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서 돈 냄새가 났으면 좋겠다”고 최영미 시인은 말했지만, 송경동의 시에서는 무슨 냄새가 날까.

광주천을 붉다고 쓴 시 때문에 얻어맞아 얼얼한 볼을 한 채로 맡은 봄 향기일까, 눅눅한 잡부 숙소의 때 절은 이부자리에서 나는 피 섞인 정액 냄새일까, 아니면 가끔 비정규직 일터인 지하로 내려오던 어느 아름다운 정규직 여 직원에게서 끼쳐오던 향수 냄새일까, 그도 아니면 아들과 놀이터 삼아 가던 사우나의 수증기 냄새일까.

『꿈꾸는 자 잡혀간다』는 운문의 제약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쓰인 그의 줄글을 모은 책이다. 시집 속에서 그는 어쩔 수 없는 시인이었지만, 이 산문 속에서 그는 시인이기도 하고 시인이 아니기도 하다. 시인이 아닐 때 그는 노동자이자 투사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이자 남편이자 아들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는 아주 견고한 성벽을 쌓고 있는 그의 시집에서와 달리, 여기서 무방비 상태로 자신을 내보인다.

가령 학생들이 별 생각 없이 광주천을 붉다고, 날개를 달고 이 땅을 떠나고 싶다고 쓴 시를 공안 검사의 눈으로 바라보던 교감 선생님과 문예반 선생님의 ‘취조’ 사건은 그의 시에서였다면 단단한 껍데기에 싸여 고정돼 있었겠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핸드헬드카메라’처럼 흔들흔들, 거칠게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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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4415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용산 참사’ 현장인 남일당 빌딩이었다. 차디찬 겨울,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모닥불 곁에서 그는 성명 같은 시를 읽었다. 도무지 시 같이 느껴지지 않았고, 어쩐지 어색하게도 뭉툭한 모습이었다. 추위에 내가 너무 얼어 있었기 때문일까.

다시 참 쓸쓸한 겨울 공화국이다. 언론의 입에 재갈이 물리고, 사람들의 양심은 얼어붙고, 광장은 봉쇄당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보수화되고, 가진 자들은 인면수심의 짐승이 되어가고 있다. 사회가 닫혀가고 있다.

-「시대의 망루, 용산」

그러다 창비에서 나온 시집이 눈에 띄었고, 그 시집에서 그는 좀더 단단한 사고의 언어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쩌면 남일당 빌딩 앞에서 들었던 시와 같은 시였는지도 모르지만, 시집 속에 정련된 활자는 적어도 말들을 더욱 단단하게 보이게 하는 재주가 있는지도 모른다. 브레히트나 엘뤼아르의 어떤 번역시들을 연상하게 하는 그의 시는 세련되지 않은 매력이 있었다.

말하자면 백무산처럼 강하지 않으면서 단단하고, 박노해처럼 비장하지 않으면서 쓸쓸했다.

자꾸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 묵은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려봐도
진보단체 사이트를 이리저리 뒤져봐도
(…)
분명히 내가 잃어버린 게 한가지 있는 듯한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혁명」

그리고 이번 산문집에서 그는 뭉툭하지도 단단하지도 않은 말랑말랑하고 흔들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영웅도 위인도 아니었고, 평범한 사람이거나 어쩌면 그보다 더 못한 사람이었다. 꿈과 희망을 품고 있지만, 한 때는 욕망에 매몰됐던 사람이었다.

일을 받지 못한 날은 힘이 쭉 빠졌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생활이기에 타격이 컸다. 생활의 타격보다 일조차 할 수 없는 인생이라는 설움이 자학의 늪으로 청년을 끌어당겼다. 그런 날이면 청년은 텅 빈 잡부 숙소에 누워 종일 몇 번씩이고 자위를 하곤 했다. 어떤 땐 허물이 벗겨진 그곳에서 핏물이 배어 나오기도 했다.

-「그 잡부 숙소를 잊지 못한다」

그러나 그 말랑말랑함은 책을 읽어나갈수록 조금씩 뼈를 얻어간다.

1부~5부의 소제목으로 말하자면, ‘꿈꾸는 청춘’ ‘가난한 마음들’에서 물렁거렸던 것들이 ‘이상한 나라’에서 굳고, ‘잃어버린 신발’을 거쳐 ‘CT85호와 희망버스’에서는 점차 우리가 아는 송경동의 얼굴로 빚어진다.

