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예술작품이 갖추고 있어야할 여러 조건 중에는 새로움도 포함된다. 탄탄한 줄거리나 재미있는 볼거리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이 전부는 아니다.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좋은 예술작품이 되기 어려운 까닭은 여기에 있다.

작품의 전체적인 틀은 성장소설Bildungsroman의 원형을 갖고 있다. '견주堅柱' 혹은 '견자犬子'가 서자로서의 불만을 품고 있다가 어떻게 당대 최고의 칼잡이가 되고, 또 거기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이 만화가 그리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전통적 메타포들이 동원되었다. 메타포들이 이 작품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엄청나다. 메타포를 빼면 짧게 요약한 줄거리에 불과할 정도다. 이를테면 '방짜'의 메타포가 그렇다.

방짜 메타포는 견자가 스승 황정학과 함께 처음으로 간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황정학은 견자에게 방짜의 메타포를 이해하라, 고 명령한다. 그리고 견자가 그것을 진실로 깨닫는 부분은 마지막 결투에서이다. 또는 '구르믈 버서난 달'의 메타포가 그렇다. 그것이 다시 '한계'의 메타포로 바뀌는 과정이 작품의 뼈대를 이룬다.

문제는 그런 메타포들이, 그리고 그 과정들이 지나치게 상투적이라는 데 있다. 눈 멀쩡히 뜬 사람을 '장님'이라고 하는 것이나, 어디어디에서 자신을 찾으라는 명령이나, 스승의 죽음의 방식이나 시기도 여느 무협지에나 다 있는 것을 만화로 끌어왔을 뿐이다.

어느 대학 만화학과 교수는 책 뒤에 라깡이나 알뛰쎄르를 인용하며 작품에 칭찬의 침을 바르고 있지만, 그가 인용한 대로의 라깡과 알뛰쎄르라면 이 작품 아니라 어느 곳에나 있는 라깡과 알뛰쎄르다. 더구나 이 작품에서 말하는 한계는 그가 지적한 대로 "승리는 눈물이며 더 커져버린 분노일 뿐"인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오히려 '나를 찾는 것'을 말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계는 알고보면 자유'라는 식의 안이한 상상력도 이 작품의 큰 결점으로 그대로 남는다. 더구나 그 결론도 결국 메타포로 일구어낸 결론이기 때문에 정치精緻하지 않다. 그래서 이 작품의 큰 뼈대는 결국 신비주의로 남는다. 좀더 나아가자면, 일종의 '아는 체'고 '겉멋'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아무 것도 꿰뚫지 못하면서 꿰뚫은 체하는 만화다. 삶의 계란을 품을 수 없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1
박흥용 글 그림/바다출판사

Posted by 엔디
프라도의 『섬』은 특이한 만화다. 대부분의 만화는 몰입없이 빨리 읽을 수 있도록 비교적 단순한 서사구조récit를 가지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만화들은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갖지 못하고 내용으로 환원되기도 한다. 그런 만화들의 경우에는, 한 편의 작품이 그 줄거리로 대체되어도 큰 문제가 없어보인다.

『섬』은 독자의 몰입을 요구한다. 독자는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려는 바가 무엇인가, 이 작품이 왜 이렇게 구성되었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하고, 종국에는 작품에 깊이 몰입하게 된다. 퍽 짧은 이 책이 두번씩 세번씩 읽히는 이유도 그것이고, 시일이 지난 뒤에도 다시 꺼내읽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스콧 매클루드는 그의 『만화의 이해』에서 '홈통'의 역할을 강조하며, 바로 그곳이 독자의 상상력이 개입할 공간이라고 말했다. 그림의 칸과 칸이 홈통을 통해서 분리되면서 그 사이의 시간이나 사건이나, 혹은 무엇이든지 독자의 상상력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영상예술과 만화의 차이는 바로 거기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프라도는 그 '홈통'의 영역을 서사구조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켰다. 『섬』의 서두에는 의미심장한 보르헤스의 글이 인용되어 있다.

"그날 밤 나는 비오이 까사레스와 같이 식사를 하면서 화자話者가 사실을 생략하거나 왜곡시키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극소수의 독자만이 잔인하거나 혹은 평범한 현실을 발견하게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될 일인칭 소설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놓고 밤늦게까지 오랫동안 논쟁했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뜰룅,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시간이나 사건의 역전, 시점視點의 교묘한 이동과 충격적인 사건의 삽입을 통해서 독자에게 다가오는 이 만화가 갖는 여운은 바로 그런 점에서 계속해서 읽고 싶은 만화라고 하겠다. 좀더 자세한 분석을 위해서는 작품을 좀더 꼼꼼히 그리고 여러차례 읽어봐야 하겠지만, '분필선Trazo de tiza'이라는 원제가 작품의 의미를 좀더 밝혀줄 지도 모른다는 점은 지적할만한 사항이다. 그것은 기이한 섬의 모양을 지칭할 수도 있고, 흔히 선적으로 상상하는 시간을 지칭할 수도 있다.

