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신경 쓰는 것은 한반도 대운하와 기업 투자, 그리고 영어 교육 뿐인 것 같다. 영어 몰입교육을 주창하다가 한 발 물러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다시 영어 이야기를 꺼냈다. 이경숙 위원장은 "처음 미국에 가서 (표기법 대로) '오렌지'를 달라고 했더니 못 알아들어서 'Orange'라고 말하니 알아듣더라"는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하면서 영어 교육을 위해서 외래어 표기법을 바꾸자고 제안했고, 인수위 공식적으로는 "학교 교육만으로 영어를 해결하기 위해 5년간 4조원을 들이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경숙 위원장은 적어도 한 대학의 교수로 오래 일했고 총장까지 지냈던 교육자다. 게다가 그런 사람이 국내에 TESOL(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을 처음 도입한 '영어 전도사'로 알려져 있고, 또 그가 차기 정부 정책의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위원장이라면 우리는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이경숙 위원장이 이야기한 것은 영어 교육의 문제점이 아니며, 국립국어원이 관장하는 외래어 표기법이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에 대한 이경숙 위원장의 철학에 대해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한편 중등(중고교) 과정까지의 공교육만으로 영어를 해결하도록 하겠다는 것은 이명박 정부의 핵심적인 정책으로 보이는데, 사실 당연히 그렇게 되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한국 사회가 앞으로 영어가 되었든 다른 무슨 언어가 되었든 공교육만으로 충분히 외국어 능력을 습득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언제가 되었든 꼭 그렇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교육을 강화하겠다는 이명박 인수위의 정책을 총론 차원에서 인정하고 독려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각론인데, 먼저 거기에 5년간 4조원 이상을 들이는 것이 효율적인 일인가를 확인해 봐야 하며, 그렇게 들였을 때 과연 인수위가 주장하는 대로 중등 과정 졸업만으로 영어가 유창해질 수 있느냐를 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과연 그것이 (이명박이 바라는 대로) 향후 5년 안에 가능하다고 믿고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나는 이명박 차기 정부의 '실용주의'라는 이름의 철학이 그들이 내세우는 영어에 대한 이야기들 만으로도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다; 한반도 대운하 정책은 사실 논의만 던져 주고 나머지는 사기업에 맡긴다고 하면 그만이고, 친기업적 정책 역시 전봇대만 좀 뽑아 주면 나머지는 사기업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영어 정책은 분명히 국가의 고유 업무 영역인 공교육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일이며, 따라서 이명박 차기 정부가 가장 힘주어 처리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를 인식한 듯, 대통령직 인수위는 "영어 공교육 강화는 제2의 청계천 사업"이라는 수사修辭까지 구사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인수위가 말하는 영어 공교육 정책을 살펴보는 것은 분명 상당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먼저 이경숙 위원장의 '오렌지 발언'을 단초로 하여 이 위원장의 발언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위원회가 말하는 '실용주의'가 '언어 제국주의'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밝히려고 한다.

 

1. 한글의 수난과 비전문가들의 오지랖

논의에 앞서 한글의 수난사를 잠깐 훑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지금 이경숙 위원장이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외래어표기법이며 그것은 외래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한글의 수난사 하면 대개 1940년대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을 펴던 시절을 생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한글이 받은 수난의 역사는 훨씬 더 길고 깊다: 세종대왕이 한글(훈민정음)을 만든 그 순간부터 한글의 수난은 시작되었고, 그렇게 시작된 한글의 수난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최만리가 훈민정음을 만드는 것이 불가하다고 아뢰는 장면이 나온다:

1.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遵行)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1. 옛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고(蒙古)·서하(西夏)·여진(女眞)·일본(日本)과 서번(西蕃)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옛글에 말하기를, ‘화하(華夏)를 써서 이적(夷狄)을 변화시킨다. ’ 하였고, 화하가 이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로 중국에서 모두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의 남긴 풍속이 있다 하고, 문물과 예악을 중화에 견주어 말하기도 하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이른바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당랑환(螗螂丸)을 취함이오니,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오리까.

一, 我朝自祖宗以來, 至誠事大, 一遵華制, 今當同文同軌之時, 創作諺文, 有駭觀聽。 儻曰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 若流中國, 或有非議之者, 豈不有愧於事大慕華?

一, 自古九州之內, 風土雖異, 未有因方言而別爲文字者, 唯蒙古、西夏、女眞、日本、西蕃之類, 各有其字, 是皆夷狄事耳, 無足道者。 《傳》曰: “用夏變夷, 未聞變於夷者也。” 歷代中國皆以我國有箕子遺風, 文物禮樂, 比擬中華。 今別作諺文, 捨中國而自同於夷狄, 是所謂棄蘇合之香, 而取螗螂之丸也, 豈非文明之大累哉?

요컨대 당시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이었던 사대주의자 최만리의 입장에서는 '큰 나라大國'를 섬기고 '중심지의 화려함中華'를 따르는 것이 조선의 마땅히 행해야 할 바였던 것이다. 그의 걱정거리는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자칫 중국이 우리를 오랑캐夷狄으로 여기면 큰일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소를 올리는 최만리의 무리들이 언어학에 대해서는 거의 몰랐던 것 같다. 그것은 세종이 이렇게 그들을 꾸짖는 부분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강신항 2003. 209):

또 그대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과 칠음을 알며, 자모가 몇인지 아느냐? 만일에 내가 저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 누가 이를 바로잡겠느냐?

且汝知韻書乎? 四聲七音, 字母有幾乎? 若非予正其韻書, 則伊誰正之乎?