이를테면 우리는 우리가 아는 그의 얼굴을 대하면서 조금씩 마음이 놓인다.

2003년 6월 11일, 김주익은 최후의 결단을 한다. 폭우가 쏟아지는 새벽, 혼자 100톤짜리 지브 크레인, 35미터 상공의 ‘85호 크레인’으로 올라갔다. ‘나의 무덤은 85호 크레인이다. 너희가 내 목숨을 달라고 하면 기꺼이 바치겠다’라는 절박한 호소였다. 하지만 그 결의를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경찰은 공권력을 수시로 투입했고, 국민의 정부를 넘어 참여정부라는 정권 역시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고 못 박았다. 힘을 받은 사측은 김주익이 목숨을 걸고 크레인에 올라 있는 동안에 단 한 번도 교섭에 나오지 않았다.

(…)

2011년 1월 6일 새벽 3시. 한 늙은 여성노동자가 김주익의 영혼이 아직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85호 크레인의 차가운 난간을 붙잡고 올랐다. 사측이 정리해고 명단을 발표하기 전날이었다.

-「김진숙과 ‘85호 크레인’」

그래, 여기서 우리는 ‘구속당한 시인’인 송경동의 얼굴을 비로소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추도시 낭독이 폭력 행위가 되는 나라에서 그는 시인 직함을 단 투사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누가 내게 이 산문집의 매력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1부와 2부의 글을 읽어줄 것이다. 그가 투사나 시인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안다는 것은 무척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 다시 그의 시에서는 무슨 냄새가 날까. 어쩌면 아무 냄새도 안 나지 않을까.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냄새는 아무도 맡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꿈꾸는 자 잡혀간다 - 8점
송경동 지음/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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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들은 왜 이야기를 읽을까? 또 왜 이야기를 쓸까? 내게 항상 관심을 끄는 말은 이런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쓰면 소설책 몇 권은 된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술에 취해 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의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어쨌든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참 많다. 블로그나 까페가 붐비고, 인터넷 댓글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다. 술에 취한 것처럼 다들 자기 이야기를 내뱉고,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는 욕을 '씨부리'는 것이다.

이청준은 일찍이 언어사회학서설이라는 연작 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 가운데 한 편은 「자서전들 쓰십시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코미디언 피문오 씨의 자서전 대필 작가 윤지욱이 자서전 쓰기를 그만두는 이야기를 골격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자서전 대필 작가는'글팔이'로 묘사된다(이청준, 85):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지욱을 마음내키는 대로 매도해 대다 말고 피문오 씨는 무슨 생각을 해냈는지 갑자기 목을 잔뜩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청승맞도록 능청스런 목소리로 허공을 향해 외쳐대기 시작했다.

"고장난 시계나 라디오들 고칩니다아― 채권 삽니다아― 부서진 우산이나 빈 병 삽니다아― 자서전이나 회고록들 쓰십시다아―."

자서전 대필. 이 묘한 이율배반의 어구語句는, 지욱의 소설에서의 자괴와는 상관 없이, 지금 이 땅에서는 산문시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누구도 유명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자서전을 직접 썼다고 믿는 일이 없다.


2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자동기술법l'automatisme이라는 것을 말했다. 무의식(의 가능성)을 발견한 예술가들이 이성理性의 통제를 받지 않은 무의식을 그대로 원고지에 옮겨적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자동기술법이야말로 대필의 가장 완전한 대척점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자동기술법은 자주 '자아의 확대'라는 면에 초점이 맞추어져서 낭만주의와 쉽사리 연결된다. 실제로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에서 낭만주의란 '영혼'이라는 예술가의 자아가 너무 커서 '현실'과 불일치한 것을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다(Lukács, 146):

19세기의 소설에서는, 영혼과 현실 사이가 어쩔 수 없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관계를 갖는 또 다른 유형이 한층 더 중요하게 된다. 영혼과 현실 사이의 이러한 불일치성은, 영혼이 삶의 운명보다 더 넓고 더 크기 때문에 생겨나게 된다. […] 따라서 내적 현실과 외적 현실 사이의 동일성을 실현하려는 삶의 시도가 실패로 끝난다는 것이 이러한 소설 유형이 다루는 대상이 되고 있다.

확실히 이런 예술가의 자아가 가장 화려하게 펼쳐진 것은 20세기 후반이었던 것이 아닐까. 적어도 지금은 더 이상 아닌 것 같다.


