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에 외투를 두고 회사 앞 식당에서 비빔밥을 사 먹는다. 혼자 먹는 저녁이라 부러 TV 앞자리를 골라 앉는다. 창밖엔 가난한 눈이 내리고 있다. TV는 이명박을 비추고 있다, 두 손을 번쩍 든. 문득 술이 마시고 싶어진다.

아니, 실은 낮부터 저녁 술 약속을 잡으려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회식이나 야근의 칼날을 비껴갈 수 있었던 친구들은 많지 않았다. 그런 밤이었다. 신촌이라면, 아마 신촌이라면 함께 술을 마실 마음 맞는 친구들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저 미끈거리는 눈물을 밟고 신촌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마침, 다행이었을까. 일이 진척을 보이지 않아 결국 야근이었다. 하마터면 공허한 약속을 하나 더 만들 뻔했다.

747공약이 공약空約이라고 특히 외국에서 말들이 많다. 괜찮다. 나는 이명박이 747 공약을 안/못 지켰다고 그를 비난할 생각이 없다. 말하자면, 나는 그가 말한 것보다도 그가 침묵하고 있는 것들을 더 걱정하는 편이다. 그는 가난한 이웃들에 대해 침묵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침묵하며, 다른 생각들에 대해 침묵한다. 말할 수 없는 부분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 것은 비트겐슈타인이었다. 언론은 너무 정확하게도 말할 수 있는 부분만을 보여준다.


1. 희년과 나그네됨

숫자로만 본다면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지난 1998년은 한국이라는 나라의 '희년禧年jubliee'이었다. 희년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제 50년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희년에 남북 정상이 처음으로 대화를 했고, 희년에 이루어진 정권 교체를 계기로 이 땅에 최소한의 복지 정책이 시작되었다. 레위기 25장은 여호와가 희년을 제정하는 목소리를 기록하고 있다:

오십 년이 되는 이 해를 너희는 거룩한 해로 정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지킬 해이다. […] 이 해를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

희년에는 모든 빚의 탕감, 땅의 소유권 반환, 종의 해방 등이 이루어졌다(레위기 25:23-28, 39-55). 자본주의의 눈으로 보면 가히 혁명적인 이 규정들은 본질적으로 이 세상의 소유자가 인간 개개인이 아니라 여호와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개역한글판, 레 25:23):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레위기 25장 특히 레위기 시절, 모세의 지도를 받고 있는 유태인들은 이런 규정들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만한 배경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얼마 전까지 이집트에서 노예로 생활했고, 그들을 그런 상태에서 해방시켜 준 것은 바로 여호와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경에는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하는 명령이 종종 나온다. 가령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설교를 보자:

그 때에 그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

이 말을 듣고 의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이 말을 듣고 그들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주님께서 언제 굶주리고 목마르셨으며, 언제 나그네 되시고 헐벗으셨으며, 또 언제 병드시고 감옥에 갇히셨기에 저희가 모른 체하고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면 임금은 '똑똑히 들어라.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회적 약자에게 한 일이 곧 그리스도에게 한 일이고, 사회적 약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자신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설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설교는 단순히 '착한 일을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가 유명한 '달란트 비유'에서 바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설교의 본질적인 의미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잠시 맡겨둔 것이므로 그것을 여호와의 마음에 맞는 곳에 써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그네에게 대접하라고 하는 말이 가장 처음 나오는 것은 출애굽기에서이다(개역한글판, 출 23:9):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느니라

이 율법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여호와는 신명기에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한 번 더 확인시킨다(개역한글판, 신 10: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이것이 몇 천년 전의 유태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야곱이 나이를 묻는 이집트의 파라오 앞에서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라고 대답했던 것처럼, 우리는 여기 다만 나그네로 있는 것이다. 가수 최희준은 "인생은 나그네길"이라고 노래했고, 시인 이성복은 "삶이란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규정지었다. 꾸란(13:26)에도 이런 세계관이 보인다:

불신자들은 현세의 생활을 기뻐하나 현세의 생활은 내세의 기쁨에 비하여 순간의 기쁨에 불과하니라

그러나 기독교에 있어서는 특히 나그네됨의 인식이 소중한데, 그것은 여호와가 이 땅 전체를 만든 신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노예였다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그네됨'의 인식이 확고할수록 우리 스스로가 나그네임을 자각하여 이 땅에 다른 나그네를 사랑하고 그들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

나그네라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이 땅의 이방인들, 곧 한국 사회의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우리가 영접하고 맞아들여야 할 이 땅의 나그네다. 또 한편, 이 땅의 소외되고 박해받는 노동자들과 집이 없는 세입자들 역시 우리의 나그네다. 우리는 그동안 '법과 원칙'을 부르짖으며 그들을 짓밟았고, 그들을 착취했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아주 잘 지켰다고 자부하는 의기양양한 청년에게 이렇게 말한다(마태복음 19:21):

예수께서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하셨다.

성경은 그 청년이 재물이 많은 탓에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전한다. 어리석은 그 청년은 자신이 나그네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 모든 재물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것이라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어리석다는 것은 그 청년이 물욕物慾이 너무 많다는 뜻만은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그 청년이 이재에도 능하지 못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가 직접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라고 언급하기도 했거니와 그보다 훨씬 더 전에 모세는 계산을 잘 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적이 있다(시편 90:12):

우리에게 날수를 제대로 헤아릴 줄 알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지혜에 이르게 하소서.

천상병 시인이 약간은 슬프게 읊었던 것처럼, 우리는 이 땅에 다만 '소풍' 왔을 뿐이다. 이땅의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전도서의 지혜이다.


2. 우리 곁의 나그네

눈발이 2월 25일의 저녁을 싸늘하게 덮어 주고 있었다. 밤늦게 사무실에서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저마다의 고통을 간직한 여남은 눈망울들이 거기서 떨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 사내가 울고 있었다.

"아니, 젊은 사람이 뭐가 걱정이야. 괜찮아, 괜찮아.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 하다못해 어디 가서 경비 노릇을 해도 백오십은 받어, 백오십은 받는다고. 괜찮아. 아니, 젊은 사람이 뭐가 걱정이라고 이렇게 울어. 울지 말어. 나도 경비 노릇도 해보고 다 해본 사람이야. 다시 시작하면 못할 게 뭐 있어. 나이가 젊잖아."

사내 옆에서 한 노인이 위로인지 꾸짖음인지 알 수 없을 목소리를 하고 사내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를테면 그 목소리는 이런 것이었다: 호통은 쳤으되 하나도 위협이 되지 않는 목소리, 내가 너와 함께 고통을 겪는 사람이라는 목소리, 내가 너에게 줄 것이라고는 이 위로하는 말 몇 마디 뿐이라는 목소리. 이곳 버스 정류장에서 처음 만난 것이 분명한 그들 사이에서 나는 그리스도가 말한 이웃을 보고 있었다. 사내는 그 노인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절박한 심정으로 듣고 있었다. 약간은 술기운을 빈 그는 울먹이며 노인에게 되물었다, 그것이 무슨 신탁이라도 된다는 듯이:

"어르신, 정말 다시 시작하면 될까요?"
"아, 그럼, 그럼. 젊은 사람이 뭐가 걱정이야. 나이도 오십줄 초반 밖에 안 되어 보이는구만."
"아니요, 어르신, 제가 사십댑니다."
"아, 그러면 더 걱정할 것 없어. 금방 다 극복하고 잘 될 거야. 젊은 사람이 말이야."

눈발이 그들을 싸늘하게 덮어 주고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버스가 도착했고, 나는 위로받으려는 사십대와 위로하려는 어르신을 두고 버스에 올랐다. 그 순간, 내 앞에 전경foreground이었던 그들은 갑자기 배경background으로 변했다. 버스 바깥의 온 세상이 배경화하는 순간 나는 약간 두려워졌고, 블레이크를 생각했다.

I wander through each chartered street,
Near where the chartered Thames does flow,
And mark in every face I meet
Marks of weakness, marks of woe.

In every cry of every man,
In every infant's cry of fear,
In every voice, in every ban,
The mind-forged manacles I hear.

How the chimney-sweeper's cry
Every black'ning church appalls
And the hapless soldier's sigh
Runs in blood down palace walls.

But most through midnight streets I hear
How the youthful harlot's curse
Blasts the new born infant's tear
And blights with plagues the marriage hearse.

특권의 탬즈 강이 흐르는 그 곁으로,
나느 특권의 거리거리를 정처없이 걸으며,
지나는 모든 이의 얼굴에서 본다,
약함의 자국들을, 비애의 자국들을.

모든 사람의 모든 울음에서,
모든 갓난아기의 두려운 울음에서,
모든 목소리에서, 모든 금지 속에서,
나는 마음이 벼린 수갑 소리를 듣는다.

굴뚝청소부의 울음 소리가 어떻게
모든 검은 죄 저지르는 교회를 창백하게 하는지를
그리고 불운한 병사의 한숨이
궁궐의 벽을 따라 한숨으로 흐르는가를.

그러나 한밤중 거리의 많은 것들에서 나는 듣는다
젊은 창녀의 저주가 어떻게
갓 태어난 아기의 눈물을 이울게 하는지를
그리고 결혼의 묘지를 역병으로 마르게 하는지를.

William Blake, London.

나는 날리는 눈발이 검고 검은 아스팔트를 하얗게 덮는 것을 보았다. 검은 연탄 위에 하얀 눈이 쌓이던 그의 대선 광고가 생각났다. 나는 버스에서 손잡이를 잡고 서 가면서도 간간이 졸았다. 꿈에서 이 땅의 고통받는 나그네들이 겪을 검은 현실을 누군가 거꾸로 흰 크레파스로 덧칠하는 모습을 본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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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엔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신경 쓰는 것은 한반도 대운하와 기업 투자, 그리고 영어 교육 뿐인 것 같다. 영어 몰입교육을 주창하다가 한 발 물러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다시 영어 이야기를 꺼냈다. 이경숙 위원장은 "처음 미국에 가서 (표기법 대로) '오렌지'를 달라고 했더니 못 알아들어서 'Orange'라고 말하니 알아듣더라"는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하면서 영어 교육을 위해서 외래어 표기법을 바꾸자고 제안했고, 인수위 공식적으로는 "학교 교육만으로 영어를 해결하기 위해 5년간 4조원을 들이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경숙 위원장은 적어도 한 대학의 교수로 오래 일했고 총장까지 지냈던 교육자다. 게다가 그런 사람이 국내에 TESOL(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을 처음 도입한 '영어 전도사'로 알려져 있고, 또 그가 차기 정부 정책의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위원장이라면 우리는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이경숙 위원장이 이야기한 것은 영어 교육의 문제점이 아니며, 국립국어원이 관장하는 외래어 표기법이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에 대한 이경숙 위원장의 철학에 대해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한편 중등(중고교) 과정까지의 공교육만으로 영어를 해결하도록 하겠다는 것은 이명박 정부의 핵심적인 정책으로 보이는데, 사실 당연히 그렇게 되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한국 사회가 앞으로 영어가 되었든 다른 무슨 언어가 되었든 공교육만으로 충분히 외국어 능력을 습득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언제가 되었든 꼭 그렇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교육을 강화하겠다는 이명박 인수위의 정책을 총론 차원에서 인정하고 독려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각론인데, 먼저 거기에 5년간 4조원 이상을 들이는 것이 효율적인 일인가를 확인해 봐야 하며, 그렇게 들였을 때 과연 인수위가 주장하는 대로 중등 과정 졸업만으로 영어가 유창해질 수 있느냐를 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과연 그것이 (이명박이 바라는 대로) 향후 5년 안에 가능하다고 믿고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나는 이명박 차기 정부의 '실용주의'라는 이름의 철학이 그들이 내세우는 영어에 대한 이야기들 만으로도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다; 한반도 대운하 정책은 사실 논의만 던져 주고 나머지는 사기업에 맡긴다고 하면 그만이고, 친기업적 정책 역시 전봇대만 좀 뽑아 주면 나머지는 사기업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영어 정책은 분명히 국가의 고유 업무 영역인 공교육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일이며, 따라서 이명박 차기 정부가 가장 힘주어 처리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를 인식한 듯, 대통령직 인수위는 "영어 공교육 강화는 제2의 청계천 사업"이라는 수사修辭까지 구사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인수위가 말하는 영어 공교육 정책을 살펴보는 것은 분명 상당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먼저 이경숙 위원장의 '오렌지 발언'을 단초로 하여 이 위원장의 발언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위원회가 말하는 '실용주의'가 '언어 제국주의'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밝히려고 한다.

 

1. 한글의 수난과 비전문가들의 오지랖

논의에 앞서 한글의 수난사를 잠깐 훑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지금 이경숙 위원장이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외래어표기법이며 그것은 외래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한글의 수난사 하면 대개 1940년대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을 펴던 시절을 생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한글이 받은 수난의 역사는 훨씬 더 길고 깊다: 세종대왕이 한글(훈민정음)을 만든 그 순간부터 한글의 수난은 시작되었고, 그렇게 시작된 한글의 수난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최만리가 훈민정음을 만드는 것이 불가하다고 아뢰는 장면이 나온다:

1.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遵行)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1. 옛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고(蒙古)·서하(西夏)·여진(女眞)·일본(日本)과 서번(西蕃)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옛글에 말하기를, ‘화하(華夏)를 써서 이적(夷狄)을 변화시킨다. ’ 하였고, 화하가 이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로 중국에서 모두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의 남긴 풍속이 있다 하고, 문물과 예악을 중화에 견주어 말하기도 하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이른바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당랑환(螗螂丸)을 취함이오니,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오리까.

