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평역 삼국지의 잘못옮긴 부분을 지적하고, 삼국지와 관련된 속설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책 자체의 목적이 앞의것에 있었고 서문이나 책겉의 광고글도 모조리 앞엣것에 대한 것이지만, 뒤엣것도 사실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특히 『유세명언喩世明言』이라는 소설집에 실렸다는, 사마모가 한나라 건국시의 영웅들을 삼국시대에 등장시켰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있는 이야기거리다. 이를테면, 한 고조를 도와 한나라의 건국공신이 되었던 한신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으니 후한 말에 조조로 다시 태어나게 하고, 한 고조 유방은 헌제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고 사마모가 염라대왕을 대신하여 판결한다는 식이다.

책의 앞부분은 역시 이문열 삼국지의 틀린 부분을 지적하는데 많은 힘을 쏟는다. 이문열이 터무니없게 옮긴 부분은 생각보다 많았다. 가령, 고대 중국어에서 "무장대소撫掌大笑"는 본래 박장대소와 같은 뜻인데 이를 "손바닥을 쓸며 크게 웃었다"라고 옮긴 부분은 현대 중국어에서도 무撫가 애무愛撫와 같이 "쓰다듬다"는 뜻으로 자주 쓰이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춘추 시대 초나라의 성득신成得臣을 "일껏 얻은 신하"라고 한다든가, "예양중인국사지론豫襄衆人國士之論"은 "예양의 중인국사론"이라는 뜻인데 "국사國士"를 아예 빼먹고 "예·양 땅의 사람들이 하는 말"이라고 옮긴 것 등은 옮기는 이의 성실성을 망각한 처사라 할 만하다. 성득신이라는 사람은 본래 중국 역사나 역사소설을 그다지 많이 읽지 않은 나는 모르니까 뭐라고 할 말이 없지만, 예양은 사마천 『사기史記』 '자객열전'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인물인데 이를 잘못 옮긴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유종호 선생은 『시란 무엇인가』의 「숨어있는 부호」에서 '숨어있는 부호'를 읽지 못하면 "두세 겹의 목소리와 울림"을 읽지 못한다고 했다. 유종호 선생이 직접 예를 들고 있듯이 그리스도가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한 것을 당시 사람도 못 알아들었는지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마태복음 27:47)라고 하지만, 사실은 시편 22편 1절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 말을 알지 못하면 이성복의 「정든 유곽에서」의 "엘리, 엘리 죽지 말고 내 목마른 裸身에 못박혀요 / 얼마든지 죽을 수 있어요 몸은 하나지만 / 참한 죽음 하나 당신이 가꾸어 꽃을 / 보여 주세요 엘리, 엘리 당신이 昇天하면 / 나는 죽음으로 越境할 뿐 더럽힌 몸으로 죽어서도 / 시집 가는 당신의 딸, 당신의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다.

또, 나귀의 얼굴에 '제갈자유諸葛子瑜'라고, 얼굴이 길기로 유명했던 제갈근의 성과 자字를 써놓으니 그 아들인 제갈각이 거기다 "지려之驢"라고 써서 아버지의 명예를 구했다는 것이, 나귀를 노새라고 옮기는 바람에 성적인 농담이 되어버렸다는 것도 흥미있는 이문열의 오류다.

삼국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읽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저자는 전문 한학자도 아니고 대학을 나온 사람도 아니지만, 삼국지를 열렬히 좋아하는 재중동포라는 조건이 읽기 괜찮은 책을 낼 수 있게 한 듯 싶다. 사실관계를 밝히거나 새로운 것을 알려주는 책에 적극적인 의미의 '평評'을 하기는 힘들다. 장점이라면, 지나치게 긴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원문을 소상히 인용하여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독자가 어느 부분이 잘못 옮겨진 부분인지를 쉽게 알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상투적인 비유나 과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눈감아줄만한 정도다.


삼국지가 울고 있네
리동혁 지음/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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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감하게 중편이나, 장편이라도 좀더 짧게 압축시킬 수 있는 작품이다. 수많은 옛날 헐리우드 영화가 우리 눈을 어지럽히고, 그 배우들의 이름에 휘둘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그 많은 영화제목을 빼고 나면, 이 작품은 그저 옛날엔 참 좋았지 류의 과거를 아름답게 재구성하는 회고소설에 불과해질 것이다.

회고소설? 하긴 어떤 이는 이 소설을 회고소설이라고 부를 것이고 어떤 이는 이 소설을 표절에 대한 소설이라고 부를 것이지만, 이 소설은 기실 그 아무 것과도 관련이 없다. 영화가 삶의 한 부분이었던 그 당시를 애정어린 손길로 재구성해내고 있으면서도, 항상 '지금-여기maintenant-ici'를 잊지 않고있는 작가의 펜은 헐리우드 키드가 느꼈던 '고스트幽靈 현상'과는 정반대되는 방향을 가지는 것이다.

꿈을 이야기하면서 현실을 생각하는 '나'와 현실을 살면서 꿈만을 생각하는 헐리우드 키드의 삶 중에 어느 삶이 더 훌륭하다거나 위대하다거나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어째서 '나'는 현실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헐리우드 키드는 어째서 현실을 무시하지도 못하면서 애써 도외시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보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덧) 권성우 씨가 붙인 책끝의 해설은 그야말로 불필요한 해설이다. 초등학생 독후감처럼 줄거리 재구성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1993. 1. 9
안정효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민족과 문학사, 1992)를 읽다. 이 소설의 문제점은 주인공 임병석이 어떻게 '헐리우드' 방식의 삶과 '키드' 상태를 벗어나느냐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환상과 실제를 구분하지 못하여, 어른이 되어 현실의 삶을 대변하고 책임지지 않으려는 임병석이 어떻게 어두컴컴한 극장(환상과 도피)을 나와 집(현실과 책임)으로 돌아오는가 보여주는 것이 이 소설의 관건이다. 작가는 그러나 '패스티스pastiche'된 시나리오 한 편을 짜깁기해놓고 임병석을 죽이는 것으로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마감시킨다. 그러므로 임병석이 '헐리우드' 방식의 삶과 '키드' 상태를 벗어났느냐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자명해진다. '패스티시'란 '헐리우드' 특유의 문법이며, '패스티스' 자체가 아직은 예술가로 독립하지 못한 상태 즉 '키드'의 예술이겠기 때문이다.



헐리우드키드의 생애
안정효/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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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서평, 소설
프라도의 『섬』은 특이한 만화다. 대부분의 만화는 몰입없이 빨리 읽을 수 있도록 비교적 단순한 서사구조récit를 가지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만화들은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갖지 못하고 내용으로 환원되기도 한다. 그런 만화들의 경우에는, 한 편의 작품이 그 줄거리로 대체되어도 큰 문제가 없어보인다.

