, 1917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 곧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新生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詩가 말言의 사원寺인 것도 그 때문이지요.

공원길을 함께 걸었어요
나뭇잎의 색깔이 점점 엷어지면서
햇살이 우릴 쫓아왔죠
눈이 부시어 마주보았죠
이야기했죠
그대 눈 속의 이파리는 현실보다 환하다고

그댈 사랑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워
나뭇잎이 아름답다고 했죠
세상 모든 만물아 나 대신
이야기하렴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그러나 길은 끝나가고
문을 닫을 시간이 왔죠
그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기 위하여
나뭇잎이 아름답다고 했죠

- 「고독에 관한 간략한 정의」全文


노혜경의 시도 그 근저에 머물고 있습니다. 세상의 사랑은 많이 실.패.하는 것 같지만, 사회가 유지되는 걸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나 결국은 사랑을 찾고, 인류를 만들어 갑니다. 그런데 왜 성복은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고 했을까요? 노혜경의 시가 3련까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대시는 무서운 시입니다. (아직도 근대를 벗어나지 못한 예술은 영화입니다. 만화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아직 예술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이들 장르에서는 아직도 죄의 개념이 있고, 감독이 말이 많습니다. 그건,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대단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지요. 무서운 오만함입니다.)

現代詩는 그러므로 모든 관계를 否定합니다. 먼저 작가auteur와 작품œuvre의 관계를 부정합니다. 남는 것은 다만 글texte일 뿐입니다. 더구나 그 글은 쉿! (믿을 수 없는 글입니다…)

라자로가
거의 썩은 몸에 붕대를 친친 감고
동굴 입구에 나타났을 때
저 더러운 몰골은 죽은 자/산 자에 대한 모욕이라고
아무도/모두가 외치지 않은/외친 것은
(기록자는 신중히 삭제한다)

허공 중에 흩어져버린 살과 뼈를 급히 끌어 모아 다시 사람이 되는 일이
생각처럼 쉽고 즐거운 일이었겠냐고
라자로가 말하지 않은/말한 것은
(기록자는 한 줄 더 삭제한다)

너무 긴 세월을 메아리치고 있는
(나는 알아야 한다)
지워져버린 글자들
내가 죽여버린 글자들
잊을 수 없는 이야기들

- 「진기한 기록」全文

정신분석학 이래로 작가의 모든 말은, 이미 떽스뜨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의 떽스뜨에 이미 수많은 가위질이 행해졌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모든 詩는 '진기한 기록'일 뿐입니다. 그래서 시는 현실에서 두 단계나 떨어진 IDEA에 불과합니다. (모든 예술이)

노혜경의 시집 제목 그대로 우리의 모든 시는 『뜯어먹기 좋은 빵』에 불과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Then Jesus said unto them, Take heed and beware of the leaven of the Pharisees and of the Sadducees." (Mattew 16:6)

…그러나 바로 그 시가 다시 우리의 삶이 되기 시작합니다. 무섭고도 맹렬한 기세로. 기다리던 사람이 오지 않기 시작합니다. 삶이 지워지기 시작하고, 사랑이 실.패.하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게 現代입니다. (종말론자들이 이해되시지요?)



거기서 우린 만난 겁니다. 종말론자들처럼. 사랑.

2004. 10. 1.


뜯어먹기 좋은 빵
노혜경 지음/세계사

Posted by 엔디
김혜순의 시는 '몸의 시'이다. 인간이 육체와 욕망을 발견하게 된 것이 르네상스 이후라고 한다면 그때부터 생산되었을 수많은 시들에 몸의 묘사나 언급이 안 나올 리 없지만, 김혜순의 시를 '몸의 시'라고 하는 것은 그보다 더 나아간 의미에서이다. 대개의 경우, 시에서 나타나는 몸은 주체이거나 대상이다. 1인칭의 몸이 다른 대상을 욕망할 때, 그 '몸'은 주체의 몸이다. 또 1인칭이 3인칭의 몸을 욕망할 때, 그 '몸'은 대상의 몸이다. 그런데, 김혜순의 시에서 '몸'은 주체이자 곧 대상이다. 이 강렬한 나르시시슴narcissisme, 그것이 김혜순 시의 본질이다.

김혜순 시에서는 특징적으로 물의 이마쥬가 무척 강렬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거기서 물의 이마쥬는 자세히 살펴보면 실은 거울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의 경우에는 나르키소스 자신이, 그리고 거울의 경우에는 이상李想이 예증적으로 그렇듯이 물과 거울은 자기 자신과 만나게 하는 동시에 이를 단절시키는 기능을 주로 한다. 때문에 나르시시슴의 끝은 늘 불행하다. 그러나 이처럼 불행으로 끝나는 나르키소스 이야기는, 벌써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상정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김혜순의 시에서 보이는 나르시시슴과는 거리가 있다.

「물 속에 잠긴 TV」는 그 징후가 보이는 작품이다. 첫째 연 맨 앞에서 화자는 "TV 욕조 속에서 하루 종일 나오지 않는 그녀를 들여다"본다. 그런데, 셋째 연 첫 행에서 화자는 앞서의 진술을 조금 바꾸고 있다. "나는 이어서 그녀라는 이름의 TV를 들여다보네." 그녀가 "TV 욕조 속"에 있다는 진술과 "그녀라는 이름의 TV"라는 진술은 거울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엇바뀜이다. 거울은 항상 자기자신을 '주인공'으로 비추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울은 주체와 대상 사이를 단절시키기도 하지만, 주체와 대상이 있는 문맥contexte을 희석화시키는 기능도 한다. 그래서 나르시시슴은 생산성이 없는, 망각의 시학이 될 가능성이 짙다. 더구나 목욕이라는, 가장 강조된 자기애自己愛가 그 중심에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나르키소스는 아사餓死했던 것이다.

하지만 김혜순의 위의 시에서 물(거울)과 등치되는 매개로서 'TV'가 관련되고 있다는 것은 시사적이다. 거울과 TV는 주체와 대상을 만나게 하면서 동시에 단절시키는 유사점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밖의 기능은 모두 서로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거울이 자기자신을 비추는데 비해 TV는 자기자신이 아닌 것을 비추고, 거울이 문맥을 희미하게 만드는데 비해 TV는 문맥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거울 속에서 우리는 자신 속에 함몰되는데, TV 속에서 우리는 TV로 표상되는 세계 속에 함몰되어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화자는 그 TV를 거울삼아 그 속에서 자기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정 뉴스가 끝나면 그 뉴스에 이어서
그 뉴스를 견뎌내는 건 바로 그녀
오늘밤 자정 뉴스는 오십 명의 넥타이 맨 남자들을 보여주었지만
여자들이 맡은 배역은 불에 타 죽은 아이를 껴안고
몸부림치며 우는 역할뿐

화자는 TV속에 등장하는 "여자들" 속에서 자기자신을 보는 것이다. 본래 TV의 특성은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그래서 마치 우리가 TV를 지배하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하는 데에 있는데, 이 시의 화자는 그렇게 TV를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그 뉴스를 견뎌내"고 있다. 그녀의 TV 시청은 "점점 더 깊은 땅속으로 끌려들어가서는 / 묻혀서도 숨쉬는 허파처럼 / 끝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TV 속에는 "여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의미심장한 2연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3연에서 앞서 인용했던 '주인공'이 된 "그녀"가 TV속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계속 "이어서" TV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시에서 TV가 거울역할을 대신했다는 것은 김혜순의 나르시시슴이 개인차원을 넘어선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거울은 자의식만을 강조하고 TV는 문맥만을 강조하는데 비해, "물 속에 잠긴 TV"는 두 가지 역할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이 TV에서부터 김혜순의 사회학적 상상력은 시작된다. télévision의 télé-가 본래 '원격遠隔의-'라는 뜻을 가진 접두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여기서 김혜순이 표현한 여성의 자의식이 사실은 보다 넓은 파문을 통해 퍼질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얼음 비단, 얼음 아씨」는 바로 그 점을 집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시이다. 길을 걷고 있는 화자를 누군가 안는다. 그 '누군가'는, "천사"로 지칭되고 있는데, "아주아주 멀고 먼 곳"에 있는 이다. 그는 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을 환하게 밝히며 들어"오고, "핏줄마다 살결마다 스며[든]"다. 그런데 여기서, "천사"들이 내 속에 있다는 것에서 사실은 나도 "천사"들을 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함께 안고s'embrasser있는 것이다. 생각을 더 진전시켜보면, "천사"들이 사실은 화자 자신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사"들은 화자의 안에 있기 때문이다. 곧, 화자의 자의식 속에 있기 때문이다.

