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족과 계급

민족이냐 계급이냐 하는 문제는 한국적 상황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이슈가 되어왔다. 식민지 시절에 맑시즘을 받아들이고, 분단 시대를 거쳐 이를 정교화하는 과정을 겪어온 까닭이다. 민족의 독립이, 그리고 민족의 통일이 오랫동안 지상과제였던 시절, 계급을 들먹이는 것은 반역이나 개인주의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항상 있었다. 권력을 장악하려는 음모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민족주의자 백범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적는다(김구 1997, 313-314):

국민대회가 실패한 후 상해에서는 통일이란 미명美名하에 공산당 운동이 끊어지지 않고 민족운동자들을 종용하였다. 공산당 청년들은 여전히 양파로 나뉘어 동일한 목적과 동일한 명칭으로 '재在중국청년동맹'과 '주住중국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상해의 우리 청년들을 앞다투어 포섭하여 독립운동을 공산운동화하자고 절규하였다.

그러던 중 레닌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식민지운동은 복국운동復國運動이 사회운동보다 우선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말이 한번 떨어지자 어제까지 민족운동 즉 복국운동을 비난·조소하던 공산당원들이 돌변하여 독립·민족운동을 공산당의 당시黨是로 주창하였다. 여기에 민족주의자들이 자연 찬동하고 나서서 '유일독립당촉성회唯一獨立黨促成會'를 성립시켰다. 그런데 내부에서는 의연히 공산당 양파의 권리쟁탈전이 음양으로 치열하게 대립되어 한 걸음도 진전되기 어려웠다. 민족운동자들도 차차 깨우쳐 공산당의 속임수에서 벗어나 결국 유일독립당촉성회는 해산되고 말았다.

백범일지
백범은 공산운동을 '절규'하다가 레닌의 한 마디에 민족운동으로 뛰어드는 공산주의자들을 조소하고 있다. 또한, 그들의 권력 지향적인 모습을 드러내어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는 당시 공산주의 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에서 민족의 독립을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았고(강만길 1994, 80-90), 아나키스트였던 신채호 역시 민족 운동에 일생을 바친 것을 살펴보면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을 무턱대고 비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여겨진다. (실제로, 계급 혁명을 민족 해방에 우선시 한다는 사실은 헤게모니를 장악한 민족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글을 인용한 것은, 백범의 진단은 현 상황에서 민노당의 모습을 조망하는 데 꽤나 유용한 도구가 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2. 민노당의 분당론

민주노동당의 분당론은 꽤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본격적인 분당론은 17대 대선을 위한 경선 과정에서 NL들이 보였던 행태 때문에 드러난 것 같다. 경선 직후 박노자 교수는 자신의 블로그에 민노당, 분당 이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라는 글을 올려 분당론의 운을 뗐고, 수많은 민노당 지지자들은 NL이 지지했던 권영길 후보를 응원하면서도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이른바 '비난적 지지'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졌다. 권영길 후보는 영국의 무상 의료, 무상 교육이라는 소중한 정책보다는 (아마도) NL의 입김이 들어간 '코리아 연방 공화국'이라는 생경한 정책만 떠들다가 사라졌다. 박노자는 권영길 후보께 삼가 충고드립니다라는 포스팅을 통해 점잖게 충고했고, 백무현 화백은 만평에서 이렇게 그렸다:

백무현 서울 만평 2007년 11월 27일

백무현 서울 만평 2007년 11월 27일


민노당 입장에서 이번 17대 대선은 명박한명백한 패배이다. 중선관위 집계에 따르면 16대 대선 당시 3.9%였던 득표율은 3.0%로 떨어졌다. 5년 만에 1/4의 지지자를 잃은 것이다. 16대 때 이른바 '정몽준 폭탄' 사건으로 민노당 지지자 일부가 노무현을 찍은 사례가 많았다고 판단되므로 실제 잃은 지지자 수는 훨씬 더 많은 셈이다. 4월에 있을 총선에도 밝은 미래는 없다: 중선관위의 지역별 득표 집계(IE only)에 따르면 민주노동당의 권영길은 자신의 지역구인 창원에서 7.9%, 현대차 노조가 있는 울산에서 8.4%의 득표를 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이명박 당선자는 창원에서 51.7%, 울산에서 54.0%의 득표를 했다.)