『섬』은 독자의 몰입을 요구한다. 독자는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려는 바가 무엇인가, 이 작품이 왜 이렇게 구성되었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하고, 종국에는 작품에 깊이 몰입하게 된다. 퍽 짧은 이 책이 두번씩 세번씩 읽히는 이유도 그것이고, 시일이 지난 뒤에도 다시 꺼내읽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스콧 매클루드는 그의 『만화의 이해』에서 '홈통'의 역할을 강조하며, 바로 그곳이 독자의 상상력이 개입할 공간이라고 말했다. 그림의 칸과 칸이 홈통을 통해서 분리되면서 그 사이의 시간이나 사건이나, 혹은 무엇이든지 독자의 상상력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영상예술과 만화의 차이는 바로 거기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프라도는 그 '홈통'의 영역을 서사구조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켰다. 『섬』의 서두에는 의미심장한 보르헤스의 글이 인용되어 있다.

"그날 밤 나는 비오이 까사레스와 같이 식사를 하면서 화자話者가 사실을 생략하거나 왜곡시키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극소수의 독자만이 잔인하거나 혹은 평범한 현실을 발견하게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될 일인칭 소설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놓고 밤늦게까지 오랫동안 논쟁했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뜰룅,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시간이나 사건의 역전, 시점視點의 교묘한 이동과 충격적인 사건의 삽입을 통해서 독자에게 다가오는 이 만화가 갖는 여운은 바로 그런 점에서 계속해서 읽고 싶은 만화라고 하겠다. 좀더 자세한 분석을 위해서는 작품을 좀더 꼼꼼히 그리고 여러차례 읽어봐야 하겠지만, '분필선Trazo de tiza'이라는 원제가 작품의 의미를 좀더 밝혀줄 지도 모른다는 점은 지적할만한 사항이다. 그것은 기이한 섬의 모양을 지칭할 수도 있고, 흔히 선적으로 상상하는 시간을 지칭할 수도 있다.

서사라는 것이 본래 시간에 관심갖는 것이긴 하지만, 그때의 시간은 흔히 시간을 단선적으로 흐른다고 상상하는 한에서의 정의인 것이다. 이야기histoire를 어떻게 서사récit로 풀어내는가는 그런 상상력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므로,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꿀 필요가 생겨나는 것이다. 3장과 7장章은 바로 그런 점에서 중요한 장이다. 선입견을 버리고 차근차근 읽는 독서 혹은 독화讀畵가 필요하다. '처음'이라는 단어나 '내년'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는 이 책 속에서는 희석되어 사라져버리고 만다.

다시 찬찬히 생각해보자. 독자는 이 책을 덮지 못하고, 첫부분으로 돌아가 다시금 읽게 된다. 책을 다시 읽는 행위가 여기서 강조되어야 한다. 시간이나 사건의 역전은 책을 다시 읽음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프라도가 "나는 아예 처음부터 그들로 하여금 만화를 그냥 덮어버리지 못하게 하는 재능이 내게는 없는 게 아닐까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이 만화는 "그냥 덮어버"려서는 안 되는 만화다. 작가는 공공연하게 이 만화책을 다시 읽도록 만들었으며, 그것이 시간의 의미를 밝혀준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만화가 짧은 것도 이유의 하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책livre을 다시 읽는 것은 하나의 삶을 다시 사는vivre 것이다. 부활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묻는 사두개인들의 질문보다, 이것은 더욱 진실한, 실재하는 사실이다. 만화라는 형식을 다시 생각해보면 각각의 그림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아주 사소한 진리를 우리는 다시 한 번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미겔란쏘 프라도 지음, 이재형 옮김/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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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만화, 서평
'영화보다 재미있는 언어학 강의'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언어학 강의라 하기에 깊이도 없을 뿐더러 재미도 없다. 아니, 본제부터가 잘못되었다. 이 책은 '영화마을'에 있지 않고 그 언저리에 있을 뿐이다.

거의 60편에 달하는 영화 속에서 언어학을 설명하려고 글쓴이는 애쓰고 있지만, 그것이 영화의 내용과 잘 융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는 영화의 제목이나 아주 사소한 것에 집착해서 그에 대한 이야기로 한두 페이지를 채우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런대로 괜찮은 몇몇 사례들은 있다. 《쥬라기 공원3》에서 공룡들의 의사소통이 우리의 언어와 달리 무한성을 갖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오로지 추측만을 가지고 한 말이라는 결점은 있더라도, 그런대로 봐줄 만한 언어학적 설명이라고 하겠다. 또, 《인랑人狼》, 즉 '인간늑대'와 '늑대인간'의 차이를 말하면서 어느 언어에서나 합성명사에서는 뒤의 것이 본질적인 것임을 일러주는 대목도, 지엽적이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런대로 유용한 부분이다. 그리고, 《수색자The searchers》 항목에서 북미 인디언의 언어가 고립어도 첨가어(교착어)도 굴절어도 아닌 '포합어抱合語'라는 것을 알려주는 부분도, 《수색자》라는 영화에 인디언들이 '나온다'는 점 외에는 내용상의 연관점을 찾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나름대로 도움되는 내용이다. (참고로 저자는 포합어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 예는 다음과 같다. 북미 인디언 언어 가운데 하나인 누트카어에서 <inikw-ihl>은 <fire in the house>이고 <inikwihl'minih'isit>는 <several small fires were burning in the house>라고 한다.)

그렇지만, 《반지의 제왕》을 말하면서 '반지'와 '가락지'의 차이를 말한다든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메탈 자켓Full Metal Jacket》 에서 "Sir, yes, sir."라는 말에서 "서, 예, 서"는 경상도 사람이 들으면 "서라, 여기에 서라"로 들을 것이라며, 사투리에 대해서 설명한다든가, 《시월애時越愛》에서 일 마레Il Mare를 보고 '바다'가 모든 언어에서 남성인지를 조사한다든가, 김성수 감독의 《무사》에서 원나라 장수들이 '몽고어'를 쓰지 않는다고, 자기는 중국어도 '몽고어'도 잘 모르므로 확실치는 않지만 '몽고어'를 만약에 썼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질책하는 장면이라든가, 《천국의 아이들》에서 글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는 것만을 지적한다든가,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엉뚱하게도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의 차이만을 보고, 미국에 '해리 포터'가 가면 '해리 파러'가 될 것이라고 쓴다든가, 같은 영화에서 'wand'를 '지팡이'라고 옮긴 그 번역어를 문제삼는다든가, 《번지 점프를 하다》에서 이미 인터넷을 통해 화제가 된 숟가락과 젓가락의 맞춤법에 대해 말한다든가, 버나드 쇼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상류 사회의 언어(RP:received pronunciation)와 하층어(Cockney)의 차이가 사회언어학적 설명이 되지 못하고, 단순한 차이―가령, lady의 a가 RP에서는 [ei]로, 코크니에서는 [ai]로 발음된다는 정도의 사례중심의 설명―에만 국한되고 있다든가 하는 점은, 도대체 이 책의 어디에 '언어학'이 숨어있는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이 책은 영화소개와 감상, 언어학적 지식이 종횡무진 섞여있지만 전통 언어학의 영역인 음성학·음운론·형태론·통사론·의미론·화용론뿐 아니라 기계번역·통신언어·음성합성·인공지능 등의 문제, 언어의 본질과 사회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것은 경향신문 기사였다. 이 책을 다 읽은 다음에 이 기사에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심히 의심스럽다.