운서韻書란 언어학 가운데 음운론 내지 음성학을 일컫던 당시의 성운학聲韻學에 기초한 일종의 발음 사전이며, 사성四聲은 지금 중국어와 동남아시아 언어들에 있는 평성·거성·상성·입성의 성조이고, 칠음七音은 어금닛소리牙音·혓소리舌音·입술소리脣音·잇소리齒音·목구멍소리喉音·반혓소리半舌音·반잇소리半齒音로 닿소리의 분류이다. 세종대왕이 스스로 "만일에 내가 저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 누가 이를 바로잡겠느냐?"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세종은 임금이면서 당대에 가장 뛰어난 언어학자였다. 세종의 가장 급진적인 정책은 이렇게 비전문가인 사대주의자의 국익을 들먹이는 반대를 뚫고 시작되었다는 부분을 기억해두자.

이후 한글은 조롱조로 언문 또는 암클이라 불리며 조선 왕조 시대를 살아냈다. 한글이 재발견된 것은 한창 민족주의를 받아들인 개화기 때였다. 나라를 앗긴 후 돌이켜보니 '우리글'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한글에 대해서 한마디씩 거들게 된다. (여담이지만, 언어와 글자는 학문 연구의 대상이 되면서도 사실 그 사회의 누구나가 쓰는 도구이기 때문에 고등 교육 정도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언어나 글자에 대해 말을 꺼내는 데 두려움이 없게 되는 것 같다. 가령, 정치학 박사가 후두암의 진단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는 없지만, 한글의 표기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는 더러 있는 것이다.) 근대 이후 정부가 인가한 첫 국어 정책이 종두법으로 유명한 의사였던 지석영의 「신정국문新訂國文」(1905)이었다는 사실은--지석영의 「신정국문」 자체에 대한 평가는 논외로 하고--한글이 얼마나 비전문가들에 의해 쉽게 좌지우지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개화기에는 유학파 지식인들이 한글에 대해 너도나도 한마디씩 거들었다면, 오늘날에는 주로 경제 논리나 영어중심주의에서 또는 경제 논리와 영어중심주의에서 한글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이경숙 위원장의 '오렌지 발언'은 사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이다. 이런 주장은 수없이 많다.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으로 경제학자인 김영봉 교수가 2년 전에 쓴 신문 칼럼 '한글의 외래어표기와 세계화'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김 교수는 한글에 [f]를 표기할 수 있는 글자가 없어 불편하니 'ㅍ'에 모자를 씌우든 새 글자를 만들든 [f] 발음에 해당하는 글자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필'이 꽂히고, '팬시' 숍을 주로 찾는다기에 '약pill'에 취하고 '여성용품pansy' 가게에 잘 간다는 소린줄 알았다는 것이다.

한글은 일제 후기 민족말살정책에 의해서만 수난을 받은 것이 아니다: 한글은 창제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수난 중이다. 특히 15세기 최만리의 주장과 21세기 김영봉 교수·이경숙 위원장의 주장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 큰 나라의 논리를 따르자, 중심지의 화려함을 좇자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 근거는 하나같이 모두 국익國益이다. 아마 이명박 차기 정부가 주장하는 '실용주의'란 이 지점에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애써 평가절하하는 노무현 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결정할 때 국익을 이야기했고, 한미 FTA를 추진할 때 국익을 이야기했다. 이명박 차기 정부 역시 국가 경쟁력을 들어 영어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이야기한다. 새로울 것도 실체도 없는 '실용주의'라는 말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비전문가라면 한글이나 한국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운서나 사성칠음, 자모는 고등학교 과정에서 대부분 다루는 것이고, 외래어표기법이 정착된 과정은 아주 길게 잡아도 하루나 이틀 정도만 시간을 내면 정립된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있게 된다. 나는 다만 이 정도도 공부하지 않고 한글이나 한국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오지랖 혹은 오만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2. 외래어 표기법 개정, 그리고 언어학, 영어 교육과 한국어 교육
--Press Friedly와 Orange를 중심으로

(이 절에서 대괄호([])에 묶인 알파벳은 국제음성기호IPA:International Phonetic Alphabet입니다. 한국어 위키 낱말사전에 IPA 항목이 있지만 자료가 충분치 않고, 국제음성기호 항목에 한글의 IPA 표기 일람이 나와 있지만 일부 항목(가령 'ㅈ'의 IPA 표기)에 오류가 있어 추천하지 않습니다. 참고만 하세요. IPA가 보이지 않으신다면 여기에 가셔서 Charis SIL 글꼴을 내려받아 압축을 푸신 후 CharisSILR.ttf CharisSILB.ttf CharisSILI.ttf CharisSILBI.ttf 등 네 파일을 Windows\Fonts 폴더로 복사하세요.

한편, 옛한글이 안 보이시는 분은 여기에 가셔서 un-fonts-extra를 내려받으신 후 압축을 푸시면 나오는 ttf 파일들을 모두 Windows\Fonts 폴더로 복사하세요.)

이경숙 위원장은 Press Friendly를 모든 신문이 '프레스 프랜들리'로 적었다며 [p]와 [f]를 구분하지 않는 것에 대해 지적했다. 김영봉 교수도 [f]를 표기할 수 있도록 표기법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f]의 표기는 [r]의 표기만큼이나  길고도 지루하다.

사실 [f]를 표기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청량음료의 이름 FANTA를 '환타'로 표기하는 사례에서 남아 있듯이 과거에는 [f]를 '후'로 표기했다. 아직도 연세가 있으신 일부 어르신들은 free를 '후리'로, fax를 '훽스'로 발음하고 있고, 제일모직의 브랜드 FUBU는 아직도 '후부'라고 표기한다. 아마 [f]를 일본어 가따가나의 'フ'(히라가나로는 'ふ')로 표기하는 데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일본인들은 일본어 고유명사를 로마자 알파벳으로 표기할 때도 'ふ/フ'를 fu로 표기하고 있다. 가령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Fukuzawa Yukichi로 표기된다.)