一, 我朝自祖宗以來, 至誠事大, 一遵華制, 今當同文同軌之時, 創作諺文, 有駭觀聽。 儻曰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 若流中國, 或有非議之者, 豈不有愧於事大慕華?

一, 自古九州之內, 風土雖異, 未有因方言而別爲文字者, 唯蒙古、西夏、女眞、日本、西蕃之類, 各有其字, 是皆夷狄事耳, 無足道者。 《傳》曰: “用夏變夷, 未聞變於夷者也。” 歷代中國皆以我國有箕子遺風, 文物禮樂, 比擬中華。 今別作諺文, 捨中國而自同於夷狄, 是所謂棄蘇合之香, 而取螗螂之丸也, 豈非文明之大累哉?

요컨대 당시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이었던 사대주의자 최만리의 입장에서는 '큰 나라大國'를 섬기고 '중심지의 화려함中華'를 따르는 것이 조선의 마땅히 행해야 할 바였던 것이다. 그의 걱정거리는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자칫 중국이 우리를 오랑캐夷狄으로 여기면 큰일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소를 올리는 최만리의 무리들이 언어학에 대해서는 거의 몰랐던 것 같다. 그것은 세종이 이렇게 그들을 꾸짖는 부분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강신항 2003. 209):

또 그대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과 칠음을 알며, 자모가 몇인지 아느냐? 만일에 내가 저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 누가 이를 바로잡겠느냐?

且汝知韻書乎? 四聲七音, 字母有幾乎? 若非予正其韻書, 則伊誰正之乎?

운서韻書란 언어학 가운데 음운론 내지 음성학을 일컫던 당시의 성운학聲韻學에 기초한 일종의 발음 사전이며, 사성四聲은 지금 중국어와 동남아시아 언어들에 있는 평성·거성·상성·입성의 성조이고, 칠음七音은 어금닛소리牙音·혓소리舌音·입술소리脣音·잇소리齒音·목구멍소리喉音·반혓소리半舌音·반잇소리半齒音로 닿소리의 분류이다. 세종대왕이 스스로 "만일에 내가 저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 누가 이를 바로잡겠느냐?"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세종은 임금이면서 당대에 가장 뛰어난 언어학자였다. 세종의 가장 급진적인 정책은 이렇게 비전문가인 사대주의자의 국익을 들먹이는 반대를 뚫고 시작되었다는 부분을 기억해두자.

이후 한글은 조롱조로 언문 또는 암클이라 불리며 조선 왕조 시대를 살아냈다. 한글이 재발견된 것은 한창 민족주의를 받아들인 개화기 때였다. 나라를 앗긴 후 돌이켜보니 '우리글'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한글에 대해서 한마디씩 거들게 된다. (여담이지만, 언어와 글자는 학문 연구의 대상이 되면서도 사실 그 사회의 누구나가 쓰는 도구이기 때문에 고등 교육 정도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언어나 글자에 대해 말을 꺼내는 데 두려움이 없게 되는 것 같다. 가령, 정치학 박사가 후두암의 진단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는 없지만, 한글의 표기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는 더러 있는 것이다.) 근대 이후 정부가 인가한 첫 국어 정책이 종두법으로 유명한 의사였던 지석영의 「신정국문新訂國文」(1905)이었다는 사실은--지석영의 「신정국문」 자체에 대한 평가는 논외로 하고--한글이 얼마나 비전문가들에 의해 쉽게 좌지우지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개화기에는 유학파 지식인들이 한글에 대해 너도나도 한마디씩 거들었다면, 오늘날에는 주로 경제 논리나 영어중심주의에서 또는 경제 논리와 영어중심주의에서 한글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이경숙 위원장의 '오렌지 발언'은 사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이다. 이런 주장은 수없이 많다.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으로 경제학자인 김영봉 교수가 2년 전에 쓴 신문 칼럼 '한글의 외래어표기와 세계화'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김 교수는 한글에 [f]를 표기할 수 있는 글자가 없어 불편하니 'ㅍ'에 모자를 씌우든 새 글자를 만들든 [f] 발음에 해당하는 글자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필'이 꽂히고, '팬시' 숍을 주로 찾는다기에 '약pill'에 취하고 '여성용품pansy' 가게에 잘 간다는 소린줄 알았다는 것이다.

한글은 일제 후기 민족말살정책에 의해서만 수난을 받은 것이 아니다: 한글은 창제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수난 중이다. 특히 15세기 최만리의 주장과 21세기 김영봉 교수·이경숙 위원장의 주장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 큰 나라의 논리를 따르자, 중심지의 화려함을 좇자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 근거는 하나같이 모두 국익國益이다. 아마 이명박 차기 정부가 주장하는 '실용주의'란 이 지점에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애써 평가절하하는 노무현 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결정할 때 국익을 이야기했고, 한미 FTA를 추진할 때 국익을 이야기했다. 이명박 차기 정부 역시 국가 경쟁력을 들어 영어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이야기한다. 새로울 것도 실체도 없는 '실용주의'라는 말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비전문가라면 한글이나 한국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운서나 사성칠음, 자모는 고등학교 과정에서 대부분 다루는 것이고, 외래어표기법이 정착된 과정은 아주 길게 잡아도 하루나 이틀 정도만 시간을 내면 정립된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있게 된다. 나는 다만 이 정도도 공부하지 않고 한글이나 한국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오지랖 혹은 오만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2. 외래어 표기법 개정, 그리고 언어학, 영어 교육과 한국어 교육
--Press Friedly와 Orange를 중심으로

(이 절에서 대괄호([])에 묶인 알파벳은 국제음성기호IPA:International Phonetic Alphabet입니다. 한국어 위키 낱말사전에 IPA 항목이 있지만 자료가 충분치 않고, 국제음성기호 항목에 한글의 IPA 표기 일람이 나와 있지만 일부 항목(가령 'ㅈ'의 IPA 표기)에 오류가 있어 추천하지 않습니다. 참고만 하세요. IPA가 보이지 않으신다면 여기에 가셔서 Charis SIL 글꼴을 내려받아 압축을 푸신 후 CharisSILR.ttf CharisSILB.ttf CharisSILI.ttf CharisSILBI.ttf 등 네 파일을 Windows\Fonts 폴더로 복사하세요.

한편, 옛한글이 안 보이시는 분은 여기에 가셔서 un-fonts-extra를 내려받으신 후 압축을 푸시면 나오는 ttf 파일들을 모두 Windows\Fonts 폴더로 복사하세요.)

이경숙 위원장은 Press Friendly를 모든 신문이 '프레스 프랜들리'로 적었다며 [p]와 [f]를 구분하지 않는 것에 대해 지적했다. 김영봉 교수도 [f]를 표기할 수 있도록 표기법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f]의 표기는 [r]의 표기만큼이나  길고도 지루하다.

사실 [f]를 표기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청량음료의 이름 FANTA를 '환타'로 표기하는 사례에서 남아 있듯이 과거에는 [f]를 '후'로 표기했다. 아직도 연세가 있으신 일부 어르신들은 free를 '후리'로, fax를 '훽스'로 발음하고 있고, 제일모직의 브랜드 FUBU는 아직도 '후부'라고 표기한다. 아마 [f]를 일본어 가따가나의 'フ'(히라가나로는 'ふ')로 표기하는 데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일본인들은 일본어 고유명사를 로마자 알파벳으로 표기할 때도 'ふ/フ'를 fu로 표기하고 있다. 가령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Fukuzawa Yukichi로 표기된다.)

한편으로는 입술가벼운소리脣輕音 'ㅍ'인 ''를 사용할 수 있다. 본래 입술가벼운소리는 두입술갈이소리兩脣摩擦音으로 두 입술이 완전히 붙었다 떨어지면서 내는 'ㅍ'이나 'ㅂ'과 달리 두 입술이 가까이 다가가기는 하되 완전히 붙지는 않은 상태에서 그 두 입술 사이에서 나는 마찰음이다. 예를 들어 '부부'라는 낱말을 발음할 때 첫번째 'ㅂ'과 두번째 'ㅂ'은 서로 다른 소리임을 알 수 있다. 첫번째 'ㅂ'은 두 입술이 완전히 붙었다 떨어지면서 소리가 나는 반면, 두번째 'ㅂ'은 완전히 붙지는 않는다. IPA로 표기하면 '부부'는 [buβu]가 된다. 한편 [f]나 [v]는 이입술소리脣齒音으로 윗니와 아랫입술 사이에서 나는 마찰음이다. 그러므로 본래 'ㅸ'[β]은 [v]와 다르고, 'ㆄ'[ɸ]은 [f]와 다르지만 15세기에 사용되었던 그 표기를 응용해서 쓸 수 있다. 실제로 약간 변형된 입술가벼운소리 표기가 1930년 경에는 널리 사용되었는데, 외솔 최현배 선생이 실제로 『우리말본』 등에서 'ᅋᅳᆧ랑스(랑스)'로 사용하기도 했고(최현배 1961, 217), 정지용의 데뷔 시詩인 「카ᅋᅦᆧ ᅋᅳᆧ란스(카 란스)」에도 사용되었다(정지용 1988, 15).

"외솔OLYMPUS OPTICAL CO.,LTD | C2Z,D520Z,C220Z | Normal program | Multi-Segment | 1/60sec | f2.8 | 0EV | 5mm | ISO-80 | No Flash | 0000:00:00 00:00:00

외솔 최현배, 『우리말본』

"정지용,OLYMPUS OPTICAL CO.,LTD | C2Z,D520Z,C220Z | Normal program | Multi-Segment | 1/80sec | f2.8 | 0EV | 5mm | ISO-80 | No Flash | 0000:00:00 00:00:00

정지용, 「카페 프란스」

방법을 찾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과연 그것이 필요한가이다. 정말 [p]와 [f]를 구별하지 못해서 우리의 말글살이言語生活가 그토록 어려운가?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런 주장으로는 50개의 음절만으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 일본을 설명할 수 없고, '파울[paul]이야, 파울'이라고 발음해도 알아서 타자가 친 공이 파울foul 라인을 넘어간 것으로 알아듣는 말무리言衆들을 설명할 수 없다.

"Longman

Longman Dictionary of Contemporary English의 Orange 항목

언어학적으로 보자면, [f]에 해당하는 한글 표기를 만들자거나 ['ɒrɪndʒ], ['ɑ:rɪndʒ] 또는 ['ɔ:rɪndʒ]를 표기할 수 있는 표기를 만들자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일이다. 드 소쉬르de Saussure(1990, 143)에 따르면, 언어는 서로간의 '차이'에 의해 구별되는 하나의 기호 체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어의 말무리들이 거의 구별하지 못하고, 구별할 필요가 없는 [p]와 [f]의 차이와 [o]와 [ɒ], [ɑ], [a], [ɐ], [ɔ]의 차이를 표기법에 반영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IPA

IPA 모음 사각도

순수하게 영어 교육의 측면에서만 봐도 마찬가지다. 영어를 잘 하기 위해서라면 한글의 표기를 바꿀 것이 아니라 로마자 알파벳을 사용한 영어 교육에 신경써야 한다. 실제로 지금의 유아 영어 교육은 알파벳 낱글자 또는 글자들의 조합의 소리를 익히는 '파닉스phonics'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영어 교육을 위해 외래어의 표기법을 바꾸자고 주장하는 것은 효과도 전혀 없는 시대착오적 주장이다. 그런 점에서 이경숙 위원장이나 이명박의 영어관은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복거일(1998, 165-183)의 주장보다 순수하지 못하다. 차라리 복거일은 일관적인 자신의 논지와 논거를 댈 능력이 있다. 이경숙 위원장이나 이명박은 여전히 그렇다면 왜 이 나라에 한국어와 한글이 필요한가, 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한국어의 측면에서 보면 이경숙 위원장의 발언은 심각하다. 한글로 님이 Orange를 오렌지로 표기하는 이유 - 이경숙 위원장님께에서 지적했듯이 오렌지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는 한국어(외래어) 낱말이다. 따라서 이 낱말은 한국어 낱말이다. 프랑스어 단어 buffet[byfe]가 영어에서는 ['bʊfeɪ] 또는 [bə'fei]로 발음되듯이 Orange가 영미권에서 어떻게 발음되는가에 관계 없이 한국어에서는 '오렌지'라고 적고 '오렌지'라고 발음하면 그만인 것이다.


3. 영어와 제국주의

영어가 실은 영미의 제국주의적 음모를 위한 도구라고 한다면 종북주의자의 딱지를 얻게 되거나 시대착오적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될까? 나는 종북주의와는 한 터럭도 관계 없고 항상 동시대적이고자 하는 사람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영어에 대한 저 명제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영어는 사실 영미의 제국주의적 음모를 위한 도구다.

로버트 필립슨Robert Phillipson은 제국주의와 언어의 상관관계에 대한 여러 단서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三浦信孝·糟谷啓介 엮음 2005, 124): 흔히 콜럼버스라는 미국식 이름으로 알려진 끄리스또포로 꼴롬보Christoforo Colombo가 서인도 제도를 발견한 해로 제국주의의 상징이 된 1492년, 에스빠냐의 문법학자 네브리하Nebrija가 까스띠야 스페인어는 "해외 정복의 도구이자 교육받지 못한 무식한 말들을 국내에서 뿌리뽑는 무기다. …… 언어는 언제나 제국의 동반자였고 언제까지나 동료로 남을 것이다."라고 지극히 제국주의적 발상으로 말한 것이다.