3

예술이 계량화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돈을 주고 나만의 이야기를 살 수 있게 된다. 글쓰기가 가내 수공업처럼 판매되던 '대필 작가 시대'가 20세기 말 ~ 21세기 초라면, 앞으로 대량생산 레디메이드 이야기가 언젠가 나오지 않을까. 사람마다 삶과 경험이 다르지 않은가, 하고 반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34년 이후로 우리네 삶은 모두 '레디메이드 인생'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지고한 예술이 과연 돈으로 계량화될 것인가라고 묻는 사람은 있을까? 역시 회의적이다. 심심찮게 나오는 소더비서울옥션의 미술품 경매장 소식을 보자. 그리고 오규원의 다음 시를 보자:

―― MENU ――
샤를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이브 본느프와



1,000원
에리카 종



1,000원
 




가스통 바쉴라르



1,200원
이하브 핫산



1,200원
제레미 리프킨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 오규원, 「프란츠 카프카」

소설도 언젠가 자판기처럼 몇 글자 입력하면 완제품이 나오는 구조가 될 것이다. 인터넷에서 뭔가 미칠듯이 간지나는 이야기는 만든 사람이나 이용하는 사람이나 짧게 그 유치함을 비웃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혐의가 짙지만, 미래의 입장에서 볼 때 소설 자판기의 시조始祖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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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드라마는 처음 몇 회만 보면 전체 구조를 대략 짐작할 수 있고, 미소년과 얽히는 여주인공--꼭 여주인공이라야 한다--의 이야기도 쉽게 구조화·유형화가 가능하다. 이 시대에 프로프V. Propp같은 사람이 있다면 아주 쉽게 TV 드라마와 트렌디 소설을 분석해 몇 개의 요소로 나눌 것이다.

기술복제된 예술작품에는 아우라Aura가 없다고 베냐민W. Benjamin이 말했다고 하는데, 이 자판기용 소설은 처음 시작부터 아우라 따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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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2000. 『자서전들 쓰십시다』. 이청준 문학전집 연작소설1. 열림원.
Lukács, Georg. 1989. 『소설의 이론』. 중판. 반성완 옮김. 심설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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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말 '쟝르genre'는 본래 다만 '종류'를 뜻하는 말이다. 이를테면 "J'aime ce genre de fille."라고 하면 "나는 이런 유의 여자를 좋아합니다."라는 뜻이다. 프랑스말 '쟝르'가 현재의 "문예 작품의 형태상의 분류"라는 뜻을 가진 국제어, 장르로 더 많이 인식되면서 말의 쓰임은 상당한 정도로 변한 셈이다. 그러나 프라이의 지적대로라면 "장르의 비평이론에 손을 댈 때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기고 간 그 이론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머물러 있음을 발견한다."(64쪽) 우리가 이 지금 '장르의 이론'을 보아야 하는 이유는, 세미나 꺼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장르의 이론이 프라이의 비평이론의 씨눈이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의 문장에서 홀로 이름씨固有名詞를 지우고 그 문장을 일반화시켜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도 주목에 값한다. 유기룡은 국어국문학회가 엮은 『국어국문학과 구미이론』에 실린 「신화문학론의 수용과 그 과제」의 둘째 장章에서 "이 신화적 원형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신화 가운데서도 가장 전형적 신화가 문학의 관례인 장르를 이루게 된다는 관점에서 문학 장르의 이론까지 확대하게 된다."고 적고 있다.

비평을 스스로 선 인문과학의 하나로 세우기 위한 프라이의 의도는 원시적인, 소박한 귀납법에서 이른바 '귀납적 비약'을 거쳐 보다 연역적인 면모를 갖추어야 한다는 데까지 나아간다.(67-69쪽) 그는 가장 연역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쓸모있는 수학을 예로 들어 "수학에서 우리는 세 개의 사과에서부터 '3'으로, 또 직사각인 밭에서부터 '작사각형'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653쪽)이라고 말한다. 하므로 그가 『비평의 해부』의 도식적인 성격을 무릅쓰고 "비평에도 분류가 필요하다"(92쪽)고 말하는 데에까지 이르면 그의 비평이론에서 '장르의 이론'이 얼마나 높은 위치를 갖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이상섭은 『문학 연구의 방법』의 「신화 비평의 방법」의 둘째 마디節에서 "신화 비평은 최대의 중요성을 부여하는 종류의 개념, 즉 쟝르(genre=종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그러나 역사주의에서 말하는 쟝르의 개념과는 무척 다르다. <쏘넷>, <2막극>, <단편소설> 등등 역사적 쟝르는 단지 외형적 관례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라고 풀이한다.