한편으로는 입술가벼운소리脣輕音 'ㅍ'인 ''를 사용할 수 있다. 본래 입술가벼운소리는 두입술갈이소리兩脣摩擦音으로 두 입술이 완전히 붙었다 떨어지면서 내는 'ㅍ'이나 'ㅂ'과 달리 두 입술이 가까이 다가가기는 하되 완전히 붙지는 않은 상태에서 그 두 입술 사이에서 나는 마찰음이다. 예를 들어 '부부'라는 낱말을 발음할 때 첫번째 'ㅂ'과 두번째 'ㅂ'은 서로 다른 소리임을 알 수 있다. 첫번째 'ㅂ'은 두 입술이 완전히 붙었다 떨어지면서 소리가 나는 반면, 두번째 'ㅂ'은 완전히 붙지는 않는다. IPA로 표기하면 '부부'는 [buβu]가 된다. 한편 [f]나 [v]는 이입술소리脣齒音으로 윗니와 아랫입술 사이에서 나는 마찰음이다. 그러므로 본래 'ㅸ'[β]은 [v]와 다르고, 'ㆄ'[ɸ]은 [f]와 다르지만 15세기에 사용되었던 그 표기를 응용해서 쓸 수 있다. 실제로 약간 변형된 입술가벼운소리 표기가 1930년 경에는 널리 사용되었는데, 외솔 최현배 선생이 실제로 『우리말본』 등에서 'ᅋᅳᆧ랑스(랑스)'로 사용하기도 했고(최현배 1961, 217), 정지용의 데뷔 시詩인 「카ᅋᅦᆧ ᅋᅳᆧ란스(카 란스)」에도 사용되었다(정지용 198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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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솔 최현배, 『우리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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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카페 프란스」

방법을 찾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과연 그것이 필요한가이다. 정말 [p]와 [f]를 구별하지 못해서 우리의 말글살이言語生活가 그토록 어려운가?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런 주장으로는 50개의 음절만으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 일본을 설명할 수 없고, '파울[paul]이야, 파울'이라고 발음해도 알아서 타자가 친 공이 파울foul 라인을 넘어간 것으로 알아듣는 말무리言衆들을 설명할 수 없다.

"Longman

Longman Dictionary of Contemporary English의 Orange 항목

언어학적으로 보자면, [f]에 해당하는 한글 표기를 만들자거나 ['ɒrɪndʒ], ['ɑ:rɪndʒ] 또는 ['ɔ:rɪndʒ]를 표기할 수 있는 표기를 만들자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일이다. 드 소쉬르de Saussure(1990, 143)에 따르면, 언어는 서로간의 '차이'에 의해 구별되는 하나의 기호 체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어의 말무리들이 거의 구별하지 못하고, 구별할 필요가 없는 [p]와 [f]의 차이와 [o]와 [ɒ], [ɑ], [a], [ɐ], [ɔ]의 차이를 표기법에 반영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IPA

IPA 모음 사각도

순수하게 영어 교육의 측면에서만 봐도 마찬가지다. 영어를 잘 하기 위해서라면 한글의 표기를 바꿀 것이 아니라 로마자 알파벳을 사용한 영어 교육에 신경써야 한다. 실제로 지금의 유아 영어 교육은 알파벳 낱글자 또는 글자들의 조합의 소리를 익히는 '파닉스phonics'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영어 교육을 위해 외래어의 표기법을 바꾸자고 주장하는 것은 효과도 전혀 없는 시대착오적 주장이다. 그런 점에서 이경숙 위원장이나 이명박의 영어관은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복거일(1998, 165-183)의 주장보다 순수하지 못하다. 차라리 복거일은 일관적인 자신의 논지와 논거를 댈 능력이 있다. 이경숙 위원장이나 이명박은 여전히 그렇다면 왜 이 나라에 한국어와 한글이 필요한가, 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한국어의 측면에서 보면 이경숙 위원장의 발언은 심각하다. 한글로 님이 Orange를 오렌지로 표기하는 이유 - 이경숙 위원장님께에서 지적했듯이 오렌지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는 한국어(외래어) 낱말이다. 따라서 이 낱말은 한국어 낱말이다. 프랑스어 단어 buffet[byfe]가 영어에서는 ['bʊfeɪ] 또는 [bə'fei]로 발음되듯이 Orange가 영미권에서 어떻게 발음되는가에 관계 없이 한국어에서는 '오렌지'라고 적고 '오렌지'라고 발음하면 그만인 것이다.


3. 영어와 제국주의

영어가 실은 영미의 제국주의적 음모를 위한 도구라고 한다면 종북주의자의 딱지를 얻게 되거나 시대착오적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될까? 나는 종북주의와는 한 터럭도 관계 없고 항상 동시대적이고자 하는 사람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영어에 대한 저 명제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영어는 사실 영미의 제국주의적 음모를 위한 도구다.

로버트 필립슨Robert Phillipson은 제국주의와 언어의 상관관계에 대한 여러 단서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三浦信孝·糟谷啓介 엮음 2005, 124): 흔히 콜럼버스라는 미국식 이름으로 알려진 끄리스또포로 꼴롬보Christoforo Colombo가 서인도 제도를 발견한 해로 제국주의의 상징이 된 1492년, 에스빠냐의 문법학자 네브리하Nebrija가 까스띠야 스페인어는 "해외 정복의 도구이자 교육받지 못한 무식한 말들을 국내에서 뿌리뽑는 무기다. …… 언어는 언제나 제국의 동반자였고 언제까지나 동료로 남을 것이다."라고 지극히 제국주의적 발상으로 말한 것이다.