문제는 제국주의 패권 시대가 거의 끝난 현단계에도 언어의 제국주의적 속성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필립슨에 따르면 탈식민지 시대에도 언어는 제국주의적 음모를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三浦信孝·糟谷啓介 엮음 2005, 126):

1950년대에 작성된 영국 정부 보고서들 역시 탈식민지 시대에도 영국의 이익이 보호되고 유지되려면 학문적 사회기반시설에 투자해야 한다고 단언했다.(Phillipson, 1992, 6장) 영어의 보급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이자 경쟁 관계인 다른 제국주의 세력들을 제압하는 방법으로 여겨졌다. 이 사명은 『영국문화협회의 연례 보고서』(1960~1961)에서 다음과 같이 공식화되었다.

세계를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는 것은 미국이 영어를 자국의 이주민 집단들의 공통 민족어로 확립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과제를 확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세계'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영어를 사용하는 것은 영국과 미국의 이익에 들어맞는다고 보았으며, 그 자체가 대외 원조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레닌Lenin에 따르면 제국주의란 "독점자본주의의 논리적 발전"이며 "자본주의 발전의 최고의 단계"이므로(Sabine and Thorson 1997, 1187), 영미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영어 보급에 힘쓰는 것은 영어의 독점자본주의로서 일종의 제국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독점이라는 것은 "자유경쟁의 직접적 대립물"이면서도 역사적으로 자유경쟁은 쉽게 "독점으로 전화"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Lenin 1986, 121). 이를 언어에 적용해 보면, 수많은 언어가 자유로이 '경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런 '자유경쟁'으로 인해 한두 특정 거대 언어가 나머지 작은 언어들을 지배하게 되는 경향성이 뚜렷하게 되는 것이다.

가스야 게이스케糟谷啓介(三浦信孝·糟谷啓介 엮음 2005, 369-391)는 그람시헤게모니 이론을 빌어 이 '언어 제국주의'를 분석하면서 언어라는 것이 헤게모니를 과연 장악하는 사물인가를 논증하고 있지만, 사실 학술적인 논의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언어 제국주의와 영어 헤게모니를 그렇게 힘들여 입증할 필요는 없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어가 지금 헤게모니를 장악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나아가 그것이 일종의 제국주의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은 한국의 역사 속에서 매우 낯익은 풍경 가운데 하나이다:

"얘, 너 그 노어 공부를 열심히 해라."
"왜요?"
아들은 갑자기 튀어나오는 아버지의 말에 의아를 느끼면서 반문했다.
"야 원식아, 별 수 없다. 왜정 때는 그래도 일본말이 출세를 하게 했고 이제는 노어가 또 판을 치지 않니.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바에야 그 물 속에서 살 방도를 궁리해야지. 아무튼 그 노서아말 꾸준히 해라."

전광용(1994, 233)의 「꺼삐딴 리」는 일찍이 언어가 가진 헤게모니성를 간파한 한 의사의 이야기다. 이인국 박사는 일제 시대에는 일본어로, 해방 후 이북에서는 러시아어로, 그리고 월남해서는 다음과 같이 영어로 출셋길을 닦았다(전광용 1994, 246-247):

브라운 씨의 영어 반 한국말 반으로 섞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인국 박사는 흐뭇한 기분에 젖었다.
"닥터 리는 영어를 어디서 배웠습니까?"
"일제 시대에 일본말 식으로 배웠지요. 예를 들면 '잣도 이즈 아걋도' 식으루요."
"그런데 지금은 발음이 좋은데요. 문법이 아주 정확한 스탠다스 잉글리쉬입니다."
[…]
"얼마 전부터 개인 교수를 받고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이인국 박사는 자기의 어학적 재질에 은근히 자긍을 느꼈다.
[…]
그는 혈압 때문에 술을 조절해야 하는 자기 체질에 알맞게 스카치 잔을 핥듯이 조금씩 목을 축이면서 브라운 씨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거, 국무성에서 통지 왔습니다."

영어를 왜 배워야 하는지를 물으면 누구나 미국이 세계의 정치적·경제적 패권을 쥐고 있는 현단계의 상황과 전체 대외무역 가운데 대미무역이 차지하는 비중 등을 말할 것이다. 어떤 이는 '세상이 다 영어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답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영어의 독점자본주의다. 실제로 '헤게모니'라는 개념이 여기서 대두되는데, 미우라 노부따까三浦信孝는 이를 이렇게 정리한다(三浦信孝·糟谷啓介 엮음 2005, 17-18):

그러한 의미에서, 심포지엄의 마지막 날에 가스야 게이스케(糟谷啓介)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소개하면서, 행한 논리의 정리는 귀중했다. 그람시는, '정치적 강제가 없는데, 왜 특정한 언어의 사용이 확대되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하여, 화자의 자발적 동의에 의한 소언어에서 대언어에로의 이동 뒤편에 익명의 권력 작용이 매개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헤게모니를 '시민의 자발적 동의를 조직하는 권력'이라고 정의한 다음, 이것을 '독재'와 구별했다. 언어 제국주의가 정치적 강제를 유력한 수단으로 하여 정책적으로 실행했다고 한다면, 포스트식민지 시대의 '언어 헤게모니'는, 그 주체도 특정하지 못한 채,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 쪽으로 사람들을 유인한다. 이 가시적인 강제를 동반하지 않는 '헤게모니' 개념이, 오늘의 언어 제국주의를 분석하는 데에 대단히 유효하다는 것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언어 제국주의의 무서운 점은 그것이 총칼로 무장한 권력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 작용이라는 점이다. 가령 실제로 국제연합이 창설될 때 프랑스어에 국제적인 지위를 얻었던 것은 프랑스뿐 아니라 여러 프랑스의 과거 피식민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三浦信孝·糟谷啓介 엮음 2005, 372). 버나드 스폴스키Bernard Spolsky(2001, 110)는 영어가 국제적 권력을 얻기까지 영미가 직접적으로 한 일은 거의 없었다고 지적한다:

영어가 20세기에 세계어로 발전하게 된 과정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사실 수요가 공급을 항상 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어 사용 국가들의 언어 확산 노력들은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세계적 열망을 이용하려는 시도인 경우가 많았다. 영어에 대한 관심을 부추길 필요는 거의 없었다. 영어는 현대 기술, 경제 성장, 국제화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전세계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도록 하였다. 이런 움직임이 성공을 거두면 거둘수록 다른 사람들도 영어를 알면 얻게 된다고 여겨지는 권력과 성공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원하는 이유가 더 커지게 된다.

복거일(1998, 166-169)은 그러한 언어의 확장이 '망network 경제'라고 하는 현상 때문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메트카프의 법칙Metcalfe's Law'에 따르면, 사용자에 대한 효용으로 정의되는 망의 가치는 대체로 사용자 수의 제곱에 비례해서 들어난다"는 것이다. 즉, 많이 사용되는 '표준'이 열등하고 새롭게 대두되는 무언가가 우등하다고 해서 쉽게 전이shift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경제학적인 사정으로 인해 영어의 권력은 생각보다 더 공고하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런데, 이와 같은 권력 관계의 자각이 반드시 언어의 피식민 그룹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는 점은 흥미롭다. 오다 마사끼Masaki Oda는 "Linguicism in Action: Language and Power in Academic Institution"에서 영미권의 TESOL(Teaching of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 종사자들이 식민주의적이고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을 가지고 일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三浦信孝·糟谷啓介 엮음 2005, 128; Phililipson 2000, 117-121). 오다는 아끼 마에다Aki Maeda라는 일본인 대학생이 영국의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과정을 이수하면서 겪은 언어적 차별linguicism을 소개하면서 토베 스쿠트나브-캉가스Tove Skutnabb-Kangas가 말한 대로 언어가 지배와 통제의 도구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이론을 확인한다. 오다에 따르면 특히 영어 교육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권력 관계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는 영어 원어민과 비원어민의 차원에서, 다른 하나는 강사와 학생 사이에서이다.

이를 좀더 넓게 확장시켜 보면,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나라들과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나라들 사이의 권력 관계가 어떤 양상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영미는 영어의 네이티브인 동시에 한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이 스승-제자 패러다임은 (굳이 한국과 일본이 범유교문화권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이들 나라에서 자발적으로 영어를 배우려고 애쓰고, 영어 능력에 따라서 그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까닭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영어는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들어 제국주의적 지배 계급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한다.


결론: '실용'주의와 영어 이데올로기

실용주의란 무엇인가. 동녘판 『철학소사전』의 '실용주의' 항목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엮고 옮김 1990, 231):

우리의 표상, 개념, 명제 등은 객관적 실재에 대한 모상을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행동을 위한 규칙이라고 하는 테제가 실용주의의 이론적 핵심이다. 그에 따르면 진리는 명제와 객관적 사태와의 일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실제적 유용성, 즉 결과에 있다. 이러한 입장의 귀결은 어떤 성과를 내고 유용성을 가져오는 실천적 행위나 견해는 무엇이든 '확충된' 것이라고 정당화하는 철저한 상대주의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실용주의는 모든 도덕을 부정한다. 실용주의에서 볼 때 도덕은 편견의 체계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를 때 실제 생활에서 모든 인간들에 구속력이 있는 도덕적 규범이나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힐쉬베르거(1999, 760)는 "프라그마티즘에 있어서의 참된 것이란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때 이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라는 개념은 보통 애매하여 프라그마티즘은 사람들이 이 개념을 무엇이라고 이해하건 내버려둔다"고 소개한다.

즉, 실용주의란 철저한 주관주의이자 상대주의이다. 하지만, 힐쉬베르거가 지적했듯이 실용주의의 지향점은 모호하다. 실용주의 정부를 표방한 이명박 인수위가 영어 교육에 거품을 무는 것은 분명 경제적 실용주의 측면에서 영어 교육이 국부 창출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영어몰입교육을 비롯해서 그들이 주창하는 영어 교육의 방법론이 성과는 물론 그 부작용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의 영어 교육론은 특정한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단지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실용주의란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명박 인수위의 현재 태도는 좀 의아한 데가 있다; 영어 교육이 낼 수 있을 만한 '성과' 자체가 모호한 상황에서 무조건 불도저로 밀어부치는 양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몰입교육을 주창했다가 한 발 물러선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명박 인수위는 제반 언어에 대해 특히 무지함을 드러내고 있으며, 철저하게 실용주의로 무장한 듯하지만 실제로는 무척 빈약한 근거만을 내세우고 있다. '중무장한 아마추어리즘'이라고 불릴 만한 이들 정책은 분명 재고의 필요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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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강신항. 2003. 『수정증보 훈민정음연구』. 7판. 서울:성균관대학교출판부.
복거일. 1998.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서울:문학과지성사.
전광용. 1994. 『전광용 대표작품선집』. 서울:책세상.
정지용. 1988. 『정지용 전집』. 1 詩. 2판. 서울:민음사.
최현배. 1961. 『우리말본』. 네번째 고침. 서울:정음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엮고 옮김. 1990. 『철학소사전』. 서울:동녘.
三浦信孝·糟谷啓介 엮음. 2005. 『언어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이연숙·고영진·조태린 옮김. 파주:돌베개.
Hirschberger, Johannes. 1999. 『서양철학사』. 하권: 근세와 현대. 강성위 옮김. 6판. 대구:이문출판사.
Oda, Masaki. "Linguicism in Action: Language and Power in Academic Institution". in Phillipson, Robert eds. 2000. Right to Language: Equity, Power, and Education. Mahwah:Lawrence Erlbaum Association. pp. 117-121.
Lenin, Vladimir Ilich. 1986. 『제국주의론』. 남상일 옮김. 서울:백산서당.
Sabine, George H. and Thomas Landon Thorson. 1997. 『정치사상사』. 2권. 2판. 성유보·차남희 옮김. 서울:한길사.
de Saussure, Ferdinand. 1990. 『일반언어학강의』. 최승언 옮김. 서울:민음사.
Spolsky, Bernard. 2001. 『사회언어학』. 김재원·이재근·김성찬 옮김. 서울:도서출판박이정.

Posted by 엔디

성경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므두셀라다. 이 땅에서의 수명에 대해 관심이 많은 우리 인간들은 므두셀라에 대해 참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사실 창세기를 들여다보면 창세기 기자記者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창 5:21-27):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다음 삼백 년 동안 하느님과 함께 살면서 아들딸을 더 낳았다. 에녹은 모두 삼백육십오 년을 살았다.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데려가신 것이다.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다.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은 다음 칠백팔십이 년 동안 살면서 아들딸을 더 낳았다. 므두셀라는 모두 구백육십구 년을 살고 죽었다.

성경에 므두셀라가 등장하는 것은 이 일곱 절 두 문단이 전부다. 창세기는 아담의 후손에 대해 긴 족보를 열거하고 있으며, 그 바로 앞에는 므두셀라보다 훨씬 중요하고 소중한 에녹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의 눈은 에녹보다는 므두셀라에 대한 소개 쪽에 치우쳐 있는 듯하다. 정말 969년을 이 땅에서 살고 싶은 것일까? 그러나 (그 자신은 120년을 산) 모세는 이런 시를 남기고 있다(시 90:10-12):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야 팔십 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에 젖은 것, 날아가듯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누가 당신 분노의 힘을 알 수 있으며, 당신 노기의 그 두려움을 알겠습니까?
우리에게 날수를 제대로 헤아릴 줄 알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지혜에 이르게 하소서.

최근에는 므두셀라 증후군Methuselah Syndrome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므두셀라 증후군이란 과거를 아름답고 찬란했던 것으로만 기억하려고 하는 경향을 말한다고 한다. 아마도 나이가 들수록 현세를 긍정하게 되고 이 땅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인간의 한계를 반영한 작명인 듯하다.