프라이는 스스로의 '장르의 이론'을 '수사비평'이라고 이름했다. 그 점 말해주는 바 크다. 그의 장르론은 "기본적인 제시의 방식에 의거하고 있"(470쪽)다. 그러나 네 장르―에포스, 산문(즉, '픽션'), 극, 서정시―를 설명할 때 그는 리듬 분석으로 일관한다. 아마도 리듬이 '제시의 기본형식radical of presentation'과 반드시 관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 옛 문학과도 얼마쯤 관련되어 있다. 상허尙虛 이태준은 『문장강화』 제1강의 「이미 있어온 문장작법」에서 "활판술이 유치하던 시대에 있어서는, 오늘처럼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 자연히 한 사람이 읽되 소리를 내어 읽어 여러 사람을 들리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소리를 내어 읽자니 문장이 먼저 낭독조로 써지어야 할 필요가 생긴다. […] 쓰는 사람은 내용보다 먼저 문장에 난조투어(亂調套語)를 대구체로 많이 넣어 […] 아뭏든 낭독자의 목청에 흥이 나도록 하기에 주의하였을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3・4, 4・4조 낭독조의 우리 옛 문학이 투박하나마 특수한 한 예例가 되어주는 바, 리듬과 '제시의 기본형식'의 관련성은 시인・지은이作者와 듣는이聽者/聽衆・읽는이讀者의 관계양상에 의지한다고 프라이는 보고 있다. 극의 경우는 "작자가 청중의 눈으로부터 숨어 있"고, 에포스에서는 "작자가 직접 청중과 대면하며, 작중의 가상적인 인물은 숨겨"지고, 씌어진 문학記錄文學/written literature(즉, '픽션')에서는 "작자도 작중 인물도 독자로부터 숨겨져 있"(이상 473쪽)고, 서정시는 "청중이 시인으로부터 숨겨진 경우"(474쪽)라는 식이다. 장르들 사이에서 보이는 중요한 변화는 시인・지은이의 듣는이・읽는이에 대한 태도이다. 그 태도에 따라 에포스는 '계기되풀이recurrence의 리듬', 산문(즉, '픽션')은 '지속continuity의 리듬', 극은 '데코럼걸맞음decorum의 리듬', 서정시는 '연상association의 리듬'으로 갈리는 것이다.

그것은 장르에 따라 글투文體가 흔히 바뀌는 모습에서 잘 볼 수 있다. 뷔퐁Buffon이 "글은 사람이다Le style est l'homme même."라고 말했을 때, 그는 글투의 중요함을 말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프라이는 "장식적인 변론과 설득적인 변론"을 수사修辭가 처음부터 가진 두 뜻이라고 말하면서 "장식적인 수사는 문학 자체―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가설적인 언어구조라고 우리가 일컫는 것―로부터 분리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장식적인 수사야말로 시의 렉시스, 즉 말의 결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라고 높이 추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학적인 문학 연구로서의 비평이 결국은 '장르의 이론'으로 나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 같다. (장식적) 수사는 리듬과 가장 큰 관계를 갖는데, 그 수사가 문학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면 문학 연구에서 리듬의 연구는 무척 큰 범위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리듬은 장르와 연관되므로 문학 연구는 장르와 관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운문과 산문의 관계에 있어서도 셰익스피어가 하층신분의 등장인물은 산문으로 말하게 하고 상층신분 등장인물은 운문으로 말하게 하고, 상층신분 등장인물이라도 술에 취해 있을 때나 정신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에는 산문으로 말하게 하고 있다고 유종호가 「스타일 분리에서 혼합으로」의 '걸맞음' 항목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시극詩劇이라는 장르와 엮이어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에서의 글투를 중요시하여 리듬을 강조한다고 했을 때, 음악적인 면은 그런대로 풀리겠지만 실제 문학이 갖고 있는 시각적(미술적)인 면은 어떻게 풀이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의 여섯 요소'에서도 영어로는 spectacle로, 우리말로는 장경場景 또는 영상으로 옮겨지는 옵시스ὄφις가 있음에도 프라이는 이에 대해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것 같다. 다만 "고전시에서는 음의 패턴 즉 음의 장단은 반복적인 요소이며 따라서 시의 멜로스의 일부였는데, 현대에서 그것은 옵시스의 일부가 되고 있다"고 한 번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며, 그나마도 근거는 함께 쓰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또 프라이가 말하고 있는 옵시스의 리듬은 무엇일까.