서사라는 것이 본래 시간에 관심갖는 것이긴 하지만, 그때의 시간은 흔히 시간을 단선적으로 흐른다고 상상하는 한에서의 정의인 것이다. 이야기histoire를 어떻게 서사récit로 풀어내는가는 그런 상상력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므로,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꿀 필요가 생겨나는 것이다. 3장과 7장章은 바로 그런 점에서 중요한 장이다. 선입견을 버리고 차근차근 읽는 독서 혹은 독화讀畵가 필요하다. '처음'이라는 단어나 '내년'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는 이 책 속에서는 희석되어 사라져버리고 만다.

다시 찬찬히 생각해보자. 독자는 이 책을 덮지 못하고, 첫부분으로 돌아가 다시금 읽게 된다. 책을 다시 읽는 행위가 여기서 강조되어야 한다. 시간이나 사건의 역전은 책을 다시 읽음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프라도가 "나는 아예 처음부터 그들로 하여금 만화를 그냥 덮어버리지 못하게 하는 재능이 내게는 없는 게 아닐까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이 만화는 "그냥 덮어버"려서는 안 되는 만화다. 작가는 공공연하게 이 만화책을 다시 읽도록 만들었으며, 그것이 시간의 의미를 밝혀준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만화가 짧은 것도 이유의 하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책livre을 다시 읽는 것은 하나의 삶을 다시 사는vivre 것이다. 부활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묻는 사두개인들의 질문보다, 이것은 더욱 진실한, 실재하는 사실이다. 만화라는 형식을 다시 생각해보면 각각의 그림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아주 사소한 진리를 우리는 다시 한 번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미겔란쏘 프라도 지음, 이재형 옮김/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Posted by 엔디
TAG 만화, 서평
"만화를 왜 읽는가" 하는 것은 어리석은 물음이다. 묻는이가 만화를 한 번도 읽지 않았다면 모르되 그도 만화가 재미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화가 왜 재미있는가' 하는 물음은 쉽게 대답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프랑스 만화 '아스테릭스'에는 유쾌한 재미가 있다. 그 재미는, 우데르조의 표현대로라면, 대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데서 얻어지는 재미이다. 누가 만화가 상상력을 저하시킨다고 했던가? '아스테릭스'의 즐거운, 뒤집힌 상상력은 창조적 사고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아스테릭스'의 특징은 무엇보다 명언과 속담과 관련된 언어유희와 역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행하는 패러디, 그리고 캐릭터 강한 인물들의 반복되는 행동에 있다고 생각된다. "'아스테릭스'가 왜 재미있는가" 에 대한 답은 이 세 가지 특징이 모두 대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데서 얻어진 결과라는 것을 생각하면 자명해질 것이다.


본래 프랑스인들은 유머와 기지, 위트가 풍부하다고 전해진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유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말[言語]이라는 훌륭한 도구가 있다.

프랑스인들은 같은 회문回文palindrome이나 <나의 첫 번째 것은 수다스럽습니다. 나의 두 번째 것은 새입니다. 나의 세 번째 것은 까페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셋을 모두 합치면 과자가 됩니다. 나는 무엇일까요?>하는 샤라드 게임 등과 같은 언어유희를 즐긴다. 특히 샤라드 게임은 『글래디에이터가 된 아스테릭스』편에 그대로 실려 있다. <작을래의 반대. 여동생이 나보고 이거!, 그리고 줄리어스 카이사르는 이것을 아주 좋아해. 이것은 뭐게?>

그 밖에 <거 알렉상드랭을 읊는군.>에서 볼 수 있는 동음이의어pun를 이용한 언어유희도 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아스테릭스'에서의 언어유희의 백미는 속담과 명언을 이용한 언어유희라 할 수 있다. 그런 언어유희는 '아스테릭스' 시리즈의 첫 페이지에서부터 시작된다. 라는 라틴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병사(<무슨 소리야?>)를 그려내면서 <라틴어를 잊어버리다y perdre son latin.>는 불어속담의 기원을 나름의 유머로 해석해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나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Jacta Est!>같은 표현은 1, 3권에서만 각각 두 번씩 인용되면서 그 말의 무거운 역사성을 털어버리고 일상성을 획득하기도 한다. 심각한 말을 천박하고 풍자성짙게 패러디하면서 대상을 희화화시키는 것이다. 마치 60년대 초 우리나라의 "국민이 원한다면, 내가 한 잔 사지."하는 유행어처럼 말이다.