1. 므두셀라, 그가 죽을 때 심판이 온다?

그런데 성경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므두셀라가 죽은 해에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다. 창세기 8장 11-12절은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십칠일, 바로 그 날 땅 밑에 있는 큰 물줄기가 모두 터지고 하늘은 구멍이 뚫렸다. 그래서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땅 위에 폭우가 쏟아졌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단순한 산술 계산만으로 187+182+600=969를 얻을 수 있다. 곧, 므두셀라는 우리가 '노아의 홍수'라고 불리는 사건이 있던 해에 세상을 떠났던 것이 확실하다.

이를 두고 창조과학회에서는 이것이 여호와의 은혜라고 홍보한다. 미국 창조과학회the Institute of Creation Research의 학회장president인 존 D. 모리스John D. Morris 박사는 므두셀라는 어떻게 죽었을까? How Did Methuselah Die? 제하의 글을 통해 므두셀라의 장수長壽는 여호와의 인내였다고 쓰고 있다. 그에 따르면 므두셀라라는 이름이 '그가 죽을 때 심판이 온다when he dies, judgment'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므두셀라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였던 하나님의 사람 에녹은 아들의 이름을 “그가 죽을 때 심판이 온다”라는 의미를 가진 ‘므두셀라’로 지었다. 그는 아마도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예언적으로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매우 흥미롭게도 므두셀라는 하나님이 노아의 대홍수로 타락한 세상을 심판하셨던 바로 그 해에 죽었다.
[…]
그리고 이것이 므두셀라에게 일어났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는 마지막 순교자였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살해되었을 때, 하나님의 인내는 끝났던 것이다. 인류를 보존하시기 위해서, 특별히 장차 구속주가 오시게 될 여자의 후손을 남겨놓기 위해서, 하나님의 정의는 마침내 촉발되었던 것이다.

When Methuselah was born, his godly father must have prophetically known of coming things for his son's name means "when he dies, judgment," and interestingly enough, Methuselah died in the same year God judged the sinful world with the great Flood of Noah's day.
[…]
And this may have been what happened to Methuselah. Perhaps he was the last martyr, and when he was killed, God's patience was over. In order to preserve mankind, and in particular Eve's lineage through whom the Redeemer would one day come, God's justice was finally unleashed.

말하자면 여호와는 므두셀라가 죽을 때 이 땅을 심판하기로 하였지만, 오래 참고 인내함으로 인간들에게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포악한 인간들이 므두셀라마저 죽이자 여호와는 므두셀라가 태어날 때 스스로와 인류에게 한 약속을 지켜 '의로운 자'였던 노아의 가족들만 남기고 나머지 인류를 홍수로 심판하였다는 것이다.

백운대 교회 김선기 목사는 이와 비슷하게 므두셀라가 므두와 셀라(샬라흐: 보내다)로서 "이 아이가 죽을 때 홍수를 보내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므두셀라와 홍수를 극적으로 연관시킨 이 이야기는 이형異形variation이 있다.


2. 므두셀라, 창 던지는 자?

삼성교회 한인종 목사는 므두셀라의 뜻을 "창 던지는 자"라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고대 세계에서 '창 던지는 자'란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센 용사로, 그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그 마을의 전멸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에녹이 65세 되던 해에 므두셀라를 얻었습니다.이 아들을 얻고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녹은 이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은 '창 던지는 자' 라는 뜻입니다.
신학자 뉴우 베리에 의하면 고대 시대 각 마을에는 그 마을을 지키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그는 그 마을에서 가장 힘이 좋은 용사로 그가 죽으면 그 마을은 곧 적에게 점령당하고 말았습니다.
'창 던지는 자'가 죽는다는 것은 그 마을, 그 부족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그래서 '므두셀라'는 '죽음 뒤에는 심판이 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므두셀라가 죽은 해에 노아 홍수의 심판이 왔습니다.즉,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므두셀라를 주신 것은 종말에 대한 메시지였습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하나님께로부터 얻은 순간 바로 이 땅에 종말이 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므두셀라를 낳자마자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합니다.이것이 에녹의 지혜요, 믿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경고를 수없이 받았습니다.성경은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고, 그리고 우리 눈앞에 그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므두셀라에 대한 평가는 다르지만, 은평교회의 이병돈 목사도 므두셀라의 뜻을 "대확장" 또는 "창 던지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3. 므두셀라, 라 신의 사람?

미국 IVP에서 발간한 『새성경사전New Bible Dictionary』은 므두셀라의 뜻을 다르게 풀이하고 있다(F. F. Bruce et al. eds. 1996, 544):

므두셀라 METHUSELAH (히. 메투쉘라흐 מְתוּשָׁלַח, '라<Lach> 신의 사람'이라는 뜻이 분명하다). 창세기 5장의 계보에 열거되어 있는 8번째 족장이다. 그는 에녹의 아들이요 노아의 손자였다. 히브리어 역본과 LXX에 따르면, 그는 969세까지 살았다(사마리아 역본에 따르면 그는 720살까지 산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므두셀라에 대한 다른 언급이 없이 그 이름의 뜻이 '라 신의 사람'이라고만 적고 있다. ("노아의 손자"라고 되어 있는 것은 원문의 실수이거나 번역자의 실수일 것이다.)


4. 조작된 은혜의 방정식

신의 은혜는 신에게서 오는 것이다. 조작된 이야기이든 아니든 그 이야기를 듣고 은혜와 감동을 받을 수는 있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와 공동체가 속한 사회에 일정 부분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진리라는 방정식의 해가 하나 뿐이라고 믿는 기독교인으로서 작은 진실부터 규명하지 않으면 그들이 믿는 은혜는 껍데기에 불과하게 되고 말 것이다. 조작된 은혜의 무서운 점은 그것이 성경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여기에서 므두셀라의 뜻이 '라 신의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므두셀라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확인이 있기까지 우리가 쉽게 은혜라는 감정에 휩싸이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이지, 이 목사와 저 목사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는 아니다.

신약의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가장 훌륭한 전도자인 바울로부터 가장 기쁜 소식인 복음을 전해 들으면서도 끊임없이 그 방정식의 해가 옳게 구해진 것인지 확인했던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다(표준새번역, 행 17:11):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보다 더 고결한 사람들이어서, 아주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곧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어떠한 은혜도 쉽사리 사상누각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깨닫고, 해가 없거나 해가 많다고 주장하는 조작된 은혜를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적인 태도이자, 논리적인 태도이며, 또한 과학적인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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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Bruce, F. F. et al. ed. 1996. 『새성경사전』. 나용화·김의원 옮김.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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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 하는 이명박 댓글 놀이가 유행이다. 알다시피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에 이은 두 번째 정치 패러디 댓글이다. 민노씨.네 블로그를 통해 이 댓글 문화에 대한 반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명박 댓글 놀이가 찌질한 이유는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 댓글이 이명박이 아니라 이명박을 찍은 유권자들을 향한 풍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찌질하다고 주장하는 글이다. 하지만 나는 이 논의에 동의할 수 없고, 이와 같은 댓글 놀이의 한계는 인정하고서라도 재미있으면서도 일말의 의미가 있는 이 놀이는 계속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표절하면 어때 책 많이 팔아서 경제 살리면 그만이지

경제 살리면 그만이지 댓글



1.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vs. "경제만 살리면 되지."

원문에서 "노무현 때문이다."가 수구 언론을 향한 것인 반면 "경제만 살리면 되지."가 유권자를 향한 것이라고 했는데 무엇보다 나는 거기에 100% 동의할 수 없다. 원문에서 두 풍자의 차이를 판단한 근거는 나타나 있지 않다. 추측컨대 "노무현 때문이다."의 문장에는 노무현이 들어가지만 실은 수구 언론을 향한 풍자인 반면, "경제만 살리면 되지."는 이명박의 언어 자체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아서 언어의 객체와 풍자의 객체가 동일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추측이므로 확신할 수 없다.) 기실 지금껏 "노무현 때문이다."의 풍자성을 오독하고 실제로 그것이 노무현을 비난하는 것으로 인식한 사람들도 꽤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명박 댓글 놀이를 해서는 안 될 이유는 될 수 없다. 무엇보다 "경제만 살리면 되지."가 이명박을 찍은 유권자를 향한 것이므로 찌질하다면,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역시 수구 보수 언론인 조중동을 구독하는 대다수의 국민들을 조롱하는 것이 될 뿐이기 때문에 그 민주주의적 마인드에서의 찝찝함은 가시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두 풍자의 층위는 똑같은 것이다.


2. 풍자의 힘?

나는 풍자가 큰 힘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본래 풍자라는 것은 패배자의 소극적 저항일 뿐이다. 현실 정치에서 패배한 이가 승리자에 대하여, 그래도 나는 너보단 이러이러한 면에서 낫지, 하고 자위하는 것 정도가 일반적인 풍자의 모습이다. 이상섭 선생은 『문학비평용어사전』의 '풍자Satire' 항목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1997, 280-281):

이처럼 풍자하는 사람은 풍자의 대상에 대하여 우월한 태도를 유지한다.
[…]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의 도덕적, 지적 표준은 특수한 교리에 근거하거나 보통사람들이 올려다 보지 못할 만큼 높은 것은 아니다. 풍자가의 수준은 그의 독자들이 암암리에 자연스럽게 수긍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고, 그가 공격하는 대상은 독자들도 역시 불찬성, 경멸하는 대상이다. 즉 풍자가는 자신의 입장을 변호함이 없이 독자들을 자기 편으로 갖고 있다. 독자는 풍자가의 공격에 자연스럽게 기꺼이 합세한다.
[­…]
현실에 대한 도덕적 비판을 통하여 사회악을 제거시키겠다는 풍자의 목적은 실제로 실현되지는 않았으니, 그런 의미에서 풍자는 언제나 실패작인 셈이다.

즉 좀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풍자는 ① 내가 대상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에서 출발하지만 ② 실제로 풍자가인 내가 그렇게 높은 수준인 것은 아니고, ③ 풍자의 독자 역시 새로이 유입되기 보다는 같은 편끼리의 낄낄거림에 불과하며 ④ 그런 점에서 풍자는 현실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데에는 항상 실패한다는 것이다. (물론, 가령 『걸리버 여행기』와 같은 수준 높은 풍자 예술의 경우는 예외이다.)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자신이 있는 정권은 풍자를 크게 탄압하지 않는다. 김지하가 김수영(1981, 184)의 「누이야 장하고나! - 新歸去來7」의 "누이야 / 풍자諷刺가 아니면 해탈解脫이다"를 (아마 의도적으로) 오독하여 「풍자諷刺냐 자살自殺이냐」를 씀으로써 풍자를 비장하게 만들어버렸지만(김지하 1993, 141-159), 사실 풍자는 잠깐의 웃음만 줄 뿐 전망이 부재한 양식이다. 그러니까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나 "경제만 살리면 되지." 모두 그런 풍자의 약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잠깐 촌철살인의 웃음이나 '썩소' 한 방 날려주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되는 것이 풍자다. 풍자의 역할은 거기에서 마치는 것이다. 전망을 보고 비전을 보려면, 미안하지만 누리꾼들 스스로가 풍자에서 더 나아가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3. 그럼에도 풍자의 힘!

쓰다보니 풍자를 너무 깎아내린 셈이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이만한 풍자만으로도 일단 만족한다. 아직 누리꾼들이 (어느 정도는 재미로 빠져들기도 하겠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판단하고 있거나, 최소한 이 풍자 댓글 놀이를 통해 사후에라도 판단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쥐띠해인데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되지...

ⓒ여름하늘, http://skysumm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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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수영. 1981. 『김수영 전집』. vol. 1. 詩. 서울:민음사.
김지하. 1993.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시선집』. 개정판. 창비시선 33. 서울:창작과비평사.
이상섭. 1997. 『문학비평용어사전』. 신장판. 서울: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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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족과 계급

민족이냐 계급이냐 하는 문제는 한국적 상황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이슈가 되어왔다. 식민지 시절에 맑시즘을 받아들이고, 분단 시대를 거쳐 이를 정교화하는 과정을 겪어온 까닭이다. 민족의 독립이, 그리고 민족의 통일이 오랫동안 지상과제였던 시절, 계급을 들먹이는 것은 반역이나 개인주의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항상 있었다. 권력을 장악하려는 음모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민족주의자 백범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적는다(김구 1997, 313-314):

국민대회가 실패한 후 상해에서는 통일이란 미명美名하에 공산당 운동이 끊어지지 않고 민족운동자들을 종용하였다. 공산당 청년들은 여전히 양파로 나뉘어 동일한 목적과 동일한 명칭으로 '재在중국청년동맹'과 '주住중국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상해의 우리 청년들을 앞다투어 포섭하여 독립운동을 공산운동화하자고 절규하였다.

그러던 중 레닌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식민지운동은 복국운동復國運動이 사회운동보다 우선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말이 한번 떨어지자 어제까지 민족운동 즉 복국운동을 비난·조소하던 공산당원들이 돌변하여 독립·민족운동을 공산당의 당시黨是로 주창하였다. 여기에 민족주의자들이 자연 찬동하고 나서서 '유일독립당촉성회唯一獨立黨促成會'를 성립시켰다. 그런데 내부에서는 의연히 공산당 양파의 권리쟁탈전이 음양으로 치열하게 대립되어 한 걸음도 진전되기 어려웠다. 민족운동자들도 차차 깨우쳐 공산당의 속임수에서 벗어나 결국 유일독립당촉성회는 해산되고 말았다.

