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도 쓰지않던 박범신, 인터넷 소설 쓴다 : 문화일반 : 문화 : 뉴스 : 한겨레

블로그 회사마다 파워블로거, 킬러콘텐츠를 '영입'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 같다; 블로거라는 사람은 콘텐츠를 생산하는 사람이고, 콘텐츠는 쉽게 말해 블로그에서 하는 '말'이다. 이미 파워블로거로 인정받는 사람들이 서비스를 옮겨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데이터의 백업이라든지 하는 문제에서부터 블로깅 툴의 익숙도 문제까지 크고 작은 문제들이 걸려 있다.) 그러니까 블로그 회사 입장에서는 블로그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이 새로운 방법이 될 수 있겠다.

네이버 블로그에서 박범신의 소설을 연재한다고 한다. 아마추어 작가들이 스스로의 시나 소설을 블로그에 올리는 경우는 많지만, 등단 소설가가 블로그를 통해서(만) 자신의 소설을 연재하는 것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한겨레'는 "이메일도 쓰지 않던 박범신, 인터넷 소설 쓴다"라고 헤드라인을 뽑고 촐라체라는 소설을 연재할 박범신의 블로그를 링크해 놓았다.

한국의 파워블로거 중에서는 IT 관련 블로거들과 재테크나 건강·의학 등 정보성 포스팅을 주로 하는 블로거들이 많은 편인 것 같다. 블로그에 양질의 검증받은 문학 관련 콘텐츠가 적었던 것은, 아마도 기존 문단이 계간지나 월간지 등 문예지 중심으로만 돌아가고 있는 보수성 또는 폐쇄성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문예지와 사회과학지를 겸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창작과 비평은 직접 창비주간논평이라는 블로그를 만들어서 이런 단점을 보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소설가 박범신의 시도는 한국 문단에 작으나마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짐작컨대 네이버 쪽에서 박범신 쪽에 접촉을 시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앞으로 이글루스나 다음, 티스토리 등에서 비슷한 사례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문단 입장에서 볼 때에도 이와 같은 시도는 상당히 신선하면서도 잃을 것이 적은데, 매체가 바뀌면서 얼마간의 변화는 불가피하다고 하더라도, 대중성이 중요하다는 사회적 압박에 대처하기 위해 대중 소설로 하향 평준화될 텍스트의 수준 저하를 감수하기보다는 예술성을 유지하면서 접근성을 높이는 쪽으로 길을 터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박범신 스스로 "저는 인터넷에도 정통적이랄까 모범적인 글 역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밝히고 있기도 하다.

네이버 쪽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채널과 콘텐츠와 관련된 멀티미디어 정보 제공을 자신들의 몫으로 밝히고 있다.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은 작가의 팬들에게 반가운 소리가 될 것이고, 멀티미디어 정보는 문학적 입장에서는 텍스트의 상상력 제한 등의 문제가 있겠지만 '영상의 시대'인 지금 독자를 늘릴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까 생각된다.

다만 신문 연재나 계간지 연재에 비추어 블로그 연재가 가진 위험성은, 역시 편집자의 역량 문제라고 하겠다. (이메일도 쓰지 않는다는 박범신이 직접 블로그에 글을 쓸 것으로 보이지는 않고, 아마 원고지를 네이버 쪽에 전달해서 네이버에서 웹 조판(?)하는 방식을 선택할 것으로 보이는데,) 네이버를 비롯한 블로그 회사에서는 문학 텍스트의 편집을 경험한 편집자가 적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비록 해외에 비추어 국내의 문학 편집자들이 텍스트에 간여하는 바가 적은 것이 사실이지만, 편집자의 매만짐이 없이 그대로 텍스트가 노출되었을 때 작은 문제들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인터넷과 블로그에 보다 친숙한 다른 작가들이 편집자 없이 직접 블로그에 글을 쓸 때에도 드러날 수 있는 문제이다. 얼마나 두드러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연재 과정에서 확인해보자.

덧붙이자면, 등단한 시인·소설가들이 블로그에 직접 글을 쓰게 되더라도 현재의 문예지들이 크게 타격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블로그에 글을 올려서 그것이 화제가 되기 위해서는 문예지를 통해 검증을 받는 것이 중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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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댓글, 국내 포털은 흉내낼 수 없는 그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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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포털의 댓글은 이제 아는 사람 사이에선 유명하다. 박노자 교수는 "악플"의 문화라는 글을 통해서 유별난 한국의 악플 문화에 대한 진단을 내린 적이 있는데... 진단 내용은 또 그렇다 치고 가령

한국 문화를 공부하려는 외국 학생에게는 - 어느 정도 성숙된 학생이 이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논문을 써야 할 일만 아니라면 - "네이버에서의 기사 댓글들을 읽어보라고" 교원의 양심을 걸고 권고할 수 있습니까? 저 같으면, 학생에게 "한국" 그 자체가 싫어질 것 같아서 절대 권고 못할 것입니다. 특히 "외국"이 개입되면 아예 입에 올리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하도 많이 나오기에 저만 해도 참아 못읽지요. 예컨대 한국 여성들과 가끔가다 추잡한 일을 벌이는 일부 영어 강사 관련의 기사가 나간 적이 있었는데, 상당수의 댓글은 "양넘에게 ... 벌려주는 우리 나라.... 문제야! 대한민국의 진정한 남성들이여, 저 ...들을 정신차리게 교육시키고 혼내주라!"는 식이었어요. 예컨대 외국 여성이 이와 같은 문구를 읽어서 우리 국내 마초주의의 깊이를 여실히 느끼게 되면 계속 한국학하기가 쉽겠습니까? 제 학생에게도 몇 번 현실적 문제로 나타난 부분이고, 저로서 아주 두려운 부분입니다.

라고 걱정하는 부분을 보면서는 악플의 심각성이 극에 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동네 창피하다.', '국가적 망신이다.'와 같은 유교적 국가주의의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바깥에서 보는 한국의 댓글 문화가 저렇다면, 저게 바로 한국에 대한 선입견 없는 객관적 판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득해졌던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속한 공동체의 수준이 이 정도구나 하는 생각의 확인remind이었다고 할까. (박노자는 다른 글에서 아프간 피랍 사태에 대한 한국 누리꾼들의 반응을 실은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지誌의 기사를 링크하고 있기도 했다.)

한국의 댓글 문화가 아주 건전하지는 못하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정부에서도 고심 끝에 대형 포털 등에서는 '제한적 본인 확인제'라는 반半실명제를 실시하도록 하고 있다.