내가 보기에 이 책에 '언어학'은 거의 없고, 그 대신 영어학원의 수업시간이나 국정 국어맞춤법 시간에나 어울릴 한담들로 채워져 있는 것 같다.


영화마을 언어학교
강범모 지음/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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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허 선생의『문장강화』는 '文章强化'가 아니라 '文章講話'다. 초판(1940)으로 치면 63년, 증정판增訂版(1947)으로 쳐도 50년은 족히 넘게 오래된 이 책을 다시 읽은 이유는 여러 미디어에서 꽤나 칭찬을 해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기에라도 남겨두는 이유는 충분히 그 칭찬에 값하는 것 같이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에 대한 칭찬은 해제를 쓴 임형택 교수가 다 한 셈이니, 무엇보다 이 책은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보여주는 글인 것이다. 부록의 예문 색인만 네 쪽이 되니 그것은 수치로도 증명되지만 어느 쪽이고 책을 펼쳐봐도 예문이 없는 장면은 볼 수 없다시피 하다. 어느 곳은 아주 예문이 왼쪽-오른쪽 두 쪽을 꽉 채우고 있기도 하다. 임 교수는 "예문의 풍부함은 신문학 20년이 도달한 우수한 성과를 집결해놓았다 할 것이다."(4쪽)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하나도 과장이 아니게 생각된다. 알게모르게, 아니 전연 모르면서 근대문학을 아래로 보았던 내게 반성의 기미가 보일 듯도 하다.

이태준은 또한 당시에 이미 언어예술로의 문학에 대해 상당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책이라고는 '책'보다 '冊'자가 더 책 같다."(224쪽)는 부분은 흔히 한자어의 장점으로 꼽히는 함축이나 축약의 쉬움에다 중요한 한 가지 점을 더하고 있다.


내친 김에 기림의『문장론신강文章論新講』도 읽었다. 88년에 심설당에서 아마 초판을 내고 말은 것 같은 기림 전집의 넷째 권이다. 본래는 50년 4월에 낸 글이라, 잠시 멈칫했다. 전쟁 직전에 문장론을 쓰다니.

이태준의 『문장강화』가 '보여주기'식의 글이라면 기림의 『문장론신강』은 설명하기 식이다. 서양 문학과 철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은 기림은 아리스토텔레스, 리처즈, 소쉬르, 가디너 등을 인용하며 거의 일반언어학 수준의 '이론편'과 역시 외국 이론의 수입이 많고, 실무에 닿아있긴 하지만 상허에 비하면 거의 없다시피한 실용성을 지닌 '실천편'을 두고 있었다. '문장론'이라는 제목으로는 꽤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부록으로 실린 「새 문체文體의 갈 길」, 「새 말 만들기」, 「한자어漢字語의 실상」 이 세 편의 글은 '한글오로지쓰기'와 관련해 중요한 부분들이 들어있었다. 그것은 번잡한 대로 이태준의 한자어에 대한 입장과도 함께 읽으면 좋을 글인 것 같다.


이태준은 김두봉 선생의『말본』머리말에서

길이 없기어든 가지야 못하리요마는 그 말미암을 땅이 어데며 본이 없기어든 말이야 못하리요마는, 그 말미암을 바가 무엇이뇨. 이러므로 감에는 반드시 길이 있고, 말에는 반드시 본이 있게 되는 것이로다.

와 같은 책 본문의

쓰임
ㅏ, 몸은 다른 씨 위에 쓰일 때가 있어도 뜻은 반드시 그 아래 어느 씀씨에만 매임
ㅓ, 짓골억과 빛갈억은 흔히 풀이로도 쓰임

을 문제삼으며 "무슨 암호로 쓴 것 같이 보통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26쪽)고 적고 있다.

그는 또 염상섭의 단편 「전화」와 「제야除夜」의 일부를 각각 인용하여 순우리말 중심인 「전화」를 "성의일원적聲意一元的"인 문장이라 하고 한자어가 많이 섞인 「제야」를 "성의이원적聲意二元的"인 문장이라 지칭하면서, 묘사에는 앞의 것이 좋고 학문이나 논설, 이론에는 뒤의 것이 낫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그도 황진이의 유명한 「동지달 기나긴 밤을-」의 "서리서리"와 "굽이굽이"를 각각 "곡곡曲曲"과 "절절折折"로 신자하가 옮겼다는 데 가서는 "능역能譯"이긴 하지만 "'서리서리' '굽이굽이'의 말맛을 도저히 따르지 못하는 것"(63쪽, 강조 인용자)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반면 기림은 기본적으로 '한글 오로지 쓰기'에 상당히 가까운 면을 보이면서도 이른바 '순수주의'에는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어떤 한자어는 아주 "사생아私生兒"라고 부르고 있기도 하면서, 어떤 고유어는 한자어보다 더 어려운 고유어라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그 당시를 기준으로 하였으니 지금에 와서는 조금 우스운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생물生物'이나 '무생물無生物'을 '산것' '안산것'이라고 고친 것은 "어린이들에게 쉬운 말로부터 가르치려는 좋은 의도가 보"(203쪽)인다고 하고 '암염岩鹽'을 "거의 우리가 쓰지 않는 일본말 한자어"(204쪽)라고 일컬으며 '돌소금'으로 옮겨놓은 것을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적고 있다. 또 '변성암變成岩'을 '변해 된 바위'라 하고 '火成岩'을 '불에 덴 바위'라고 한 것은 시일이 지나면 순우리말이 한자어를 물리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상사형相似形'을 '닮은꼴'로 바꾸는 것이나 '대각선對角線'을 '맞모금'으로, '반경半徑'을 '반지름'으로 바꾸는 것을 두고는 "우리는 과연 새말을 낡은 한자어보다 더 변호할 정열을 느끼게 될까."(205쪽)라고 묻고 있다.

