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 요정’ 김연아 어쩌나

김연아 '올인'에 대해서 우려했던 사태가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 나는 황우석 사건과 비교하여 김연아 올인에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했었는데(링크), 그때만 해도 '그럴 우려가 있으니 조심하자' 정도였지 정말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선택과 집중'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 비근한 주식 투자만 해도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금언인데도, 다른 부분에서는 흔히 무시된다.

김연아 선수에 대한 '올인'은 그런 '대박 기대 투자'와는 또다른 해묵은 문제 하나를 더 갖고 있으니: 이는 스타 만들기다. 전체주의가 강한 국가일수록 스타 만들기에 전념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모쪼록 김 선수의 쾌유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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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총장 유엔 첫 출근... 아픈 '신고식'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사형제와 관련한 발언으로 UN에서 곤욕을 치른 모양이다. 사실 한국인들의 과반수가 사형제 유지에 찬성하고 있고(조선일보 기사), 반기문 역시 한국에서 장관 등을 지낸 사람이므로 그의 인식에 무슨 큰 문제가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다시 되새겨봐야 할 것은, UN을 비롯한 국제 사회가 사형 제도에 대해 갖는 입장과 한국인의 입장의 차이이다: UN은 지금껏 일관되게 사형제 폐지를 주장 내지 권고해 왔다. 다만 개별 국가에 이를 적용하라고 하면 내정 간섭이 되므로 이를 유보해 왔을 뿐이다. 이상한 것은 한국인들은 이를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사형제를 폐지하면 무슨 흉악범들이 활개를 칠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큰 오해이다; 큰 이상이 없어 보이는 한국도 9년째 사형 집행을 하지 않고 있다. (한겨레 기사) 그럼에도 인권위나 국제 엠네스티에서 아무리 '사형제 폐지' 권고를 해도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한 것이 벌써 몇 년이다.

UN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과 UN이 주장하는 모든 것을 따른다는 것은 분명 다른 문제지만, 반 사무총장의 UN 사무총장 취임이 우리들 개개인과 무슨 큰 관련이 있는 것처럼 '내 일'과 같이 반기던 사람들이 UN과 국제 엠네스티가 주장하고 있는 핵심 인권 사안을 가볍게 무시하는 것 또한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일은 아니다.

유태인 학살에 대해 깊이 자숙하고 되도록이면 그와 같은 과거와 확실히 선을 그으려고 하는 독일을 생각해보자. 독일은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자신들의 과거를 반성하고, 이와 같은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교육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흔히 한국인이 일본의 역사 인식과 대조하여 칭찬하곤 하는 태도다. 다른 나라나 민족에 대한 학살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부끄러운 역사'에 초점을 맞추면 어떨까?

19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사람들이 사형 판결을 받은 뒤 18시간만에 처형이 집행되는 일이 일어났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자체가 당시 정권에 의해 날조된 사건이었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대법원 확정 판결(상고 기각) 후 18시간만에 처형한 사안을 두고 스위스 쥬네브(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처형일인 1975년 4월 8일을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하기까지 했다. '사법 살인'이라는 묘한 합성어는 이런 사건에 뿌리를 둔 슬픈 조어造語다. 이런 '부끄러운 역사'를 겪은 한국은, 이에 대한 반작용이 없다. 아니, 반작용은 고사하고 '국제 표준'보다도 못한 인권 의식을 보여주는 나라가 한국이다.

다른 건 늘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치면서, 인권의 국제 표준은 여전히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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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獨-美 잇는 '국제 단일노조' 탄생할까?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하에 자본은 얼마든지 국경을 넘어다닐 수 있다. 2006년 '해외 펀드'가 뜰 수 있었던 것도, 우리가 가진 자본이 브릭스BRICs나 베트남 등지로 이동하여 투자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신자유주의는 자본'만'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가령, 브릭스 국가나 베트남의 노동자가 합법적으로 한국으로 이동하여 일자리를 얻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혹은 불법체류자로 불리는 외국인들은 대부분 이런 사람들이다.