백범일지
백범은 공산운동을 '절규'하다가 레닌의 한 마디에 민족운동으로 뛰어드는 공산주의자들을 조소하고 있다. 또한, 그들의 권력 지향적인 모습을 드러내어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는 당시 공산주의 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에서 민족의 독립을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았고(강만길 1994, 80-90), 아나키스트였던 신채호 역시 민족 운동에 일생을 바친 것을 살펴보면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을 무턱대고 비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여겨진다. (실제로, 계급 혁명을 민족 해방에 우선시 한다는 사실은 헤게모니를 장악한 민족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글을 인용한 것은, 백범의 진단은 현 상황에서 민노당의 모습을 조망하는 데 꽤나 유용한 도구가 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2. 민노당의 분당론

민주노동당의 분당론은 꽤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본격적인 분당론은 17대 대선을 위한 경선 과정에서 NL들이 보였던 행태 때문에 드러난 것 같다. 경선 직후 박노자 교수는 자신의 블로그에 민노당, 분당 이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라는 글을 올려 분당론의 운을 뗐고, 수많은 민노당 지지자들은 NL이 지지했던 권영길 후보를 응원하면서도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이른바 '비난적 지지'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졌다. 권영길 후보는 영국의 무상 의료, 무상 교육이라는 소중한 정책보다는 (아마도) NL의 입김이 들어간 '코리아 연방 공화국'이라는 생경한 정책만 떠들다가 사라졌다. 박노자는 권영길 후보께 삼가 충고드립니다라는 포스팅을 통해 점잖게 충고했고, 백무현 화백은 만평에서 이렇게 그렸다:

백무현 서울 만평 2007년 11월 27일

백무현 서울 만평 2007년 11월 27일


민노당 입장에서 이번 17대 대선은 명박한명백한 패배이다. 중선관위 집계에 따르면 16대 대선 당시 3.9%였던 득표율은 3.0%로 떨어졌다. 5년 만에 1/4의 지지자를 잃은 것이다. 16대 때 이른바 '정몽준 폭탄' 사건으로 민노당 지지자 일부가 노무현을 찍은 사례가 많았다고 판단되므로 실제 잃은 지지자 수는 훨씬 더 많은 셈이다. 4월에 있을 총선에도 밝은 미래는 없다: 중선관위의 지역별 득표 집계(IE only)에 따르면 민주노동당의 권영길은 자신의 지역구인 창원에서 7.9%, 현대차 노조가 있는 울산에서 8.4%의 득표를 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이명박 당선자는 창원에서 51.7%, 울산에서 54.0%의 득표를 했다.)

17대 대선 후보별 득표율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7대 대선 후보별 득표율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권영길의 생경한 정책과 일부 NL들의 시대착오적 행태, 그리고 당권욕 등이 대선 참패의 원인이라고 진단한 대중적 좌파 지식인들은 분당론을 확산시켰다. 박노자, 홍세화, 진중권은 블로그를 통해서, 인터뷰를 통해서, 그리고 기고문을 통해서 터뜨리듯이 NL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조승수 전 의원과 주대환 전 당 정책위의장은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하면서까지 NL들을 맹비난했다. 비판과 비난의 핵심은 그들이 당의 미래가 아닌 '김정일'의 미래를 더 생각한다는 점과 그들이 민노당 당권에 지나치게 연연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진중권이 3년 전에 쓴 민주노동당의 죽음이라는 글에서 이미 드러났다. 이번 대선과 관련해서는, 우석훈이 투표와 탈당에 대한 결심이라는 글을 통해 권영길이 실은 당대표에 대한 욕심에서 출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나타내면서도 일단은 투표하겠다는 일종의 '비난적 지지' 선언을 했다.

여기서 보이는 일련의 과정이, 백범이 과거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조금은 편협하게) 묘사한 내용과 상당히 닮아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민노당 내에서 NL들은 비록 한미 FTA 반대나 신자유주의 반대 등 맥을 같이 하는 부분에서 열심히 투쟁하였음에도 기본적으로는 그들이 당권을 장악하려고 했던 전례가 있고, 이북의 김씨 정권의 명령만을 추종한다는 점에서 백범이 묘사한 과거의 얼치기 공산주의자들과 유사성을 찾기는 아주 쉬운 것이다.

민노당에서 NL을 '잘라내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실제로 어렵기도 하고, 적어도 몇 가지 사안에 있어서 그들의 도움이 절실한 부분도 있다. 또 지지층이 갈리는 것은 어쨌든 바람직한 일이 아니기도 하다. 하지만, 주사파처럼 철학 없는 '추종자'들과의 연대 역시 바람직한 일이 아니기는 마찬가지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사태를 너무 나이브하게 바라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민노당의 모든 NL이 주사파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민족주의는 내가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주의주장이지만, 민족주의 자체를 비난할 권리는 없다. 계급적 의식이 있는 민족주의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실제로 분단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민족의 미래는 계급의 미래와 개개인의 미래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분단 시대는 국방 예산 등 엄청난 비용 지출을 필요로 하고,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라 할 (이산) 가족의 만남을 가로막고 있다.)


3. 분당론에서 염려되는 것

분당론에서 염려되는 것은 소중한 민주노동당의 토대가 와해되고, 지지층이 분산 및 이반되는 것이다. 지난 2002년의 프랑스 대통령 선거 때에는 사회당Parti Socialiste의 조스뺑이 국민전선Front National의 르 뻰에게 밀려나는 사건이 있었다. 결국 결선투표에서 시라끄가 80% 이상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전체적으로 좌파 정권을 지지하는 프랑스인들이 많았음에도 우파 시라크가 대통령이 된 것은 1차 투표 때 좌파 연합의 표가 분산된 까닭이 크다. 1차 투표에서 시라끄가 19.88%, 사회당의 조스뺑이 16.18%를 얻었지만, 여타 좌파 정당들인 노동자 투쟁당Lutte Ouvrière이 5.72%, 혁명적공산주의동맹Ligue Commuiste Révolutionnaire이 4.25%, 그리고 프랑스 공산당Parti Commuiste Français이 3.37%를 얻었다. 물론 사회당과 뜨로쯔끼주의자들, 그리고 공산당이 한 정당이 되리라고 예상하기는 힘들지만, 이들이 후보 단일화를 잘 수행했다면 수학적으로 충분히 좌파 정권 창출이 가능했을 약 30%의 지지율을 얻을 수 있다. (5.5% 가량의 표를 얻은 녹색당까지 고려하면 실제 효과는 그 이상일 수 있다.) 2002년 당시 좌파 후보들은 무려 7명이나 될 만큼 '난립'하였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분당이 이와 같은 사태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은 현실 정치의 면에서 극히 우려스럽다. 하지만, 분당을 통해 주사파들의 털고 가면 바로 그 점 때문에 민노당 지지를 유보해왔을 새로운 지지층을 흡수할 수 있을 뿐아니라, 바라건대는 한국사회당이나 녹색당 등과의 연대도 꾀할 수 있다는 희망도 보인다. 하지만 현실 정치적인 면 이외에도, 이 땅에 계급 의식에 기초한 어엿한 원내 정당이 있고 그 원내 정당이 '좌우의 날개로 나는' 한국을 이루어내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에서 자부심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소중하다고 보겠다.

박노자 교수는 확실히 이 점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민노당 분당 - 필요하지만,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제하의 포스팅에서 '분당 이후'를 이미 통찰하고 있었다:

"김빠"들이 걸러진 뒤에 "정파"들은 혁파돼야 합니다. 우리가 "사민주의자와 조합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느슨한 연합체"가 아닌, 진정한 계급 정당을 만들자면 정파 소속보다 당소속이 우선돼야 되지요. 당에서 정파적 이익을 배타적으로 추구하는 행위들은 부끄러운 행위가 돼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컨대 "다함께" 회원이면서도 당적을 보유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일단 당에서 투표할 때에 "다함께"의 의견보다 당의 이익과 전망, 그리고 넓게는 한국과 세계노동계급의 이익을 먼저 의식하고 소신 투표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마음은 아파도 진보정당을 구할 길은 이 길밖에 없습니다에서 볼 수 있듯이 분당해야 하는 까닭을 무엇보다도 대중정당의 건설이라는 확실한 목표 하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주장에 쉽게 찬동하고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덧) 웹서핑 중 현단계의 상황을 가장 명쾌하게 정리한 글이 있어 소개한다:
민주노동당 : 이건 분당이 아니라 파당이다.
트랙백도 걸었다. 일독을 권한다.
명쾌한 정리라고는 하지만, 정리가 명쾌할수록 마음은 무겁다.
2008. 1. 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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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강만길. 1994. 『고쳐 쓴 한국현대사』. 서울:창작과비평사.
김구[도진순 주해]. 1997. 『백범일지: 백범 김구 자서전』. 서울:돌베개.

고쳐 쓴 한국현대사 상세보기
강만길 지음 | 창작과비평사 펴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국현대사 개설서 <고쳐 쓴 한국현대사>. 1984년에 출간된『한국현대사』를 전면적으로 증보하여 내놓은 책이다. 이번 2판에서는 1판이 출간된 이래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을 반영하여 내용을 추가하거나 수정하였다. 또한 사진이나 도판을 새롭게 실어 시각적인 효과를 높였으며, 각 장을 요약한 도입부에 그 시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파노라마식 사진을 배치하였다. 이 책은 한국사 개설서로
백범일지(보급판) 상세보기
김구 지음 | 돌베개 펴냄
백범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는 친필 원본은 물론 등사본과 필사본, 여러 가지 출간본 등 여러 저본을 일일이 면밀하게 검토, 대조했다. 또한 사전류는 물론 고전, 규장각 자료 등의 고문서, 수많은 회고록, 일본, 중국 등 해외의 임정 관계 자료까지 두루 활용하고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로부터 자문을 받아 원본의 미흡한 점과 착오 등을 수정, 보완했다. 27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어온 민족독립운동가이자, 자신의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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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욕쟁이 할머니' 광고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광고였다. 이명박의 강한 이미지와 부자 이미지, 여러 가지 비리 이미지를 날리기 위해 정반대에서 승부를 건 한나라당의 비장의 무기였다. 한나라당도 이명박도 분명히 서민이나 중산층이 아니라 계층적으로 상류층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정책을 내세우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선거전에서는 서민들의 표가 필요하기 때문에 만든 '웰메이드' 이미지 광고였다. 대통합민주신당에서는 광고에 나오는 할머니가 사실은 종로 낙원동 국밥집이 아니라 강남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하고 있는 할머니이며, 광고에서는 할머니가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지만 실제 고향은 충청도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는 광고라는 논평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이른바 ‘위장 광고’ 논란은 이명박 후보의 이 광고가 얼마나 화제가 되는 광고인지를 보여주는 역설적인 지표라고 보아야 한다.



1. 이명박 대선 광고 '욕쟁이 할머니' 편

광고는 흑백에 가까운 모노톤의 질감으로 꾸며져 있다. 거리에는 눈발이 흩날린다. 돼지고기를 썰고 국자로 국밥을 담던 할머니는 누군가가 오는 것을 보고 "어? 오밤중에 웬 일이여? 배고파?" 하고는 국밥을 가져다준다.

이명박 대선 광고 욕쟁이 할머니 편

"맨날 쓰잘데기 없이 쌈박질이나 허구 지랄이여, 에이. 우린 먹구 살기 힘들어 죽겄어." 하는 쓴소리도 잊지 않는다. 할머니가 "청계천 열어 놓고 이번엔 뭐 해낼겨?" 하며 이명박의 서울 시장 시절 '업적'을 살짝 들추어내자마자 화면은 이명박이 뜨거운 국밥을 먹는 모습으로 바뀐다. "밥 더 줘? 더 먹어 이눔아." 계속 할머니의 독백이다. 그 독백이 끝나는 지점에서 성우의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이명박은 배고픕니다." 이명박은 계속 뜨거운 국밥을 급히 먹고 있다.

이명박 대선 광고 욕쟁이 할머니 편

거리에는 계속 눈이 내리고 있고, 그 눈이 내리는 지점은 그저 길거리가 아니라 검은 연탄이 쌓인 곳이다. 내레이션은 계속된다. "누구나 열심히 땀 흘리면 성공할 수 있는 시대."라고 할 때 연탄 하나가 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명박 대선 광고 욕쟁이 할머니 편

한겨울 밤, 국밥집에는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고 젊은 연인으로 보이는 손님은 할머니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가게를 들어선다. "국민 성공 시대를 열기 위해 이명박은 밥 먹는 시간도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할머니의 목소리. "밥 처먹었으니께 경제는 꼭 살려라잉? 알겄냐?" 이명박 대신 내레이션이 답한다: "경제를 살리겠습니다."

이명박 대선 광고 욕쟁이 할머니 편

처음으로 광고에서 할머니가 환한 웃음을 보인다. 이명박도 웃음으로 답하고, 둘은 어느 사이 서로 안고 악수를 나눈다. 그 동안 내레이션은 "실천하는 경제 대통령, 기호 2번 이명박이 해내겠습니다."라고 끝을 맺는다.

이명박 대선 광고 욕쟁이 할머니 편

광고에서 이명박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급히 밥을 먹고, 웃으며 할머니와 얼싸안을 뿐이다.