17대 대선 후보별 득표율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7대 대선 후보별 득표율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권영길의 생경한 정책과 일부 NL들의 시대착오적 행태, 그리고 당권욕 등이 대선 참패의 원인이라고 진단한 대중적 좌파 지식인들은 분당론을 확산시켰다. 박노자, 홍세화, 진중권은 블로그를 통해서, 인터뷰를 통해서, 그리고 기고문을 통해서 터뜨리듯이 NL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조승수 전 의원과 주대환 전 당 정책위의장은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하면서까지 NL들을 맹비난했다. 비판과 비난의 핵심은 그들이 당의 미래가 아닌 '김정일'의 미래를 더 생각한다는 점과 그들이 민노당 당권에 지나치게 연연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진중권이 3년 전에 쓴 민주노동당의 죽음이라는 글에서 이미 드러났다. 이번 대선과 관련해서는, 우석훈이 투표와 탈당에 대한 결심이라는 글을 통해 권영길이 실은 당대표에 대한 욕심에서 출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나타내면서도 일단은 투표하겠다는 일종의 '비난적 지지' 선언을 했다.

여기서 보이는 일련의 과정이, 백범이 과거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조금은 편협하게) 묘사한 내용과 상당히 닮아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민노당 내에서 NL들은 비록 한미 FTA 반대나 신자유주의 반대 등 맥을 같이 하는 부분에서 열심히 투쟁하였음에도 기본적으로는 그들이 당권을 장악하려고 했던 전례가 있고, 이북의 김씨 정권의 명령만을 추종한다는 점에서 백범이 묘사한 과거의 얼치기 공산주의자들과 유사성을 찾기는 아주 쉬운 것이다.

민노당에서 NL을 '잘라내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실제로 어렵기도 하고, 적어도 몇 가지 사안에 있어서 그들의 도움이 절실한 부분도 있다. 또 지지층이 갈리는 것은 어쨌든 바람직한 일이 아니기도 하다. 하지만, 주사파처럼 철학 없는 '추종자'들과의 연대 역시 바람직한 일이 아니기는 마찬가지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사태를 너무 나이브하게 바라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민노당의 모든 NL이 주사파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민족주의는 내가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주의주장이지만, 민족주의 자체를 비난할 권리는 없다. 계급적 의식이 있는 민족주의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실제로 분단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민족의 미래는 계급의 미래와 개개인의 미래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분단 시대는 국방 예산 등 엄청난 비용 지출을 필요로 하고,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라 할 (이산) 가족의 만남을 가로막고 있다.)


3. 분당론에서 염려되는 것

분당론에서 염려되는 것은 소중한 민주노동당의 토대가 와해되고, 지지층이 분산 및 이반되는 것이다. 지난 2002년의 프랑스 대통령 선거 때에는 사회당Parti Socialiste의 조스뺑이 국민전선Front National의 르 뻰에게 밀려나는 사건이 있었다. 결국 결선투표에서 시라끄가 80% 이상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전체적으로 좌파 정권을 지지하는 프랑스인들이 많았음에도 우파 시라크가 대통령이 된 것은 1차 투표 때 좌파 연합의 표가 분산된 까닭이 크다. 1차 투표에서 시라끄가 19.88%, 사회당의 조스뺑이 16.18%를 얻었지만, 여타 좌파 정당들인 노동자 투쟁당Lutte Ouvrière이 5.72%, 혁명적공산주의동맹Ligue Commuiste Révolutionnaire이 4.25%, 그리고 프랑스 공산당Parti Commuiste Français이 3.37%를 얻었다. 물론 사회당과 뜨로쯔끼주의자들, 그리고 공산당이 한 정당이 되리라고 예상하기는 힘들지만, 이들이 후보 단일화를 잘 수행했다면 수학적으로 충분히 좌파 정권 창출이 가능했을 약 30%의 지지율을 얻을 수 있다. (5.5% 가량의 표를 얻은 녹색당까지 고려하면 실제 효과는 그 이상일 수 있다.) 2002년 당시 좌파 후보들은 무려 7명이나 될 만큼 '난립'하였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분당이 이와 같은 사태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은 현실 정치의 면에서 극히 우려스럽다. 하지만, 분당을 통해 주사파들의 털고 가면 바로 그 점 때문에 민노당 지지를 유보해왔을 새로운 지지층을 흡수할 수 있을 뿐아니라, 바라건대는 한국사회당이나 녹색당 등과의 연대도 꾀할 수 있다는 희망도 보인다. 하지만 현실 정치적인 면 이외에도, 이 땅에 계급 의식에 기초한 어엿한 원내 정당이 있고 그 원내 정당이 '좌우의 날개로 나는' 한국을 이루어내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에서 자부심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소중하다고 보겠다.