문제는 제국주의 패권 시대가 거의 끝난 현단계에도 언어의 제국주의적 속성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필립슨에 따르면 탈식민지 시대에도 언어는 제국주의적 음모를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三浦信孝·糟谷啓介 엮음 2005, 126):

1950년대에 작성된 영국 정부 보고서들 역시 탈식민지 시대에도 영국의 이익이 보호되고 유지되려면 학문적 사회기반시설에 투자해야 한다고 단언했다.(Phillipson, 1992, 6장) 영어의 보급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이자 경쟁 관계인 다른 제국주의 세력들을 제압하는 방법으로 여겨졌다. 이 사명은 『영국문화협회의 연례 보고서』(1960~1961)에서 다음과 같이 공식화되었다.

세계를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는 것은 미국이 영어를 자국의 이주민 집단들의 공통 민족어로 확립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과제를 확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세계'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영어를 사용하는 것은 영국과 미국의 이익에 들어맞는다고 보았으며, 그 자체가 대외 원조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레닌Lenin에 따르면 제국주의란 "독점자본주의의 논리적 발전"이며 "자본주의 발전의 최고의 단계"이므로(Sabine and Thorson 1997, 1187), 영미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영어 보급에 힘쓰는 것은 영어의 독점자본주의로서 일종의 제국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독점이라는 것은 "자유경쟁의 직접적 대립물"이면서도 역사적으로 자유경쟁은 쉽게 "독점으로 전화"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Lenin 1986, 121). 이를 언어에 적용해 보면, 수많은 언어가 자유로이 '경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런 '자유경쟁'으로 인해 한두 특정 거대 언어가 나머지 작은 언어들을 지배하게 되는 경향성이 뚜렷하게 되는 것이다.

가스야 게이스케糟谷啓介(三浦信孝·糟谷啓介 엮음 2005, 369-391)는 그람시헤게모니 이론을 빌어 이 '언어 제국주의'를 분석하면서 언어라는 것이 헤게모니를 과연 장악하는 사물인가를 논증하고 있지만, 사실 학술적인 논의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언어 제국주의와 영어 헤게모니를 그렇게 힘들여 입증할 필요는 없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어가 지금 헤게모니를 장악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나아가 그것이 일종의 제국주의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은 한국의 역사 속에서 매우 낯익은 풍경 가운데 하나이다:

"얘, 너 그 노어 공부를 열심히 해라."
"왜요?"
아들은 갑자기 튀어나오는 아버지의 말에 의아를 느끼면서 반문했다.
"야 원식아, 별 수 없다. 왜정 때는 그래도 일본말이 출세를 하게 했고 이제는 노어가 또 판을 치지 않니.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바에야 그 물 속에서 살 방도를 궁리해야지. 아무튼 그 노서아말 꾸준히 해라."

전광용(1994, 233)의 「꺼삐딴 리」는 일찍이 언어가 가진 헤게모니성를 간파한 한 의사의 이야기다. 이인국 박사는 일제 시대에는 일본어로, 해방 후 이북에서는 러시아어로, 그리고 월남해서는 다음과 같이 영어로 출셋길을 닦았다(전광용 1994, 246-247):

브라운 씨의 영어 반 한국말 반으로 섞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인국 박사는 흐뭇한 기분에 젖었다.
"닥터 리는 영어를 어디서 배웠습니까?"
"일제 시대에 일본말 식으로 배웠지요. 예를 들면 '잣도 이즈 아걋도' 식으루요."
"그런데 지금은 발음이 좋은데요. 문법이 아주 정확한 스탠다스 잉글리쉬입니다."
[…]
"얼마 전부터 개인 교수를 받고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이인국 박사는 자기의 어학적 재질에 은근히 자긍을 느꼈다.
[…]
그는 혈압 때문에 술을 조절해야 하는 자기 체질에 알맞게 스카치 잔을 핥듯이 조금씩 목을 축이면서 브라운 씨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거, 국무성에서 통지 왔습니다."

영어를 왜 배워야 하는지를 물으면 누구나 미국이 세계의 정치적·경제적 패권을 쥐고 있는 현단계의 상황과 전체 대외무역 가운데 대미무역이 차지하는 비중 등을 말할 것이다. 어떤 이는 '세상이 다 영어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답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영어의 독점자본주의다. 실제로 '헤게모니'라는 개념이 여기서 대두되는데, 미우라 노부따까三浦信孝는 이를 이렇게 정리한다(三浦信孝·糟谷啓介 엮음 2005, 17-18):

그러한 의미에서, 심포지엄의 마지막 날에 가스야 게이스케(糟谷啓介)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소개하면서, 행한 논리의 정리는 귀중했다. 그람시는, '정치적 강제가 없는데, 왜 특정한 언어의 사용이 확대되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하여, 화자의 자발적 동의에 의한 소언어에서 대언어에로의 이동 뒤편에 익명의 권력 작용이 매개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헤게모니를 '시민의 자발적 동의를 조직하는 권력'이라고 정의한 다음, 이것을 '독재'와 구별했다. 언어 제국주의가 정치적 강제를 유력한 수단으로 하여 정책적으로 실행했다고 한다면, 포스트식민지 시대의 '언어 헤게모니'는, 그 주체도 특정하지 못한 채,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 쪽으로 사람들을 유인한다. 이 가시적인 강제를 동반하지 않는 '헤게모니' 개념이, 오늘의 언어 제국주의를 분석하는 데에 대단히 유효하다는 것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언어 제국주의의 무서운 점은 그것이 총칼로 무장한 권력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 작용이라는 점이다. 가령 실제로 국제연합이 창설될 때 프랑스어에 국제적인 지위를 얻었던 것은 프랑스뿐 아니라 여러 프랑스의 과거 피식민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三浦信孝·糟谷啓介 엮음 2005, 372). 버나드 스폴스키Bernard Spolsky(2001, 110)는 영어가 국제적 권력을 얻기까지 영미가 직접적으로 한 일은 거의 없었다고 지적한다:

영어가 20세기에 세계어로 발전하게 된 과정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사실 수요가 공급을 항상 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어 사용 국가들의 언어 확산 노력들은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세계적 열망을 이용하려는 시도인 경우가 많았다. 영어에 대한 관심을 부추길 필요는 거의 없었다. 영어는 현대 기술, 경제 성장, 국제화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전세계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도록 하였다. 이런 움직임이 성공을 거두면 거둘수록 다른 사람들도 영어를 알면 얻게 된다고 여겨지는 권력과 성공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원하는 이유가 더 커지게 된다.