2.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의 커뮤니케이션 이론

로만 야콥슨은 커뮤니케이션 모델을 통해 메시지가 말하는 사람으로부터 듣는 사람에게로 전달될 때의 여러 가지 요소를 검토한 바 있다. 이를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야콥슨 도표

야콥슨은 이 여섯 요소 가운데 무엇이 강조되느냐에 따라 말이 커뮤니케이션의 어떤 기능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가령, 말하는 사람이 강조되면 ‘감성적 기능emotive function’의 특성을, 듣는 사람이 강조되면 ‘지시적 기능conative function’을, 그리고 상황context이 강조되면 ‘정보공유 기능referential function’을 갖고, 또 채널contact이 강조되면 ‘교감적 기능phatic function’을, 부호code가 강조되면 ‘메타언어적 기능metalingual function’을 가지며, 메시지 자체에 강조점을 찍게 되면 ‘시적 기능poetic function’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야콥슨 도표

야콥슨은 커뮤니케이션 모델을 소개한 글에서 "언어학이 언어 예술의 모든 영역에서 또 모든 단계에서 그것을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고 선언한다. 야콥슨의 커뮤니케이션 모델은 또한 미디어의 기능을 설명하는 데에도 사용할 수 있다. 미디어가 어느 요소에 강조점을 두는지 확인하면 그 미디어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고, 맥루한의 구분대로 따뜻한 매체인지 차가운 매체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3. 야콥슨의 커뮤니케이션 구조와 17대 대선 이명박 대선 광고 '욕쟁이 할머니' 편

이명박 후보의 '욕쟁이 할머니' 광고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이명박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광고에서 등장하는 목소리는 욕쟁이 할머니의 되바라진 목소리와 성우의 비교적 반듯한 목소리뿐이다. 대선 후보의 광고에서 후보자 본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후보자 아닌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장 극적으로 강조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관심 갖는 대상은 후보자이기 때문에 광고에서 후보자가 짧게 한 마디만 해도 다른 사람의 열 마디보다 더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인데, 이 광고에서 후보자가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욕쟁이 할머니와 성우의 목소리가 강조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욕쟁이 할머니의 말에는 물음만 있지 대답은 없다; 이명박은 "오밤중에 웬 일이여? 배고파?" 하는 질문에도, "이번엔 뭐 해낼겨?"라는 질문에도, "밥 더 줘?" 하는 물음에도 아무런 답도 하지 않는다. 광고는 그런 욕쟁이 할머니의 독백으로 이어져간다. 여기서 이명박 광고의 가장 중요한 감성적 접근이 드러난다. 욕쟁이 할머니는 "맨날 쓰잘데기 없이 쌈박질이나 허구 지랄이여, 에이. 우린 먹구 살기 힘들어 죽겄어."라고 분명히 현실 정치를 비난하고 있다. 그 비난은 상당히 많은 대중의 공감을 자아낼 수 있는 말이지만, 사실 정치에 대한 이성적 접근과는 거리가 멀다. 다시 말해, 해당 멘트는 정치권에서 양극화와 경제 성장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꼭 진행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단지 내가 살기가 너무 힘들다는 말이다. 또, 이 부분은 두 번째 광고인 '살려주이소'와 쉽사리 연결되기도 한다. '살려주이소'에서도 이명박은 거리에서 시장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살려주이소'라는 말을 듣는다. '실천하는 경제 대통령'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단순히 내걸기보다, 많은 서민들의 목소리로 지금 살기가 너무 힘들다는 말을 들려줌으로써 자신의 '경제'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야콥슨은 말하는 사람이 강조되는 커뮤니케이션은 '감정적 기능'을 갖는다고 말했다. 자신의 이미지를 스스로 말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의 감정적 토로를 통해 드러냈을 때, 그 파괴력은 엄청날 것이다. 국가적인 양극화로 서민 경제가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므로 이런 감정 토로에 동의할 사람은 거의 듣는 사람 전체라고 봐도 좋다. 이명박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어떻게 경제를 살릴 수 있는지도 말하지 않고, 쉽사리 자신을 '실천하는 경제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여기서 환기되는 것이 상황과 부호이다.

광고를 보면서 쉽사리 욕쟁이 할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은, 현 노무현 정권의 경제 정책 실패--대다수의 국민들이 느끼는 감정적 차원에서--의 탓이다. 이것은 이명박에게 중요한 상황context이다. 이명박 후보측은 이런 유리한 국가적 상황을 밑바탕에 깔고 커뮤니케이션을 시작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실정失政이,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뒤집힐 수 있다는 어떤 근거도 없이 이명박은 '경제 대통령'의 이미지를 전유專有하게 되는데, 그것은 커뮤니케이션의 상황을 잘 이용했기 때문이다.

한편, 아직까지 한국 정치의 고질병으로 남아 있는 '지역주의'도 중요한 상황으로 작동한다. 본래 충청도 출신인 욕쟁이 할머니에게 전라도 사투리를 요구한 광고주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비교적 분명하게 추측할 수 있다. 흔히 영남권 정당으로 알려져 있는 한나라당에게 있어서 취약 지역인 호남 사람의 목소리가 절실했던 것이다. 이 호남 사투리는 2편인 '살려주이소'의 부산 사투리와 연결되면서 '전국 후보 이명박'을 천명한다. 여기서 사투리를 하나의 부호로 본다면 이 광고가 일종의 메타언어적 기능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지역주의적인 한국 정치의 상황 속에서 상황화된 부호의 역할을 사투리가 담당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이 광고에서 할머니의 역할은 현재의 상황을 환기시키면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정보 공유와 감정 전달을 꾀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정보 공유'라고 하였지만, 그것이 수용자가 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알게 하는 정보 공유라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수준의 정보 공유라는 점이다. 그것은 역시 이 광고에서 중요한 것은 상황이 아니라 서민 한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을 뜻한다. 앞서 말했듯이 '상황'이라는 것도 경제성장률 몇 퍼센트, 양극화 지수 몇이라고 하는 객관적인 지표가 아니라 "죽겄어."나 "살려주이소."로부터 오는 자못 과장된 감정적 표현이라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이 광고가 말하는 사람의 감정에 얼마나 치우친 광고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뒷부분에서 이어지는 반듯한 성우의 내레이션은 욕쟁이 할머니를 보완하면서, 어느 정도는 이명박을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이명박 스스로가 욕쟁이 할머니의 수준이어서는 곤란하므로 아나운서를 연상시키는 반듯한 목소리의 성우가 동원된 것이다. "이명박은 배고픕니다."라는 목소리에서 이명박이 3인칭으로 지칭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이명박의 목소리로 "나는 배가 고픕니다."라고 했을 때, 그 말은 말하는 사람을 강조하므로 감정표시적 기능이 될 뿐이다. 하지만 제3자의 말을 통해 "이명박은 배고픕니다."라고 한다면 그 말이 객관성을 획득하기가 훨씬 용이할 뿐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황을 강조하게 되므로 정보 공유의 기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명박 스스로 "나는 배가 고픕니다."라고 했을 때 "재산이 수백억이나 되는 사람이 배고프다니"라며 거부감을 가질 사람들이, 제3자가"이명박은 배고픕니다."라고 했을 때에는 "실천하는 경제 대통령"의 실천력을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성우의 "국민 성공 시대" 발언과 할머니의 "밥 처먹었으니께 경제는 꼭 살려라잉?"하는 말에는 두 말하는 사람이 함께 공유하는 이명박에 대한 믿음이 실려있다. 이명박은 듣는 사람의 역할을 하게 되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 이명박은 광고의 다른 모든 부분에서보다 더 강조되어 있다. 이명박의 대변자인 성우가 마지막 말을 끝낸 시점인데다가 할머니의 발언이 명령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할머니의 발언은 여기서 지시적 기능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경제를 살려라"라는 명령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이명박에게 그럴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은연 중에 광고는 커뮤니케이션의 지시적 기능을 이용해서 수용자들에게 이명박이 그럴 능력이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게끔 만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할머니는 활짝 웃고, 이명박도 할머니를 얼싸안고 웃는 모습은 두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채널, 곧 접촉contact의 양상을 강조한다. 유권자의 한 사람과 대통령 후보의 접촉은 바로 그런 정감어린 교감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수용자는 판단하게 된다. 욕쟁이 할머니의 국밥집이라는 장소부터가 서민적이고 정겨운 곳이고, 그곳에서 국밥을 먹는 사람들은 정이 넘쳐 있다. 새로 국밥집에 들어오는 젊은 연인들도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다. 이와 같은 곳이 만남의 채널이 되는 것이다. 광고는 앞으로 이명박과의 만남이 이와 같이 정겨울 것이라고 수용자들에게 인식시킨다. 또한 앞으로도 계속 이명박이 이런 곳에서 서민들과 함께 호흡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4. 결론: 이명박 대선 광고의 전략과 이미지

이명박 후보의 '욕쟁이 할머니' 광고는 커뮤니케이션 상의 여러 요소 가운데 특히 말하는 사람adresser을 강조한 텍스트이며, 특정 부분에서는 듣는 사람adressee인 이명박을 강조하고 있으며,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명박과의 채널 곧 접촉contact을 강조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럼으로써 이 광고는 정당의 정책 설명이나 공약 설명과는 거의 관계가 없고, 오로지 이명박이 가진 긍정적인 이미지(경제)만을 집중적으로 드러내면서 부정적인 이미지(부자)를 은연중에 숨기는 식으로 기능하는 광고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광고가 본래 이성적 접근보다는 감정적 접근이 필요한 양식이긴 하지만, 정치 광고가 이토록 감정과 이미지에만 매달리는 것이 정치적으로 보았을 때 바람직한 일일지는 고민이 필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광고는 현대 정치의 가장 부정적인 면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양식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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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에 바란다>“출판은 국민정신 발전체제의 큰 동력”

'이명박에 바란다'류의 칼럼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출판 분야의 요구 사항도 있다. 당선자가 궁금해 하는 것은 국민들의 요구 사항needs이고, 요구 사항이 적절할 경우 정책에 반영해야 할 것이므로 이런 칼럼들의 존재 의의는 분명하다. 게다가 이명박 당선자에게 흔히 부족한 부분으로 지적되는 것이 문화 부분이다. 경영학과라는 이유도 있고, 대기업 건설사 CEO 출신이라는 이유도 있다. 공약의 맨 앞자리를 경부 운하 등 건설 쪽에 배당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선입견일는지 모른다. 어쨌든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문화 분야를 챙기는 것은 무척 중요하고, 그 가운데 출판은 문화의 핵심이라는 자부심은 물론 매출 규모에 있어서도 '문화 산업' 가운데 '가장 큰 파이'이므로 당선자로서 꼭 챙겨야 한다. (2004년 기준 문화 산업 전체의 매출액은 19조5684억5700만원이고, 그 가운데 출판의 매출액은 15조3003억1600만원으로 전체의 78.2%에 달한다. 참고로 영화의 매출액은 2조6384억300만원이다.)



1. 출판계의 요구 사항

앞서 선입견 이야기를 했지만, 나로서는 이명박 당선자의 출판 관련 정책이 사람들의 기대처럼 되리라고 믿기는 힘들다. 그러기에는 이명박은 지나치게 거대담론에 매몰되어 있고 수치와 규모의 경제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숙경 이가서 대표의 다음 요구는 그저 허공에 흩어질 가능성이 크다:

우선 국가의 도서관 수를 확대해서 성실히 좋은 책을 만드는 출판사들의 책은 도서관에서 기본적으로 소화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외국은 작은 마을마다 도서관을 효율적으로 운영한다. 기본적인 생존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존심을 가지고 책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소신을 가진 출판사들이 대자본과의 싸움에서 경쟁할 수 있게 유통구조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으로 편법이 통용되지 않는 체제를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

출판계에서 요구하는 것은 항상 정해져있다. 하나는 도서관의 확충이고, 다른 하나는 출판진흥위원회의 설립이다. 두 요구의 지향점은 한 가지인데, 결국 안정적인 매출인 셈이다. 출판이 '문화 산업' 가운데 가장 큰 매출 규모를 보이고 있음에도 출판계 입장에서는 '파이'의 크기 이외에도 개별 출판사의 안정적인 매출이 중요한데, 그 이유는 아직까지 한국 출판계는 좋은 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여전히 많은 출판사들은 '많이 팔리는 책'의 이윤을 '좋은 책'을 만드는 데 쓰려는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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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알다시피 책은 편집자의 기획력이 가치를 좌우하는, 일종의 장인 제품이다. 따라서 규모가 큰 대형 출판사들의 책이라고 항상 좋거나 항상 잘 팔리는 것이 아니고, 규모가 작은 이른바 1인 출판사의 책이라고 해서 조악하거나 시장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몇 년 전 35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높였던 『창가의 토토』는 당시 1인 출판사였던 프로메테우스가 펴낸 첫 책이었다. 프로메테우스의 신충일 사장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후에도 직원을 단 두 명만 채용했다면서 그 이유를 출판은 "결국 (소규모) '대장간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것은 흔히 '문화 산업' 하면 먼저 떠오르는 영화와는 사뭇 다른 사고 방식이다. 영화의 경우는 '한류 열풍' 등의 요인에 힘입어 '많이 팔리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공식이 빠르게 자리잡았지만, 책의 경우 '베스트셀러가 좋은 책'이라는 등식에 전적으로 공감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영화 한 편을 찍는 데 드는 인력과 비용이 책 한 권을 펴내는 데 드는 것보다 현저히 많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블록버스터 영화'는 있어도 '블록버스터 책'은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 하에서라면 영화는 파레토 법칙을 따르는 것이, 출판은 롱테일 법칙을 따르는 것이 유용할 것이며 두 '문화 상품'의 구매처인 멀티플렉스 극장과 대형 서점의 상영/진열 방식을 보면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마 두 '문화 상품'의 제작 시점에서도 마찬가지의 법칙을 따르고 있을 것이다.