박노자 교수는 확실히 이 점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민노당 분당 - 필요하지만,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제하의 포스팅에서 '분당 이후'를 이미 통찰하고 있었다:

"김빠"들이 걸러진 뒤에 "정파"들은 혁파돼야 합니다. 우리가 "사민주의자와 조합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느슨한 연합체"가 아닌, 진정한 계급 정당을 만들자면 정파 소속보다 당소속이 우선돼야 되지요. 당에서 정파적 이익을 배타적으로 추구하는 행위들은 부끄러운 행위가 돼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컨대 "다함께" 회원이면서도 당적을 보유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일단 당에서 투표할 때에 "다함께"의 의견보다 당의 이익과 전망, 그리고 넓게는 한국과 세계노동계급의 이익을 먼저 의식하고 소신 투표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마음은 아파도 진보정당을 구할 길은 이 길밖에 없습니다에서 볼 수 있듯이 분당해야 하는 까닭을 무엇보다도 대중정당의 건설이라는 확실한 목표 하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주장에 쉽게 찬동하고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덧) 웹서핑 중 현단계의 상황을 가장 명쾌하게 정리한 글이 있어 소개한다:
민주노동당 : 이건 분당이 아니라 파당이다.
트랙백도 걸었다. 일독을 권한다.
명쾌한 정리라고는 하지만, 정리가 명쾌할수록 마음은 무겁다.
2008. 1. 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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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강만길. 1994. 『고쳐 쓴 한국현대사』. 서울:창작과비평사.
김구[도진순 주해]. 1997. 『백범일지: 백범 김구 자서전』. 서울:돌베개.

고쳐 쓴 한국현대사 상세보기
강만길 지음 | 창작과비평사 펴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국현대사 개설서 <고쳐 쓴 한국현대사>. 1984년에 출간된『한국현대사』를 전면적으로 증보하여 내놓은 책이다. 이번 2판에서는 1판이 출간된 이래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을 반영하여 내용을 추가하거나 수정하였다. 또한 사진이나 도판을 새롭게 실어 시각적인 효과를 높였으며, 각 장을 요약한 도입부에 그 시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파노라마식 사진을 배치하였다. 이 책은 한국사 개설서로
백범일지(보급판) 상세보기
김구 지음 | 돌베개 펴냄
백범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는 친필 원본은 물론 등사본과 필사본, 여러 가지 출간본 등 여러 저본을 일일이 면밀하게 검토, 대조했다. 또한 사전류는 물론 고전, 규장각 자료 등의 고문서, 수많은 회고록, 일본, 중국 등 해외의 임정 관계 자료까지 두루 활용하고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로부터 자문을 받아 원본의 미흡한 점과 착오 등을 수정, 보완했다. 27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어온 민족독립운동가이자, 자신의 전
Posted by 엔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욕쟁이 할머니' 광고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광고였다. 이명박의 강한 이미지와 부자 이미지, 여러 가지 비리 이미지를 날리기 위해 정반대에서 승부를 건 한나라당의 비장의 무기였다. 한나라당도 이명박도 분명히 서민이나 중산층이 아니라 계층적으로 상류층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정책을 내세우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선거전에서는 서민들의 표가 필요하기 때문에 만든 '웰메이드' 이미지 광고였다. 대통합민주신당에서는 광고에 나오는 할머니가 사실은 종로 낙원동 국밥집이 아니라 강남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하고 있는 할머니이며, 광고에서는 할머니가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지만 실제 고향은 충청도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는 광고라는 논평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이른바 ‘위장 광고’ 논란은 이명박 후보의 이 광고가 얼마나 화제가 되는 광고인지를 보여주는 역설적인 지표라고 보아야 한다.