게다가 '파충류爬蟲類'를 '길동물'로 '포유동물哺乳動物'을 '젖빨이 동물'로 옮기는 데는 동의하면서 '양서류兩棲類'를 '물뭍동물'이라고 멋지게 옮긴 것에는 반대하고 있다.


어쨌든 '우리말 오로지 쓰기'와 '국한문병용론'을 포함하여 두 문장론 책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은 바로 문체론이다. 어문일치語文一致 혹은 언문일치言文一致를 모든 글의 중심으로 하고 딛고 일어설 든든한 반석으로 여기는 것에서는 당대의 문장가들의 무거운 역할들이 눈앞에 보이는 것이다. 특히 이태준은 책의 앞부분에서

"벌써 진달래가 피었구나!"를 지껄이면 말이요 써놓으면 글이다. 본 대로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듯이, 본 대로 생각나는 대로 문자로 쓰면 곧 글이다. (12쪽)

라고 하다가도 책의 마지막에 가서는

언문일치의 문장은 틀림없이 모체문장, 기초문장이다. 민중의 문장이다. 앞으로 어떤 새 문체가 나타나든, 다 이 밭에서 피는 꽃일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언문일치 문장은 민중의 문장이다. 개인의 문장, 즉 스타일은 아니다. 개성의 문장일 수는 없다. 언문일치 그대로는 이 앞으로는 예술가의 문장이기 어려울 것이다. (296쪽)

라고 쓰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물론 기림도 뷔퐁Buffon의 "글은 사람이다Le style est l'homme même."(80쪽, 277쪽)를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도 하다.


문장강화
이태준 지음, 임형택 해제/창비(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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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많은 판타지 소설이 그렇듯이, 리처드 애덤스의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아이들의 요구에서 시작된다. 애덤스의 아이들은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않은' 길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원했다. 아이 때는 누구나 이야기를 원한다. 삶의 언어, 언어로 표현된 삶이 인간에게 본래적인 즐거움을 가져다준다는 증거이다.

허구虛構를 뜻하는 '소설fiction'이라는 말에 환상幻想을 뜻하는 '판타지fantasy'라는 말이 덧붙여졌을 때, 그 말의 파괴력은 절정에 달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거짓'의 극한極限이다. 그런데, 놀라워라, 판타지 소설의 독자는 그 '거짓'을 '거짓' 그대로 믿게 된다. 이름에서 보자면 허구의 끝으로 달려가는 것이 판타지소설인데도 판타지소설의 독자는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아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톨킨도 그런 맥락에서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불가능한 것을 믿을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 판타지라고 정의내렸던 것이다.

『워터십 다운』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판타지다. 판타지는, 외부적인 해석 없이, 내재적으로 사실성reality을 갖는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현실 세계와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부질없을 때가 많다. 판타지를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것은, 그래서 온당치 않기가 쉽다. 그런 알레고리는 오히려 판타지의 사실성을 약화시킨다. 현실과 일대일 대응시키려는 노력 속에는 '이것은 거짓이다, 거짓이다, 거짓이다'라는 자기암시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 복잡하고도 사실적인 텍스트의 전승을 설명하면서 리얼리티를 획득했다면 『워터십 다운』은 1권 첫머리에 밝혔듯이 실존하는 장소를 배경으로 제시하면서 사실성을 갖게 된다. 더구나 토끼의 생태를 연구한 연구서를 숙독하면서 사실에 기초한 토끼들의 삶을 재구성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다 알다시피 문학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가 새로운 세계의 창조이다.

또 한편으로는 상세하고 자세하면서도 정형화定型化의 위험에 빠지지 않은 캐릭터들의 묘사에서도 사실성은 드러난다. 작가는 「서문」에서 헤이즐이 "조용하고 겸손하고 분별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운드워트가 "상냥함이나 온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토끼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의 인물 요약과는 상관없이 토끼들은 작가가 설정한 성격의 틀에서 조금씩 일탈하기도 하는데, 바로 그것이 사실성의 중요한 밑거름인 것이다.

가령 운드워트에 대해서도 4부의 43장 말미에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운드워트 장군은 스스로 생각하듯이 자신이 앞날을 내다보는 비범한 지도자인지, 아니면 해적의 용기와 교활함을 가진 폭군에 지나지 않는지 판가름할 중요한 순간을 맞이했다. 맥박이 한 번 뛰는 동안, 절름발이 토끼가 제시한 미래상이 눈앞에 환하게 펼쳐졌다. 운드워트는 그것을 이해하고 의미를 깨달았다. 하지만 곧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맥박이 한 번 뛰는 동안"의 망설임이다. 운드워트는 바로 이러한 망설임에 힘입어 폭군의 이미지를 잠시 벗을 수 있으며, 또한 이어 "그 생각을 떨쳐 버"리는 부분에서도 오히려 온정-자신을 향한-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워터십 다운』을 읽고 난 후에는 한 번 자문自問해봐야 한다. 내가 이 토끼 이야기를 진실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고. 실제로 나는 이 책을 읽고 한동안 토끼들의 행군 모습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상상 속의 토끼들은 질서정연하지도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았다. 토끼는 거기(상상 속)에 사실로 있었다.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리처드 애덤스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사계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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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는 없다"고 누군가가 자신의 '삼국지' 번역본 서문에서 말했다. '삼국지'는 홍수처럼 많이 출간되지만 진짜 '삼국지'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문열, 김홍신을 대표로 하여 정비석, 박종화, 조성기는 물론이고 멀리는 박태원 가까이는 황석영까지 당대의 글쟁이와 문장가는 삼국지 번역을 한 번씩 해보려는 욕심이 있는 모양이다. 이문열이 그 서문에서 말한 의미로 "쓸모없는 노력의 중복"이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 모두는 '역자 서문'에서 출간의 변辨을 한 마디씩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출간의 변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번역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이다. 이문열은 '평역 삼국지' 서문에서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를 "거의 대역이 가능할 정도로" 모본을 충실히 따랐다고 하고 있고, 조성기는 "삼국지는 없다"고 쓰면서도 이례적으로 하나의 예외를 두고 있다. 그만큼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는 시기적으로도 선구적이지만, 내용의 충실도에 있어서도 결코 이후의 번역본에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앞선다.