2

이번에 구글 뉴스(미국판)에서는 메일을 통한 코멘트(댓글과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 게시라는 방식을 시도한다고 한다. 전문가나 관계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고 하는데, '네이버보다 못하다.'라든지 '웹web적이지 않다.'라는 평가도 있고 심지어는 '구글이 뭐만 하면 찬탄하는 건 사대주의가 아닌가?'하는 조금 다른 범주의 평가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상당히 괜찮은 방식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와 같은 형태의 구글 뉴스의 코멘트는 실제로 악성 댓글의 부작용을 개선할 뿐만 아니라 매체media의 기능을 어느 정도 대체하거나 보완할 수도 있다:

1) 먼저 구글 뉴스의 코멘트는 악플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이것은 구글에서 모든 코멘트를 확인한 후에 게시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구글 뉴스에 코멘트를 게시하려면 특정 주소로 관련 메일을 전송해야 하는데, 이게 생각보다 번거로운 작업이다. 개개의 악플은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을 통해 이루어진다기보다는 순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번거롭다'는 점에서 이미 악플은 차단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번거로움'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2) 전문가나 관계자의 코멘트만을 게시하므로 코멘트의 질이 높을 수밖에 없다. 구글 검색을 통해 가끔 해외의 포럼forum을 열람하면 상당히 질 높은 대화가 오가는 것을 가끔 볼 수가 있는데, 이와 같은 코멘트 게시의 방식은 이 수준 높은 대화를 통해 그 자체로 하나의 추가 기사나 박스 기사를 읽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줄 수 있다.

3) 만약 기사에 오류가 있거나, 명예훼손 등의 사안이 관련된 경우 구글 뉴스의 코멘트는 상당한 정도로 관련된 문제를 경감시킬 수 있다. 이 경우 언론을 상대로 정정보도청구권이나 반론보도청구권 등을 행사해서 정정 기사 또는 반론 기사를 게제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겠지만, 그 경우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므로 구글 뉴스의 코멘트가 이를 보완할 수 있는 것이다.


3

국내 포털의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댓글 문화의 자유도나 편의도를 중요시하고 있거나, 댓글 문화의 자정 작용을 믿는 사람들일 것으로 짐작된다. 당장 생각해도 구글 뉴스의 코멘트처럼 불편하고 부자유스러운 데다, 일일이 '검열'을 거치는 모양새는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악해지지 말라Don't be evil."는 구글의 모토에는 상당히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글의 모토는 중국 내 서비스를 하면서 중국 정부의 검열 방침을 수용하면서 수난을 받기 시작했지만, 정부의 검열을 받는 것과 뉴스 코멘트의 내용을 확인 후에 게시하는 것은 다르다: 중국 정부와의 타협은 중국 내 서비스를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노린 것이지만, 코멘트에 대한 자체 검열 정책은 말초적인 댓글에 대한 봉쇄를 통해 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한국에는 종이 신문이나 TV 뉴스를 보면서 이에 대한 댓글은 어떤 게 달렸을까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건전한 호기심을 넘어 때로는 선정적이고 말초적인 폭력적 댓글을 즐기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그만큼 말초적인 인터넷 댓글은 중독성이 있다. 구글은 그런 식으로 페이지 트래픽을 증가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요컨대, 다소 이상해보이는 구글이 이번 코멘트 정책은 한국적 댓글 문화에 대한 연구를 통해 나온 고육책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덧.

이와 함께 구글 뉴스의 코멘트는 웹페이지의 캐시와 블로거 이외에 사용자생산콘텐츠(User Generated Contents)를 구글의 서버에 저장한다는 점에서 이채로운 서비스로 판단된다. 세계일보 기사에 따르면 저장 기간은 약 30일 정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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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쿨이 바꿀 수 있는 사법의 세계

1. 손 무덤

로스쿨이 이토록 큰 사회적 이슈가 되는 것은, 그 동안 법조인들과 변호사들의 삶이 평탄했기 때문이다. 시민의 손발인 판검사가 편했다는 것은 시민들이 그간 겪은 고통이 크다는 뜻이고, 말을 팔아 돈 버는 서비스업종 변호사가 편했다는 것은 아직까지 그들 앞에서 '손님'들이 '왕'인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 말은... 대다수의 시민들에게 법은 아직 먼 존재라는 말이다. 가령 단병호 의원의 딸인 단정려 씨가 사법고시에 합격하고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고 싶다는 소망"은 아버지와 같다고 밝힌 것(한겨레)이 이례적인 것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은 법의 보호를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박노해 시인은 시 「손 무덤」의 일절을 통해 노동자가 느끼는 법과의 거리를 보여준 적이 있다. 프레스에 노동자의 손목이 날아갔는데, 그를 타이탄 트럭으로 병원에 실어주고 나서 동료 노동자들이 찾아간 곳은 변호사가 아니라 종로의 큰 서점이었다.

훤한 대낮에 산동네 구멍가게 주저앉아 쇠주병을 비우고
정형이 부탁한 산재관계 책을 찾아
종로의 크다는 책방을 둘러봐도
엠병할, 산데미 같은 책들 중에
노동자가 읽을 책은 두 눈 까뒤집어도 없고

- 박노해, 「손 무덤」부분

노동자에게 변호사는 그토록 어려운 존재였고, 그래서 찾아간 서점에서도 노동자는 책에 의해 소외를 당하는 현실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 장면은 묘하게 같은 시집에 실린 「지문을 부른다」와 겹쳐져서, 노동자의 법적 소외가 존재론적 차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평생토록 죄진 적 없이
이 손으로 우리 식구 먹여살리고
수출품을 생산해 온
검고 투박한 자랑스런 손을 들어
지문을 찍는다

없어, 선명하게
없어,
노동 속에 문드러져
너와 나 사람마다 다르다는
지문이 나오지를 않아
없어, 정형도 이형도 문형도
사라져 버렸어
임석 경찰은 화를 내도
긴 노동 속에
물 건너간 수출품 속에 묻혀
지문도, 청춘도, 존재마저
사라져 버렸나봐

- 박노해, 「지문을 부른다」부분

요는 지금까지 법은 꼭 필요한 사람들 곁에 없었다는 말이 된다. 그 이유는, 역시 돈 때문이다.


2. 로스쿨과 변호사의 수

로스쿨이 사법 개혁의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일단 자본주의적 논리에 기초한 해법이다: 고시라는 형식을 통해 법조인을 뽑으면 한정된 숫자로 뽑을 수밖에 없는 반면, 로스쿨 졸업생들을 간단한 자격 시험을 통해 변호사로 만들면 변호사 자격증 소지자를 보다 쉽고 빠르게 양성할 수 있는 것이다.변호사 공급에 비해 수요가 너무 많은 현재 상황의 타개책으로 공급을 늘리는 정책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 모델은 미국인 셈인데, 우스개소리로 미국에는 길거리에서 돌을 던지면 변호사가 맞는다고 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인구 대비로 1만 명당 37.3명 정도 되는 모양인데, 한국은 1만 명당 1.7명이다(2005년 기준, 한국경제 칼럼). 미국은 인구 10만 명당 352.1명인데, 한국은 17.4명이다(한국경제 기사, 2007년 8월 24일)



일단 공급을 늘리는 방안은 가장 확실하고도 강력한 방안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변호사들이 적은 수임료를 주는 사건도 맡게 될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일정 자격을 갖춘 법 전문가들이 보다 많아짐으로써 쉽게 법의 일상화가 진행되고 일반인들도 법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 이를테면, 허위 사실의 유포뿐 아니라 특정 사실의 공공연한 적시도 명예훼손이 된다는 것과 그것이 공공복리에 이바지한다면 위법성이 조각된다는 정도의 기본적인 법 지식을 몰라 피해를 보는 사람이 줄어들 것이라는 말이다.