국제 노동조합이 이와 같은 이주노동자들을 충분히 보호해주기는 어렵겠지만, 최소한 노동자의 연대solidarité를 통해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이런 국제 노동조합은 영-미-독 등 구미 국가에서만 출범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 그나마도 출범에 십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라는 점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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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미술은 ‘혁명문학’이다 : 책 : 문화 : 뉴스 : 한겨레:

예술의 경향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기'와 '아는 대로 그리기'로 나눈 아르놀트 하우저의 견해는 진정 탁견인 듯하다.

내 생각에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기'의 매력은 그 힘에 있다. 진실과 사실이 가진 힘을 우리가 모르는 바 아니기 때문이다. 꾸르베의 그림을 보았을 때, 그리고 러시아 민중들의 삶을 보았을 때 우리가 느끼는 절망과 그 절망에서 나오는 힘이란 그런 것이다.

'아는 대로 그리기'의 매력은 그 자유로움에 있는 것이다. 뭉크의 음산한 그림을 볼 때나, 마그리트의 묘한 그림을 볼 때, 그리고 샤갈의 분방하고 발랄한 그림을 볼 때 우리는 그런 것을 느끼는 것이다.

백색의 북국에서 일어난 혁명은, 또 무슨 색을 가지고 있을까. 어두운 흰색,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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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구글 검색엔진과 정면대결?: (세계일보)

위키피디아의 설립자가 위키피디아처럼 자원봉사자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검색 엔진을 만들 거라고 한다. 내심 구글을 따라잡는 검색 엔진이 목표인 모양인 것으로 보인다. 그가 구상하고 있는 자세한 방식은 모르겠지만, 위키의 방식으로 검색은 아무래도 무리가 아닐까 싶다. 그 이유는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보람이 없고, 양이 방대한 데다 다른 언어에 무력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가 '자원봉사'의 방식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각 분야의 전문가 내지는 준전문가들이 '내가 지식을 전달하는 전달자다'라고 하는 일종의 사명감이나 명예욕 또는 최소한 재미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디드로Diderot를 비롯한 계몽 철학자들의 결론이 백과전서였던 것처럼 말이다.

(프랑스는 계몽주의의 '발상지'였음에도, 불어에는 '계몽주의'라는 단어가 없다. 불어로 계몽주의는 빛의 시기Siécle de lumière라고 하는데, 여기는 빛이 가진 '지식'과 '지혜'의 속성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리스 신화를 잘 들여다보면 프로메테우스가 코카서스 산에 묶이게 된 것도 '불'을 인간에게 전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바슐라르Bachelard는 『불의 정신분석』에서 아버지나 선생님보다 더 잘 알고 싶은 경향을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 길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위키피디아를 이끌던 유저들은 자신들을 일종의 '프로메테우스'나 '계몽철학자'들로 여겼을 것이라는 짐작 때문이다.)

하지만, 검색 알고리듬을 기계 대신 수행하는 작업은 자원봉사로 하기에는 보람이 지나치게 적다.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실제로 많은 작업을 사람이 하는 '통합검색' 시스템이 있어서 잘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흔히 노가다(<どかた, 막일)로 불릴 만큼 고된 일이다. 한국에서는 돈을 받고서야 하는 일이라는 말이다.

더구나 백과사전과 일반 검색 대상 웹페이지는 그 양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차이가 크며, 업데이트 속도도 '하늘과 땅 차이'다. 그 모든 페이지들에 조금이라도 사람의 손길이 미쳐야 한다면 그 시간과 비용이란 엄청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구글과는 달리 위키피디아형 검색 엔진은 개발자들 또는 자원봉사자들이 사용하는 언어(아마도 영어) 이외의 언어에는 절대적으로 무력해지고 마는 것이다. 각 언어의 문법 구조만 알면 자연언어처리를 통해 자동으로 목록이 만들어지는 구글형과 달리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구조는 사람들이 자신이 아는 언어로만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위키형 검색 엔진이 성공하려면 각 언어권마다 충분한 수의 열정적인 자원봉사자들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 위키아 검색엔진의 성공 가능성은 극히 낮다. 위키아가 잊고 있는 것은 그뿐이 아니다: 구글이 개발하거나 사들인 수많은 툴들... 블로거닷컴, 피카사, 캘린더, 지메일, 스프레드시트 등도 이제 꺾기 힘든 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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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뱃갑에 경고문구 필요없다, 사진 한장이면 OK! : 국제일반 : 국제 : 뉴스 : 한겨레:

담배 회사에 대한 과도한 규제다? 나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들이 담배가 건강에 해로운 줄 몰라서 안 피우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은 자주 무디어지고 무감각해지기 때문에 담배의 해로움은 자주 광고하고 재확인시켜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진은 무척 유용하다.

황지우의 「경고」가 떠올랐다.

「경고」- 황지우 (열기)



이를테면 나는 환경호르몬의 위험에 대해 호들갑을 떠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실체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의혹을 사실로 단정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소비자의 입장이고, 생산자들은 자신들의 제품에 혹시 모를 위험이 있는지를 항상 연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수은의 위험을 모르던 시절, 수은으로 만든 화장품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겠는가? 그건 분명히 수은 화장품 회사들의 잘못이다.

담배도 마찬가지다. 담배의 위험에 대해 사람들이 잘 모를 수도 있고, 오히려 귀를 막고 있을 수도 있다. 담배 회사는 그 위험을 끊임없이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인터넷으로 치면 그게 약관이다: 회.사.의. 고.지.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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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신영복을 다시 사색하라 : 강준만의 세상읽기 : 칼럼 : 한겨레21:

민노총이나 전교조에 대한 기사를 볼 때마다 나는 '전략의 부재'가 안타깝다. 아니, 한국의 모든 정치세력을 볼 때마다, 과연 그들에게 전략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들은 대중에게 자신들이 어떻게 비칠지 전혀 생각지 않고 행동하는 듯하다. 대중 정치 사회에서는, 적어도 집권 세력이 아닌 정치 세력이 기댈 곳은 대중뿐인데도 말이다.

그들은 '언론'의 핑계를 댈 것이다: 아무리 해도 보수 언론들이 우리의 진의를 왜곡시킨다고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한국의 상황에서 보수 언론들은 하나의 '주어진 상황'이다. 애초부터 그들의 행동은 예측하고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상황이 와서는 안 되겠지만, 치밀한 전략으로 그들을 이용하는 정치력이 아쉽다.

한국의 진보는 자신들만의 '옳음' 속에 갖혀 있다. '진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선전전'은 가장 보수적이다. 나는 상황논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상황이 과격한 행동은 힘들지 않느냐,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집회에서도 80년대식의 화염병 시위는 사라지고, 촛불집회 등 새로운 형식의 집회가 자리잡았다. 아무도 '과격한 시위'는 하지 않는다. (보수 언론들이 '과격'이라는 낱말을 사용하는 것은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상당수의 이슈는 '대중 속으로' 파고들지 않고 있다. 아무도 대중을 향한 홍보를 하고 있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광화문이나 여의도를 지나면서, 집회 현장 바로 옆을 지나면서도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 집회를 하고 있으며,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를 알아채기란 쉽지 않은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들은 교통체증 때문에 짜증 나고, 군중 집회에 불안에 떠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정부를 적으로 돌리고 정부와 싸우려고 해서는 되지 않는다. 민노총이든 전교조든 정부보다 힘이 약하다. 정부보다 힘이 센 집단은 대중뿐이다. 그러므로 진보단체들은 정부를 변화시키려고 애쓰기보다는 대중을 변화시키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신영복 선생의 글은 쉽고 평이하다. 그래서 정치적 성향과는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신영복 선생의 글을 즐겨 읽고 감동을 받는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샘터』 같은 잡지나 정채봉 같은 작가의 글처럼 정치적 거부감을 주지 않으면서 정치적 생각을 바꾼다. (신영복 선생의 글이 『샘터』나 정채봉 수준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신영복 선생처럼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런 글쓰기를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의 방법론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노자 오슬로 대학 교수는 한 강연에서 80년대에 남쪽에서 주체사상이 퍼지게 된 계기는 진보 진영에서의 '어른'이 없는 상황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어른이 없는 상황에서 김일성의 품성론이 결핍의 한 부분을 채워주었다는 것이다. 이를 바꾸어 이해하면 신영복 선생과 같은 '어른'이 있는 지금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는 것일 수 있다. 신영복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에게 맞는 더 좋은 방법론을 찾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비판에 주력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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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 대구성서아카대미 원장 설교비평 책 눈길