솔판 『삼국지연의』의 표지를 열면 진수의 '삼국지'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는 글이 나온다.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역사'가 아니라 '역사소설'이라는 점이다. 그 조어造語는 '역사'보다 '소설'에 방점을 찍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렇다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모름지기 한 편의 문학작품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가 응당 대접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번역의 대상인 원텍스트를 아무런 가감加減없이 그대로 옮겼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가 '삼국지연의'를 하나의 문학작품이라고 보는 이상 우리는 그것의 완전성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다른 모든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삼국지연의'의 텍스트도 열려있다. 그러나 그 열림은 외부로 향한 열림이지 내부로 역류하는 열림은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삼국지'의 첫머리에 나오는 고조참백사高祖斬白蛇의 고사만 해도 그렇다. "한나라는 한 고조가 흰 뱀을 죽이고 대의를 일으킨 데서 시작하여 마침내 천하를 통일한 것"이라는 역사인식은 '삼국지연의'의 전개에서는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수의 '삼국지'와의 근본적인 차이점, 촉한정통론을 담보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당수의 다른 번역본에서는 이 중요한 부분이 삭제되어 있거나 대체되어 있다. 우리는 유비가 사금을 모아 산 차茶를 강에다 내다 버리는 유비의 어머니 이야기에 알게모르게 길들여져 있다. 이문열의 삼국지에서도 '고조참백사'의 장면은 아예 없고, 상황 설정도 무척 자의적이다.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는 '삼국지연의'의 보다 정확한 이해를 담보시켜 줄 것이다. 그것은 어지러운 홍수의 흙탕물 속에 하나의 정수가 되어 줄 것이다.

삼국지연의 1
나관중 지음, 김구용 옮김/솔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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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Godot'는 죽음이다. 도대체 사람이 이생에서 죽음말고 무엇을 기다릴 수 있단 말인가. 이성복이 삶이란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던 것처럼 고도기다리기 역시 '집으로 가는 길'이다. '집'에 도달하면 그들은 살게(즉, 죽게) 된다.

블라디미르 내일 목이나 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야.
에스트라공 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 그럼 살게 되는 거지.
-『고도를 기다리며』오증자 옮김, 민음사, 2000, 158쪽.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죽기를 바라고 목을 매달아도 그들은 죽을 수 없다.

에스트라공 그렇다면 당장에 목을 매자.
블라디미르 나뭇가지에? (둘은 나무 앞으로 다가가서 쳐다본다) 이 나무는 믿을 수가 없는걸. (24쪽)


그곳은 '죽지 못하는 곳'이다. 에스트라공이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지 않는군."(61쪽), "그래 반가우니 이젠 무얼 한다?"(101쪽), "이젠 뭘 한다?"(127쪽)라며 매차례 푸념할 때, 그는 영원성에 대해서 푸념을 퍼붓는 것이다. 그는 아주 "제일 좋은 길은 날 죽여주는 거다."(104쪽)라고 말하기도 한다.

고도는 매일의 약속을 연기한다. 그는 저녁에 메신저(소년)을 보내 사람들에게 자신의 약속을 미룬다. 여기서 '미룬다'는 것은 오늘은 아니라는 뜻이겠지만, 좀더 구체적으로는 오늘이 아닌 날은 아니지 않다는 것이다. 고도는 자신의 약속을 미룸으로써 자신의 약속을 가장 효과적으로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 잠을 말하는 것일까?) 이런 '미룸-상기'의 기술에 말려들어 그들은 고도에게 "꽁꽁 묶여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27/30쪽)

포조와 럭키 역시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 그들이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된 것이 다른 무엇도 아니고, 우연에 기초한 원인없는 결과라는 점은 죽음의 속성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포조 어느 날 깨어보니 캄캄하더란 말이오. 마치 운명처럼. (사이) 그래서 지금도 나는 혹시 내가 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때가 있다오. (144-145쪽)

포조 묻지 마시오. 장님에겐 시간 관념이 없는 법이오. (사이) 그리고 시간과 관계되는 건 다 모른다오. (145쪽)

포조 (버럭 화를 내며) 그놈의 시간 얘기를 자꾸 꺼내서 사람을 괴롭히지 좀 말아요! 말끝마다 언제 언제 하고 물어대다니! 당신, 정신 나간 사람 아니야? 그냥 어느 날이라고만 하면 됐지. 여느 날과 같은 어느 날 저놈은 벙어리가 되고 난 장님이 된 거요.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우리는 귀머거리가 될 테고. 어느 날 우리는 태어났고, 어느 날 우리는 죽을 거요. 어느 같은 날 같은 순간에 말이오. 그만하면 된 것 아니냔 말이오? (더욱 침울하게)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아이를 낳는 거지. 해가 잠깐 비추다간 곧 다시 밤이 오는 거요. (149-150쪽)


이런 면에서 고도는 죽음이고 그들은 인류의 대표라고 할 수 있겠다. 아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인류의 대표'이고 포조는 '인류 전체'다. 짐작컨대 럭키나 소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블라디미르 […] 방금 들은 살려달라는 소리는 인류 전체에게 한 말일 거야.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엔 우리 둘뿐이니 싫건 좋건 그 인간이 우리란 말이다. 그러니 너무 늦기 전에 그 기회를 이용해야 해. 불행히도 인간으로 태어난 바에야 이번 한 번만이라도 의젓하게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가 돼보자는 거다. (133쪽)

에스트라공 다른 이름으로 불러보면 어떨까?
블라디미르 아주 뻗은 건 아닐까?
에스트라공 그럼 재미있을 거다.
블라디미르 뭐가 재미있어?
에스트라공 다른 이름으로 불러보는 게 재미있겠단 말이다. 아무 이름이나 차례차례로 말야. 그럼 시간이 잘 갈 거다. 그러노라면 진짜 이름이 나오겠지 뭐.
블라디미르 포조가 저자 이름이래도.
에스트라공 이제 두고보면 알 게 아냐? 자…… (생각한다) 아벨! 아벨!
포   조 이쪽이오!
에스트라공 그것 봐.
블라디미르 이런 짓거리에는 이제 넌더리가 난다.
에스트라공 또 한 놈의 이름은 카인일 거다. (부른다) 카인! 카인!
포   조 이쪽이오!
에스트라공 그러면 인류 전체다. (140쪽)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았지만 사실은 모두 거짓이다. 고도가 빵이네 희망이네 통일이네 자유네 많은 소리가 있지만, 영어 God(신神)과 불어 Dieu(신神)의 합성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걸 도대체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베케트 자신이 "내가 그걸 알았으면 작품에다 썼을 것"이라는 말을 익살스러운 대답으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가 그것을 알고 썼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기다리는 행위 그 자체다. 그것이 인생이다, 라고 나는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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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의 『회색인』에는 독고준이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하는 부분이 나온다. 아마도 작가 자신의 생각을 많이 투영하고 있을 그 평가는 이렇다:

그가 요즈음 읽고 있는 책은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였다. 유명한 소련 작가의 그 소설은 러시아 제정 끝무렵에서 시작하여 소비에트 혁명, 그 뒤를 이은 국내 전쟁을 통하여 한 소년이 어떤 모험과 결심, 교훈과 용기를 통해서 한 사람의 훌륭한 공산당원이 되었는가를 말한 일종의 성장소설(成長小說)이었다. 그러나 그가 공산당원이라든가 짜르 정부가 얼마나 혹독했는가는 아무래도 좋았다. 소설의 처음부터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주인공 소년의 익살스럽고 착한 성격이, 그리고 황폐해가는 농촌과 도시의 눈에 보이는 듯한 그림, 주인공의 바보같이 순진한 사랑, 그러한 것이 준의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집없는 아이』의 소비에트판 번안이었다.