"천사"와 화자를 연결시켜주는 것은 "氷蠶"이다. "氷蠶"은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누에인데, 서리와 눈 속에서 나며 이 누에고치에서 나온 실로 짠 천은 젖지도 않고 타지도 않는다고 하는 전설상의 동물이다. 더불어 얼음 빙氷자가 예비하고 있는 것은 화자의 눈물이다. 화자의 눈물은 "효모"로, "솜털"로 "가볍고도 환한" 이마쥬로 제시되어 있다. 눈물이면서 환하고 눈물이면서 젖지도 타지도 않는다고 하는 진술은, 그 눈물이 결코 소모적이고 자기 함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그 눈물은 생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눈물(곧, "氷蠶")로 화자와 "천사"가 튼튼하게 엮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눈물의 이마쥬는 「자욱한 사랑」에서는 "눈보라"로 바뀌어 나타난다. "이토록 자욱한 눈보라" 때문에 화자는 "헤집고 갈 수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눈보라"가 부정적인 이마쥬만이 아닌 것은 바로 이어서 나온다.

세상에! 돌림병처럼 자욱한 눈보라!
이 병 걸리지 않고는 네 몸을 건너갈 수가 없겠구나

여기서 우리는 "눈보라" 역시 거울처럼 만남과 단절을 함께 주는 매개체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눈보라"는 거울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매개체이다. 거울은 만남을 주는 척하면서 실은 단절을 주는 매개체라면, "눈보라"는 단절을 주는 것 같은데, 사실은 만남을 주는 매개체인 것이다. '눈보라 돌림병'에 걸리기만 하면 "네 몸 속"으로 건너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돌림병"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돌림병"이란 말 자체와 "결핵"이 피를 상기시키고 있고, "어린 새"와 "아가의 심장을 만들어오시는 그분이 / 아무도 몰래 넣어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주머니"가 자궁(子宮)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월경menstruation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여성성을 말하는데 있어서 월경이 갖는 위상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것이 여성만이 할 수 있는 것, 곧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과 관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레위기Lévitique 이래로 늘 부정하다고 여겨졌고 그것이 여성이 열등하다는 증거로까지 쓰여왔던 것이다. 여기서 월경을 일종의 병病으로 지칭하는 것은 '월경'이라는 단어가 종종 갖는 사회적 문맥과 관계가 깊다. 화자가 "나 어떻게 이 숨찬 눈보라 건너가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그러나 모든 여성들은 그 눈보라를 건너가야만 하며, 그 눈보라, 곧 "氷蠶"을 통해서 먼 곳에서도 서로를 안을 수 있는 것이다.

여성의 이와 같은 형상화는 '어머니로서의 여성'이라고 불릴만 하다. 바로 그 점에서 「어머니 달이 눈동자 만드시는 밤」은 좀더 상세하게 이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어머니는 "달"로 표상되고 있는데, 이것은 앞서 서술한 '월경'과 관계가 깊다. 월경을 '달거리'라고도 하는 것이다. 달에서 어머니를 보는 것은 아르테미스 신을 상기시킨다. 아르테미스 신은 달의 신이며 수렵의 신인데, 달의 둥근 굴곡이나 활의 둥근 모습이 만삭의 배와 같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아르테미스 여신은 달의 신이자 출산의 여신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 문맥은 좀더 넓게 펼쳐지고 있다. 화자가 "걸어들어"가는 곳이 바다이기 때문이다. 왕왕 모성성을 드러내는 바다의 모티프들이 여기에 드러나고, 밀물과 썰물을 두고 "우리 어머닌 한 천 년째 바다를 휘젓고 계시다"고 쓰고 있는데서 볼 수 있듯이, 여기서의 어머니는 개인적인 어머니가 아니라 세계의 어머니, 생명의 창조자로서의 신이다. 되짚어보면, 「자욱한 사랑」에 나왔던 바로 그 "네가 태어나기 전 먼먼 옛날부터 / 뜨거운 손길로 아가의 심장을 만들어오시는 그분"이 바로 어머니인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라노스에서부터 시작되는 남신들의 계보는 "바다 깊이 잠들어"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아버지'에게 배꼽이 있다는 것이다. 배꼽은 탯줄의 흔적이므로, 남신인 '아버지'도 실상은 '어머니'로부터 온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와 아퀴나스의 제1원인으로서의 신의 우주론적 증명에서 보이는 남신의 역사도, 사실은 여신이 없다면 있을 수 없다는 거대한 인식의 전환이 여기에 보이는 것이다. 아퀴나스를 풍자하여, 제1원인으로서의 '어머니'는 "바다를 휘[저]"어서 생긴 "파도란 파도 / 그 모든 파도의 물방울 방울마다" 맺히는 "영롱한 눈망울"을 만들고 있다.

그 '어머니'는 '할머니'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김혜순은 일찍이 씌어진 「딸을 낳던 날의 기억」에서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
거울 안에 어머니가 앉아 계시고
거울 열고 다시 들어가니
그 거울 안에 외할머니가 앉으셨고
외할머니 앉은 거울을 밀고 문턱을 넘으니
거울 안에 외증조 할머니 웃고 계시고
외증조할머니 웃으시던 입술 안으로 고개를 들이미니
그 거울 안에 나보다 젊으신 외고조할머니
돌아 앉으셨고
그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
또 들어가니
또 다시 들어가니

와 같이 쓴 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혜순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세계의 어머니, 곧 가이아로서의 대모라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어머니와 할머니와 증조할머니와 고조할머니와 ……로 이어지는 연대기-계보는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우주적 친연성의 필요조건이 된다. 이런 연대기가 있었기 때문에 "氷蠶"의 정신감응télépathie이 가능했던 것이다. 「잘 익은 사과」에서 맨 처음에 들려오는 소리들은 이와같은 우주적 친연성을 예표해주는 장치이다. 그런 우주적 친연성은 특히 화자가 "고향 마을"로 가고 있기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는데, 그 "고향 마을"에는 다름아닌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노망든 할머니"가 바로 대모다, 가이아다, 제1원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라 하더라도 이 할머니 역시 언젠가 '어머니'였음에 틀림없다면, 화자가 그 할머니에게 우주적 친연성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처사라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김혜순적인 나르시시슴이다.

그러나 화자는 더이상 "氷蠶"의 이불 속에서 있을 수는 없다. 「어머니 달이 눈동자 만드시는 밤」에서 화자는

그러나 시방은 다시금 내가 그 바다에서 걸어나올 시각
나는 가슴에 나란히 포갰던 손을 풀고
오대양 육대주 넘실거리던
내 두 눈동자의 주름을 거두어 들고
이불 밖으로 몸을 솟구쳐올린다

고 쓰고 있다. 화자가 그 아름다운 친연성의 천국에 "천사"들과 함께 있을 수 없는 이유는, 그녀가 여전히 "자정 뉴스는 오십 명의 넥타이 맨 남자들을 보여주"는 '지금-여기'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여기'를 보여주는 시는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의 다른 시편들에 훨씬 많은데, 특히 표제시인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는 시인이 직접 남신에게 항의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남신의 역사(달력)는 지금껏 본 여신의 역사보다 훨씬 지루하게 그려져 있다. 남신들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며, 지겨운 열두 곡의 노래를 계속해서 틀어댄다. 생명의 탄생과 관계하는 여성성의 환희와 비교해보면 남성의 역사의 권태로움은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사실 「물 속에 잠긴 TV」만 보아도 그런 권태는 충분히 드러난다. 넥타이 50개가 쉴새없이 들락날락하는 TV!

권태는 시의 안과 밖에 있는 것이다.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김혜순 지음/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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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선생님의 『한시 미학 산책』을 읽었다. (『정민 선생님과 함께 읽는 한시 이야기』를 지하철에서 하도 많이 발견한 탓에 '정민 선생님'이 굳어버렸다. 그렇지 않으면, 대개 '선생' 정도로만 이를텐데. 하지만, 훌륭한 책을 쓴 사람은 '선생'보다는 '선생님'이 옳다. 고등학교 시절 은사님은 중국에서는 존경의 뜻으로 '子'를 붙이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선생님'을 붙인다고 하셨다.) 한자와 한문문법에 익숙지 않아 보다 깊은 독서를 하기는 힘들지만, 그런 나에게도 이 책은 재미있으면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책이다. 일주일에 한 편씩 한자 공부를 겸해 한시 한 편을 보면 좋겠다. 잊지 않으면 말이다.