3. 로스쿨 대 고시

프레시안은 로스쿨 제도가 확립되면 상고만 졸업하고 독학으로 고시를 패스하여 변호사가 되는 이른바 '노무현 신화'는 사라진다고 적고 있다:

비싼 등록금도 문제로 꼽힌다. 이번에 통과된 로스쿨법이 모델로 삼고 있는 미국, 일본의 경우 로스쿨의 학비는 천문학적 수준이다. 국내 로스쿨의 등록금 수준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한 학기 학비가 1000만 원을 훌쩍 넘으리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런 전망대로라면 서민 가정에서 자란 학생이 법조인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지적에 대해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로스쿨 졸업 후, 공익 변호사가 되려는 이를 위한 장학금 제도를 강화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비싼 등록금 때문에 로스쿨 재학 중 과도한 빚을 진 변호사들은 아무래도 인권, 환경, 노동, 복지 등 공익성이 강한 분야를 기피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런 방안이 마련되지 않는 한, 농촌에서 태어나 상고만 졸업하고 독학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해 판사가 된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사례는 더 이상 나올 수 없다.

하지만, 기사는 동시에 수만의 '고시 낭인'을 양산하는 현행 시스템을 옹호하고 있지도 않다. 다른 외부 필자의 기고는 중요한 것은 시스템이 아니라 숫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공급 규모가 중요하지 양성 시스템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발 방법은 '일정 수준의 자격'을 위해 매우 중요한 요소이고, 내가 보기에 로스쿨 제도야말로 보다 많은 변호사들을 공급하면서도 '일정 수준의 자격'을 갖추도록 하기 적당한 시스템이다.

또한 현재의 고시 시스템은 법조인의 선발 방식만을 규정하고, 그들이 어떻게 학습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고시 학원 등의 무분별한 사교육에 의존하도록 만든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로스쿨은 대학원 코스로 편입된다는 점에서 선발 방법과 함께, (변호사들로부터) 수업을 직접 들을 수 있다는 학습 방법까지 규정된다는 점이 장점이라고 할 만하다. (비록 로스쿨 입학 시험에 대한 학원 의존이나 졸업 후 자격 시험에 대한 학원 의존이 생길 수 있지만, 그 부분은 한국의 사교육 '문화'에서 단칼에 없애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로스쿨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통하는 높은 등록금도 장기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을 수 있다. 로스쿨 졸업자의 대다수가 변호사가 되는 현실에서, 은행권은 회수가 거의 확실할 채무자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국가나 대학에서 편성할 장학금도 적지 않을 것이다. 4년제 대학 졸업생만 입학 자격을 준다는 점을 우려할 수는 있겠지만, 법조인에게 대학 졸업 정도의 학력을 요구하는 것은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얼마나 정확한 통계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고시 시스템을 채용하고 있는 현재도 고졸 이하 변호사의 비율은 전체의 1%가 안 된다(직업).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돈이 없어서 대학을 못 갈 정도의 사람이 고시 공부에 올인하고 있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http://www.jigup.co.kr/job/bpjob33_view.php?code=750의 자료로 구성)

4

로스쿨이 완벽한 제도라는 것이 아니다. 시스템이란 완벽으로 점근선을 그어가는 것이지 완벽한 시스템이라는 것은 없다. 다만 로스쿨이 현재의 시스템보다 합리적이고, 사회적으로 낭비가 적으며 보다 많은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 제도라는 것이다. 나타날 부작용들은 어느 정도 예견 가능하며 그것은 제도적으로 보완하면 된다. 로스쿨은 지나치게 자본주의적이고 지나치게 미국적임에도 한국의 현재적 상황에서는 서민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제도라고 생각된다.

* 2007년 8월 27일 인구 x명당 변호사수 자료 업데이트. (via xChart)
Posted by 엔디
0. 선교의 중요성

주지하다시피 기독교에서의 선교란 무척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다. 마태복음 28장에서, 그리고 사도행전 1장에서 그리스도는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이를 지상至上 명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이후, 기독교의 역사는 선교의 역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개개의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보낸 선교사라고 보아야 옳다. 흔히 '임무'의 뜻으로도 쓰이는 mission은 본래 예수회Jésuite가 해외로 선교사를 파송할 때 사용했던 말로 '보내다'라는 뜻의 라띤어 'mittere'에서 나왔다고 한다. 선교사를 보내는 일, 선교사로 가는 일은 기독교의 임무mission인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영혼의 구원이 기독교의 존재 이유는 아니라는 점이다. 기독교의 존재 이유는 영혼 구원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광이다. 따라서 영혼 구원만을 목적으로 여호와의 영광을 가리는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대개의 경우 영혼이 구원받는 자리에서 영광도 드높아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과 이를 둘러싼 국내외적 상황을 살펴본다면 영혼 구원 혹은 영혼 구원을 위한 행동이 여호와의 영광과 항등식을 이루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이 짧은 글은 아프가니스탄 단기 선교에 대한 평가를 위해 단기 선교가 무엇인지 간략히 살펴보고 보다 지혜로운 선교를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위해 쓴 것이다.

(합법적으로 블로그에 노래를 틀 수 있을 때까지 노래 잠시 내립니다. 2008년 3월 24일. 조환곤, 선교지로 향하며)

1. 장기 선교와 단기 선교

선교를 구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그 길이를 기준으로 장기 선교와 단기 선교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장기 선교는 몇 년에서 몇 십년, 혹은 일생을 바쳐서 어느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일하는 것이고, 단기 선교는 며칠, 몇 주, 몇 달, 혹은 대략 한두 해 정도의 사역 기간을 갖는다.

장기 선교와 단기 선교를 나눈 기준은 기간이지만, 그 둘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먼저 선교사들이 선교에 임하는 자세가 다를 것이다. 또, 선교를 위한 준비 기간 역시 다를 것이다. 또한 선교사들의 신분이나 연령 등이 다를 것이며, 선교사들의 숫자도 다를 가능성이 높다: 아무래도 장기 선교를 떠나는 사람은 보다 비장한 각오를 하고 보다 더 치밀하게 준비할 것이며, 평신도이기보다는 신학을 공부한 교역자이기가 쉽고 아주 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장기 선교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가기보다는 혼자, 혹은 부부나 일가족 정도가 떠나는 것이 보통이다.