- 최인훈,『회색인』재판, 문학과지성사, 1991, 38쪽.

회색인
최인훈 지음/문학과지성사

『집 없는 아이』의 번안이라는 표현은 독창적이면서도 충분히 타당한 비교일 수 있겠지만, 그러나 '성장소설'이라는 말과 같은 무게는 이 소설에서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이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더군다나 '성장소설'은 더욱 아니다. 성장소설은 독일어 Bildungsroman의 번역이고 Bildung을 '교양'이라고도 새긴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강철…』은 주인공인 꼬르차긴의 내적 갈등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훌륭한 소설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다. 주인공은 볼셰비끼 혁명이 일어나던 시기부터 이미 훌륭한 공산당이었고, 한 번도 그 입장은 변하지 않는다. 멘셰비끼의 입장에 선 적도 없고, 뜨로츠끼 파들에 대한 비판들이 제기되던 때도 그는 당연히 볼셰비끼의 편에 선다. 왜 그랬을까? 모른다. 책의 어디에도 그것은 나오지 않는다. 하긴 주인공이 나이가 기껏해야 스무 살 안팎이니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그는 소학교 3학년까지밖에 다니지 않아 제대로 된 러시아어 문법도 잘 모르는 수준이었으니까 말이다.

「꼬르차긴 동무! 당신에게는 대단한 자질이 있어요. 계속 이 일에 몰두한다면 당신은 앞으로 문학 일꾼이 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지금 당신은 철자법에 맞지 않게 쓰고 있어요. 논문으로 보건대 당신은 러시아어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

- 『강철…』, 열린책들, 1990, 492-493쪽.

결국 이 책은 하나의 이야기책에 불과한 정도의 글이 되어버렸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약간은 감상적이고 약간은 의욕적인, 훌륭한, 긴 글이다. 이것은 내가 이 책에 대해 하는 '혹평'이지만 오스뜨로프스끼의 입장에서 볼 때는 칭찬으로 들릴 지도 모른다.

오스뜨로프스끼에게 문학은 사회주의 혁명과 그 건설을 위한 투쟁에 복무하는 <무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 자기의 창작 보고서에 그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삶은 모든 전선에 걸쳐 공세로 나아가고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대열로 나를 복귀시킬 수 있는 새로운 무기를 확보하라는 과제를 내 앞에 제기하고 있었다.> 현역전사로서 사회주의 건설투쟁에 참여할 수 없었던 국내전의 전사는 결국 <문학>이라는 무기를 통해 그 뜨거운 열망을 성취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김규종, 「역자후기」, 『강철…』, 526-527쪽.


예술을 어떤 다른 목적에 종속시키려는 시도는 거의 필연적으로 그 예술성에 대한 상처를 생기게 하는 것이다.



특기할 점.

옮긴이 김규종은 책 뒷부분의 약력에 따르면 책이 출간될 당시인 1990년에 베를린 자유대학 슬라브학과 박사과정에 있던 학생인데, 그가 책의 중간중간에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단 역자주석의 논조를 보면 그는 레닌주의와 스딸린주의를 충실히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주가 아닌) 그가 단 주석의 상당수는 글의 전개와 크게 관계있지 않은, 그의 '주장'이 담긴 글이었던 것이다.

예)
[…] 따라서 스딸린을 오늘날의 <실존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발생하고 있는 모든 문제의 정점으로 매도하는 것은 피상적인 관점으로 비판받아야 마땅하리라 생각된다. 결국 <빛>과 <어둠>, <긍정>과 <부정>, <선>과 <악>은 일면적이거나 단선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 모든 것은 언제나 <쥐포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적인 맥락없는 스딸린 비판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강철…』, 508-509, 난하주.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니꼴라이 오스뜨로프스끼 지음, 김규종 옮김/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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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카멘친트』는 헤세의 데뷔작이다. 나는 그래서 이 작품이 정돈되기 보다는 거칠은 어떤 것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그런 것을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작품은 깨끗했다.

데뷔작에서부터 우리가 흔히 '헤세적'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잘 드러나고 있었다. 가령 자연 친화, 기독교적 신의 거부, 민중적 삶에 대한 애착 등이 여기서 페터 카멘친트라는 인물을 통해 제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아마 이것들은 이미 그의 유년기에 형성된 것이기가 쉽다. 인도 선교사였던 그의 아버지와 동양학자였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상상해 볼 수 있겠다.

카멘친트는 '촌뜨기'다. 그는 도회지에서 사교생활을 해보지만 결국 그는 촌뜨기로서 시골로 돌아간다. 줄거리만 가지고는 『수레바퀴 아래서』와 비슷한 면이 있는, 소박한 소설인듯 싶지만 실제로는 교양소설이나 예술가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을 정도로 카멘친트의 생각의 궤적들이 잘 형상화되어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헤세와 화해할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 곧 '시골주의'를 발견해냈다. 『수레바퀴 아래서』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보여준 그런 생각들이 여기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이 소설은 그의 가장 도시적인 소설이라 할 수 있는 『황야의 이리』와는 대척점에 있었다. 가령 그가

산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은 오랫동안 철학과 자연 과학을 공부해서 옛날의 신을 다시 버렸을지라도, 푄을 다시 한 번 느끼거나 눈사태가 나무를 부러뜨리는 소시를 듣게 되면, 그는 가슴이 철렁 떨리고 다시 신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법이다. (19쪽)

라고 말할 때, 나는 이를 인정하고 수긍하면서도 '그렇다면 소설은 도회지 삶에 대한 도피처 정도로 되고 말 수도 있다, 소설은 오히려 사람들의 삶을 더 드러내야 한다'고 아직은 어설픈 반대입장을 내놓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적 신에 대한 그의 입장은 변한 적이 없는데, 내 입장은 자꾸 변했다. 처음에는 그토록 적대시한 그의 신관神觀을 나는 이제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