여담이지만, 『한시 미학 산책』에 모란과 고양이에 얽힌 설명이 나온다. 이야기의 시작은 당 태종이 선덕여왕에게 모란 그림과 꽃씨를 보냈는데, 선덕여왕이 그 그림에 나비가 없음을 보고 그 꽃에 향기가 없음을 미리 알아냈다는 『삼국유사』의 한 기사이다. 정민 선생님은 모란 그림이 나비가 없음은 나비 '접蝶'의 중국 발음은 '디에'로, 팔십늙은이 '질(늙을老 아래 이를至)'과 발음이 같아, 나비는 곧 팔십늙은이를 쌍관雙關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 나비를 그리면 흔히 고양이를 같이 그리는데, 이는 고양이 '묘猫'자의 중국음인 '마오'는 칠십늙은이 '모(늙을老 아래 털毛)'와 같아 이를 쌍관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말을 듣고 퍼뜩 생각난 것이 덩샤우핑鄧小平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었다. '묘猫'가 '마오'로 읽힌다면 '흑묘백묘론'은 얼마쯤 '마오'쩌둥毛澤東을 풍자한 것은 아닐까? 중국말을 모르니 알 수 없지만, 이만한 상상은 해롭지도 않고 재미있으니 그걸로 족하다. 물론, 중국말을 아는 이가 대답해주어도 좋겠다.


한시미학산책
정민 지음/솔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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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예술작품이 갖추고 있어야할 여러 조건 중에는 새로움도 포함된다. 탄탄한 줄거리나 재미있는 볼거리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이 전부는 아니다.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좋은 예술작품이 되기 어려운 까닭은 여기에 있다.

작품의 전체적인 틀은 성장소설Bildungsroman의 원형을 갖고 있다. '견주堅柱' 혹은 '견자犬子'가 서자로서의 불만을 품고 있다가 어떻게 당대 최고의 칼잡이가 되고, 또 거기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이 만화가 그리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전통적 메타포들이 동원되었다. 메타포들이 이 작품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엄청나다. 메타포를 빼면 짧게 요약한 줄거리에 불과할 정도다. 이를테면 '방짜'의 메타포가 그렇다.

방짜 메타포는 견자가 스승 황정학과 함께 처음으로 간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황정학은 견자에게 방짜의 메타포를 이해하라, 고 명령한다. 그리고 견자가 그것을 진실로 깨닫는 부분은 마지막 결투에서이다. 또는 '구르믈 버서난 달'의 메타포가 그렇다. 그것이 다시 '한계'의 메타포로 바뀌는 과정이 작품의 뼈대를 이룬다.

문제는 그런 메타포들이, 그리고 그 과정들이 지나치게 상투적이라는 데 있다. 눈 멀쩡히 뜬 사람을 '장님'이라고 하는 것이나, 어디어디에서 자신을 찾으라는 명령이나, 스승의 죽음의 방식이나 시기도 여느 무협지에나 다 있는 것을 만화로 끌어왔을 뿐이다.

어느 대학 만화학과 교수는 책 뒤에 라깡이나 알뛰쎄르를 인용하며 작품에 칭찬의 침을 바르고 있지만, 그가 인용한 대로의 라깡과 알뛰쎄르라면 이 작품 아니라 어느 곳에나 있는 라깡과 알뛰쎄르다. 더구나 이 작품에서 말하는 한계는 그가 지적한 대로 "승리는 눈물이며 더 커져버린 분노일 뿐"인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오히려 '나를 찾는 것'을 말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계는 알고보면 자유'라는 식의 안이한 상상력도 이 작품의 큰 결점으로 그대로 남는다. 더구나 그 결론도 결국 메타포로 일구어낸 결론이기 때문에 정치精緻하지 않다. 그래서 이 작품의 큰 뼈대는 결국 신비주의로 남는다. 좀더 나아가자면, 일종의 '아는 체'고 '겉멋'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아무 것도 꿰뚫지 못하면서 꿰뚫은 체하는 만화다. 삶의 계란을 품을 수 없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1
박흥용 글 그림/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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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한 것은 하이데거였다. 언어가 먼저인지 '존재'가 먼저인지가 '닭과 달걀의 변증법'과 같은 쓸모없는 싸움이라 일컫더라도, 우리 '근대'사 속에서 등장한 서구어의 번역어들을 보면 하이데거 쪽의 손을 은근히 들어줄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존재'나 '근대'가 바로 그 번역어들이다. '사회,' '개인,' '권리'와 같은 것들이 바로 그 번역어들이다. 이들 번역어들의 특징은 시쳇時體말로 '썰렁하다'는 것이다. 뜻과 맛은 다르지만 '지나치게 학구적이다'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서구어에서 être, moderne, société, individu, droit같은 낱말들은 평소에 자주 쓰이는 말들이다. 대표적으로 '사회'같은 낱말은 우리 현실에서는 거의 글말文語에서만 쓰인다고도 볼 수 있지만, 영어의 society는 입말口語과 글말에 두루 쓰이는 말인 것이다. 2003년 출간된 4판 『롱맨현대영어사전Longman Dictionary of Contemporary English』의 society 항목을 보면 이 낱말이 글말written에서 자주 쓰는 1000낱말 중의 하나인 동시에, 입말spoken에서 자주 쓰는 1000낱말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부터 생긴 것일까. 대개의 번역어들을 '근대' 일본에게 빚지고 있는 우리는 일본을 돌아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바로 '근대' 일본에서 번역어들이 어떻게 생겨나고 정립되었는가를 추적하는 글이다. 말하자면 번역어의 계보학을 세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각 낱말의 세세한 계보는 책 자신에게 맡겨두고 그 맨 아래층에 깔린 저자의 생각을 읽어보면 이렇다. "일반적으로 어떤 번역어가 선택되고 남는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문자의 뜻으로 보아 가장 적절한 말이 남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가장 번역어다운 말이 정착한다." (177쪽)

지금은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한겨레 신문 이상수 기자는 『창작과 비평』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말 철학 용어에서 생소한 한자가 지나치게 많아 우리에게 '가짜 어려움'을 주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최근에 '우리말로 철학하기'의 운동이 일고 있는 것도 실로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윤구병 선생 같은 분도 싸르뜨르의 L'Être et le néant의 우리말 제목은 '있음과 없음'이 훨씬 더 적합하고 원어의 뜻에도 가까운데 『존재存在와 무無』로만 옮겨지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고민은 사실 일본에서도 일찍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소개하고 있다. 후쿠자와는 그의 벗과 대화하면서 "자네와 같은 이들은 서양 원서를 번역하는 데 한결같이 네모난 문자(한자를 뜻함)만 사용하려 하는데 그것은 어째서인가?"(45-46쪽)라고 물으며 서양어를 자연스러운 일본어로 옮겨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했던 것이다.

우리도 '피투성被投性의 존재'같은 말을 버리고 '던져진 존재'로 가려고 하고 있다. 후쿠자와는 후년에 할 수 없이 스스로의 소신을 꺾고 '사람들이 많이 쓰는' 번역으로 전회했다고 하는데 우리의 이번 시도는 어떨까. 언젠가 우리말을 대상으로한 '번역어가 생긴 유래'라는 책이 나오길 기대한다.


번역어 성립 사정
야나부 아키라 지음, 서혜영 옮김/일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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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와의 싸움은 지금의 현실에서 소중하다. 이 시대에도 아직 신비주의가 횡행하고 있는 탓이다. 지금 우리가 가진 신비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를테면 '죽음'이 있다. 어느 시인을 두고, 그의 죽음이 그의 시를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이나 그가 스스로의 죽음을 시에서 예견했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신비주의다. 그런 식의 신비주의는 문학을 정치하게 보려는 노력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그것은 올바른 문학이론이나 문학비평이 될 수 없다. 그것은 현대비평이 혐오해마지 않는 실증주의와 인상주의의 단점만을 수용한 최악의 읽기다.

수잔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은 질병이 가지고 있는 신비주의를 하나하나 검토해본 책이다. 친인척들을 병으로 잃은, 그리고 스스로도 유방암을 비롯한 여러 병들을 겪은 저자는 '병은 고쳐야할 그 무엇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특히 결핵과 암과 관련된 문학작품에 대해서 저자는 깊숙이 고찰하고 있는데, 그 대상이 문학작품이라는 점은 주목에 값한다. 저자에게 있어서 문학은 신성한 어떤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병에 대한 오해만 증폭시켜온 기제일 뿐이다.