복거일(1998, 166-169)은 그러한 언어의 확장이 '망network 경제'라고 하는 현상 때문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메트카프의 법칙Metcalfe's Law'에 따르면, 사용자에 대한 효용으로 정의되는 망의 가치는 대체로 사용자 수의 제곱에 비례해서 들어난다"는 것이다. 즉, 많이 사용되는 '표준'이 열등하고 새롭게 대두되는 무언가가 우등하다고 해서 쉽게 전이shift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경제학적인 사정으로 인해 영어의 권력은 생각보다 더 공고하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런데, 이와 같은 권력 관계의 자각이 반드시 언어의 피식민 그룹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는 점은 흥미롭다. 오다 마사끼Masaki Oda는 "Linguicism in Action: Language and Power in Academic Institution"에서 영미권의 TESOL(Teaching of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 종사자들이 식민주의적이고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을 가지고 일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三浦信孝·糟谷啓介 엮음 2005, 128; Phililipson 2000, 117-121). 오다는 아끼 마에다Aki Maeda라는 일본인 대학생이 영국의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과정을 이수하면서 겪은 언어적 차별linguicism을 소개하면서 토베 스쿠트나브-캉가스Tove Skutnabb-Kangas가 말한 대로 언어가 지배와 통제의 도구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이론을 확인한다. 오다에 따르면 특히 영어 교육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권력 관계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는 영어 원어민과 비원어민의 차원에서, 다른 하나는 강사와 학생 사이에서이다.

이를 좀더 넓게 확장시켜 보면,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나라들과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나라들 사이의 권력 관계가 어떤 양상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영미는 영어의 네이티브인 동시에 한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이 스승-제자 패러다임은 (굳이 한국과 일본이 범유교문화권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이들 나라에서 자발적으로 영어를 배우려고 애쓰고, 영어 능력에 따라서 그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까닭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영어는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들어 제국주의적 지배 계급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한다.


결론: '실용'주의와 영어 이데올로기

실용주의란 무엇인가. 동녘판 『철학소사전』의 '실용주의' 항목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엮고 옮김 1990, 231):

우리의 표상, 개념, 명제 등은 객관적 실재에 대한 모상을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행동을 위한 규칙이라고 하는 테제가 실용주의의 이론적 핵심이다. 그에 따르면 진리는 명제와 객관적 사태와의 일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실제적 유용성, 즉 결과에 있다. 이러한 입장의 귀결은 어떤 성과를 내고 유용성을 가져오는 실천적 행위나 견해는 무엇이든 '확충된' 것이라고 정당화하는 철저한 상대주의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실용주의는 모든 도덕을 부정한다. 실용주의에서 볼 때 도덕은 편견의 체계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를 때 실제 생활에서 모든 인간들에 구속력이 있는 도덕적 규범이나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힐쉬베르거(1999, 760)는 "프라그마티즘에 있어서의 참된 것이란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때 이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라는 개념은 보통 애매하여 프라그마티즘은 사람들이 이 개념을 무엇이라고 이해하건 내버려둔다"고 소개한다.

즉, 실용주의란 철저한 주관주의이자 상대주의이다. 하지만, 힐쉬베르거가 지적했듯이 실용주의의 지향점은 모호하다. 실용주의 정부를 표방한 이명박 인수위가 영어 교육에 거품을 무는 것은 분명 경제적 실용주의 측면에서 영어 교육이 국부 창출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영어몰입교육을 비롯해서 그들이 주창하는 영어 교육의 방법론이 성과는 물론 그 부작용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의 영어 교육론은 특정한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단지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실용주의란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명박 인수위의 현재 태도는 좀 의아한 데가 있다; 영어 교육이 낼 수 있을 만한 '성과' 자체가 모호한 상황에서 무조건 불도저로 밀어부치는 양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몰입교육을 주창했다가 한 발 물러선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명박 인수위는 제반 언어에 대해 특히 무지함을 드러내고 있으며, 철저하게 실용주의로 무장한 듯하지만 실제로는 무척 빈약한 근거만을 내세우고 있다. '중무장한 아마추어리즘'이라고 불릴 만한 이들 정책은 분명 재고의 필요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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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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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浦信孝·糟谷啓介 엮음. 2005. 『언어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이연숙·고영진·조태린 옮김. 파주: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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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lsky, Bernard. 2001. 『사회언어학』. 김재원·이재근·김성찬 옮김. 서울:도서출판박이정.

Posted by 엔디
2, 3일간 틈나는 대로 복거일의 『소수를 위한 변명』을 읽었다. 아마 출판해인 1997년 이전에 신문이나 잡지에 게제된 글을 모은 책일 것이고, 그런 글들이 시사時事적인 부분과 관련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현재적으로도 꽤나 중요한 글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각각 독립된 글들이라 중복되는 부분도 얼마간 있었지만 책 전체를 꿰뚫는 생각은 자유주의와 합리성이었다.

모든 분야를 경제적 자유주의와 합리주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일관성이 있고, 끌리기까지 했다. 교장의 권위주의적인 태도가 문제가 되어 기간제 교사가 피해자인 것이 분명한 사건임에도 죽음 앞에서는 시야가 흐릿해지는 사회를 보면서 많이 답답해져 있던 터라 그런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화는 더 잘 이루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거부감이 드는 측면도 있었다. 교육도 수능점수를 토대로한 배급제에서 완전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나, 대통령 후보로 외국인은 어떤가 하는 의견들은 쉽사리 받아들여질 수 없는 부분이다. 사회의 구성원들을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합리적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경제인으로만 구분짓는 것 같아서 조금 기분이 나쁜 면도 있었다.