1. 이명박 대선 광고 '욕쟁이 할머니' 편

광고는 흑백에 가까운 모노톤의 질감으로 꾸며져 있다. 거리에는 눈발이 흩날린다. 돼지고기를 썰고 국자로 국밥을 담던 할머니는 누군가가 오는 것을 보고 "어? 오밤중에 웬 일이여? 배고파?" 하고는 국밥을 가져다준다.

이명박 대선 광고 욕쟁이 할머니 편

"맨날 쓰잘데기 없이 쌈박질이나 허구 지랄이여, 에이. 우린 먹구 살기 힘들어 죽겄어." 하는 쓴소리도 잊지 않는다. 할머니가 "청계천 열어 놓고 이번엔 뭐 해낼겨?" 하며 이명박의 서울 시장 시절 '업적'을 살짝 들추어내자마자 화면은 이명박이 뜨거운 국밥을 먹는 모습으로 바뀐다. "밥 더 줘? 더 먹어 이눔아." 계속 할머니의 독백이다. 그 독백이 끝나는 지점에서 성우의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이명박은 배고픕니다." 이명박은 계속 뜨거운 국밥을 급히 먹고 있다.

이명박 대선 광고 욕쟁이 할머니 편

거리에는 계속 눈이 내리고 있고, 그 눈이 내리는 지점은 그저 길거리가 아니라 검은 연탄이 쌓인 곳이다. 내레이션은 계속된다. "누구나 열심히 땀 흘리면 성공할 수 있는 시대."라고 할 때 연탄 하나가 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명박 대선 광고 욕쟁이 할머니 편

한겨울 밤, 국밥집에는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고 젊은 연인으로 보이는 손님은 할머니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가게를 들어선다. "국민 성공 시대를 열기 위해 이명박은 밥 먹는 시간도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할머니의 목소리. "밥 처먹었으니께 경제는 꼭 살려라잉? 알겄냐?" 이명박 대신 내레이션이 답한다: "경제를 살리겠습니다."

이명박 대선 광고 욕쟁이 할머니 편

처음으로 광고에서 할머니가 환한 웃음을 보인다. 이명박도 웃음으로 답하고, 둘은 어느 사이 서로 안고 악수를 나눈다. 그 동안 내레이션은 "실천하는 경제 대통령, 기호 2번 이명박이 해내겠습니다."라고 끝을 맺는다.

이명박 대선 광고 욕쟁이 할머니 편

광고에서 이명박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급히 밥을 먹고, 웃으며 할머니와 얼싸안을 뿐이다.


2.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의 커뮤니케이션 이론

로만 야콥슨은 커뮤니케이션 모델을 통해 메시지가 말하는 사람으로부터 듣는 사람에게로 전달될 때의 여러 가지 요소를 검토한 바 있다. 이를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야콥슨 도표

야콥슨은 이 여섯 요소 가운데 무엇이 강조되느냐에 따라 말이 커뮤니케이션의 어떤 기능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가령, 말하는 사람이 강조되면 ‘감성적 기능emotive function’의 특성을, 듣는 사람이 강조되면 ‘지시적 기능conative function’을, 그리고 상황context이 강조되면 ‘정보공유 기능referential function’을 갖고, 또 채널contact이 강조되면 ‘교감적 기능phatic function’을, 부호code가 강조되면 ‘메타언어적 기능metalingual function’을 가지며, 메시지 자체에 강조점을 찍게 되면 ‘시적 기능poetic function’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야콥슨 도표

야콥슨은 커뮤니케이션 모델을 소개한 글에서 "언어학이 언어 예술의 모든 영역에서 또 모든 단계에서 그것을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고 선언한다. 야콥슨의 커뮤니케이션 모델은 또한 미디어의 기능을 설명하는 데에도 사용할 수 있다. 미디어가 어느 요소에 강조점을 두는지 확인하면 그 미디어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고, 맥루한의 구분대로 따뜻한 매체인지 차가운 매체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3. 야콥슨의 커뮤니케이션 구조와 17대 대선 이명박 대선 광고 '욕쟁이 할머니' 편