실제로, 문학은 오래 전부터 사실과는 구별되는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때문에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왼손잡이가 유전되는 것으로 설정된 과학적 오류라든가, 블레이크가 「갓난이의 기쁨」에서 난 지 이틀밖에 안 된 아이가 미소짓는 것을 묘사한 것이라든가, 윌리엄 골딩이 『파리대왕』에서 근시 안경으로 불을 피우도록 한 것은 전체적인 진실과 대비해서 지극히 사소한 거짓이라 그다지 중요한 사항으로는 여기지 않는 것이 보통인 것이다(유종호 1994, 48-51). 하지만 위의 예들에서는 확실히 그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다 할지라도, 손택의 여러 예들을 우리가 쉽게 멀리 물리칠 수 있을지는 생각해보아야할 일이다.

이를테면, 카프카가 자신의 결핵을 두고 '정신의 병이 넘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을 보자. 카프카의 이런 생각은 지극히 신비주의적이다. 결핵은 결핵일 뿐이지, 문학을 위한 선물도 기제도 아니다. 그에게 결핵이 없었다면 그의 문학은 훨씬 치졸했을 것이라는 인식도 마찬가지로 신비주의다. 카프카의 질병이 그의 문학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은 질병 그 자체가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카프카가 그것을 '정신의 병이 넘친 것'으로 은유화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는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탄생시킬 수 있었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결국 자신을 치료할 수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문학의 본질적인 목적과 같은 것과 만나게 된다. 예술은 본래 치료를 위한 행위였던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아름다운 작품이라 해도 그것이 인간의 치료의지를 박탈하고 그것을 신비적인 것이나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진실에 반反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이 과연 진정한 아름다움일까, 하는 점을 깊이 숙고하게 한다.

물론, 이런 이분법적 사고로는 카프카의 문학에 대한 일면적인 평가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카프카의 문학이 일관되게 가지고 있는 질병의 모티프와 그 은유가 사실은 어디에 기대고 있는지를 아는 일은 오히려 그의 떽스뜨texte를 다양하게 볼 수 있기 위한 원동력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를 평가해주어야 할 것이다.

* 유종호(1994),『문학이란 무엇인가』개정판, 민음사.


은유로서의 질병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이후(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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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집이 가져야만 하는 덕은 사색과 운율과 새로움이다. 그 중에서 시를 시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운율이다. 운율韻律은 그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운韻과 율律이다. 운韻을 쓰지 않는 우리시에서는 율律로만 보더라도 그다지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은 좋은 시집이 가져야만 하는 사색과 운율과 새로움을 모두 방기放棄하고 있는 시집이다. 그 중에서도 운율을 깡그리 망각하고 있다. 그의 시가 이른바 산문시poème en prose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산문시도 훌륭한 운율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여자네 집』의 산문시는 그런 운율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나는 방금, "『그 여자네 집』의 산문시"라고 말했다. '김용택의 산문시'가 아닌 이유는 그가 이미 훌륭한 산문시를 우리에게 보여준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 여자네 집』에 실린 사진과 머리의 모양 및 길이와 입은 옷과 옷에 펜 꽂은 모습과 배경이 같고 표정까지 비슷하여, 한날 한곳에서 찍은 게 분명한 다른 사진이 실려있는, 그의 첫 시집 『섬진강』에는 이런 시가 있다.

강 건너 산밭에 하루 내내 스무 번도 더 거름을 져 나르셨단다. 어머님은 발바닥이 뜨겁다며 강물에 발을 담그시며 자꾸 발바닥이 뜨겁단다. 세상이야 이래도 몸만 성하면 농사 짓고 산느 것 이상 재미있고 속 편한 게 어디 있겠냐며 자꾸 갈라진 발바닥을 쓰다듬으시며 자꾸 발바닥이 뜨겁단다.
-「섬진강9」부분

마침표까지 턱턱 찍어가며 거침없이 쓰인 줄글이지만, "자꾸," "발바닥"과 같은 낱말들의 되풀이와 "-단다"로의 종결어미 통일로 운율감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일종의 보격步格pied도 적극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보다 더 산문에 가까운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피와 땀과 살을 섞었던 땅, 버림받고 무시당하면서도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다 했던 땅, 그래도 정 붙여 살았던 땅, 나이 서른다섯에 이사라니.
동 구 정자나무를 빠져나간 차는 새마을 신작로길을 잘도 달리며 불빛을 여기저기 쏘아댔다. 차 꽁무니의 빨간 불빛이 동구길을 아주 사라진 후에도 사람들은 회관 마당에 덩그렇게 남아 서로 얼굴들을 외면한 채 앉거나 서서 담뱃불을 빤닥이며 캄캄한 앞산을 바라보거나 땅을 내려다보며 그와 살 비벼 살아온 날들을 생각하며 헤성헤성한 마음들을 어찌하지 못하고 하나둘 헛기침을 하며 어둑어둑 헤어졌다.
-「섬진강16 -이사」부분

여기서는 "헤성헤성한 마음"이나 "어둑어둑 헤어졌다"에서 보듯이 모양을 흉내낸 말들과, "[……] 땅, [……] 땅, [……] 땅"에서 보이는 점점 세지는强化 말들의 사용으로 운율감을 얻어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도 읽으면 어떤 보격이 느껴진다. 특히 "차는 […] 잘도 달리며"에 주목해보자.

사람들은 차를 타고 씽씽 잘들도 달린다. 그러나 나는 천천히 걸어간다. 아침에 올 때 강물에 둥둥 떠 있던 오리, 빨간 발을 허공에 내저으며 자맥질을 하던 오리 없다. 틀림없이 누군가 총질을 했을 것이다. 새들과 나무와 꽃과 물이 하늘과 바람과 물과 어울려 노는 꼴을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들판은 텅 비어 있다.
-「나는 집으로 간다」부분

"잘도 달리며"와 "잘들도 달린다"의 운율상 차이는 명백하다. 앞엣것은 읽히며 뒤엣것은 읽히지 않는다. 여기서 읽히지 않는다는 것은 좀 문제를 갖고 있다. "잘들도 달린다"는 말이 "씽씽 […] 달[리]"지 않기 때문이다. 좀더 읽어보면 "나는 천천히 걸어간다"고 쓰여 있다. "천천히." 하지만 이 시를 소리내 읽어보면 결코 느리게 읽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줄글이 뭉텅이씩 지나간다. 왜 그러냐 하면, 율律이 없기 때문이다. 율은 멈춤休止에서 생기고, 그 멈춤은 자연스러운 숨呼吸이다. 그것이 없으면 좋은 시가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이 글이 아주 산문으로 쓰였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자맥질을 하던 오리 없다"는 토씨가 없어서 (산문으로서는) 이상한, 시문장이다. 그러나 "틀림없이 누군가 총질을 했을 것이다. 새들과 나무와 꽃과 물이 하늘과 바람과 물과 어울려 노는 꼴을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에서 우리는 어떠한 운율도 발견할 수 없다. 그것은 어절로 잘게 쪼개지거나 문장으로만 있어 전혀 쪼개지지 않는다.

그건 이야기histoire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책끝에 붙은 이문재 시인의 "시에서 이야기가 승하면 언어는 죽는다, 라고 나는 믿어왔"지만 이 시집을 보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는 고백은 과장이거나 좀 우스운 말이다. 지겹도록 들어온 세계 문학의 첫 페이지 호메로스에서부터 우리는 이야기가 승한 예를 보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이야기가 승하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이야기가 승하든 죽든 어떻게 그러하느냐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는 이 시집에서 드물게 만날 수 있는 좋은 시 중 하나인데, 우리는 여기서 사색과 운율과 새로움이 함께 어울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별은 손끝에 있고 /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고 시인은 툭 잠언aphorisme을 던지고 왜 그런지를 물을 독자들에게 풀잎이나 햇살 따위를 보여준다. 어떤 독자는 풀잎이나 햇살이 나오자마자 답을 찾을 것이고, 어떤 독자는 "아픈 데서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가 나오기까지 답을 유보한다. 다른 독자는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불편했던 마음의 평안함을 느낀다. 이 시의 중요한 매력은 행갈이인데, 운율과 의미구조가 하나가 된 듯한 모습을 보인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는 구절은 특히 그렇다.