아마 그의 '영어공용어화'는 그런 의미에서 접근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어를 배우는데 엄청난 비용이 듦에도 그것이 국제사회에서의 통용율은 거의 0%에 가까운 상황이니 경제적인 측면만 생각하면 그것은 낭비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 것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거기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그런 생각이 들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합리적인 사고인 이상 비판할 수는 있지만 비난할 수는 없다.

다만, 그런 선택은 그가 제목으로 내세운 '소수'를 배제하기 쉽다는 생각은 든다. 어떤 재화가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만 소비된다는 것은 그 재화가 효율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재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적은 것이다. 때문에 수익성만을 가지고 그것을 재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닐까 한다. 물론 그는 그렇다면 그 수요가 적은 재화는 가격을 올리면 된다고 시장의 논리를 말하겠지만, 생필품이 아닌 이상 그 재화가 가격탄력성이 적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정치나 사회준거에 관계된 글들은 무척 재미있게, 탄복하면서 읽었지만 뒤로 갈수록 경제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와 지루하긴 했다. 그것은 내가 경제에 무관심하다기보다는 무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때가 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복거일의 『소수를 위한 변명』은 약간의 거부감을 인정하고서라도 좋은 책이고 이 시점에서 꼭 필요한 책이라고 하고 싶다.

소수를 위한 변명
복거일 지음/문학과지성사

Posted by 엔디
I. 서론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국제 사회에서 영어의 중요성이 점차로 강조되고 있다. 이미 여러 나라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했으며, 공용어로 지정하지 않은 나라에서도 제 1외국어로 영어를 배우는 비율이 매우 높다(복거일 1998, 170-171). 이 때문에 최근 우리 나라도 '영어공용화론'이라는 논쟁이 있었고, 잠재적으로는 지금도 상반된 주장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영어를 배우는 인구가 점차로 늘고 있지만, 영어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높다. 그것은 아마 미국에 대한 견제의 일부일 것이라 생각되는데, 모든 것을 경제의 논리로 환원시키는 신자유주의 논리가 거기에 스며있다. 그러나, 김종명이 인용한 독일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문화를 단순히 경제적 요인으로 격하시켜서는 안 됩니다."라는 발언(원윤수 2000, 149)에서 보듯이, 문화를 경제의 논리로만 판단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어떤 문화를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언어이다. 프랑스에서 최근 시행한 조사에서는 질문 대상의 69%가 프랑스어가 가장 중요한 문화재라고 답하였다고 한다(김춘미 1997, 88). 이 언어가 경제의 논리에 지배되려는 경향으로 기울어진 것이 눈에 띄기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 '영어공용화론'을 최초로 공론화시킨 복거일도 경제의 논리를 주로 그 논거로 펴고 있다.

약소국인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막강한 경제력과 이를 위한 효율성을 무기로 한 영어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다. 이에 영어의 영향력은 점차 커지고 있다. 이 현상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길을 찾아야하는지를 자세히 알아보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다. 이런 작업에서 프랑스처럼 자기 언어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그 관심을 구체적으로 정책에 반영하고 있는 나라에 대한 참고는 필수적일 것이며, 또한 그런 나라를 곧이 따라해서도 안 될 것이다.


II. 프랑스의 경우

프랑스의 경우에도 영어는 하나의 문제거리였다. 일터에서 쓰이는 영어가 점차로 많아지게 된 것이다(김종명 2000, 148). 에띠앙블Etiemble 교수같은 사람은 프랑스인들의 무절제한 영어사용을 개탄하여 조롱조로 프랑글레franglais라는 표현을 만들어 쓰기도 했을 정도다(주경복 1996, 46).

프랑스의 경우, 프랑스어가 차지하는 비율은 적지 않다. 그들은 독일이나 우리 나라처럼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으므로, '프랑스어를 쓰는가'가 문화와 나라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단적인 예로, 문학을 들어보면 이렇다. "프랑스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프랑스 사람이 쓴 문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어로 씌어진 문학"을 가리키는 것이다(송면 1996, 10; 송면 1973, 14-15).¹ 이렇게 중요한 프랑스어가 'DDD(Donald Duck Dialect)'에 의해 '오염'되고 있으니 프랑스의 정책이 이를 막는데 기우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여진다.

1994년,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이었던 자끄 뚜봉Jacques Toubon은 프랑스어 보호를 위해 이른바 '뚜봉 법Loi de Toubon'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영어의 영향력을 막기 위한 것이 그 주목적이었다. 이 '뚜봉 법'에 대한 입장은 크게는 두 가지, 조금 더 세분하면 세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찬성, 제한적 찬성, 반대가 그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의 근거가 하나로 같다는 것이다. 둘 다 '언어의 획일화에 대한 반대'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뚜봉 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당연히 "프랑스 내에서 불어만 쓰라는 것은 언어의 획일화"이며, "언론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것이다(이원복 1996, 196-197). 또, 찬성하는 사람은 찬성하는 사람대로 '뚜봉 법'의 취지는 "영어를 통해 진행되고 있는 획일화 및 미국 중심의 패권주의에 대한 경계"라며, 이는 언어의 획일화가 아니라 언어의 다양화를 위한 필수적인 선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안근종은 전하고 있다(원윤수 2000, 59). (그런데 이 '뚜봉 법'은 3,500개의 영어 단어 사용을 금하고 이를 프랑스어로 대체했는데, 사용과정에 억지가 많이 눈에 띄기도 한다. 이를테면 청바지Jean를 님Nîmes 산産 천 바지pantalon en toile de Nîmes라고 하는 것과 같은 억지이다(이원복 1996. 202-203).)

