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용 선생이 옮긴 『삼국지 연의』를 사러 헌책방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보니 나올 당시 신문에서 꽤 많이 떠들어댄 것 같은데, 왜 내 기억속엔 남아있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몰랐던 처음에는 그저 책꽂이에 꽂힌 걸 보고 제목이 좋았고, 꺼내서 겉을 살펴볼 때는 책의 디자인과 장정이 마음에 들었다. 문학동네나 민음사에서 나오는 하드커버 시집과는 달리 품격이 있어보였다. 표지에 다른 유치한 디자인 없이 시를 넣어, 그 시만으로 표지가 되게 하는 것도 좋았고, 그걸 제목 그대로 수직성있게 배열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무턱대고 살 수는 없었다. 책장을 넘겨 몇 편의 시를 보았다. 느낌이라고 하면 너무 추상적이지만, '흉내내는' 시인은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늦가을 투명한 바람 위에
탱잣빛 색종이 조각을
수없이 뿌리던

먼 들녘 논둑에
쓸쓸한 눈부심처럼 서 있는
한 그루 미루나무 밑을
수만 톤의 지하수가 흐르고 있다.

무너지기 직전의 눈사태 같은
위기의 눈은 그것을 본다.

그것을 본 시인이 죽었다.

-「한 시인의 데스 마스크」부분, 61쪽.

"그것을 본 시인이 죽었다." 그 시인이 박남수 시인일 것 같다는 추측을 한 것은 나중에 통독을 하면서 앞뒤의 두서너 시를 함께 읽으며 안 것이지만, 저 문장 하나만으로도 나락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책 상태도 거의 새책같은 상태라 헌책방 아저씨께 함께 넣어달라고 했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부터 바로 통독을 시작했다. '포스트-잍'을 붙이려고 하다가 시집의 분위기를 망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포스트-잍'의 색도 색이지만, 그렇게 붙이다간 책 전체를 붙여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는 내 성벽을 공략하고 있었다. 조금씩 성벽은 허물어져갔다.

길은 산자락을 따라 시내처럼 흐르고 있었다. 벼랑은 잘린 언덕줄기의 속살이었다. 통곡의 벽을 바라보듯 나는 벼랑 앞에 섰다. 흑표범의 눈처럼 나를 노려보고 있는 지층. 바위는 조용히 기억하고 있었다. 쓰러지는 양치식물의 숲. 아우성치는 맘모스의 마지막 울음소리. 쌓인 시간의 무게 밑에서 목숨은 진한 원유로 일렁이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바위의 적의를 느꼈다. 바위는 기다리고 있다, 인류의 멸망을. 찢어진 바위틈에서 갈맷빛 물이 솟구쳐 바다가 되고 부스러진 스스로의 피부에서 다시 풀밭이 일어서서 눈부신 고함을 지르며 연둣빛 바람을 흔드는 부활의 순간을.

-「바위의 적의」全文, 14쪽.

시집의 두번째 시를 읽고서 나는 오래 지체하였다. 길다랗게 여백에 느낌표를 해두고 다시 읽었다. 또 다시 읽었다. "갑자기 나는 바위의 적의를 느꼈다." 이렇게 절묘하게 '갑자기'라는 부사가 들어간 문장을 나는 알지 못한다. '갑자기'는 본래 뜻이 그런지라 뜻밖의 순간에 급작스레 등장하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갑자기'의 앞과 그 뒤는 상당한 비약이 존재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갑자기"가 일련의 단계를 거쳐 제 자리에 올라앉아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양치식물의 숲.", "…마지막 울음소리." 처럼 명사로 끝맺은 문장들이 "시내처럼 흐르"며 읽히는 데에 방해가 되기도 하고 고등학생 습작시인같은 느낌을 준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 명사들은 파문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일렁인다는 것은 분명 파동의 이미지를 주고, 파동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기가 쉽다. 즉, 화자가 느낀 "바위의 적의"는 그 파동에 동화되어가는 화자의 허를 찌르면서도 자연스러운 궤도에 편입되어 있다. 때문에 여기에서의 "갑자기"는 뜻밖의 등장이면서도 비약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 파동은 그렇게 나의 허도 찔렀다. 만물에 생명이 있음을 나는 한순간 깨달았다. 잊어버렸다. 또 깨달았다. 잊어버렸다. 시가 자꾸 내 감각의 끄트머리를 건드렸다.

비가 빛나기 위하여 포도가 있다. 미로처럼 이어지는 돌의 포도. 원수의 뒷모습처럼 빛나는 비. 나의 발자국도 비에 젖는다.

나의 쓸쓸함은 카를교 난간에 기대고 만다. 아득한 수면을 본다. 저무는 흐름 위에 몸을 던지는 비,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물안개 같다. 카프카의 불안과 외로움이 잠들어 있는 유대인 묘지에는 가보지 않았다. 이마 밑에서 기이하게 빛나는 눈빛은 마이즈르 거리 그의 생가 벽면에서 보았다.

-「프라하 일기」부분, 27쪽.

카프카의,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흑백 사진이 떠올랐다. 비는 "저무는 흐름 위에 몸을 던"져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흐름"은 무엇일까. 포도는 鋪道일 것이다. 미로迷路인 포도. 길은 유사有辭이래로 오랫동안 삶을 지칭하였다. 비올 것 같은 카프카와 그의 묘지, 그리고 비에 젖는 화자의 발자국이 지속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죽음이다.