표제시이기도 한 「그 여자네 집」은 행갈이가 엉망이다. 무슨 기준으로 행갈이를 했는지 알 수 없다.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 그 여자 / 아버지와 그 여자 / 큰오빠가 / 지붕에 올라가"와 같은 구절은 이 시와 어울리지 않게 1000미터 오래달리기를 하고 와서 헉헉거리며 읽는듯한 모습이고,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 그 / 여 / 자 / 네 집"에서 마지막 행 "네 집"은 '너의 집'이라는 의미로 오해될 여지가 있는데 그런 모호성ambiguïté은 이 시와 전혀 맞지 않는 모습이다.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 가 / 있던 집 / 그 / 여자네 / 집 /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은 감정을 제멋대로 발산시키면서 고삐질을 제대로 못해서 감정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모양이다. "생. 각. 을. 하. 면……"이 왜 어색한지를 우리는 생. 각. 해. 볼. 필. 요. 가. 있. 다. 그건 생경하고 쓸모없는, 아니 잘못된 과장일 뿐이다. 생각은, 여기서는 거닐면서 뒤를 자근자근 밟아가는 생각이지, 악몽같은 생각이나 충격적인 생각이 아닌 까닭이다.

아침밥 먹고
또 밥 먹는다
문 열고 마루에 나가
숟가락 들고 서서
눈 위에 눈이 오는 눈을 보다가
방에 들어와

밥 먹는다
-「눈 오는 집의 하루」전문全文

『섬진강』과 달리 이 시집에서는 오히려 짧은 시가 힘을 갖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눈 오는 집의 하루」는 짧은, 좋은 시다. 여기서는 사색이 보인다. "또 / 밥 먹는다"에서는 새롭지 않음의 새로움이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시의 백미白眉는 "눈 위에 눈이 오는 눈을 보다가"이다. "눈"이 뒤에 오는 홀소리에 따라 각각 [누뉘], [누니], [누늘]로 바뀌는 모습이 입술을 즐겁게 해준다. 더구나 [눈]은 울림소리와 둥근입술홀소리圓脣母音가 합한 형태라 더욱 그렇다.

물론 같은 짧은 시라도 「춥지요」와 같은 시는 힘이 하나도 없다. 잠깐의 감상주의에 빠지고 말 시다. 이 시의 하나뿐인 메시아는 "당신 뺨에 / 따스한 온기"가 눈물을 의미할지도 모른다는 역설뿐이다.


그 여자네 집
김용택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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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가 지구로 다시 돌아왔다. 그의 별에 어쩌다 호랑이가 머물게 되었고, 호랑이 때문에 양과 장미가 위협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린왕자는 호랑이 사냥꾼을 찾고 있다.

워낙 쌩떽쥐뻬리의 『어린왕자』는 동화로 씌어진 것이다. 동화가 소설보다 수준낮은 것이라는 생각은 큰 오산이리라. 쌩떽쥐뻬리는 심지어 『어린왕자』를 어른인 레옹 베르뜨에게 헌정하는 것을 어린이들에게 사과하고 있기까지 하다. 쌩떽쥐뻬리가, 혹은 그의 어린왕자가 경멸했던 것은 '버섯'같은 어른들의 사고방식이다.

『다시 만난 어린왕자』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어린왕자는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별(사실은 행성)을 떠나 지구로 오는 길에 만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려지는지를 보면 금방 나타난다. 어린왕자는 차례로 환경주의자, 광고기획자, 통계학자, 관리인, 편갈라 싸우는 사람, 그리고 소녀, 지구에 와서는 문학평론가를 만난다. 물론, 소녀를 빼고는 모두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그건 쌩떽쥐뻬리의 플롯을 그대로 따온 것이지만, 다비뜨의 묘사는 보다 우리 시대에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다.

김정란은 해설에서 쌩떽쥐뻬리의 '모던'함과 다비뜨의 '포스트모던'함이 어디서 차이를 보이는지 세목들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로 다비뜨의 글에서 '모던'에 대한 반발이 많이 읽히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생텍쥐페리 선생님, 선생님께서 전에 출간하신 책을 읽어보니까, 선생님께선 비행사의 피를 가지고 계셨더군요. 선생님이셨다면, 그냥 휙 날아가셨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공기보다 더 무거운 걸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게 별로 내키질 않아요. 하늘 높이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세상은 너무나 조그마해서, 마치 지도가 펼쳐지는 것같이 느껴지지요. 어떨 때는 지도를 보는 것보다도 못해요. 풍경은 양떼처럼 흩어져버리고, 형태를 알 수 없는 구름 낀 산정밖엔 보이질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구체적인 것입니다. 물과 땅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 그들과 하나가 되는 것, 제가 원하는 건 그런 것입니다. (12-13쪽)

그러나 이 책의 단점을 꼽으라면, 그것은 내가 보기에 아주 치명적인 단점인데, 어린이보다는 어른을 위한 글이라는 점이다. 광고기획자나 편갈라 싸우는 사람 정도는 어린이가 읽어서 이해할만하다고 볼 수 있지만, 환경주의자나 통계학자, 지구의 문학평론가에 대한 내용을 어린이들이 읽어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오히려, 뻔한 사실을 '어린이'의 입장에서 본다는 의미의 '낯설게 하기'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말이다. 『어린왕자』와 비교해보면 그런 차이는 한눈에 보인다. 해서 결과적으로는, '지식인'과 '무식쟁이'의 경계를 허물고 '고급'과 '저급'의 갈림을 모호하게 만드는 '포스트모던'한 글쓰기로서는 어느 정도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다시 만난 어린왕자
장 피에르 다비트 지음, 김정란 옮김/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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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바뀌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대체로 '사회의 변화'가 그 원인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언어학자 울만Ullmann은 말의 의미변화 원인을 언어적, 역사적, 사회적, 심리적 원인, 그리고 외래어의 영향에 의한 원인 등 다섯 가지로 나누었지만 그 다섯 원인들이 무자르듯 정확하게 갈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우리네 근대화 과정을 생각하면 일본을 통해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외래어 혹은 외국어의 영향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것은 또한 사회적 원인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음이 비슷한 것들은 의미혼동을 겪게도 된다. 역사적 원인이라는 것은 이런 사실들을 통시적으로 보았을 때의 변화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비근한 예를 찾느라 우리네 근대화 과정을 예로 들었지만, 사실 그만큼 심각한 언어변화를 찾기도 힘들다. 해서 우리말 속에는 일본말들이 상당히 많이 들어왔는데, 지속적인 '국어순화'를 통해 일본말은 많이 사라진 상태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말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말 낱말책에 실린 일본말과 일본식 한자어를 합치면 30%정도가 된다고 한다. 과연 책을 읽다보면 독자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사실들이 많이 있다. "이것도 일본말이었어?"

본전이라는 의미의 '똔똔,' 어린이들이 주로 배우는 놀이인 '셋셋세(세세세),' 감청색이나 짙은남색을 뜻하는 '곤색'은 물론이고 일생一生을 뜻하는 '생애生涯'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힘'의 전남 방언으로 등록되어 있는 '히마리' 등이 모두 일본말이라는 것이다. ('생애'는 물론 정극인의 「상춘곡」에도 등장하지만, 그때의 '생애'는 지금과 같은 일생의 뜻은 전혀 담지 않고 처한 환경 혹은 생활 환경을 뜻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테레비television, 리모콘remote controller, 레미콘ready-mixed-concrete, 도란스trans 등에서 보듯이 본래 일본어가 아닌 것들까지도 우리는 일본식으로 자주 읽는 것이다. 책에는 없지만 밧데리battery와 같은 낱말은, 일본에서 영어를 배워 발음이 어색한 윗 세대들의 표기법을 비웃는, 요즘 젊은 층들도 아무 거리낌없이 쓰는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주장을 완전히 수긍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말이 된 낱말들까지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말의 순수함은 혈통의 순수함만큼이나 검증하거나 보장하기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말이 다른 말들 속으로 들어갈 때는 각자의 자리매김을 다시 하기 때문이다. 복거일은 '사라さら'라는 말을 없앨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쓰고 있다.