이명박 후보의 '욕쟁이 할머니' 광고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이명박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광고에서 등장하는 목소리는 욕쟁이 할머니의 되바라진 목소리와 성우의 비교적 반듯한 목소리뿐이다. 대선 후보의 광고에서 후보자 본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후보자 아닌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장 극적으로 강조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관심 갖는 대상은 후보자이기 때문에 광고에서 후보자가 짧게 한 마디만 해도 다른 사람의 열 마디보다 더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인데, 이 광고에서 후보자가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욕쟁이 할머니와 성우의 목소리가 강조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욕쟁이 할머니의 말에는 물음만 있지 대답은 없다; 이명박은 "오밤중에 웬 일이여? 배고파?" 하는 질문에도, "이번엔 뭐 해낼겨?"라는 질문에도, "밥 더 줘?" 하는 물음에도 아무런 답도 하지 않는다. 광고는 그런 욕쟁이 할머니의 독백으로 이어져간다. 여기서 이명박 광고의 가장 중요한 감성적 접근이 드러난다. 욕쟁이 할머니는 "맨날 쓰잘데기 없이 쌈박질이나 허구 지랄이여, 에이. 우린 먹구 살기 힘들어 죽겄어."라고 분명히 현실 정치를 비난하고 있다. 그 비난은 상당히 많은 대중의 공감을 자아낼 수 있는 말이지만, 사실 정치에 대한 이성적 접근과는 거리가 멀다. 다시 말해, 해당 멘트는 정치권에서 양극화와 경제 성장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꼭 진행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단지 내가 살기가 너무 힘들다는 말이다. 또, 이 부분은 두 번째 광고인 '살려주이소'와 쉽사리 연결되기도 한다. '살려주이소'에서도 이명박은 거리에서 시장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살려주이소'라는 말을 듣는다. '실천하는 경제 대통령'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단순히 내걸기보다, 많은 서민들의 목소리로 지금 살기가 너무 힘들다는 말을 들려줌으로써 자신의 '경제'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야콥슨은 말하는 사람이 강조되는 커뮤니케이션은 '감정적 기능'을 갖는다고 말했다. 자신의 이미지를 스스로 말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의 감정적 토로를 통해 드러냈을 때, 그 파괴력은 엄청날 것이다. 국가적인 양극화로 서민 경제가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므로 이런 감정 토로에 동의할 사람은 거의 듣는 사람 전체라고 봐도 좋다. 이명박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어떻게 경제를 살릴 수 있는지도 말하지 않고, 쉽사리 자신을 '실천하는 경제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여기서 환기되는 것이 상황과 부호이다.

광고를 보면서 쉽사리 욕쟁이 할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은, 현 노무현 정권의 경제 정책 실패--대다수의 국민들이 느끼는 감정적 차원에서--의 탓이다. 이것은 이명박에게 중요한 상황context이다. 이명박 후보측은 이런 유리한 국가적 상황을 밑바탕에 깔고 커뮤니케이션을 시작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실정失政이,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뒤집힐 수 있다는 어떤 근거도 없이 이명박은 '경제 대통령'의 이미지를 전유專有하게 되는데, 그것은 커뮤니케이션의 상황을 잘 이용했기 때문이다.