열왕기하 2장 23-24절은, 자신을 보고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하고 외친 아이들을 저주하며 곰을 불러 찢어 죽이는 선지자 엘리사를 묘사하고 있다. 때때로 이 장면은 목회자의 권위를 보여준 사례로 인용되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성경을 찬찬히 읽어보면 그것과는 별반 관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회자의 권위를 보여준다는 쪽은 아이들의 놀림에서 '대머리'에만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엘리사는 대머리였다고 하는 주석을 본 바도 있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 요소는 아닌 것 같다; 만약 중요했다면 (일부) 주석이 아니라 본문에 나와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놀림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올라가라'는 부분이다. 열왕기하의 바로 앞 부분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올라가라'는 말이 놀림으로 쓰였다면 이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다: 이는 목회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여호와의 존재와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의 바로 앞에서 엘리사의 스승 격인 엘리야는 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다. 에녹과 인자人子와 함께 성경에 등장하는 세 승천 가운데 하나인데, 이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예수님의 승천을 표상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아이들이라도 '올라가라'라고 놀린다면 이는 엘리야의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며, 나아가 예수님의 구원 사업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사사기 7장에 나오는 기드온에 대한 설교였는데, 7장 5절에 나오는 이 구절이 문제였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무릇 개의 핥는 것 같이 그 혀로 물을 핥는 자는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무릇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도 그같이 하라 하시더니" 이 부분을 설교하는 목사님은 여기서 "개"라는 말이 갖는 부정적 의미에 주목하셨던지 성경에서 개가 나쁘게 묘사되는 구절의 목록을 만들어 줄줄 읊었다. 하지만 이는 명백히 오독이다; 이어지는 6절과 7절을 읽어보면 '기드온의 300용사'로 뽑히는 것은 "핥아 먹은 삼백명"이다. 설교자가 텍스트를 간과하면 이렇게 된다.


내가 보기에 한국 교회의 목사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자신들이 쓸모없는 존재일 수 있다는 자각이다. 평신도 선교사가 가서 봉사하는 선교지에서는 전문적인 설교가 있기 힘들다. 그런 곳에서는 성경 자체가 이미 훌륭한 설교이다. 예전에 만난 한 목사님은, 가끔 수요예배 시간에 설교 대신 30분간 성경 교독을 한다고 했다. 그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목사의 설교가 예배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그만큼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목사의 설교는 보다 더 훌륭해야 하고, 보다 더 정확해야 한다.

그 귀중한 설교 시간을 개인적 경험담으로 채운다든가, 기복 신앙에 기댄 세속적 축복으로 허비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새문안 교회는 더 기가 막히는데, 정치 이야기는 더더욱 안 된다. 여호와가 한나라당이든 열린우리당이든 또 어느 당이든 가입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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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엔디
우리銀 비정규직 전원 정규직 전환 - NO.1 경제포털 :: 매일경제

국가 공무원도 비정규직으로 뽑는 이 나라에서 한 은행이 꽤 훌륭한 결심을 했다. 우리은행이 비정규직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임금도 기존 정규직과 순차적으로 맞춰가겠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비정규직이 있어야 노동 유연성이 높아져 오히려 취업 시장이 활성화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런 거시적인 안목보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 한 사람(과 그 가족)이 어떻게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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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엔디
‘김연아 올인’…딴 요정은 어쩌나 : 스포츠일반 : 스포츠 : 뉴스 : 한겨레