언젠가 헤세는 중고생용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나는 거기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노벨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소설에 담긴 그의 사상들은 현재까지도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는 점은 다른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그의 깊은 사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페터 카멘친트
헤르만 헤세 지음, 원당희 옮김/민음사



인상깊은 구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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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가 시에 대해 가진 생각은 아주 독특하다. 문학과 예술의 무용성無用性을 강조하는 일군의 예술가와는 달리 브레히트는 문학 역시 써먹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브레히트의 첫 시집인 『가정기도서』는 "이 가정기도서는 독자들이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이 시집은 아무 의미없이 처먹혀서는 안된다"라는 사용지침서를 가지고 있다. 브레히트가 시의 사용가치를 중요시하는 것은 그의 서사극 이론의 핵심인 '낯설게하기효과Verfremdungseffekt'와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사실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이 책의 소중한 점 가운데 하나는, 모든 면에서 신비주의를 배격한 브레히트가 시인들에게 하는 충고이다. 책의 표제로도 쓰인 '시의 꽃잎을 뜯어내는 일'은 시를 하나하나 분석하는 일이다. 그는 꽃이 꽃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꽃잎을 뜯어내도 하나하나가 다 아름다운 것처럼 시도 그렇다고 말한다. 이 책에 실린 그의 어떤 분석이 수준 미달인 것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를 꼼꼼히 분석하려는 태도는 시인이 가져야할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또 그는 시인이 논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옳다. 시에 논리가 없다면 온갖 비약이 시라는 이유만으로 허용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 어떤 시가 좋은 시고 어떤 시가 좋지 못한 시인지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몇 가지 논거는, 당시의 사정은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대체로 다 통용되는 것이다.


학교에서 내려오다 교내 어느 문학회에서 시화전을 여는 것을 보았다. 브레히트도 시와 그림을 따로 전시하는 기획을 한 일이 있다. 그러나 그는 시화와는 다르게 시 따로, 그림 따로 전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고유의 예술을 지키면서 두 예술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이것과 관련해 연인과 얘기를 나눴다. 가령, 블레이크의 경우에 대해서.

시의 꽃잎을 뜯어내다
시의 꽃잎을 뜯어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이승진 옮김/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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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용 선생이 옮긴 『삼국지 연의』를 사러 헌책방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보니 나올 당시 신문에서 꽤 많이 떠들어댄 것 같은데, 왜 내 기억속엔 남아있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몰랐던 처음에는 그저 책꽂이에 꽂힌 걸 보고 제목이 좋았고, 꺼내서 겉을 살펴볼 때는 책의 디자인과 장정이 마음에 들었다. 문학동네나 민음사에서 나오는 하드커버 시집과는 달리 품격이 있어보였다. 표지에 다른 유치한 디자인 없이 시를 넣어, 그 시만으로 표지가 되게 하는 것도 좋았고, 그걸 제목 그대로 수직성있게 배열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무턱대고 살 수는 없었다. 책장을 넘겨 몇 편의 시를 보았다. 느낌이라고 하면 너무 추상적이지만, '흉내내는' 시인은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늦가을 투명한 바람 위에
탱잣빛 색종이 조각을
수없이 뿌리던

먼 들녘 논둑에
쓸쓸한 눈부심처럼 서 있는
한 그루 미루나무 밑을
수만 톤의 지하수가 흐르고 있다.

무너지기 직전의 눈사태 같은
위기의 눈은 그것을 본다.

그것을 본 시인이 죽었다.

-「한 시인의 데스 마스크」부분, 61쪽.

"그것을 본 시인이 죽었다." 그 시인이 박남수 시인일 것 같다는 추측을 한 것은 나중에 통독을 하면서 앞뒤의 두서너 시를 함께 읽으며 안 것이지만, 저 문장 하나만으로도 나락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책 상태도 거의 새책같은 상태라 헌책방 아저씨께 함께 넣어달라고 했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부터 바로 통독을 시작했다. '포스트-잍'을 붙이려고 하다가 시집의 분위기를 망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포스트-잍'의 색도 색이지만, 그렇게 붙이다간 책 전체를 붙여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는 내 성벽을 공략하고 있었다. 조금씩 성벽은 허물어져갔다.

길은 산자락을 따라 시내처럼 흐르고 있었다. 벼랑은 잘린 언덕줄기의 속살이었다. 통곡의 벽을 바라보듯 나는 벼랑 앞에 섰다. 흑표범의 눈처럼 나를 노려보고 있는 지층. 바위는 조용히 기억하고 있었다. 쓰러지는 양치식물의 숲. 아우성치는 맘모스의 마지막 울음소리. 쌓인 시간의 무게 밑에서 목숨은 진한 원유로 일렁이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바위의 적의를 느꼈다. 바위는 기다리고 있다, 인류의 멸망을. 찢어진 바위틈에서 갈맷빛 물이 솟구쳐 바다가 되고 부스러진 스스로의 피부에서 다시 풀밭이 일어서서 눈부신 고함을 지르며 연둣빛 바람을 흔드는 부활의 순간을.

-「바위의 적의」全文, 14쪽.

시집의 두번째 시를 읽고서 나는 오래 지체하였다. 길다랗게 여백에 느낌표를 해두고 다시 읽었다. 또 다시 읽었다. "갑자기 나는 바위의 적의를 느꼈다." 이렇게 절묘하게 '갑자기'라는 부사가 들어간 문장을 나는 알지 못한다. '갑자기'는 본래 뜻이 그런지라 뜻밖의 순간에 급작스레 등장하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갑자기'의 앞과 그 뒤는 상당한 비약이 존재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갑자기"가 일련의 단계를 거쳐 제 자리에 올라앉아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양치식물의 숲.", "…마지막 울음소리." 처럼 명사로 끝맺은 문장들이 "시내처럼 흐르"며 읽히는 데에 방해가 되기도 하고 고등학생 습작시인같은 느낌을 준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 명사들은 파문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일렁인다는 것은 분명 파동의 이미지를 주고, 파동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기가 쉽다. 즉, 화자가 느낀 "바위의 적의"는 그 파동에 동화되어가는 화자의 허를 찌르면서도 자연스러운 궤도에 편입되어 있다. 때문에 여기에서의 "갑자기"는 뜻밖의 등장이면서도 비약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 파동은 그렇게 나의 허도 찔렀다. 만물에 생명이 있음을 나는 한순간 깨달았다. 잊어버렸다. 또 깨달았다. 잊어버렸다. 시가 자꾸 내 감각의 끄트머리를 건드렸다.