한편, 아직까지 한국 정치의 고질병으로 남아 있는 '지역주의'도 중요한 상황으로 작동한다. 본래 충청도 출신인 욕쟁이 할머니에게 전라도 사투리를 요구한 광고주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비교적 분명하게 추측할 수 있다. 흔히 영남권 정당으로 알려져 있는 한나라당에게 있어서 취약 지역인 호남 사람의 목소리가 절실했던 것이다. 이 호남 사투리는 2편인 '살려주이소'의 부산 사투리와 연결되면서 '전국 후보 이명박'을 천명한다. 여기서 사투리를 하나의 부호로 본다면 이 광고가 일종의 메타언어적 기능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지역주의적인 한국 정치의 상황 속에서 상황화된 부호의 역할을 사투리가 담당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이 광고에서 할머니의 역할은 현재의 상황을 환기시키면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정보 공유와 감정 전달을 꾀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정보 공유'라고 하였지만, 그것이 수용자가 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알게 하는 정보 공유라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수준의 정보 공유라는 점이다. 그것은 역시 이 광고에서 중요한 것은 상황이 아니라 서민 한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을 뜻한다. 앞서 말했듯이 '상황'이라는 것도 경제성장률 몇 퍼센트, 양극화 지수 몇이라고 하는 객관적인 지표가 아니라 "죽겄어."나 "살려주이소."로부터 오는 자못 과장된 감정적 표현이라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이 광고가 말하는 사람의 감정에 얼마나 치우친 광고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뒷부분에서 이어지는 반듯한 성우의 내레이션은 욕쟁이 할머니를 보완하면서, 어느 정도는 이명박을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이명박 스스로가 욕쟁이 할머니의 수준이어서는 곤란하므로 아나운서를 연상시키는 반듯한 목소리의 성우가 동원된 것이다. "이명박은 배고픕니다."라는 목소리에서 이명박이 3인칭으로 지칭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이명박의 목소리로 "나는 배가 고픕니다."라고 했을 때, 그 말은 말하는 사람을 강조하므로 감정표시적 기능이 될 뿐이다. 하지만 제3자의 말을 통해 "이명박은 배고픕니다."라고 한다면 그 말이 객관성을 획득하기가 훨씬 용이할 뿐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황을 강조하게 되므로 정보 공유의 기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명박 스스로 "나는 배가 고픕니다."라고 했을 때 "재산이 수백억이나 되는 사람이 배고프다니"라며 거부감을 가질 사람들이, 제3자가"이명박은 배고픕니다."라고 했을 때에는 "실천하는 경제 대통령"의 실천력을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성우의 "국민 성공 시대" 발언과 할머니의 "밥 처먹었으니께 경제는 꼭 살려라잉?"하는 말에는 두 말하는 사람이 함께 공유하는 이명박에 대한 믿음이 실려있다. 이명박은 듣는 사람의 역할을 하게 되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 이명박은 광고의 다른 모든 부분에서보다 더 강조되어 있다. 이명박의 대변자인 성우가 마지막 말을 끝낸 시점인데다가 할머니의 발언이 명령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할머니의 발언은 여기서 지시적 기능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경제를 살려라"라는 명령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이명박에게 그럴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은연 중에 광고는 커뮤니케이션의 지시적 기능을 이용해서 수용자들에게 이명박이 그럴 능력이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게끔 만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할머니는 활짝 웃고, 이명박도 할머니를 얼싸안고 웃는 모습은 두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채널, 곧 접촉contact의 양상을 강조한다. 유권자의 한 사람과 대통령 후보의 접촉은 바로 그런 정감어린 교감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수용자는 판단하게 된다. 욕쟁이 할머니의 국밥집이라는 장소부터가 서민적이고 정겨운 곳이고, 그곳에서 국밥을 먹는 사람들은 정이 넘쳐 있다. 새로 국밥집에 들어오는 젊은 연인들도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다. 이와 같은 곳이 만남의 채널이 되는 것이다. 광고는 앞으로 이명박과의 만남이 이와 같이 정겨울 것이라고 수용자들에게 인식시킨다. 또한 앞으로도 계속 이명박이 이런 곳에서 서민들과 함께 호흡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4. 결론: 이명박 대선 광고의 전략과 이미지

이명박 후보의 '욕쟁이 할머니' 광고는 커뮤니케이션 상의 여러 요소 가운데 특히 말하는 사람adresser을 강조한 텍스트이며, 특정 부분에서는 듣는 사람adressee인 이명박을 강조하고 있으며,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명박과의 채널 곧 접촉contact을 강조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럼으로써 이 광고는 정당의 정책 설명이나 공약 설명과는 거의 관계가 없고, 오로지 이명박이 가진 긍정적인 이미지(경제)만을 집중적으로 드러내면서 부정적인 이미지(부자)를 은연중에 숨기는 식으로 기능하는 광고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광고가 본래 이성적 접근보다는 감정적 접근이 필요한 양식이긴 하지만, 정치 광고가 이토록 감정과 이미지에만 매달리는 것이 정치적으로 보았을 때 바람직한 일일지는 고민이 필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광고는 현대 정치의 가장 부정적인 면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양식일는지도 모른다.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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