빙상연맹이 김연아 선수에 대해 '무한 지원'을 약속하면서, 다른 선수들에게는 지원금을 전혀 지급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스포츠에서도 '선택과 집중'은 중요하다. 아마추어가 아닌 바에는 소질이 있는 선수를 집중 육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여기서 '형평성'이나 평등이라는 가치를 들고나올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경험'에 대해서 한 마디 하려고 하는 것이다.

국가 대표 선수 한 사람에게 지원금 '올인'이라. 가만,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아닌가? 연전에 우리는 '국가 과학자'라는 명목으로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에게 어마어마한 연구비가 지급되었으며 앞으로도 지급될 것이라는 소리를 매일 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황 전 교수가 뭔가 큰일을 해낼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도대체 황 전 교수의 그 큰일이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러나 황 전 교수의 실험은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것임이 드러났고, 자신들이 '국민'이라고 믿는 시민들은 당혹해했으며, 그 사이에서 기자들만 취재열을 올렸다.

나는 김연아 선수가 황우석 전 교수처럼 '사기'를 쳤다거나, (그런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앞으로 갑자기 다쳐서 선수 생활이 어려워지거나, 갑자기 결혼을 발표하고 선수 생활을 접는다거나 할 것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결혼을 했다고 선수 생활을 접는 것은 더더구나 옳지 않은 선택이다.) 다만 나는 '경험'에 대해 한 마디 하려고 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이미 황 전 교수와 관련된 '진실'을 들은 탓에 과학에 대한 무기력증을 경험하고 있다. 그 무기력증은 지금 이미 도를 넘어서 "그래도 황우석이 대단했는데." 내지는 "그래도 국가를 위해서는 황우석 다 용서하고 재기용해서 투자해야 하는데." 따위의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현재로서는 황 전 교수가 최선이라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황 전 교수가 최고인 이유는 수년간 나라에서 대는 과학 연구 지원금이 황우석 전 교수에게 '올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과학 유망주'들은 설 자리가 없었다.

게다가 국가 연구비 지원 당시는 현실적으로 황우석 전 교수의 연구가 상당한 의학적 실용성을 갖고 있다고 판단되므로, 국내외 대기업에서 상당한 수준의 지원을 이끌어내기도 쉬운 상황이었다. 또, 그 인도주의적 유용성 덕분에 상당한 기부금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국가의 지원금은 늘어만 갔으니, 아무리 '선택과 집중'이라고 해도 그 정도가 지나쳤던 것이다. 그건 미래를 생각하지 않은 단편적인 지원이자, 대표적인 전시 행정일 뿐이다.

내가 염려하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는 자주 '전시 행정'을 경험한다. 김연아 선수 정도면 스폰서를 구하기도 어렵지 않을 것인데, 김 선수에게만 '올인' 투자한다며 이는 예산 낭비이자 전시 행정이 아닐까? 만약 김 선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빙상 연맹의 '올인' 투자는 '오링'으로 귀결되지 않을까?
Posted by 엔디
창비주간논평


언젠가 나는, 마이클 무어의 《화씨911》을 보면서, 공화당이 불만이면 민주당, 민주당이 불만이면 공화당으로 갈 수밖에 없는 미국인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두 정당으로부터 '표밭'으로만 인식되지 '국민'이나 '시민'으로 인식되는 것 같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공화당에게 실망한 미국인들이 민주당으로 몰려드는 모습은 마치 레밍쥐들의 이동 같았다.

하지만 한국의 실정은 또 어떤가. 내 보기에 한국의 정당 정치에는 전통이라는 게 없다. 김수영은 "전통傳統은 아무리 더러운 傳統이라도 좋다"고 했는데, 한국의 정당 정치에는 그 전통이라는 것이 도무지 없다. 말장난을 하자면, 전통이 없다는 것이 전통일 정도다.