단기 선교는 교역자들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짧은 시간 복음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 떠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청소년이나 청년들이 방학을 이용해서 떠나는 여행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두 종류의 단기 선교를 《선교타임즈》에서는 각각 '비전 트립vision trip'과 '미션 트립mission trip'으로 '미션 트립mission trip'과 '비전 트립vision trip'으로 적절하게 구분한 바 있다. (단기선교, 이것만은 알고 가자) 모든 '비전 트립'은 '미션 트립'으로 이어져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전 트립'이 '미션 트립'보다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아주 작은 일에도 우리는 선교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데, 가령 선교지에서 선교사님 집 청소를 도와주는 일만 했다고 해도 우리는 선교를 한 셈이다. 그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롬8:28)는 세계관으로 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게다가 '비전 트립'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선교사의 방을 닦으면서 자신의 삶 속에서 선교를 실천하는 각오를 다질 수도 있고 선교사가 되고자 하는 꿈을 키울 수도 있다.


2 뱀과 비둘기

단기 선교를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기도라고 할 것이지만, 그밖에도 선교지에 대한 자세한 공부와 언어 및 문화에 대한 숙지가 필요하고 때에 따라서는 특수한 훈련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고 명령한 적이 있다. 영어로는 and, 불어로는 et로 연결된 두 구절은 어느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상반절에 나와 있듯이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파송하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기 때문이다. 이 말이 제자들을 택한 백성인 유태인에게 보내면서 했던 말인 것을 생각해보면 이슬람이나 토착 종교권으로 선교를 갈 때에 얼마나 더 큰 준비가 필요한지 알 수 있다.

그런데 한달 이하의 비전 트립 형식의 단기 선교를 간다고 했을 때, 이와 같은 준비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기도로 준비하는 것은 기본이자 베이스가 되겠지만, 전공자가 아닌 이상 언어를 익힌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문화에 대한 공부도 소홀히 하기가 쉽다. 때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나 선교사라는 것을 숨겨야 할 때도 있는데, 이것도 훈련을 받고 늘 긴장하면서 살지 않으면 쉬운 일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위험 지역이나 선교 불가 지역으로의 비전 트립은 최대한으로 자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아프가니스탄으로 단기 선교를 떠난 분당 S교회 팀은 그런 의미에서 조심성이 없었고, 준비가 부족했다. 아니, 비전 트립 형식으로 아프간으로 떠났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신앙적 오만이었다고 생각한다. 아프간 정도 되는 곳이라면, 적어도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선교사가 의료 봉사나 교육 봉사 등의 사역을 겸하면서 (필요하다면) 가명까지 쓰면서 조심스럽게 사역을 해야 하는 곳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차인표 씨의 아래 글은 잘못된 비유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악어들이 득실거리는 어느 강가에 "위험"이라는 푯말이 서 있습니다. 강을 건너던 작은 배가 뒤집혀 아이들이 빠져서 허우적거립니다. 그들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죽어가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한 무리의 어른들이 강으로 뛰어 듭니다. 아이들을 한명, 두명 구하던 그 어른들은 이내 악어의 공격을 받아 피투성이가 되기 시작합니다.
차인표 씨의 미니홈피

어린이가 나쁜 일을 당하고자 하면 구하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맹자가 '우물에 빠지려는 어린 아이'의 비유孺子入井說를 든 이후로, 오랜 전통을 가진 예시문인 셈이다. 하지만 이번 아프간 사건에서의 문제는 (비유로 이야기하자면) 아이들이 빠져 허우적거리는 곳에 아이들이 들어갔다는 점이다. 그곳에는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수영 선수나 구조원이 들어가야 옳고, 물 밖의 아이들은 단기적으로는 그런 수영 선수나 구조원을 찾아다니고 장기적으로는 수영 선수나 구조원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어야 옳은 것이다.


3 단기 선교의 세부적인 주의점: S교회 아프간 단기선교팀의 행동과 관련하여

선교가 반드시 심각하기만 하고 재미라고는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선교는 재미보다는 어려움과 힘듦, 심지어 삶의 위협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밤에 숨죽이고 찬양을 부르는 사람들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S교회 단기 선교단은 그곳 모스크와 이슬람 성지와 같은 곳에서 예배와 워십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디시인사이드 갤로그) 이와 같은 행동은 이슬람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올린 것으로 보이는 글들의 문체에서 그들의 기쁨이 잘 드러나 있는데, 이 역시 무척이나 실망스러운 모습이다. 복음화가 절실한 곳에서 워십과 예배를 드릴 때의 슬픔이나 무거움이 완전히 표백된 기쁨에 찬 그 글을 보면서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찬양이 진실로 여호와를 기리고 영광을 돌리는 것인지, 아니면 일종의 '신앙 고수'의 이벤트인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행동은 비기독교인들에게 커다란 반발을 일으킨다. 개신교도들이 흔히 하는 오해 중에는 비기독교인들의 비난이 거센 것을 자신들의 행동이 옳은 증거로 여기는 것이다. 비기독교인들의 비난은 개신교도들이 신앙의 윤리대로 사는 것을 두고 하는 몰이해의 비난일 수도 있고, 개신교도들이 정말 잘못하는 것을 두고 하는 준엄한 비난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비난 그 자체만을 가지고 가치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개신교도의 준거는 성경이어야 하지, 비기독교인들의 반응이어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반발을 사는 행동도 없어야 한다. 세상의 법과 도덕에 맞추어도 신앙적 및 신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에는 세상의 법과 도덕을 따르는 것이 좋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막12:17) 돌려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칫 여호와의 영광을 가리는 행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 사태로 인해 욕을 먹은 것은 개신교도만이 아니라, 여호와와 그리스도도 마찬가지다. 이런 가슴아픈 사태는 없으면 없을수록 좋다.

'떡과 복음'이라는 말이 있다. 기아대책이라는 선교 단체의 슬로건이다. 생각해보면 현재 아프가니스탄 선교만큼이나 어려웠을 식민지 조선에서의 선교는 저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다. 한국 복음화의 두 축인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젤러가 각각 의사, 교육자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시 조선은 의사와 교육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조선의 비폭력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유관순 역시 선교사가 세운 이화학당 출신이다. 아프가니스탄도 지금 교육과 의료라는 떡이 필요하다. 이는 아프가니스탄 선교의 '문'을 열기 위해 꼭 필요하다. 피랍 여성 가운데 처음 미국 방송사 CBS와 육성 통화를 한 임현주 씨는 실제로 그 문을 위해 오래도록 아프간에서 봉사 활동을 한 분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토록 오래 '떡'으로 섬겨서 조금씩 열리고 있는 아프간 선교의 문이 이번 단기 선교 이벤트로 인해 닫혀버린 것이다. (모기불 통신)

그밖에 국내외 정세에 개신교도들이 너무 어두운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4 조심스러운 제언

단기 선교는 비교적 재정 여력이 있는 나라의 그러한 교회에서 주로 기획해서 간다. 그런 단기 선교를 이벤트성 행사나 선교를 명목으로 한 여행이 아니라 보다 의미 있는 비전 선포식으로 바꾸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또는 해외가 아니라 국내의 미자립 교회 등에 찾아가서 개척의 어려움도 듣고 봉사활동도 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활동도 변질되면 무서운 암세포가 될 수도 있다:

도시 교회 수련회나 봉사활동으로 온 사람들로 인해 농촌 교역자들을 골머리를 썩히고 있다는 것이다. 도시교회에서 조금한 시골교회에서 찾아와서 자신들의 여름 수련회을 농어촌 교회 지역봉사를 섬기겠다고 찾아와서는 봉사하는 것이 오히려 농촌 교회 교역자를 얘를 먹이고 있다고 리서치 하는 우리들을 붙잡고 하소연 하시는 것을 교역자님과의 인터뷰 가운데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 안하시면 되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런 행사 유치를 통해 조그마한 교회재정에 도움을 얻고 또 도시지역의 협력하는 교회에서  부탁을 하는데 어떻게 안들어 줄 수 있느냐며 저희에게 되물으셨다. 그것도 제 날짜에 와 주면 감사하다고 하시며 온다고 해서 다 준비해 놓았더니 약속한 날, 몇일 전에 갑자기 취소하면 이처럼 씁쓸한 일이 없다고 저희에게 토로하시는 것을 보게 되었다.
여호수아 프로젝트

결국 우리는 늘 순결하고 지혜롭도록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1:5)

그리스도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7:1)고 했다. 나는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분당 S교회 단기 선교팀을 비판한 셈이다. 나 자신 그들보다 나은 점이 없고 결코 그들을 판단할 만한 위치에 있지는 않다. 다만, 악하고 게으른 종이지만 조금이나마 선교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짧은 글이나마 적어 본다.

◎ 현재 파랍된 아프가니스탄 단기선교 팀 모두의 무사 귀환을 기원합니다.
Posted by 엔디
탈레반, 피랍여성 울먹이는 육성 공개

탈레반에 피랍된 임현주 씨의 육성을 공개한 것을 두고 언론에서는 '고도의 심리전'이라고 난리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피랍자들의 육성을 들려주는 것은 저런 국제적으로 알려진 단체뿐 아니라 우발적으로 어린이를 유괴하는 유괴범들도 다 하는 기본적인 '협상' 방법이다.

상대를 잘 경계하고, 상대의 방법을 분석해야지 상대를 과장하는 것은 좋지 않다. 상대를 과장하는 과정에서 쓸데없이 감정이 들어갈 수 있고, 이 사안에는 또 민족주의가 개입할 가능성도 있다. 또 현재 사회에 만연한 개신교에 대한 반발심리도 커질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고인이 되기는 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이라도 건강하게 무사히 돌아오기를 빈다. 그리고, 개신교도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 개신교가 제발 좀 정신차리기를 빈다.
Posted by 엔디
이랜드 사태가 점점 심각한 상태로 빠져든다.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오십년대 평양에서 '빨갱이'들을 악마라고 불렀고, 칠팔십년대에 학생운동하고 노동운동하던 사람들을 마귀라고 불렀고, 오늘날 노조 간부들을 사탄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우구스띠누스가 받아들인 플라톤주의의 쉬운 2분법이 기됵교에게 익숙할 수밖에 없지만, 저런 명칭은 지나치게 정치적이라서 더 부끄럽다: 일단 상대를 사탄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 상대에 대한 모든 인식은 닫혀버리고 만다. 종교도 정치처럼 언어예술이자 립서비스로 변하는 순간이다.

이럴 때 개신교인임이 무척이나 부끄럽다, 슬프다.

이랜드 사내 메일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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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라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대한민국을 노래했을 때, 나는 대한민국의 일원임이 자랑스러웠다. 나는 동남아시아나 인도 따위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불쌍하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네들은 그런 나라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학 시절 나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그 명제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별다른 고생을 하지 않고 살아온 내 20년도 나름 꽤나 괴로운 시간이었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도록 해주지도 않고, 해줄 수도 없는 나라라는 생각이었다.

저 노랫말의 의미를 지금은 조금 깨달을 것 같다: 저 명제는 확실히 참이고, 다만 교묘하게 주체를 숨겼을 뿐이다. 대한민국은 어떤 사람에게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나라인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과 그렇지 않은 다른 많은 사람들간의 격차를 고착화시킨 것이 바로 1988년의 서울 올림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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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은 신기한 일이 많이 일어난 해였다: 전국민 직선제에 의해 뽑힌 '보통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고, 월북 또는 납북된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출판 금지 조처가 해제되었고, 백무산의 『만국의 노동자여』가 출간되었다. 그리고 서울 올림픽이 열렸다.

솔직히 서울 올림픽에 대한 기억은 이제 거의 없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개막식 행사 마지막 부분의 굴렁쇠 굴리는 소년, 세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성화를 점화하는 모습, 그 때 날아오른 흰 비둘기들, 가장 먼저 입장한 '가나'라는 나라와 '대한민국'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이름을 달고 맨 마지막으로 등장한 한국, 김수녕을 비롯한 여자 양궁수들의 개인전 금·은·동 '싹쓸이', 칼 루이스의 당시 100미터 달리기 세계 신기록 9초86, 벤 존슨의 도핑 테스트 양성 반응 소식, 금메달 12개로 세계 4위에 오른 한국의 성적... 정수라가 부른 '아, 대한민국'... 그 정도다.

아마 다른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보여지는 것'에 민감한 한국인의 속물 근성 때문에 밀려나야 했던 판잣촌의 사람들. 분명 서울 올림픽 유치 소식에 함께 기뻐했음이 틀림없는 그들은, 난장이였기 때문에 기쁨 대신 슬픔을 얻었을 것이 분명한. ...88 올림픽은 시작부터가, 80년 5월 사건을 거쳐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이 밀어붙인 3S 정책의 일환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야기가 더 쉬워질는지도 모른다.

최근 영국 일간지 가디언 기사에서 올림픽과 개발 그리고 소외에 대한 기사가 있었나보다.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서 해당 기사를 번역하여 올렸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엄청난 성공을 거둔 대회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군사독재 세력은 올림픽을 통해 민중들이이 소유한 토지를 빼앗아 소수의 엘리트가 주인이 되는 기업도시로 서울을 만드는 기회로 이용했다. 72만명의 주민들이 자기 집에서 쫓겨났고 거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폭력배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구금됐다. 세입자들은 사전 공지도 없이 퇴거조치 됐고 일부는 고속도로의 뚝 밑에 굴을 파서 살게 됐다. 노점상은 금지됐고, 노숙자, 알코올중독자, 거지, 정신장애자들은 한데 모아져 수용소에 갇혔다. 세계는 그런 장면을 보지 못했다. 단지 번듯한 사람들이 활보하는 번듯한 새 도시만 보았다." (프레시안)

어쨌든 그 한두 해 뒤 정태춘은 다른 '아, 대한민국'을 발표한다.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이 뛰어난 곡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곡은 사람들이 보지 못한... 혹은 보려 하지 않은 한국 사회의 이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이색적이라는 것이다.