2. 문화 vs. 문화 산업

앞서 했던 이야기를 종합하면, 전반적으로 출판인들이 바라는 문화 인프라는 '문화 산업 인프라'가 아니라 '문화 인프라'라는 것이다. 도서관을 늘려달라거나 출판진흥 기구를 설립해달라고 하는 것은 출판을 산업으로서가 아니라 문화 자체로 봐 달라는 것이다.

물론, 출판사도 하나의 회사이며 이윤 추구는 출판사의 중요한 목표다. 이윤이 없으면 출판사가 더이상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신의 정당한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은 무척 기쁘고 당연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느 출판사든지 기획 단계에서 판매 예상 부수와 예상 손익을 점검해보게 마련이다. 하지만 출판사는 자동사로서의 출판을 하기도 한다. 이것이 일반 회사와는 다른 점이다.

가령, 편집자가 보기에 정말 훌륭한 책이 있는데 이 책의 예상 손익이 '제로'라면 그 책은 어떻게 될까? 수익만 따진다면 내도 그만, 안 내도 그만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만나본 어느 출판사의 대표도 그랬고, 내가 믿는 대로라면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모두 그 책을 낸다, 고 답할 것이다. 출판사는 (좋은) 책을 내기 위해 존재한다고 그들은 믿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출판사가 앞으로의 이익을 위한 홍보 효과를 내기 위해 내는 것이 아니고, 또 다른 대박 책을 찾을 때까지 출판사를 계속 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는 책도 아니다. 그 점이 회사와 출판사의 차이이며, 문화가 '문화산업'으로만 환원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3. 이명박 당선자와 문화 산업

그러나 문화일보 기사에 따르면 대통령 후보 시절 이명박 당선자는 문화 분야의 활성화를 일컬으면서 실은 문화 산업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출판과 관련해서는 도서관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정동영 후보가 '지역밀착문화예술복합도서관 1000곳 조성', '도서구입비에 대한 문화비소득공제 제도 도입' 등의 공약을 내건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이명박 당선자가 당시 내건 것은 "투자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콘텐츠진흥기금 조성을 정책적으로 검토"하는 것과 "출판진흥위원회 설립도 적극 추진하겠다"는 것뿐이었다.

문화 관련 발언이 '투자'로부터 시작된다는 데서부터 이명박 당선자의 문화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에게 있어 문화는 해외로 뻗어나가는 한류이자 미국 땅에서 2000여 개 개봉관을 둥지 삼아 부활한 '드래곤'이 이끄는 전쟁터에 불과한 것이다.

그나마 투자 이야기는 아마 한 건으로 큰 돈을 벌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와 관련한 것일테고, 결국 출판과 관련해서는 출판진흥위의 설립 하나만을 이야기한 셈이다.


4. 출판진흥위원회와 그 방향성

최봉규 지상사 대표는 <이명박에 바란다> "독서는 국가의 미래"에서 출판진흥위원회 설립 추진 공약을 환영하며 이렇게 적었다:

당선자께서는 출판진흥위원회 설립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출판진흥기구는 어제 오늘에 거론된 이슈가 아니고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어느 정부도 못해 왔다. 공약으로 내 건 일인 만큼 큰 기대를 걸며, 지식산업의 핵심인 출판산업을 진흥시켜 우리나라를 지식강국으로 실현시켜 주길 바란다.

이를 보면 출판인들이 그래도 아직 이명박 후보의 발언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출판진흥위가 설립되어 문화일보 기사에서 이명박 당선자가 말한 대로 "출판정책 방향을 기존의 규제 중심에서 진흥과 육성으로 과감히 전환"할 수 있다면 이는 출판계에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출판진흥위도 큰 출판사 위주로 진행되거나, 팔릴 책만 지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간다면 그 효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이명박 당선자는 아직 취임 전이다. 그 전에 이 글의 결론을 낼 수도 없고 내서도 안 된다. 이 글은 이제 시작이다. 이명박 정부가 출판과 문화와 관련하여 앞으로 어떤 정책을 펴는지 모두가 지켜봐야 한다. 이 글은 그런 다짐으로 씌어진 것이다.
Posted by 엔디
1. 조선의 임금들

"정조의 시대"라고 한다. 정조와 관련된 책이 쏟아져 나오고, TV 드라마도 정조 열풍이다. 조선조의 임금 가운데 현대인들의 지지와 존경을 한몸에 받는 인물은 많지 않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과 영조의 뒤를 이어 개혁을 펼친 정조, 둘 뿐인 것 같다. 경국대전을 만든 성종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고, 사대주의를 탈피하기 위해 노력했던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다. 세조에 대한 심정적 거부와 이성적 칭찬은 이광수의 『단종애사』와 김동인의 『대수양』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세종대왕의 업적은 훈민정음 창제가 가장 빛나는 성과로 이야기되고 있다.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말하자면, 사람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처음 듣는 서양의 언어학자들과 작가들의 이름을 대면서 "그들이 칭찬했다"고 입을 모은다. 그 자신이 당대에 가장 훌륭한 언어학자였던 세종대왕에 대한 칭찬은, 그 가운데 엄청난 자위적 민족주의가 개입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나 역시 유보할 필요 없이 인정하고자 한다. 15세기에 (중국의 성운학聲韻學을 뛰어넘을 만한) 그만큼의 언어학적 지식을 갖추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백성들의 말글살이를 바꾸고자 했던 세종대왕은 진정한 하부구조의 개혁자였다.

정조는 어떠한가?


2. 정조 콤플렉스

사람들이 정조를 떠받드는 이유는 세 가지다: 그가 개혁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적 대안의 사례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의 '개혁'이 실패했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이유는 개혁적 정치 지도자들에게 일종의 콤플렉스가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개혁을 기치로 들고 나오는 대통령들은 알게모르게 정조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개혁자라는 것은 기존의 것을 뒤집을 만한 카리스마와 능력을 말하는 것이고,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적 대안이라는 것은 곧 민족주의 또는 국가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문제는 정조의 개혁이 중도에 그쳤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치가의 정조 콤플렉스는 절정에 이르는데, 그것은 실패한 혹은 미완의 개혁가들이 정조에 비견될 수 있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개혁적 이미지를 만든 정치가들에 있어서 정조는 하나의 보험이 된다.


3. 개혁자 정조

대한민국 건국 이래로 개혁의 이미지를 가장 확실하게 심어 준 두 대통령은 박정희와 노무현인데, 공교롭게도 정조와 겹쳐지는 '영광'을 입은 대통령도 그렇게 둘이다. 정조가 10년 더 살았다면에  따르면 정조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 첫 소설은 이인화(류철균)의 『영원한 제국』이라고 한다. 이인화는 그 소설에서 정조를 시해하고자 하는 노론과 정조를 지키고자 하는 남인의 대립을 다룬다. 그 소설의 결론은 이렇다: 정조가 좀더 살았다면 자주적인 개혁과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박기 어려웠던 이유는 정조가 너무 일찍 '시해'되어 왕권 강화 정책이 미완에 그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굳이 이인화의 다음 작품인 『인간의 길』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여기서 정조가 박정희와 오버랩된다는 점을 알아채기는 어렵지 않다. 거의 임금과 같은 지위를 누리던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너무 일찍 시해되는 바람에 오히려 군부독재가 더 길어졌다는 논리와 그 줄기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박정희 역시 처음부터 자신의 이미지를 개혁자로 만들었다. 그가 5·16 꾸데따를 '혁명'이라고 이름붙인 것부터가 이미지 메이킹의 일환이었다. 대통령 선거에 나올 때에는 팔다리를 걷고 농촌에 가서 '백성들'과 모도 함께 심었다. 그가 시해되었을 때 많은 '백성들'이 진심으로 울었다는 것은 그의 이미지 메이킹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월이 지나 노무현이 등장했다. 그에게서 소중한 가치는 역시 개혁이었다. 노무현은 취임 초기부터 백범 선생과의 비교를 굳이 거부하며, 자신의 벤치마킹 상대로 링컨을 꼽았다. 링컨의 정치 이력과 자신의 정치 이력이 실패 투성이였던 점이 닮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링컨이 가진 개혁자의 이미지를 빌어오려는 목적이 더 크지 않았을까. 정조가 10년 더 살았다면에 인용된, "<한성별곡>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많이 좋아하게 됐으며, 내 연기를 통해 사람들이 그 아픈 부분을 이해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는 탤런트 안내상씨의 발언은 노무현이 현재 처한 상황에 사람들이 정조를 오버랩시키는 일이 얼마나 쉬운가를 여실히 보여 준다. 돼지저금통을 모아 대통령이 된 사람은 이전에 없었기 때문이다. 개혁적 임금인 정조는 노론의 반대에 부딪혀서, 개혁적 대통령인 노무현은 한나라당을 비롯한 수구적인 기존 정치인들에 부딪혀 실패를 맞는다는 스토리다.


4. 근대적 민족주의자 정조

또 정조가 각광을 받는 것은 근대적 민족주의의 모습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자유로운 상업을 발달을 위해 금난전권과 육의전을 철폐하였고, 정약용이 만든 거중기를 이용해 화성을 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와 더불어서 자본주의 맹아론 등 자생적 근대화론의 많은 부분이 정조 치세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그 자신이 책읽기를 좋아해 서양에서 들어온 안경을 끼었다는 기록도 있다(조선왕조실록):

상이 이르기를,
"나의 시력이 점점 이전보다 못해져서 경전의 문자는 안경이 아니면 알아보기가 어렵지만 안경은 2백 년 이후 처음 있는 물건이므로 이것을 쓰고 조정에서 국사를 처결한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이다."
上曰: "予之眼視, 漸不如前, 經傳文字, 非眼鏡則難以辦認, 而眼鏡乃二百年來初有之物也, 帶此臨朝, 有駭觀瞻。"
- 정조 52권, 23년( 1799 기미 / 청 가경(嘉慶) 4년) 7월 10일 병인 1번째기사

안경이란,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근대적인 것이라는 이미지를 전유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정조를 통한 근대화론은 좀더 심정적으로 대중에 의해 지지받게 마련이다. 서구 문물의 하나인 안경을 조선의 개혁적 임금이 쓰고 있었다는 사실은, 쇄국정책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흥선대원군과 친일파라는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김옥균을 동시에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식민지 근대화론과 자생적 근대화론의 어느 한 편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럴 의도는 물론, 그럴 능력도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대중은 둘 가운데 뒤엣것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으며, 그것이 정조 신화 또는 정조 콤플렉스의 중요한 축이 된다는 것이다. 어쨌든 '정조-근대화'론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평가하는 하나의 시금석처럼 되어 있는 듯하다.

근대화론은 먼저 경제 성장을 가리킨다.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그의 새마을 운동의 활기를 떠올릴 것이고, 노무현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그가 국익을 위해 추진한 또는 추진 중인 여러 FTA 협정을 생각할 것이다.

한편 자생적 근대화론은 필연적으로 민족주의 감정을 호출하는데, 박정희와 노무현은 그것을 매우 적극적으로 이용한 대통령들이다: 박정희는 먼저 그 자신이 관동군 출신이라는 점을 철저히 숨기며 사람들의 반일감정을 오히려 이용했다. 또 1972년에는 이후락을 이북에 보내 김일성을 만나게 함으로써, 7·4 공동선언이라는 성과를 이루어낸다. 노무현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설치 등에서 반일감정을 자극시켰고, 그간 고조되었던 반미감정 역시 적절하게 이용해서 민족주의를 강화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에 이은 제 2차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여기서 두 사람의 행보가 정조와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은 이채로운 일이 아니다; 사실 그들이 정조를 따라한 것이 아니라, 개혁적 임금으로 존경받는 정조가 그 두 사람을 위해 호출되었다는 혐의가 크기 때문이다.


5. 정조 개혁의 한계와 실제

사람들이 정조의 개혁의 어디까지를 바라고 있는 것일까. 분명한 시대적 한계와 계급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 정조 개혁의 핵심은 (영조를 계승하여) 탕평책蕩平策으로 대표되는 왕권 강화다. 탕평책은 『서경書經』 「홍범조洪範條」의 '무편무당無偏無黨하면 왕도탕탕王道蕩蕩하며, 무당부편無黨無偏하면 왕도평평王道平平하며'라는 글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정조와 남인의 철학은 왕도정치를 위한 왕권강화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런데, 여기에 이르러 정조의 개혁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분명해지는 것이다: 정조의 개혁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개혁의 출발점이 왕권 강화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모든 개혁의 출발점과 완성점을 자기 자신으로 잡았는데, 그것은 정조가 사라지는 순간 개혁의 이유와 지향점이 모두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정조가 시스템을 바꾸기보다 단순히 자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개혁의 목표를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개혁이라는 것은 노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개혁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고, 진정한 하부구조의 개혁이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가령 금난전권 철폐만 하더라도 자유로운 시장 경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노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혐의가 짙다. 한편 하부구조의 개혁이라 할 만한 연암 박지원의 패관문학에 대해서는, 정조의 호된 질책이 뒤따른다. 노론인 박지원의 개혁적 언어관에 대해 정조는 육경六經만이 진정한 언어라고 하며 순정고문醇正古文으로 글을 지어 바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널리 알려진 문체반정文體反正이다.