지금 우리의 삶에서 사라는 접시와 완전한 동의어는 아니다. 사라는 큰 접시를 뜻한다. 그래서 그 말을 몰아내면, 다른 말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에 따르는 사회적 비용은 언뜻 보기보다 크다
- 복거일『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문학과지성사, 1998, 132쪽.
이렇듯 개개의 말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는 복 씨가 어떻게 "사회적 비용"이 엄청나게 큰 영어공용어화를 주장하게 되었는지 그 복잡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위의 글만은 우리가 새겨 읽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말 속에서 걸러내야 할 일본말이나 한자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계주라는 말보다는 이어달리기라는 말이 훨씬 좋다. 공사판의 수많은 일본말들은, 최근 '순화'의 노력을 하고 있듯이, 우리말로 바꾸어써도 전혀 지장이 없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모든 일본말을 우리말로 바꾸어써야 한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실질적으로 저자 박숙희씨도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哲學이나 기차汽車와 같은 낱말은 일본식 한자말이지만, 우리말로 정착이 된 것이라고 보고 이는 책에서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말로 정착되었다'의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가령 '와사비'와 같은 낱말은,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가끔 '겨자'라는 말을 쓸 뿐, 우리말 언중들이 다같이 쓰는 말인데 이를 꼭 '고추냉이 양념'이라고 고쳐야 하는가말이다. 더구나 와사비는 초밥 등의 일본음식을 먹을 때 주로 쓰는 말인데말이다.

그 밖에 사소한 문제들도 있다. 이를테면, 이해를 돕기 위해 넣은 예문이 일본말을 쓰면 "불량한 사람"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자네들이 무슨 불량배인가, 좋은 우리말을 놔두고 왜 일본말이야."라는 예문이 가진 문제점은 명확하다. 그건 일제강점기의 낱말인 "불령선인不逞鮮人"의 현대판 민족주의적 번안어이다. 또한 부부인듯한 두 사람이 등장할 때, 남자쪽은 대개 '해체'나 '하오체'를 쓰고 여자쪽은 '해요체'를 쓰는 것도 바른 묘사는 아니다.

반드시 바꿔 써야 할 우리말 속 일본말
박숙희/한울림어린이(한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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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크게 보아 '구원의 역사'이다. 아담의 첫 범죄sin 이후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때를 거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구원'이 올 때까지의. '구원'이 있기까지는 '죄'가 있어야 하므로 성서는 또한 '죄'의 역사이다. 그러나 '죄'가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누구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다. 누구든 "신(神)이 부과한 명령을 어기는 것"이 죄라고 주장하려는 이는 '왜 카인이 십계명이 생기기도 전에 스스로를 괴롭게 해야 했는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그 '죄의 역사'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죄의 개념을 보다 명확히 하고 있다. 대개 사람들에게는 죄가 선험성Apriotät을 지니고 나타난다면,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 속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구체Konkretum'를 지니고 나타난다. 여기서 '구체'가 왜 중요한가 하면, 법과 도덕이 항용 만나는 것이 바로 이 '구체'이기 때문이다. '구체'란 늘 법과 도덕의 '반증'으로서 그것들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것들을 '시험'하여 보다 과학적이도록 만든다. 칼 포퍼의 말을 빌리자면, '구체'가 법과 도덕의 '반증가능성'이 되는 것이다. 또한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이 '구체'라는 것은 그것이 다만 개별적인 특수 체험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 소설이 가진 상징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풀어 말하면 이 소설이 법제도가 아니라 그 뿌리를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법제도를 문제삼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법제도를 대신하는 잣대로서는 종교가 가장 유력하다. 그것은 세 명의 까라마조프가 갈라지는 분수령이 바로 종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관점에서 조시마 장로와 관련된 두 가지 에피소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곧 이 소설의 종교관·윤리관과 직접적으로 닿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추악한 지경에까지 이른 장면은 너무나 뜻밖의 상황으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다. 장로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장로 때문에, 그리고 다른 사람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혀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던 알료샤는 겨우 장로의 한 팔을 부축할 수 있었다. 장로는 드미뜨리 표도로비치를 향해 걸음을 옮겼고, 그에게 다가가자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알료샤는 장로가 기력이 쇠진하여 쓰러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장로는 드미뜨리 표도로비치 앞에 무릎을 꿇더니 그의 발에 대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완전히 조아리며 분명히 의식적으로 절을 했다. 알료샤는 그가 일어날 때 부축하는 것조차 잊을 만큼 얼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장로의 입가에는 가냘픈 미소가 가늘게 빛나고 있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모든 것을 용서해 주세요!」
(140쪽)

장로는 임종하기 직전에 "어제 난 앞으로 그에게 닥칠 위대한 고난을 향해 절했던 것이란다"(504쪽)라고 알료샤에게 일러준다. 장로는 '위대한 고난'이라고 말했다. 드미뜨리가 존속살해의 누명을 쓰고 20년형을 받은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누명을 쓴 것은 '고난'은 될 수 있어도 '위대한 고난'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고난 정도는 되어야 그 말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드미뜨리의 고난 속에 그리스도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 된다.

사실 드미뜨리의 이미지는 소설 내내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이를테면 때때로 알료샤를 만나 선과 악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는 것이라든지, 누구와도 완전한 심정적 교류에 이르지 못하고 혼자서 표류하고 있다든지 하는 것은 그리스도 생애의 닮은꼴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결과적으로는 드미뜨리의 누명이 소설의 뼈대되는 줄거리라는 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드미뜨리의 누명이 단순한 누명이 아니라 '위대한 고난'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희생'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차근차근 소설을 되짚어보면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미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복음서를 인용하여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의 복음서 12장 24절"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만인의 구원'을 가져왔다면, 드미뜨리의 '희생'은 사람들에게 직관적 양심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두드러지게 받아들인 이는 알료샤다.

인간의 모든 죄를 떠맡고 그 책임자가 되십시오. 벗이여, 바로 그것이 옳은 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에 대하여 만인에 대하여 진정으로 그 책임자로서 처신한다면 그때 여러분은 그것이 진정으로 사실이며, 당신이야말로 만인에 대해, 모든 죄에 대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570쪽)

기적 따위는 일어나지 않아도 좋고, 기적이 입증되지도 않고 기대했던 일이 당장 실현되지 않아도 좋다. 하지면 어째서 이런 불명예를, 이런 모욕을 받아야 하며, 어째서 못된 수도사들이 말하듯이 <자연의 법칙을 벗어난> 빠른 부패가 일어난 것일까? (602쪽)

알료샤는 조시마 장로의 아끼는 제자였고, 그래서 소설이 시작할 때부터 이미 종교관이 정립되어 있었다. 이반에게 "반드시 논리 이전에라야만 의미를 깨닫게"(410쪽) 된다고 강조하고 조시마 장로의 연설도 꼼꼼하게 메모하는 알료샤의 모습은 종교적인 측면을 강하게 내보인다. 그는 논리 이전에 그 의미를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조시마 장로가 죽은 후, 그 시체에서 '썩는 냄새'가 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순간부터 알료샤에게서 종교적인 의무감은 사라져버린다. 처음으로 알료샤는 '왜(어째서)'라는 말을 꺼냈다. 그러나 거기에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결국은 알료샤 자신이 찾아나서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이유는, 알료샤 자신이 잘 알고 있듯이 논리가 아닌 직관을 통해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짧게는 근대주의, 길게는 계몽주의까지 포괄하는 이성(理性)주의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이성에 복속시키고 감성 등의 지표를 소홀히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국에 가서 '죄'의 문제까지를 이성 아래 위치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조시마 장로나 드미뜨리가 보기에 죄는 이성과 전혀 관계없는 것이다. 이성은 죄의 반대자이며, 죄의 은폐자이다. 이성의 입장에서 보면 죄라는 것은 오히려 쉽게 사라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죄를 충분히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논리를 두고 상대를 굴복시킬 수는 있어도 설득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성은 죄의식의 논리에 굴복당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새로운 논리를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는 이 이성주의의 최후를 소설 후반부에서 이반의 모습을 통해 볼 수 있다. 이반은 섬망증이라는 일종의 정신병을 앓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반에게 섬망증이 나타난 경위를 생각해보면, 무신론자의 이성주의가 얼마나 사상누각(砂上樓閣)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섬망증은 두말할 것 없이 이반의 죄의식에서 오는 것이다. 이반이 실제로 아버지 표도르를 죽인 사실이 없다는 것은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렇듯 직관이란 항상 논리보다 선행하기 때문에 가장 철저한 이성주의자였던 이반까지도 어쩔 수 없이 스스로의 직관에 종속적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죄는 이성보다도 마음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드미뜨리는 알료샤에게

이성의 눈에는 치욕으로 보이는 것도 마음의 눈에는 끊임없이 아름다움으로 보이니까. 그러니 아름다움은 소돔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아름다움은 소돔 속에 자리잡고 있는데, 넌 그 비밀을 알고 있니? 아름다움이란 무시무시한 것일 뿐 아니라 비밀스러운 것이란 사실은 정말 끔찍스러워. 거기에서는 악마가 신과 싸움을 벌이고 있고 그 싸움터는 다름아닌 인간들의 마음이지. (198쪽)

여기서 아름다움은 '치욕'이나 '죄'와 지나치게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이성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에 아름다움으로 비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소돔" 속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선악의 싸움터에서의 죄를 말하는 것인데, 그 싸움터란 "다름아닌 인간들의 마음"이라고 드미뜨리는 규정한다. 이 철학적인 내용은 드미뜨리가 논리적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떠올린 것이다.