정태춘 - 아, 대한민국 가사 열기


노래를 듣다보면 우리는 아주 익숙함을 느낄 수 있는데, 뉴스나 신문의 사회면과 노래 가사가 닮아 있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계몽적이지 않다. 불어에 기반을 둔 '계몽enlightenment'이란 낱말이 진리가 없는 어두운 곳에 빛lumière을 비추이는 것이라면, 정태춘의 이 노래는 사람들이 다 아는 사건들을 몽타주 식으로 이어붙인 것에 불과하다. 누구나 사회면을 보고 잊어버리는 것들을 상기시키는 효과를 보여주는데,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올림픽의 화려한 모습에 비해 그런 사건들을 쉬이 잊어버리고 산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

러시아 태생의 박노자 교수는 소치 "승리"를 한탄한다...라는 글에서 소치의 동계올림픽 유치 소식을 비보로 받아들인다. 그는 소치라는 땅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 땅의 아름다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는데, 이제 곧 그 땅이 사라지는 것이다. 가령 침엽수림의 나이테로 가늠했던 소치의 나이는 이제 철근과 콘크리트의 녹과 부식 정도로나 가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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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도 그렇다. 나는 평창에 누가 살고 있는지, 어떤 생태가 있는지 모르지만... 아름다운 설원에서 눈의 아름다움보다는 돈의 아름다움이나 정권의 아름다움만을 보고 있다는 생각에만은 치가 떨린다.

그러니까 말이지, 이 땅에는 참 많은 천성산 도롱뇽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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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엔디
인터넷에서 수난받는 시작품들

별이 갈 길을 비추었던 서사시의 시대를 동경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의 시는 '향유'된다기보다는 '소비'되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나는 늘 절망한다. 나는 좋은 시는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재생산이란 하나의 시가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 속에 다른 울림을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재생산 과정에서 원래의 시가 가지고 있는 아우라는 사라지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그 시를 딛고 있는 다른 시를 낳기도 한다.

인터넷과 '미니홈피' 시대의 시의 '소비'는 좀 색다른 경향이 있어서, 시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고치거나 다른 사람의 시에 자신의 시를 덧붙이거나, 시를 마음껏 자기 것으로 이용한다. 그렇게 '가공'된 시는 원작의 분위기를 잃고 대개 감동적인 사랑이나 착한 도덕률의 삶을 설파하는 교과서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 순간 시가 잃어버리는 것은 시니피앙이다.

1

도종환 시인의 시는 「접시꽃 당신」 시절부터 수첩이나 다이어리에 적혀 회자되던 것이다. 그의 시는 서정윤이나 특정 시점 이후의 류시화의 시와 달리 삶에서 비어져나온 어떤 빛이 있는 시였다. 이를테면, 베개맡의 머리칼처럼 생명이 빠져나간다는 표현은 쓰기 쉬운 것이 아니다. 그 시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탁월한 성찰에 관한 시였다. 씨앗과 열매는 거의 자연스럽게 그 앞의 혹은 그 뒤의 꽃을 연상시키고 벌레는 수정受精을 떠올리게 하는데, 시인 부부가 섬겼던 농사일은 거기서 거의 확실한 삶의 은유가 되어 있다.

나는 이런 아픈 사랑의 시를 좋아하는데, 널리 알려진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나 또 이정록 시인의 「보석달」 같은 시는 읽을 때마다 조금 숙연해진다.

보석달

식 올린지 이년
삼개월 만에 결혼 패물을 판다
내 반지와 아내의 알반지 하나는
돈이 되지 않아 남기기로 한다
다행이다 이놈들마저 순금으로 장만했다면
흔적은 간 데 없고 추억만으로 서글플 텐데
외출해도 이제 집걱정 덜 되겠다며 아내는
부재와 평온을 혼돈하는 척, 나를 위로한다

농협빚 내어 장만해준 패물들

빨간 비단상자에서 꺼내어 마지막으로 쓰다듬고
양파껍질인 양 신문지에 둘둘 만다
버려야 할 쓰레기처럼 밀쳐놓고 화장을 한다
거울에 비친 허름한 저 사내는 누구인가
월급날이면 짜장면이 먹고 싶다던
그때처럼 화장시간이 길다
동창생을 만나러 나갈 때처럼
오늘의 화장은 서툴러 자꾸 지우곤 한다

김칫거리며 두루마리 화장지를
장식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돌아오는 길
자전거 꽁무니에 걸터앉아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콧노래 부르며 노을이 이쁘단다
금 판 돈 떼어 섭섭해 새로 산
알반지 하나를 쓰다듬으며 아내는
괜히 샀다고 괜히 샀다고
젖은 눈망울을 별빛에 씻는다
오래 한 화장이 지워지면서
아내가 보석달로 떠오른다

하지만 이 시들이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순간 이 시인들의 삶 역시 돈으로 살 수 있는 것FOR SALE이 되고 만다.

무서워라,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시詩라는 것이 존재할 이유는 없다...

2

뿐만 아니라, 시가 멋대로 바뀌어 회자된다면 장기적으로 상당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먼저 웹의 어떤 텍스트도 확정된 텍스트로 믿을 수 없고, 어떤 작가도 자신의 글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

시의 내용을 조금 바꾸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항변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확실히 세계에서 닳고 닳은 언어라는 질료는 다루기가 쉽지 않다. 다 빈치 작품 「모나리자」에 멋대로 덧칠을 해서 웹에 게시하면서 내가 무얼 잘못했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아니, 그렇다면 또 뒤샹의 「L.H.O.O.Q」에 대해 말할 사람이 있으려나. 모든 문학사와 미술사를 다시 써야 할 판이다.)

3

아니면 여기서 '저자의 죽음La mort de l'auteur'에 대해서 말해야 할까? 놀랍게도 텍스트가 마구 바뀌고 시의 형상이 훼손되는 그 가운데에서도 저자는 죽지 않았다. 저자의 이름은 훼손된 텍스트 앞에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가끔 도종환을 도종완으로 잘못 쓰는 경우는 있다.) 그 말은 웹에 올려진 텍스트가 저자의 권위에 호소하는 것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저자의 권위를 빌어 글을 쓰는 것이나 그 씌어진 글을 우리는 위작僞作이라고 부른다.

롤랑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을 말했을 때 그는 '작품에서 텍스트로de l'œuvre au texte'를 말했다. 글의 주인은 저자가 아니라 독자라고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본다. 하지만 '소비'되는 글들은 여전히 텍스트가 아니라 작품으로 기능하고 있다. 바르트는 "저자는 합리적인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웹에서 떠돌아다니는 훼손된 텍스트들은 철저한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Posted by 엔디
“미터법, 국제적 추세지만 안쓰면 벌 주겠다는 건 곤란”

1 전통과 문화의 중심부/주변부

- 평坪이라는 단위는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한국의 전통적인 넓이 단위가 아니다. 평은 일본에서 들여온 것인데, 현재는 일본에서도 평 대신 제곱미터를 쓰고 있다. (본래 이런 것은 문화의 중심부에서보다 문화의 변두리에서 더 소중히 여겨지는 것이다.)