프라이의 이론이 도식적이라는 것은 그 비판자들은 물론이고 프라이 스스로도 인정한 바이다. 사실 연구를 위해서는 얼마쯤 추상화와 도식화를 피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도식화가 비판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그 도식에서 벗어난 사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준오는 그의 유고집 『문학사와 장르』의 「원형적 방법과 다원적 체계 시학」의 둘째 장章에서 "토도로프는 프라이의 장르론을 '이론적 장르theoretical genre'라고 규정하고 그의 이론의 연역적 성격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 토도로프에 의하면 장르는 순전히 사변적으로 연역적으로 규정된 이론적 장르의 개념과 구체적 작품을 관찰한 결과로서 귀납적으로 규정되는 '역사적 장르historical genre'라는  두 개념이 있다"는 말로 일면 프라이의 한계를 지적했다.

또한 리듬에 관해서도, 김준오 역시 지적한 바이지만, "운문과 산문의 차이가 그대로 장르의 구분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471쪽)고 말하고 있으면서도 에포스를 결국 운문일 수밖에 없는 '되풀이의 리듬'으로 설명하고 '픽션'을 산문이기가 쉬운 '지속의 리듬/의미의 리듬semantic rhythm'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의 이론의 혼란된 면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픽션'이라는 말로 가리키기도 하고 때때로 '기록문학'이라고 일컫기도 하는 "서적을 통해서 독자에게 이야기를 거는 장르"(472쪽)를 '산문'이라고도 바꾸어 쓰고 있음을 보아도 그렇다.


프라이가 도식적이라는 것은, 또다른 뜻으로서 그가 형식주의적이라는 뜻도 될 것 같다. 그가 '서술적 작품'과 '주제적 작품'을 나누고는 있지만 실제로 주제에 대해 깊이 파고드는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문학에서 큰 부분을 갖는 상상력과의 관련성은, 원형상징archetype을 다루는 신화와의 관련성에도 불구하고, 프라이의 『비평의 해부』와 그 '장르의 이론'의 논지가 거의 갖지 못하고 있는 부분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만 그런 것일까, 실제로도 그런 것일까. 만약 실제로 그런 것이라면 「도전적 서론」에서 우려한 대로 비평은 문학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엉뚱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네번째 에세이, 「수사비평: 장르의 이론」만을 대상으로 한 글입니다.



덧말> 프라이가 "아리스토텔레스도 『시학』에서 렉시스의 문제에 이르게 될 때, 이 문제는 수사학에 속하는 것이 한층 더 적당하다고 말하고 있다."(467쪽)고 한 부분은 오류인 것 같다. 천병희가 옮긴 『시학』의 6장에서는 "제 3은 사상이다. 사상이란 상황에 따라 해야 할 말과 적당한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대사에 관한 한, 이 능력은 정치학과 수사학의 연구분야에 속한다."(1450b)고 하고 있으며 19장에서는 "사상에 관해서는 «수사학»에서 말한 바를 여기서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왜냐하면 사상에 관한 연구는 시학보다는 수사학의 연구분야에 속하기 때문이다."(1456a)라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보다 수사학에 적합하다고 말한 것은 렉시스가 아니라 디아노이아이다.

프라이가 464쪽에서 밝힌, 아리스토텔레스가 섬긴 비극의 여섯 요소는 뮈토스, 에토스, 디아노이아, 멜로스, 렉시스lexis/言辭, 옵시스인데 천병희는 이것을 플롯, 성격, 사상, 노래, 조사措辭, 장경으로 옮기고 있다. 보다 확실하게 말하자면, 천병희는 그가 옮긴 『시학』 52쪽 본문 아래의 옮긴이 주註에서 "조사의 원어는 λέξις인데 대부분의 영역본에서는 「diction」으로 번역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구텐베르크 기획(http://www.gutenberg.net/)' 에서 새뮤얼 버틀러Samuel Butler가 영어로 옮긴 Poetics를 찾아봐도 6장의 것은 "Third in order is Thought,--that is, the faculty of saying what is possible and pertinent in given circumstances. In the case of oratory, this is the function of the Political art and of the art of rhetoric"이라고 되어 있고 19장의 것은 "Concerning Thought, we may assume what is said in the Rhetoric, to which inquiry the subject more strictly belongs."라고 되어 있다.


비평의 해부
노스럽 프라이 지음, 임철규 옮김/한길사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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