그런 죽음을 알리는 이미지는 시집에 줄기차게 제시되어 있다. 그는 죽음과 시적으로 동화된다. 박남수 시인의 죽음을 쓴 것으로 짐작되는 시가 「새」(55-56), 「하늘」(57-59), 「데스 마스크」(60), 「한 시인의 데스 마스크」(61-63), 「내면의 바다」(64), 「독」(65) 등 6편 이상이다. 시인의 죽음에 당면해 한두 편 정도의 시를 쓰는 것은 관례이기도 하고 그 심정도 이해가 된다. 이 여섯편의 시들은 그럼 어떻게 된 것일까. 그가 자신을 '죽음'과 직접적으로 관계시키고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둘은 죽음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시의 등」(71)에서는 아예 "먼 섬나라에 사는 사람의 죽음이 나의 일부를 죽인다"고 선언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것은 정지용의 "아아 山을 돌아 / 멫 萬里 물을건너 / 南쪽 나라 빠나나가 / 이땅에 잇는사람들의 입에 씹히네"(「파충류동물爬蟲類動物」)와 비슷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정반대를 다루고 있다.

그런 죽음에의 동화는 그의 시를 시로 만들었다. 그는 "언어의 그리움은 / 섬처럼 외롭다. / 언어는 침묵을 그리워한다."(「오베르의 들녘」, 83)라고 적고 있다. 사실 시란 가장 구차한 삶의 모습이다. 끊임없이 죽음을 시쓰려고 하지만 살아있지 않으면 시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는 절대로 죽음을 그대로 설명할 수 없다. 시의 역할은 그게 아니다. 시가 설명한다면, 이미 시가 아니다.

안개 속에서 사람들은 형용사로 이야기한다. 요원들의 암호처럼 그것은 아름답다. 가령 A가 '쓸쓸한' 하면 B가 '부드러운'이라고 말한다. 이따금 섞이는 프랑스 말 비음같은 우아한 어법으로 메시지를 교환한다. 물론 알타이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언어 체계다. 목적을 위하여 혹사된 언어는 이제 피로하다. 반란하는 언어는 물푸레나무 향 같은, 들길 연둣빛 쑥내 같은, 의미와 은유를 떠난 새로운 시스템이다.

-「안개를 위한 에스키스」부분, 117쪽.

시의 언어는 의미로부터 도피하여 "메시지를 교환한다." 시의 언어는 의미와 조우遭遇해서도 안 된다. 의미가 시퍼렇게 살아있으면 시는 죽는다. "프랑스 말 비음"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에서 언어는 의미보다도 음성에 더 바탕을 두고 있다. "쓸쓸한"이나 "부드러운"도 마찬가지다. 우리말로 두 단어는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순수하게 음성만을 따져보아도 어딘지 "쓸쓸한", 어딘지 "부드러운"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시집을 통독해보라. 어딘지 "죽.음."이 전달되지 않는가?

잡목림 마른 풀섶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낸 늙은 엽사는 흰 눈가루를 털며 말했다.

―상처입은 사슴이 가장 높이 뛴다.

밤새 모국어의 가시에 상처입은 나는 흰 눈 위에 핏자국을 남긴 사슴의 최후의 점프를 생각하며 걸었다. 바다처럼 번득이는 언어의 슬픈 물빛을 찾아 지팡이를 짚고 걸었다. 아린 혼의 무게를 부드럽게 짚어주는 은빛 지팡이. 피는 붉은 것만은 아니다. 피는 울음처럼 맑을 수 있다. 흰 꽃잎이 눈송이처럼 무너지고 있는 눈부신 길을 걷는 나는 나의 상처다.

-「상처」全文, 129쪽.

그렇다면 그의 시는 죽음으로 가는 길목에서 쓴 '생채기'일 것이다. 붉은 피가 엉겨붙어 지저분한 상처가 아니라 맑디 맑은 사슴의 눈같은 상처. 그러고보면, 이 시집의 길 맨 처음에 만났던 바위의 메시지가 바로 상처이고 죽음이 아니었던가.



보유補遺

이 시집에는 각주가 없다. 요즘 시집을 읽으면 각주 표시 때문에 리듬과 흐름이 끊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리듬과 흐름의 단절'을 의도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각주는 자제해야 옳다. 이 시집에는 다른 시인들같으면 각주를 달았을 내용까지도 시 속에 포섭하고 있다. 가령,

『부란의 꽃』이란
성녀 리도비나에 대한 책이름이다.
사후에 육체가 젊었을 때와 같은
싱싱함과 미모에 돌아간 성자
열두 명이 이 책자에
열기되어 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여섯 모의 무구한 결정체로 되돌아간
진흙을 생각했다.

-「진흙에 대하여2」부분, 103쪽.

와 같은 부분은 웬만한 시인 같으면 부제로 『부란의 꽃』을 달고 2-6행 부분을 각주로 돌리고서 "나는 여섯 모의 무구한 결정체로 되돌아간-"으로 시를 시작할 것이다. 이것은

바깥을 보겠다는 의지가
뇌신경 세포 단말을
눈으로 만들었다.

신경생물학자의
최신 리포트를 읽었다.
지난해 Nature다.

그러나
한 시인은 말했다.
보아야 할
사랑의 대상이 밖에 있기 때문에
눈이 생겨났다.

-「눈의 발생」부분, 132쪽.

같은 부분도 마찬가지다.



지용의「파충류동물」인용부분은 다른 사람의 시로 밝혀졌다.
고대高大 최동호 교수의 지적으로 밝혀져 신판 지용전집에서는 빼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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