여당은 야당을 끌어모아 합당하거나 표지갈이만 한 신당을 창당하고, 대통령은 어느 사이 그 신당에 참여하지만 임기 말이 되면 어김없이 탈당이라는 절차를 거친다. 그 모든 과정의 목적은 단 하나: 책임회피다.

가령 지금의 한나라당이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에서 이어지는 독재정권의 계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지금의 한나라당에게 12.12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한나라당이 12.12의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좀더 정교한 정치적·역사적 분석을 필요로 할 것이다. 다만, 앞으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면피하려는 정치 세력에 대해서는, 우리가 시민으로서 대처해야 마땅하다는 것뿐이다.

열린우리당은 워낙 기움투성이의 정당이라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면 쪼개질 것이라는 예상이 컸고, 한나라당 역시 이념적 스펙트럼이 너무 넓어 당내 불화도 상당한 만큼 어떤 계기를 만나면 이합집산할 공산이 크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기대는 역시 확실한 정책을 가진 이념 정당이다.

이념 정당은 확실한 색깔이 있는 만큼 그 특성상 당의 간판을 바꾸더라도 책임을 회피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이념 정당은 자신의 이념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개발에 매진하게 되어 있다. 이념이라는 '원칙'이 있기 때문에 쉽사리 포퓰리즘에 빠질 염려도 없다.

무엇보다도 이념이란 단순한 '정권 창출'보다는 호흡이 길어 전통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정당의 목적은 단순한 '정권 창출'이 아니다. 정당의 목적이 '정권 창출'이라면 왜 모든 정당을 다 하나로 합당하지 않을까? 그것은 정당의 목적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정권을 창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상당히 오랜 기간 정권 창출의 신화를 이룬 독일 녹색당이 창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전통을 가꿀 수 있는 것은 확실한 정체성 때문이다.

미국은 공화당과 민주당 단 두 정당밖에 없지만, 두 정당이 확실한 이념적 정체성을 가지고 스펙트럼을 나누어 점유하고 있다. 어쩌면 미국인들을 그토록 단순하게 평가한 내가 레밍쥐처럼 사고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인들은 한 정당이 싫어지만 다른 정당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두 이념 중에서 취사선택하여 장점을 뽑으려고 긴 세월동안 노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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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두리가 '분데스리거'라고 했다. 가십성 기사를 써대는 작은 언론사의 일이 아니다. 포털 사이트에서 '분데스리거'로 뉴스 검색을 해보면 알겠지만, KBS와 MBC, 동아일보, 미디어오늘 등의 굵직굵직한 언론사가 이와 같은 용어를 썼다.

분데스리거라... 난 축구에 대해 잘 모르지만, 영국과 에스빠냐, 이딸리아, 독일의 축구 리그를 4대 리그라고 한다는 것은 들은 적이 있다. 각 리그는 당연히 제나라 말로 표기한다. 영국은 프리미어 리그Premier League, 에스빠냐는 프리메라 리가Primera Liga, 이딸리아는 세리에 아Serie A, 그리고 독일은 분데스리가Bundesliga인 것이다. (독일어는 복합명사를 무조건 붙여 쓴다.)

분데스리가는 연방, 연맹이라는 뜻의 분트Bund에 동맹, 단체라는 뜻의 리가Liga가 붙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리가Liga는 영어의 리그league에 해당한다. 문제는 리거leaguer에 해당하는 독일어는 Liger가 아니라 리기스트Ligist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분데스리거가 아니라 분데스리기스트가 맞는 표현이다.

나는 분데스리거를 분데스리기스트로 바꾸어 표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분데스리가 선수, 또는 분데스리가 소속 선수라고 하면 그만이다. 한국어도 아닐 뿐더러, 어법에 맞지도 않는 말을 무조건 영어식으로 끼워 맞추어 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책임있는 언론의 자세가 아니다.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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