사실 프랑스는 특유의 똘레랑스tolérence 정신으로 상대적 소수자들을 용인해주고, 소수문화에 대한 보호정책을 펴고 있다. 당연히 다양한 인류 문화의 소중한 재산이며, 서로 다른 세계관의 거울(Humboldt)이라는 언어에 대한 다양화 정책은 당위성을 가진다고까지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영어에는 이렇듯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영어가 경제의 논리를 가지고 들어오기 때문일 것이다.


III. 우리 나라의 경우

우리 나라에서는 복거일과 민족주의자들이 영어공용화에 대해 치고받는 소모적인 논쟁을 하긴 했으나 실제적으로 논의된 것은 없었다. 그것은 지극히 비생산적인 논쟁이었다.

복거일은 21세기가 되면 영어가 '지구 제국'의 명실상부한 공용어가 될 것이고, 그 때가 되어 정보의 한 가운데 있기 위해선 인터넷 등에서 가장 많이 보는 말인 영어를 잘 해야 우리가 '지구 제국'의 중심부에 위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번역 등에 들이는 수고를 다른 쪽, 즉 생산적인 쪽으로 돌리면 훨씬 더 효율적일 것이라는 주장이다(복거일 1998, 179; 189-190).

반면 민족주의자들은 언어야말로 우리 민족을 나타내주는 가장 확실한 표식이라고 주장하면서, 복거일을 제지하고 나섰다. 「민족의 생명」(정소성, 『중앙일보』1999년 11월 29일), 「민족의 얼이 담겨있는 그릇」(현택수, 『조선일보』1999년 8월 31일), 「한국어에는 한국 민족의 역사와 전통과 정서가 담겨 있다」(박강문, 『새국어 생활』2000년 봄호), 「노예로서 편하게 사느냐, 경제적으로 어렵더라도 주인 노릇을 하면서 제멋대로 사느냐」(한영우, 『조선일보』1998년 7월 10일), 「어머니가 문둥이일지라도 클레오파트라와 바꾸지는 않을 것」(이윤기, 『조선일보』1998년 7월 13일) 등 제목만 보아도 민족주의의 열정이 풍기는 글들이다.


IV. 해결책은?

하지만 이쯤에서 다시 한 번 짚어야 할 것은, '문제'는 '양쪽 중에 어느 쪽이 옳은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의 목적은 최선의 방법과 최선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양쪽에서 좋은 점을 뽑아 보다 나은 해결책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언어와 사회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언어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국민 정신과 국민성을 반영한다는 것은 훔볼트Humboldt의 언어관이고, 언어가 인간의 경험을 단지 반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경험들을 규정짓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사피어Sapir의 가설이지만, 주변 환경(사회)과 언어가 "관련이 있다"고 하는데 대해서는 이견異見이 없어보인다. 노암 촘스키Noam Chomsky도 "언어는 인간을 규정하는 핵심요소"라고 하여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한학성 2000, 58). 에스키모의 말에 '눈[雪]'을 지칭하는 각기 다른 단어가 많이 눈에 띄고, 우리말에 rice에 해당하는 말―벼, 쌀, 밥 등이 많이 보이는 것은 이를 뒷받침해주는 논거로 흔히 사용되는 것 중 하나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회와 언어 어느 하나가 우위를 점하고 다른 하나에 일방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나, 사실은 안근종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사회와 언어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고 서로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원윤수 2000, 52-56). 즉, 사회가 변하면 이에 따라 언어도 변하게 되고, 반면 언어가 변하면 사회도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언어는 변한다. 사회는 늘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언어는 외부와의 접촉에서 가장 많이 변하는데, 그것은 두 문화의 접점에서는 상대 문화와 자기 문화의 서로 상이한 부분을 많이 목격하기 때문일 것이다. 컴퓨터와 같은 "새로운 문물"들이 그 예이다. 이런 "새로운 문물"들이 들어오면서 이를 표현하는 말도 같이 들어오게 된다. 여기서 또다시 주의해야할 것이 있는데, 언어가 변하는 것은 언어의 "타락"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남기심들(1997, 4)이 말했듯 "옛말이 타락해서 오늘날의 말이 되는 것이 아니고 변화해서 달라지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다른 문화와의 접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설령 우리가 접촉하는 대상이 소위 '굉장히 발달되지 못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의 문화의 질이 위협받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문화는 어느 한 쪽이 다른 쪽보다 낫다고 하는 판단이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레비-스트로스는 지질학의 비유를 들어, 아주 오래된 암반층이 최근에 형성된 암반층과 함께 있을 때 고대의 암반이 현대의 암반에 비해 열등하지 않은 것처럼, 흔히 '원시적'이라 일컬어지는 문화·관습이 열등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Leach 1998, 37). 또, 남기심들도 "미개사회(未開社會)의 언어는 미개하고, 문명사회의 언어는 더 발달되고 복잡한 구조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문화의 발전도(發展度)와 언어구조의 추상성이나 복잡성의 정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남기심 외 1997, 3). 그리고 그 각기 대등한 문화 중에서 가장 확실하게 구분되며 가장 총체적인 문화는 바로 언어이다. 다시 말해, 언어는 "문화는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주장의 가장 핵심적인 예가 되는 것이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이런 변별성은 언어의 특징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모든 각 언어는 서로 다르게 구조적으로 분절되어 있다. 그런 분절은 언어마다 다르다. 예를 들면 눈[雪]에 대한 어휘가 이례적으로 많은 에스키모 족의 언어와 영어를 비교할 때, 에스키모 족이 눈에 대한 어휘수가 많으므로 영어보다 우등하지 않은 것과 같다. 또, 프랑스어의 fleuve(강)와 rivière(하천)라는 단어에 대응하는 영어의 단어는 각각 river과 stream이지만, 양 언어 내에서 두 단어를 분절하는 양식이 다르다. river와 stream은 순전히 강의 크기에만 관련된 것이지만, fleuve와 riviere는 바다로 흘러가는 강fleuve과 바다로 직접 흘러들지 않는 강rivière이라는 식으로 다르게 분절하고 있다. 때문에 불어의 fleuve와 영어의 river는 비슷한 말이긴 하지만 꼭 같지는 않다(Culler 1998, 37-38). 어느 쪽이 더 나은 언어인가? 양쪽의 언어가 모두 필요하다.