그런 직관은 결국 꿈과 같은 것이다. 실제로 드미뜨리는 판결 직전에 가서 '아귀(餓鬼)'와 관련된 꿈을 꾼다. 여기서 '아귀'의 꿈을 다른 사람이 아닌 드미뜨리가 꾸었다는 점은 상당히 중요한 기능을 한다. 가령 이반이나 알료샤가 '아귀'의 꿈을 꾸었다면, 소설의 전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갔을 것임에 틀림없다.

만약 이반이 '아귀'의 꿈을 꾸었다면 그는 오히려 그것을 바탕으로 신없음을 증명하려 들 것이다. 혹은 최소한 무관심한 신(해서 쓸모없는 신)을 상정하려고 할 것이다. 또 만약 알료샤가 '아귀'의 꿈을 꾸었다면 그는 여전히 의심과 고민에 빠져 있을 것이다. 조시마 장로의 임종 이후에 알료샤가 '왜'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던졌음은 아까 지적한 바이지만, 그런 알료샤의 심경은 아직까지도 극복되지 못하고 '경험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미뜨리는 직관과 행동이 사고보다 항상 앞서는 사람이다. 드미뜨리는 그 꿈 속에서 직관적으로 "지금부터는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무언가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890쪽)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드미뜨리가 그들보다 위에 군림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자신을 나눔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일찍이 조시마 장로가 "인간의 모든 죄를 떠맡"(570쪽)으라는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드미뜨리에 이르러 몸으로 (꿈에서나마) 실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드미뜨리는 '희생'했다. 드미뜨리의 희생은 누구보다 알료샤에게 특히 의미있는 것이었다. 신의 존재와 종교의 규율에 대한 알료샤의 풀리지 않던 호기심은 드미뜨리의 희생에 이르러 말끔히 씻겨진다. 알료샤에게 모든 것은 지금껏 선험적으로 존재해왔지만 여기서부터는 경험적으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예전의 알료샤는 "어쩌면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지도 모릅니다"(393쪽)라는 식의 불명확한 모습을 보였다. 선험적으로 주어져있던 진리는 스스로를 주장하지 못하므로 항상 '의심'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 데까르뜨의 회의(懷疑)도 '방법적 회의'라고는 하지만, 그의 전존재의 고민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데까르뜨의 경우는 그래도 신뢰할 '이성'이 있었지만 알료샤는 그보다 더 막막한 지경이었다.

그러나 드미뜨리의 '희생'은 알료샤에게 모든 것을 분명하게 만들어주었다. 왜냐하면 드미뜨리는 모두가 서로에 대해서 죄인이라는 조시마 장로의 설교를 몸으로 체현해냈기 때문이다. 드미뜨리적인 몸의 진리는 조시마적인 말의 진리보다 훨씬 명확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거기서 조시마 장로가 드미뜨리에게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했던 이유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라고 봤을 때, 죄와 더불어 꼭 필요한 개념은 사랑이다. 드미뜨리와 까쩨리나가 서로 '사랑한다'고 하는 대목이나 이 소설의 또 하나의 줄기였던 꼬마들이 일류샤를 잊지 않겠다고 하는 부분은 결국 '사랑'과 연관될 수밖에 없는 몸이다. 그러나 사랑은 논리로 환원되지도, 추상으로 떨어지지도 않는 구체적인 어떤 것이다. '사랑'은 어디까지나 직관적이면서 경험적인 것이다. 여기에 와서야 얄료샤는 드디어 "그래, 우린 틀림없이 부활할 거야. 그리고 다시 만나 기쁘고 즐거웠던 지난날을 이야기하게 될 거야!"(1354쪽)라고 확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카인이 인류 첫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스스로의 직관으로 그것이 죄임을 깨달았던 것과 유사한 것이다. '죄의 역사'로서의 성서의 역사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보다 직관적이고 경험적인 역사로 바뀐 데서, 우리는 이 책이 지니는 윤리·도덕적 의의를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열린책들

Posted by 엔디
근대 이후의 사회도 근대 이전의 사회만큼이나 소수자가 억압된 사회이다. 여기서 근대가 시대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은, 그 시기가 스스로를 '이성理性의 시기'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는 이성에 윗점을 찍으면서 그것이 중심이 되면 '인권'과 같은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고 믿는다. 꽁뜨 이후의 이성중심주의 혹은 과학주의는 '사실fait'을 중요시하게 되고, 필연적으로 '실증성'을 강조하게 된다.

그것은 역사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실증주의자들은 "역사가들이 도달한 결론은 자연과학자들이 도달한 결론과 마찬가지의 객관성을 지녀야 한다고 믿고 있"어 일종의 '과학적 역사관'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차하순, 62). 물론 학자가 사료를 접했을 때에는 '사료검증'을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상식에 속하는 것이고, 김영한 교수도 같은 글에서 "실증사학과 실증주의 사학과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며 "우리나라에서 흔히 '실증사학'이라고 말할 때의 '실증'은 […] 사료와 문헌에 대한 철저한 고증이라는 단순한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채택하는 입장이 '문서사료 중심주의'(우에노 찌즈꼬, 158; 앞으로 쪽수만 기입)인 만큼 '실증사학'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차하순, 61, 276-277).

그러나 실증주의가 붙잡고 있던 '사실'이라는 것이 실상은 유럽·백인·남성 위주로 편향된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글쓴이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역사란 항상 현재로부터의 '재심'의 대상"(우에노, 1)이므로 "일단 '정사(正史)'나 '정설(定說)'이 씌어졌다고 해도 그것으로 마무리되는 일은 없"(우에노, 2)다. 상대주의사관의 입장에서 보면 '원래 있던 그대로'의 역사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록이니 사료니 하는 것도 결국은 생기했던 사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 […] 영상이나 관념을 정신 속에 가졌던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차하순, 127). 바로 이런 점에서 마이너리티의 역사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지점이 상대주의이다. 글쓴이 스스로도 "니힐리즘이라기 보다는 그렇기 때문에 소리 높이는 것을 단념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마이너리티의 권한을 위한 주장"(우에노, x)이라고 역설力說하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마이너리티는, 제목에서 나타내고 있는 바대로, '민족' 혹은 '여성'으로 환원되어버리는 '나'를 체험하는 사람들이다.

마이너리티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했다. 글쓴이는 I장에서 '전후사의 패러다임 전환', '여성사의 패러다임 전환' 등이 절을 따로 마련해 '사학 혁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고찰했다. 또 II장에 와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패러다임들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그 안의 가부장적 요소들을 정밀하게 지적하는 작업을 해냈다. 그러나 이러한 패러다임들을 글쓴이가 살피면서 느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페미니즘은 역사상 국민 국가를 초월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우에노, vi)는 것이었다.

'국민 국가nation state'라는 개념은 역시 근대의 소산으로 '하나의 네이션nation'을 전제하고 있다. 민족이나 국민에 대한 관념은 절대로 마이너리티를 고려하지 않으므로 그 안에서 모든 마이너리티는 전체 속으로 귀속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는 본질적으로 가부장제와 그 패러다임을 같이 하고 있으므로 여성의 정체성은 더욱 억압된다. 가령, '위안부' 피해 여성의 개인청구권을 '국가'가 '남편이나 부친'의 역할을 하여 '가해자'와 합의했다는 것을 이유로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우리는 국민 국가가 가부장제의 국가적인 확대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여성'이야말로 근대=시민 사회=국민 국가가 만들어 낸 바로 그 '창작'이라고. '여성의 국민화', 즉 국민 국가에 '여성'으로 '참가'하는 것은 그것이 분리형이든 참가형이든 '여성≠시민'이라는 배리를 짊어진 채 국민 국가와 운명을 함께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우에노, 95)는 주장이나 "개인 청구권 논리는 국가가 개인(의 이해)을 대표할 수 없다는 점에서 국민 국가를 초월하는 성질을 갖는다. 따라서 피해 여성과 그 지원 그룹이 싸워야 할 상대는 동시에 한일 양국의 가부장제이기도 하다"(우에노, 108)는 글쓴이의 지적은 이에 대한 부연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글쓴이가 "근대·가부장제·국민 국가라는 틀 안에서 '남녀 평등'이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우에노, 94)다고 했을 때, 그는 이음동의어를 세 번 이야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민족'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개념이다. 르낭(64-79)은 민족 개념이 종족, 언어, 종교, 이익공동체, 지리의 어느 것과도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단언하며 조목조목 그 반례를 든다. 르낭은 민족을 만들어진 것이라고 단언한다(81).