문체반정에서 조선조의 다른 역사를 기억해보는 것이 무리일까. 조선조에서 바를 정正 자가 사용된 것은 대개 개혁이라기보다는 옛것을 지키려는 보수주의의 발현인 경우가 많았다. 사대주의를 극복하고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뛰어난 외교 능력을 선보였던 광해군을 꾸데따로 몰아낸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반정'이라고 이름붙였다. 그들에게 있어 바를 정正이란 명에 대한 사대의식과 같은 구태의 것이었다. 한편, 조선 말의 위정척사도 새로운 것을 사邪로 몰아붙이고 옛것을 정正으로 이름붙인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정조의 개혁은 결국 왕권의 강화였고, 그것은 왕권이 절정에 달했던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는 것이었던 것에 불과하다.




6. 다시 정조 콤플렉스

정조와 남인 정약용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그들은 결국 전제왕정이라는 사상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잘못이 될 것이다. 대중들 사이에 정조 콤플렉스가 강하면 강할수록 대통령은 임금의 위치로 수렴될 것이며, 민족주의의 유령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결론은 늘 쉽다: 정조를 극복해야 한다.




글을 올린 뒤, 꼭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논지의 글이 나와서 링크를 걸어 둔다.
‘문체’만 부각시키는 게 문제다 : 문화일반 : 문화 : 뉴스 : 한겨레:
12월 4일 추가
Posted by 엔디
1

사람들은 왜 이야기를 읽을까? 또 왜 이야기를 쓸까? 내게 항상 관심을 끄는 말은 이런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쓰면 소설책 몇 권은 된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술에 취해 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의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어쨌든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참 많다. 블로그나 까페가 붐비고, 인터넷 댓글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다. 술에 취한 것처럼 다들 자기 이야기를 내뱉고,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는 욕을 '씨부리'는 것이다.

이청준은 일찍이 언어사회학서설이라는 연작 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 가운데 한 편은 「자서전들 쓰십시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코미디언 피문오 씨의 자서전 대필 작가 윤지욱이 자서전 쓰기를 그만두는 이야기를 골격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자서전 대필 작가는'글팔이'로 묘사된다(이청준, 85):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지욱을 마음내키는 대로 매도해 대다 말고 피문오 씨는 무슨 생각을 해냈는지 갑자기 목을 잔뜩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청승맞도록 능청스런 목소리로 허공을 향해 외쳐대기 시작했다.

"고장난 시계나 라디오들 고칩니다아― 채권 삽니다아― 부서진 우산이나 빈 병 삽니다아― 자서전이나 회고록들 쓰십시다아―."

자서전 대필. 이 묘한 이율배반의 어구語句는, 지욱의 소설에서의 자괴와는 상관 없이, 지금 이 땅에서는 산문시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누구도 유명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자서전을 직접 썼다고 믿는 일이 없다.


2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자동기술법l'automatisme이라는 것을 말했다. 무의식(의 가능성)을 발견한 예술가들이 이성理性의 통제를 받지 않은 무의식을 그대로 원고지에 옮겨적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자동기술법이야말로 대필의 가장 완전한 대척점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자동기술법은 자주 '자아의 확대'라는 면에 초점이 맞추어져서 낭만주의와 쉽사리 연결된다. 실제로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에서 낭만주의란 '영혼'이라는 예술가의 자아가 너무 커서 '현실'과 불일치한 것을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다(Lukács, 146):

19세기의 소설에서는, 영혼과 현실 사이가 어쩔 수 없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관계를 갖는 또 다른 유형이 한층 더 중요하게 된다. 영혼과 현실 사이의 이러한 불일치성은, 영혼이 삶의 운명보다 더 넓고 더 크기 때문에 생겨나게 된다. […] 따라서 내적 현실과 외적 현실 사이의 동일성을 실현하려는 삶의 시도가 실패로 끝난다는 것이 이러한 소설 유형이 다루는 대상이 되고 있다.

확실히 이런 예술가의 자아가 가장 화려하게 펼쳐진 것은 20세기 후반이었던 것이 아닐까. 적어도 지금은 더 이상 아닌 것 같다.


3

예술이 계량화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돈을 주고 나만의 이야기를 살 수 있게 된다. 글쓰기가 가내 수공업처럼 판매되던 '대필 작가 시대'가 20세기 말 ~ 21세기 초라면, 앞으로 대량생산 레디메이드 이야기가 언젠가 나오지 않을까. 사람마다 삶과 경험이 다르지 않은가, 하고 반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34년 이후로 우리네 삶은 모두 '레디메이드 인생'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지고한 예술이 과연 돈으로 계량화될 것인가라고 묻는 사람은 있을까? 역시 회의적이다. 심심찮게 나오는 소더비서울옥션의 미술품 경매장 소식을 보자. 그리고 오규원의 다음 시를 보자:

―― MENU ――
샤를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이브 본느프와



1,000원
에리카 종



1,000원
 




가스통 바쉴라르



1,200원
이하브 핫산



1,200원
제레미 리프킨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 오규원, 「프란츠 카프카」

소설도 언젠가 자판기처럼 몇 글자 입력하면 완제품이 나오는 구조가 될 것이다. 인터넷에서 뭔가 미칠듯이 간지나는 이야기는 만든 사람이나 이용하는 사람이나 짧게 그 유치함을 비웃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혐의가 짙지만, 미래의 입장에서 볼 때 소설 자판기의 시조始祖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TV 드라마는 처음 몇 회만 보면 전체 구조를 대략 짐작할 수 있고, 미소년과 얽히는 여주인공--꼭 여주인공이라야 한다--의 이야기도 쉽게 구조화·유형화가 가능하다. 이 시대에 프로프V. Propp같은 사람이 있다면 아주 쉽게 TV 드라마와 트렌디 소설을 분석해 몇 개의 요소로 나눌 것이다.

기술복제된 예술작품에는 아우라Aura가 없다고 베냐민W. Benjamin이 말했다고 하는데, 이 자판기용 소설은 처음 시작부터 아우라 따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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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2000. 『자서전들 쓰십시다』. 이청준 문학전집 연작소설1. 열림원.
Lukács, Georg. 1989. 『소설의 이론』. 중판. 반성완 옮김. 심설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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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최초로 국제기구 공식언어 채택 쾌거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모든 언어가 '도구'로서의 기능만 갖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에서 언어의 타동사적인 측면은 자동사적인 측면보다 훨씬 강조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언어 예술이라고 불리는 문학이나 언어를 통해 내밀한 사유를 하는 철학이 아니라면, 언어는 분명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도구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언어가 다른 언어보다 뛰어나다거나 못하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어떤 언어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이유는 분명히 언어 외적인 것이다. 옛적의 중국어, 프랑스어가 그랬고, 지금의 영어가 그렇다.

대학 시절 한 선생님은 대학생들이 소위 '원서'라고 하는 깨알 같은 영미권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 나라의 학문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가령, 심리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영어로 된 책을 많이 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영어가 심리학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 아니라 심리학이라는 학문이 영미권 특히 미국에서 발달된 학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경영학이나 사회학, 정보산업이나 생명공학 등 분야 학문 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른 언어도 사정은 비슷해서 대륙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독일어를 배워야 하며, 패션 관련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어나 이딸리아어를 배워야 한다. 선생님은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철학 분야에서의 '퇴계학'과 언어학 분야에서 '훈민정음(한글)'이라는 것이다. 그 둘만이 한국이 학문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분야라는 것이다.


한국어가 특허 협력 조약PCT: Patent Cooperation Treaty의 국제 공개어로 채택되었다. 이제는 국제 특허를 출원할 때, 기존의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중국어, 아랍어 등으로 특허 내용을 번역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특허청 관계자는 한국이 "세계 4위의 특허 출원국이자 세계 5위의 PCT 출원국"이라는 점이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마 그뿐 아니라 한국어를 모어로 하는 인구 수가 6700만으로 세계 16위(Ethnologue 2005 기준)에 달한다는 점도 반영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몇몇 신문이 이를 계기로 한글의 뛰어남을 찬양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대전일보는 해당 사실을 전하면서 사설을 통해 독일 언어학자 베르너 사세의 한글 찬사와 작가 펄 벅의 한글 찬사를 인용했고, 문화일보 역시 사설을 통해 한글에 대한 칭찬을 싣고 있다. 이러한 무분별한 찬양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하나는 PCT의 국제 공개어로 채택된 것은 '한글'이 아니라 '한국어'라는 점에서 두 신문은 '동문서답'을 하고 있는 셈이라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한국어 또는 한글이 내재적인 우수성으로 인해 PCT에 채택된 것이 아니라 특허 출원 수나 모어 화자의 수가 기준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정인지의 말처럼 훈민정음(한글)이 "비록 바람 소리, 학의 울음소리,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일지라도 모두 이 글자를 가지고 적을 수가 있다雖風聲鶴唳鷄鳴狗吠 皆可得而書矣."고 믿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서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한글이 PCT 국제 공개어로 채택된 것이 아니라면 그에 대한 말을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Posted by 엔디
“국어교과서, 정권정당화 수단으로 이용돼” : 책 : 문화 : 뉴스 : 한겨레

지금 초등학교 5학년 국어 교과서에는 예전 같으면 좀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 두 편이나 실려 있다. 하나는 1학기 교과서에 실려 있는 '우리 집 우렁이 각시'라는 글이고, 다른 하나는 2학기 교과서에 실린 '엄마는 파업 중'이라는 글이다. '우리 집 우렁이 각시'는 평소 일상 속에서 권위적이었던 아버지가 실직한 이후 가족들 몰래 집안일을 한다는 내용이고, '엄마는 파업 중'은 집안 일이 엄마에게만 떠맡겨지자 엄마가 집 뒤뜰의 나무 위에 올라가 파업이라며 시위를 한다는 내용이다. 어른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쉽게 깨기 어렵고, 이야기를 꺼내기도 어려운 성 역할에 대한 내용과 주부 파업에 대한 내용이 눈길을 끈다. 아마 김대중 정부(국민의 정부)와 노무현 정부(참여 정부)의 등장이 교과서 필진들에게 미친 영향도 있는 것 같다. 어쨌거나, 주부의 역할을 포함한 성 역할 고정이라는 문제점을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국어 교과서는, 사회나 과학 교과서와는 달리 기의signifié보다는 기표signifiant가 더 강조될 수밖에 없다. 언어학적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회나 과학은 흔히 '암기 과목'이라고 불리는 만큼 외도 될 만한 사실fait만을 적어야 하므로 그 내용인 기의에 방점이 찍힌다. 그 기의가 사회나 과학 교과서의 학습 목표인 셈이다. 반면, 국어 교과서는 학습 목표에 따라 (이론적으로) 아무 글이나 실어 놓아도 학습이 가능하다. 가령 글을 발단-전개-절정-결말로 나누는 요령을 배우는 것이 학습 목표라고 했을 때, 해당 단원에는 이문열이나 이인화의 소설부터 황석영의 소설까지 실을 수 있고, 마광수, 장정일, 또는 사드나 마조흐의 소설이라고 실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소설로도 글을 단락을 나누는 방법은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어 교과서는 지문의 완성도보다는 지문의 가치나 교육성, 정치성을 소중히 여긴다. 그런데 여기서 정치성은 또 그렇다 하더라도, 가치나 교육성을 따지는 것에 상존하는 문제는 쉽게 간과된다. 이것들은 상대적인 것이라 보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기준이 없다는 것은 권력에 이용당하기가 그만큼 쉽다는 뜻이다. 위에서 언급한 '엄마는 파업 중'이라는 동화는 보기에 따라서는 '교육상 부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한편, 공산당에 저항하다 죽은 이야기는 어떤 사회에서는 이데올로기 문제와 폭력성 문제로 교육상 부적합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또 (과거의 한국과 같은) 어떤 사회에서는 아주 교육적이고 훌륭한 이야기라고 생각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독재 정권이 교과서의 내용에 개입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국어 교과서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교과서도 쉽게 안심할 수 없다. 언제 어느 부분에 애국주의나 민족주의, 전체주의가 자리잡아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민족'과 관련된 몇 가지 상황을 생각해 보면 분명히 한국인의 성장의 어느 한가운데에 '민족'에 대한 비정상적인 강조의 코드가 분명 어디 숨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국어 교과서야말로 가장 긴장하며 읽어야 하는 책이 되고 말는 것이다.
Posted by 엔디
진중권 “‘디 워’ 비평할 가치도 없어”…네티즌 ‘발끈’ : 영화·애니 : 문화 : 뉴스 : 한겨레

'디 워'에 대해 처음 쓴다. 나는 '디 워'를 보지 않았지만, 그 애국심 마케팅과 관련하여 내셔널리즘 문제와 파시즘 문제, 그리고 감독 스스로의 코멘트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관련 기사나 블로그 포스팅은 유심히 살펴보았다.

'디 워'를 혹평하는 평론가들에게 옹호자들이 했던 말은, 이 영화는 그런 영화가 아니라 가족들이 함께 즐겁게 보는 영화이니 그런 식의 비평은 하지 말라, 는 것이었다. 즉, 영화에는 즐기기 위한 영화와 예술로서의 영화가 있는데 '디 워'는 예술로서의 영화가 아니라 즐기기 위한 영화이므로 '예술로서의 비평'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심 감독이 열심히 만들었고 한국 영화로서 이 만한 CG를 갖춘 영화가 없으니 재미있고 뛰어나다, 는 비평(?)만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누리꾼들이 진중권의 "'디 워' 비평할 가치 없다'는 발언에 발끈했다는 기사를 보고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100분 토론'을 보지는 않았지만, 진중권은 옹호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했을 뿐이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가 아니므로 그런 비평을 할 가치가 없다고 말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진중권은 마케터가 아니라 미학자美學者이며 평론가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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