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와 공주》는 '꿈과 희망의 공장'인 디즈니가 절대 넘볼 수 없는 수준의 새로운 아니마시옹이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우화적인 알레고리에 불과한 것이지만, 《왕자와 공주》는 상상력과 자의식이라는 부분을 겹쳐놓은 풍부한 두께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그 안에 소속된 단편들은 유럽의 고전 동화들의 세계관에서 유달리 나아진 것이 없지만, 그런 상징들을 그들이 체현體現하는 과정은 전혀 새로운 방식이었던 것이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내지는 '믿음대로 되니라'라는 표현에 기초해볼 때 이 영화는 피그말리온의 '믿음'과도 관련될 것이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자신을 향해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피그말리온적인 나르시시즘이다.

자신이 극의 주인공이고 싶어하는 것은 사실 아이들이 흔히 가지는, 잘 알려진 동일시 행동이다. 디즈니의 시청자는 주인공이 되는 환상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환상일 뿐이다. 디즈니의 주인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은 캐릭터가 너무 강렬해서 다른 사람은 그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왕자와 거지》의 주인공들이 그림자극처럼 묘사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시종 얼굴조차 자세히 비치지 않는다. 스콧 매클루드는 『만화의 이해Understanding Comics』에서 사실화보다는 카툰과 같은 단순한 묘사가 자기동일시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끝으로 전통, 《왕자와 공주》에서 전통의 문제는 생각보다 크다. 여기서 유럽의 전통은 그대로 소재가 된다. 아니 유럽의 전통뿐 아니라 일본의 회화나 3000년대의 미래세계의 여왕까지도 어떤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미국문화와예술'을 듣는 후배 둘에게 "미국에 문화가 있어?"라고 물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러나 내 생각은 아직까지도 큰 변화가 없다.
신고
 
트랙백 0 : 댓글 0 2MB 퇴임이 남았습니다.

Write a comment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