저는 조금 전에 '고통을 함께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함께하는 고통은 기쁨보다 훨씬 더 사람을 단결시킵니다. 민족적인 추억이라는 점에서 애도가 승리보다 낫습니다. 애도의 기억들은 의무를 부과하며, 고통의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민족은 이미 치러진 희생과 여전히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희생의 욕구에 의해 구성된 거대한 결속입니다.

비록 르낭은 일단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긍정하고 이를 이용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이 개념을 고찰하고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민족이라는 개념이 순간순간 변하는 의지와 관련되어 있음을 지적한 것은 뛰어난 의견이라 할 만하다.

강상중(160-163)도 민족과 에스니시티를 다루는 자리에서 "이들 '인민'의 형태가 지닌 공통점은 '과거의 기억'이라는 정체성"이라고 발언하고 곧 이를 발리바르의 '상상의 기억imaginary memory',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월러스틴의 '과거의 기억', 그리고 사이드의 '심상역사imaginative history'와 연관시킨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민족 혹은 국민의 개념이 게마인샤프트적인 모습을 지닌다는 것이다. 국민 국가는 의심할 수 없는 근대의 산물인데, 그 전제가 되는 네이션은 합리성을 강조하는 근대에 걸맞지 않게 게마인샤프트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근대가 지지하는 이성중심주의 혹은 과학중심주의가 얼마나 허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근거가 될 것이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이데올로기인 한은 절대로 보편적일 수 없다. 민족 혹은 국민에 대한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로 절대로 보편적이지 않다. 이데올로기는 필연적으로 마이너리티를 억압하는 기제로서 작용한다. 임지현(79)은 한영우와 소설가 이인화의 민족주의가 "유신적 민족주의와 에토스를 같이함으로써 박정희의 민중 억압적 조국 근대화론에 대한 역사적 정당화에 기여하고 있다"며 민족주의 담론에서 '민중'이 배제되었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민중'이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라 '민족'이라는 개념 아래 복속되는 형태로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의 근대화 시기에 서양인들이 조선 여성을 교육하는 것에 대한 조선 남성의 반발은 우리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김진송(207)은 "「서양인의 조선여자교육방침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라」에서 오천석은 서양인이 조선여자를 교육하는 것에 대하여 '감사感謝의 염念과 수치羞恥의 염念'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고 적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가 "'민족의 치욕'이라는 가부장제 패러다임"(우에노, 103)으로 가장 먼저 해석된 것은 텍스트에도 제시된 것이지만, 서양인의 조선여성교육까지도 '수치의 염'을 느껴야 하는 가부장제의 패러다임은 근대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세계관을 주지는 않는다는 뼈저린 인식을 가능하게 해 준다. 물론, 이광수의 『무정』에서 여성해방의 중요한 일단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그것도 결국은 "여성을 여성적인 것으로부터 거세시키면서 끈내 개화 사상의 이념 구현의 대행자로서만 장치시키려 들고 있는 것"이며, 역시 남성 입장에서 여성에게 교육을 '주는' 것이다(이재선, 229). 근대화 조선 남성들이 가졌던 이런 의식들은 민족 속에 여성을 귀속시키면서 동시에 혹은 귀속시킴으로써 여성을 배제했던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여성은 '근대주의'를 거부해야 하고 그 소산인 국민 국가를 초월해야 하는 것이다. 글쓴이도 "페미니즘은 국가를 초월해야 하며, 초월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우에노, 93)다고 쓰고 있다. '페미니즘이 국민 국가를 초월해야 한다'는 명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두 국민 국가간의 패러다임이 모두 가부장제 패러다임의 변종이거나 최소한 가부장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던 점에서 명백해졌다. 문제는 '페미니즘이 국민국가를 초월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부분인데, 텍스트에서 우리는 희망적인 언설들을 많이 볼 수 있게 된다.

글쓴이는 "더 이상 누구도 "자매 연대의 전지구화Sisterhood is global"라는 낙천적 보편주의 입장에 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가진 상징성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페미니즘이 마이너리티로서의 여성에 대한 연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나 억압받는 자 모두를 대변하는 모습으로 확대될 수 있다면 '국민국가의 초월'은 더 이상 구호로서만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여성들은 그 일을 해내고 있다. WAW(Women Against War)는 최근 『전쟁을 반대하는 여성들』이라는 책을 냈다.(
링크:일다로ildaro) 그들은 "그동안 전쟁이나 평화, 국가에 대한 이야기들은 언제나 남성의 것이었다. 여성과 소수자의 시선으로 이야기하는 목소리들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지거나, 흩어져 버렸다."며 여성의 눈으로 전쟁을 바라보는 것의 중요함을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여성'과 '소수자'가 혼용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에코페미니즘은 생태적인 것에 대한 여성적 시선을 드러내고 있다. 나희덕(56)은 "생태적 지향을 지닌 시들조차 계몽적 한계로부터 그다지 자유롭지 못"한 가운데서도 "근대적 의식의 견고한 외피를 뚫고 내려가 자신의 무의식 속에서 새로운 현실을 발굴해낸 여성시인들의 활동은 그 한계를 넘어설 새로운 가능성으로 주목할 만하다"며 에코페미니즘과 관련해 여성생태시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더구나 "'여성'의 해체"를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그 자체로 "'남성'의 해체와도 같은 것이다."(우에노, 96) 왜냐하면 "'위안부' 문제가 여성의 '인권 침해'라는 언설로 구성된다고 한다면 '병사'로서 국가를 위해 살인자가 된 것 또한 남성의 '인권 침해'라고 입론하는 것도 가능"(우에노, 207)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궁극적인 목적은 다만 '남녀동권주의'가 아니라 '나'의 해방이다. 나를 구성하는 것은 "'국민'도 아니고 '개인'도 아니다. '나'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젠더나 국적, 직업, 지위, 인종, 문화, 에스니시티 등 각양 각색으로 존재하는 관계성의 집합이다. '나'는 그 어느 것도 피할 수 없지만 그 어느 하나만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우에노, 205)

글쓴이는 I장과 II장에서 2차 대전 당시의 일본내 페미니즘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중심으로 국민 국가와 젠더를 분석하였다. 그리고 III장에 이르러 ''기억'의 정치학'을 주장하면서 실증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과 상대화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글쓴이도 인식하고 있듯이 상대주의는 늘 니힐리즘을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모든 역사가 진실일 수 있다면 모든 역사가 허구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다수자의 입장이 항상 더 힘이 셀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 책에서 III장은 가장 큰 공헌이기도 하고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하다.

역사적 상대주의만 가지고는 다수자의 입장이 더 셀 수밖에 없다면, 페미니즘은 "정사(正史)라는 이름의 남성사"(우에노, 185)를 오히려 뒤집어엎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엎는다'고 할 때의 근거는 또다시 모호하다. 이성과 합리성으로 그것이 성공할 수 있을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그것은 결국 또다시 근대에의 종속일 수밖에 없다. 국민 국가 안에서의 페미니즘이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는 이 책 I장의 진단은 정확하지만, 이 책 이후에도 페미니즘은 여전히 딜레마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참고문헌

1. 단행본
강상중. 1997.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이경덕·임성모 옮김. 서울:이산.
김진송. 1999.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 서울:현실문화연구.
르낭, 에르네스트. 2002. 『민족이란 무엇인가』, 신행선 옮김. 서울:책세상.
이재선. 2000. 『한국소설사―근.현대편I』. 서울:민음사.
임지현. 1999.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서울:소나무.
차하순 엮음. 1980. 『史觀이란 무엇인가』. 증보판. 서울:청람.

2. 연속간행물
나희덕. 2000. 「생태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그리고 시」, 『창작과 비평』 110호.

3. Referenced Web Site
일다로



내셔널리즘과 젠더
우에노 치즈코 지음 | 이선이 옮김/박종철출판사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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