또 <괜찮군! 그러나 맨날 옆모습만 보는 게 지긋지긋해! 다른 각도 없나? / 하지만 현대미술은…>하는 클레오파트라와 이집트 화가의 대화는 고대(?) 이집트 미술의 '정면성의 원리'를 한 컷으로 설명하면서 유머감각을 발휘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언어유희들은 고대를 무대로 하여 진행되는 '아스테릭스'의 적극적인 역사 개입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만화 '아스테릭스'는 고대의 문명을 그대로 재현representation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스테릭스' 자체가 새로운 문화의 표현presentation이기도 하다. 때문에 '아스테릭스'의 수많은 텍스트들이 앞서의 명언이나 속담의 패러디텍스트로 기능하는 것으로, 그것은 또한 '아스테릭스' 내에서 새로운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상호텍스트성intertexuality을 환기하고 있기도 하다.

가령 <피라미드 꼭대기에서는 2000년의 세월이 우릴 내려다보고 있다!>는 파노라믹스 사제의 말은 사실 나폴레옹의 명언에 대한 패러디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만화의 배경은 나폴레옹 시대보다 2000년이나 앞선 것이므로 만화의 서술을 따라간다면 나폴레옹이 파노라믹스 사제의 말을 패러디하고 있는 것이 된다. '명언'과 '명언의 패러디'가 상호텍스트성을 가지고 서로의 텍스트를 전경화시키고 대화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만화의 대전제마저도 허구이다. <때는 기원전 50년, 로마군이 골족의 땅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 …하지만 모두를? 천만에! 못 말리는 골족 전사들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 하나만은 아직도 침략자 로마군을 향해 끈질기게 저항하고 있었으니[…]>하는 시리즈 각 권의 서두는 거짓이다. 실제로는 골족의 땅 전체가 지배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만화를 읽는 누가 작은 마을 하나가 남아 끈질기게 저항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있을까. 우데르조의 표현대로 '아스테릭스'는 고대 역사의 한 패러디―'아스테릭스' 버전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오벨릭스가 스핑크스의 코를 부숴뜨리는 장면도 그 유머러스한 패러디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스핑크스의 코를 오벨릭스가 망가뜨렸을 리는 없다. 오벨릭스는 허구의 인물이니까. 하지만 『아스테릭스, 클레오파트라를 만나다』를 읽고 난 독자들은 스핑크스의 코를 오벨릭스가 부숴뜨렸다는 유머를 유머러스하게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역사에의 개입을 통한 패러디는 등장인물들의 강한 캐릭터에 의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스테릭스'의 등장인물들은 침략자 로마군과 싸우는 전사의 이미지에 걸맞는 캐릭터는 갖고 있지 않다. 재능이 의심스러운 음유시인 아쉬랑스투릭스를 비롯하여 먹을 것만 찾고 말썽만 부리는 오벨릭스는 물론이고 가장 근엄해야 할 사제도 로마군을 속여 곯려주는데 일조하기?하고(<딸기를 구해오라고 하신 것도 압권입니다>), 위풍당당한, 마을의 우두머리 아브라라쿠르식스마저 '하늘이 무너질까'하는 기우杞憂에 두려워한다. 주인공 아스테릭스도 안마사를 때리는 등의 황당한 일을 저지른다.

그러나 이런 모자란 것 같은 캐릭터들이 만화 속에서는 오히려 효과적으로 기능하여 줄거리를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앞서 예로 든 스핑크스의 코가 부서진 이야기는 오벨릭스의 악동같은 캐릭터에 의존하고 있는 패러디이다. 또 아쉬랑스투릭스는 재능이 의심스러운 음유시인이지만 『글래디에이터가 된 아스테릭스』는 그 아쉬랑스투릭스가 잡혀감으로써 벌어지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캐릭터들은 우리가 전사라는 데서 상정하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들이다. 아마도 이런 캐릭터들이 등장한 이유는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는' 데서 얻어지는 재미때문일 것이다. 우데르조 스스로 유머작가humoritste는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만화는 재미있다"는 명제를 반박할 근거를 우리는 여럿 가지고 있다. 흔히 '교양만화'라는 면죄부 하에 만들어지는 유익하지만 재미없는 만화를 이미 몇 번 보아왔으니까. 그렇다면 이쯤에서 명제를 바꿔보면 어떨까? "만화는 재미있어야 한다."

'아스테릭스'는 유익한 교양에 대해 지시적인 설명을 그치고, 대신 그것을 배경으로 나름의 역사와 나름의 말, 나름의 캐릭터를 그려내고 있다. '아스테릭스'가 여타의 '교양만화'와 대비되는 점은 바로 그것이다. 만화 '아스테릭스'는 가르치려는 만화가 아니라 즐거움과 재미를 위한 만화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창조적인 상상력에서 비롯된 즐거움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지. 심각한 표정과 심각한 말투를 하고 등장하는 억압기의 문학작품들은 식상함과 지겨움만을 줄 뿐인데, 이쯤에서 좀 다르게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지는 않을지. 새로운 문화의 제시presentation가 나올때는 되지 않았는지.

*문학과지성사의 '아스테릭스' 독후감공모에 응모한 글
일반인부문 당선


골족의 영웅 아스테릭스
르네 고시니 글, 알베르 우데르조 그림/문학과지성사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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