비가 빛나기 위하여 포도가 있다. 미로처럼 이어지는 돌의 포도. 원수의 뒷모습처럼 빛나는 비. 나의 발자국도 비에 젖는다.

나의 쓸쓸함은 카를교 난간에 기대고 만다. 아득한 수면을 본다. 저무는 흐름 위에 몸을 던지는 비,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물안개 같다. 카프카의 불안과 외로움이 잠들어 있는 유대인 묘지에는 가보지 않았다. 이마 밑에서 기이하게 빛나는 눈빛은 마이즈르 거리 그의 생가 벽면에서 보았다.

-「프라하 일기」부분, 27쪽.

카프카의,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흑백 사진이 떠올랐다. 비는 "저무는 흐름 위에 몸을 던"져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흐름"은 무엇일까. 포도는 鋪道일 것이다. 미로迷路인 포도. 길은 유사有辭이래로 오랫동안 삶을 지칭하였다. 비올 것 같은 카프카와 그의 묘지, 그리고 비에 젖는 화자의 발자국이 지속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죽음이다.

그런 죽음을 알리는 이미지는 시집에 줄기차게 제시되어 있다. 그는 죽음과 시적으로 동화된다. 박남수 시인의 죽음을 쓴 것으로 짐작되는 시가 「새」(55-56), 「하늘」(57-59), 「데스 마스크」(60), 「한 시인의 데스 마스크」(61-63), 「내면의 바다」(64), 「독」(65) 등 6편 이상이다. 시인의 죽음에 당면해 한두 편 정도의 시를 쓰는 것은 관례이기도 하고 그 심정도 이해가 된다. 이 여섯편의 시들은 그럼 어떻게 된 것일까. 그가 자신을 '죽음'과 직접적으로 관계시키고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둘은 죽음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시의 등」(71)에서는 아예 "먼 섬나라에 사는 사람의 죽음이 나의 일부를 죽인다"고 선언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것은 정지용의 "아아 山을 돌아 / 멫 萬里 물을건너 / 南쪽 나라 빠나나가 / 이땅에 잇는사람들의 입에 씹히네"(「파충류동물爬蟲類動物」)와 비슷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정반대를 다루고 있다.

그런 죽음에의 동화는 그의 시를 시로 만들었다. 그는 "언어의 그리움은 / 섬처럼 외롭다. / 언어는 침묵을 그리워한다."(「오베르의 들녘」, 83)라고 적고 있다. 사실 시란 가장 구차한 삶의 모습이다. 끊임없이 죽음을 시쓰려고 하지만 살아있지 않으면 시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는 절대로 죽음을 그대로 설명할 수 없다. 시의 역할은 그게 아니다. 시가 설명한다면, 이미 시가 아니다.

안개 속에서 사람들은 형용사로 이야기한다. 요원들의 암호처럼 그것은 아름답다. 가령 A가 '쓸쓸한' 하면 B가 '부드러운'이라고 말한다. 이따금 섞이는 프랑스 말 비음같은 우아한 어법으로 메시지를 교환한다. 물론 알타이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언어 체계다. 목적을 위하여 혹사된 언어는 이제 피로하다. 반란하는 언어는 물푸레나무 향 같은, 들길 연둣빛 쑥내 같은, 의미와 은유를 떠난 새로운 시스템이다.

-「안개를 위한 에스키스」부분, 117쪽.

시의 언어는 의미로부터 도피하여 "메시지를 교환한다." 시의 언어는 의미와 조우遭遇해서도 안 된다. 의미가 시퍼렇게 살아있으면 시는 죽는다. "프랑스 말 비음"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에서 언어는 의미보다도 음성에 더 바탕을 두고 있다. "쓸쓸한"이나 "부드러운"도 마찬가지다. 우리말로 두 단어는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순수하게 음성만을 따져보아도 어딘지 "쓸쓸한", 어딘지 "부드러운"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시집을 통독해보라. 어딘지 "죽.음."이 전달되지 않는가?

잡목림 마른 풀섶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낸 늙은 엽사는 흰 눈가루를 털며 말했다.

―상처입은 사슴이 가장 높이 뛴다.

밤새 모국어의 가시에 상처입은 나는 흰 눈 위에 핏자국을 남긴 사슴의 최후의 점프를 생각하며 걸었다. 바다처럼 번득이는 언어의 슬픈 물빛을 찾아 지팡이를 짚고 걸었다. 아린 혼의 무게를 부드럽게 짚어주는 은빛 지팡이. 피는 붉은 것만은 아니다. 피는 울음처럼 맑을 수 있다. 흰 꽃잎이 눈송이처럼 무너지고 있는 눈부신 길을 걷는 나는 나의 상처다.

-「상처」全文, 129쪽.

그렇다면 그의 시는 죽음으로 가는 길목에서 쓴 '생채기'일 것이다. 붉은 피가 엉겨붙어 지저분한 상처가 아니라 맑디 맑은 사슴의 눈같은 상처. 그러고보면, 이 시집의 길 맨 처음에 만났던 바위의 메시지가 바로 상처이고 죽음이 아니었던가.



보유補遺

이 시집에는 각주가 없다. 요즘 시집을 읽으면 각주 표시 때문에 리듬과 흐름이 끊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리듬과 흐름의 단절'을 의도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각주는 자제해야 옳다. 이 시집에는 다른 시인들같으면 각주를 달았을 내용까지도 시 속에 포섭하고 있다. 가령,

『부란의 꽃』이란
성녀 리도비나에 대한 책이름이다.
사후에 육체가 젊었을 때와 같은
싱싱함과 미모에 돌아간 성자
열두 명이 이 책자에
열기되어 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여섯 모의 무구한 결정체로 되돌아간
진흙을 생각했다.

-「진흙에 대하여2」부분, 103쪽.

와 같은 부분은 웬만한 시인 같으면 부제로 『부란의 꽃』을 달고 2-6행 부분을 각주로 돌리고서 "나는 여섯 모의 무구한 결정체로 되돌아간-"으로 시를 시작할 것이다. 이것은

바깥을 보겠다는 의지가
뇌신경 세포 단말을
눈으로 만들었다.

신경생물학자의
최신 리포트를 읽었다.
지난해 Nature다.

그러나
한 시인은 말했다.
보아야 할
사랑의 대상이 밖에 있기 때문에
눈이 생겨났다.

-「눈의 발생」부분, 132쪽.

같은 부분도 마찬가지다.



지용의「파충류동물」인용부분은 다른 사람의 시로 밝혀졌다.
고대高大 최동호 교수의 지적으로 밝혀져 신판 지용전집에서는 빼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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