2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 평이 인간의 키를 감안한 휴먼 척도라고? 그런 인식은 곧장 180센티미터가 안 되거나, 그보다 더 큰 사람들을 싸그리 무시한 인식이 되고 만다. 또한 그런 인식대로라면 사람의 키를 잴 때도 센티미터보다는 척尺을 써야 옳다는 결론이 나온다...

3 미국 따라하기

- 옷 치수나 여자들의 신체 치수는 주로 인치를 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미국 따라하기가 아닐까 한다.

4 국제적 추세

- 국제적 추세니까 우리도 도리없이 좇아가자는 뜻이 아니다. 도량형은 사실 정확하기만 하면 무얼 쓰든 관계없지만, 통일되지 않은 도량형은 무의미하므로 국제적으로 많이 인정받는 쪽으로 움직이는 게 옳다는 뜻이다.

5 도량형에 맞추어

현재의 설계를 그대로 하여 25평짜리 건물을 짓고, 표기를 82.644625 m2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물론 그렇게 딱 떨어지는 평 단위 크기로 집을 짓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보다 82제곱미터나 83제곱미터로 애초부터 설계를 하는 것이 좋다.
Posted by 엔디
초등교사 임용시험 부산 합격자 100명 중 97명이 여선생님 [중앙일보]

1
도대체 '여성적인 것'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가끔 종잡을 수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남자들은 논리에 강하고 여자들은 창의적이어서 21세기는 여성에게 유리하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남자들은 창조적인 일을 잘하고, 여자들은 꼼꼼해서 암기하는 데 능하다고 한다. 과연 '여성적인 것'이라는 것은 있는 것일까? 21세기는 여성의 시대니, 앞으로는 여성적인 것이 중요해지는 시대가 온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사실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들이 말하는 여성에게 유리한 상황이 생물학적으로 규명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임용고시에서 여성 합격자가 많은 이유가, 시험이 여성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라는 말은 따라서 아무 근거가 없는 말이다. 그런 주장을 하려면 실제 남성과 여성의 좌/우뇌 구조가 충분히 신뢰할 수 있을 만큼 규명이 되어야 하고, 사회의 다른 분야도 교사 만큼 양성에게 기회가 균등한지도 증명이 되어야 한다. 또한 사회가 여성의 직업으로 어떤 일을 선호하는지도 규명되어야 한다.

전문직의 경우, 아직도 여성들이 도전하기에는 사회적으로 개방되어 있지 않다. 대기업 등 월급쟁이 직장인이 되려고 해도 입사 과정에서, 그리고 회사 생활을 하면서 충분히 양성이 평등한 대우를 받는다고 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좋은 신부감의 조건 가운데 하나로 '학교 선생님'을 꼽는 세태도 무시할 수 없다(좋은 신랑감의 조건으로 '학교 선생님'을 꼽지는 않는다).

나는 바로 그런 요인들 때문에 임용고시 여성 합격자가 더 많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성 합격자가 더 많은 원인이, "여성이 꼼꼼하여 암기 과목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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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적인 것'이란, 그러므로 사실 실체 없는 것이다. '여성적인 것'은 꼼꼼한 것을 포함하므로 그들이 암기과목을 잘 보고, 그래서 임용고시에 유리하다고 하는 논리를 인정한다면, 이 논리도 인정해야 한다: '여성적인 것'은 꼼꼼한 것을 포함하므로 그들이 학생들을 꼼꼼하고 섬세하게 잘 가르치고, 그래서 훌륭한 교사의 자질 가운데 한 가지다. 두 논리는 모두 대전제가 '확실하지 않으므로 성립하는지 알 수 없다.'

3
임용고시가 암기 위주로 치러지는 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잘못인 것이 아니라, 암기 위주로 치러서는 진정한 교사의 자질을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암기 위주'의 시험을 통해 진정한 교사의 자질을 평가할 수 있다면 임용고시 합격자가 여성 100%라도 해당 시험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임용고시 합격자 97%가 여성'이라는 식의 제목은 논점을 해치고 있다.
Posted by 엔디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들…’ - 조선닷컴:

도우미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노래방 도우미'가 망쳐놓았다,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끔 말은 가능한 한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는 동의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언어심미주의자가 망설일 분명한 이유가 있다: 도우미의 '출신성분'이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 도우미가 가장 처음 쓰인 것은 1993년, 대전 국제박람회EXPO 때다. 박람회 안내요원을 20대 여성들로 뽑아, 그들을 '도우미'로 이름했던 것이다. 선진국들 사이에서는 올림픽만큼이나 중요하고 인기있는 행사라고 언론에서 난리를 치던 엑스포였기 때문에, 도우미라는 이름도 쉽게 대중들에게 각인되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당시의 광고나 팸플릿을 조금만 관심있게 들여다 보았다면 '도우미'의 출신성분이 그리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1
무엇보다 '도우미'는 사람들이 흔히 짐작하는 대로 '도움-이' → '도우미'의 짜임이 아니다: '도우미'는 '도움을 주는 우아한 미인'의 줄임말이다. 사소한 것 같아 보이지만, 이것은 '도우미'가 그 말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결점을 보여준다.

나는 '도우미'가 남성을 지칭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노래방 도우미도 마사지 도우미도 여성이고, '가정부'나 '파출부' 대신 쓰이는 '도우미 아줌마'도--'아줌마'에서 알 수 있듯이--여성이다. 맨 처음의 쓰임인 박람회 도우미도 여성이다. 그 비밀은 '도우미'가 본질적으로 '우아한 미인'이기 때문이다.

'미인美人'은 한자로만 보면 양성의 구분이 없지만, 국어사전을 뒤져보면 대개 여성을 지칭한다고 되어 있다. '우아優雅'하다는 가치도 대개 여성에게 요구되는 가치이다. 아름다움이나 우아함 자체가 대개 여성을 평가하는 기준이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인데, 이 두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낱말이 '도우미'인 것이다.

'도움을 주는' 이가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사실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도움을 받는' 이는 남성일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했다는 혐의를 품게 한다. 왜냐하면 '도우미'라는 말 속에는, 남성은 도우미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논리가 품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서 박람회 도우미에게 도움을 받은 여성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 역할 구별의 전통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못된다.

도움을 받는 남성과 도움을 주는 여성이라는 사회적 이분법은, 옹호론자들이 '가장 오래된 직업'이라고 입을 모으는 매춘賣春 또는 유사 매춘의 연상을 가능케 한다. 사실 이는 단순한 연상 작용이 아니라 필연적인 귀결인데, '우아한 미인'이라는 가치가 남성으로부터 여성에게로 강제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하에서의 여성의 미덕이기 때문이다. 또 '우아한 미인'이라는 가치는 무엇보다 보여지는visible 물리적인physique 가치이며, 따라서 젊고 예쁜 노래방 도우미의 눈에 띄는visible 육체적physique 가치로 전환되기가 어렵지 않은 것이다.

2
'도우미'는 일부 국어순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순우리말이 아니다. '순純우리말' 자체도 순우리말이 아닌 현실 속에서, 순우리말이라는 것이 대체 무슨 가치를 갖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사소한 오류는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토박이말이 보다 정겹고 아름답다는 말에 나는 광범위하게 동의하지만, 억지로 만든 순우리말에는 오히려 거부감이 먼저 든다. '올인'을 '다걸기'로 바꾼다거나, '웰빙'을 '참살이'로 바꾸는 것에 대체 누가 동의를 하겠는가. 더욱이 '다걸기'는 '올인'보다 아름답지 못하며, '참살이'는 '웰빙'의 뜻을--그 부정적인 뜻까지도--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니 도대체 쓸 일이 없는 낱말인 것이다.

국어순수주의자들이 성공사례로 자주 드는 것이 '도우미'이다. 하지만 '도움을 주는 우아한 미인'이라는 말을 들여다보면 '우아優雅'와 '미인美人'은 한자말이다.

3
백 보 양보하여, '도우미'의 통시적 분석을 포기하고 공시적으로 '도움-이'라고만 분석하는 데 동의한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어째서 '도움이'가 아니라 '도우미'인가 하는 점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이'는 뒷가지接尾詞가 아니라 안옹근이름씨依存名詞다. 이 말은 '이'는 이름씨名詞의 뒤에 붙는 것이 아니라 매김씨冠形詞 뒤에 붙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들음이'가 아니라 '들은 이/듣는 이/들을 이'가 맞고, '먹음이'가 아니라 '먹은 이/먹는 이/먹을 이'가 맞다. 이때 자주 쓰여 굳은 매김씨-이름씨의 결합은 하나의 낱말로 인정할 수 있다. 가령 '지은이'나 '엮은이', '펴낸이' 등이다. 이 세 낱말은 모두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림말로 등재된 것인데, 솜솜 뜯어보면 모두 '매김씨-이'의 형태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우리말에는 움직씨動詞의 줄기語幹에 '이'가 붙는 경우가 있는데 '더듬이', '앓이', '지짐이' 등이 그 예이다. 이 경우는 반드시 '~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도와 주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순우리말을 원하는 사람은 '돕는이'나 '돕이'라는 말을 써야 마땅할 것이다.

('절름발이'나 '애꾸눈이'처럼 이름씨 뒤에 '이'가 붙은 것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움직씨 '돕다'가 변하여 '도움'이라는 이름씨가 된 경우와는 차이가 없지 않다. 이런 차이를 무시하고 '이름씨-이'의 형태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도우미'가 아니라 '도움이'가 되어야 한다.)


도우미는 몇 번을 곱씹어봐도 아름답지 않은 말이다. 내 생각으로는 아주 없어져야 할 말이다. '노래방 도우미'는 '도우미라는 아름다운 낱말'의 오용誤用이 아니라 그 말이 본래 가진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말일 뿐이다.

위와 같은 긴 글보다 한 마디 말이 더 눈에 들어온다면: '도움이'가 아니라 '도우미'라고 굳이 표기한 이유를 생각해보면 된다. '미'가 '美'를 곧바로 환기시키지 않는가 말이다. (맨 위에 링크한 조선일보 기사 제목도 참조하자: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들.)
Posted by 엔디
"'공산당이 싫어요' 기사는 가필한 것"

이승복이 공산당에게 죽으면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했느냐 안 했느냐 하는 진위 여부가 지금까지도 논의 대상인가보다. 최근 대법원 확정 판결이 있었고, 조선일보는 신이 나서 판결문을 실었다. 일부 언론은 또한 이승복 사건이 날조 내지는 가필된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국가적으로 유명해진 사건이기 때문에, 이를 제목으로 뽑으면 독자들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라는 예측도 이 사건을 지속적으로 이슈화시키는 데 한몫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나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는지 외치지 않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우리가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날조된 것이라면, 조선일보가 지탄받아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좀더 깊이 생각하면, 그 책임이 조선일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기사가 인기를 끌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사회는 이미 정상적인 사회가 아닌 것이다. 국가라는 시스템이, 아니 그보다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한 어린이의 생명보다 중요하다는 암묵적 동의가 국가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반공을 기치로 내세운 당시 독재 정권은 이를 통해 효과적으로 시민들을 '국민'들로 만들 수 있었다. 이는 일종의 반공 의식화 교육이다. 신문과 방송의 통제를 통한 간접 교육 말이다. 이와 더불어, 각급 학교에서는 '이승복 어린이'를 기념하는 웅변 대회, 독후감 대회, 포스터 그리기 대회 등을 지속적으로 개최했으니, 이는 보다 직접적인 교육이라 할 만하다.

그럼,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정말 외쳤다면 우리가 다르게 생각할수 있을까? 과연한 어린이가 죽음을 앞두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이데올로기적 발언을 하는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일까?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린이들까지 반공 이데올로기로 철저히 무장된 사회는 결코 개인을 존중하는 사회가 아니며, 개인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는 결코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이데올로기로 똘똘 뭉친 전체주의 사상을 어린이에게까지 주입하는 사회에서만 어린이가 그런 이데올로기적 외침을 내뱉을 수 있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북한에서도 자아 비판할 때 빠지지 않는 항목이 '개인주의'와 '소부르주아적 근성'이라고 한다. 남북이 어쩌면 이렇게 똑같이 전체주의적인가. (그 이유는 20세기 냉전은 일종의 총력전total war이었고, 그 가장 직접적인 대치가 이루어진 곳이 한반도였다는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간과하기 쉬운 것은, 그들이 줄기차게 경고해 온 '공비'가 내려와 어린이를 비롯한 가족을 모두 몰살시킬 동안, 군과 경찰은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알려진 이승복 사건이 진실이라면, 그 책임은 일차적으로 잘못된 교육에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경에게도 있다. 음모론적으로 사고한다면,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사실을 은폐하거나 적어도 그쪽에 주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이승복을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것 역시 음모론 자체의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아무도 그 사건에 대해 책임지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조선일보에서는 보도된 사건이 진실 그대로라고 주장한다. (소송까지 거쳤다.) 그것이 단지 언론으로서 '진실'을 그대로 전달한다는 자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직업윤리상 당연한 항변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해당 사안에 대해 때로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볼 때, 조선일보가 단지 객관적인 사실 전달만을 위해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조선일보는,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좌경화' 되어가는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해당 사안을 다시 이슈화시키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바라는 세상이 한 어린이가 죽음을 앞두고 이데올로기적 발언을 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나는 그 조선일보라는 언론을 더이상 신뢰할 수 없다.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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