한 언어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언어 습관에서 주로 쓰이는 '사라'라는 표현을 '접시'로 바꾸자는 주장이 오래 있어왔지만 사실은 '사라'와 '접시'는 그 쓰임이 다르다. '사라'는 큰 접시를 의미한다(복거일 1998, 131-132). 말이 이미 들어와 이런 지위를 획득하고 있는데 이를 언어의 '순수성'을 위해 없애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게다가 이런 행위는 통시적인 것을 공시적인 것에 적용하는 사례가 되기도 한다. 드 소쉬르(1990, 99)에 따르면 "언어는 그 구성요소의 순간 상태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규정될 수 없는 순수한 가치 체계"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언어는 본질적으로 우열을 가릴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순수한' 언어도 다른 언어나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몸바꾼 언어보다 열등한 언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어는 사회를 반영할 줄 알아야 하는데 '순수한' 언어는 그런 역할을 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회와 서로 충돌하게 되고, 급기야는 그 사회와 서로 맞지 않게 되어 버려지게 될 뿐이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지체cultural lag'―급속히 발전하는 물질문화와 비교적 완만하게 변하는 비물질문화간에 변동속도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사회적 부조화―이다.


이 시점에서 밀려들어오는 영어를 막으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그 빛이 바랜다. 그들은 '문화지체'를 일부러 조장하려는 사람들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들의 행동근거인 "언어의 다원화"도 마찬가지다. 언어의 다원화를 위해 다른 언어를 규제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이를테면, 파시즘을 규제하는 전체주의가 옳은가?) 하지만, 실제로 영어가 가지고 있는 모습은 기존의 '문화접변', '문화변동'의 양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영어의 '침입'에 반대하여 이를 규제하는 것도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 영어가 들어오는 출입구는 문화가 아니다. 영어는 경제의 문을 통해서 들어오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문화의 하나로써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효율적인 '도구'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언어의 강제이다.

우리의 경우, 일제 시대에 소위 '민족말살정책'이라는 것을 겪었다. '창씨개명'과 '조선어 탄압'을 주로하여 민족의 얼과 혼이 담긴 우리말을 없애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얼'과 '혼'은 문화이다. 우리 민족의 문화와 사상과 생각이 담긴 것이 우리말인데, 이를 뿌리채 뽑으려 하는 것은 언어에 대한 강제의 모습이다. 이것은 '문화접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강제'라 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언어(또는 문화)의 다양성을 방해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영어의 경우에는 좀더 위험한 모습으로 오고 있다. 이에 대해 안근종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원윤수 2000, 59-60).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오늘날 영어의 침탈 현상에는 이전의 언어 침탈 현상처럼 정치적 이유가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세계화와 표준화의 영향으로 영어에 대한 수요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증대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침탈을 받고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침탈 현상이 지닌 위험을 간과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는 방안 또한 종래와는 다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음모론적인 사고가 글을 지배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지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을 지적했다. 영어의 유입('침탈')에는 강제성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어가 문화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소리이다. 분명히 프랑스말과 영어와 우리말은 각기 다른데, 어느 하나가 "경제적으로" 더 편리하다는 이유에서 다른 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언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생각과 사상을 담는 틀'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하나이며 언어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문학을 예로 들어보자. 가령 서정주의 「자화상」의 경우에 이를 영역하였을 때, 과연 한 편의 시로써 손색이 없을 것인가?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자화상」과 이의 영역본과 일역본을 대조하여 영역본과 일역본이 잃고있는 시적 함의들을 밝히고 있다(유종호·최동호 1995, 131-135).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 "풋살구"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손톱이 깜한 에미" "甲午年" "外할아버지" "八割이 바람" "병든 수캐"와 같은 심상은 우리의 전통적인 삶과 그 터전에 밀착되어 있는 이를테면 기층적(基層的) 심상의 말들이다.

이런 말들이 가령 영역본에 있는 대로 "withered and pale as leek root(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 "green apricots(풋살구)", …, "the year of reforms(甲午年)", "it is wind that has raised the better part of me(八割이 바람)" 등으로 완전히 치환된다고 볼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영어는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회와 문화에서 매우 훌륭한 언어이지만 그것이 한국의 상황과 문화와는 맞지 않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영어 스스로도 아마 이런 한계에 부딪혀 세계 유일의 언어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책은 혼란을 미연에 방지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정책적으로 영어를 일뷰 규제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 할 수 있겠다.


V. 결론

영어는 결국 어느 나라의 말도 완전히 잠식하지 못한다. 하나의 언어가 다른 모든 언어를 대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실제로 깨닫는 것은 지금보다 훨씬 뒤일 것이며 그 때에는 혼란만 더 생기게 된다. 때문에 정책적으로 영어를 일부 규제하여 문화적 다양성을 유지하며, 영어도 또한 그 다양성 정책의 일환으로 보호받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해야할 일이다. 영어에 대한 규제가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에 대한 구체적인 규제안 마련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지금부터는 에너지를 그쪽으로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은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청바지를 도포바지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코너 킥'을 '구석차기'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태권도에서 '겨루기'는 어느 나라에 가도 '겨루기'이다. 또 똘레랑스tolérance를 '용인'으로 옮기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이 과연 본의를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런 문화적인 접촉으로 생긴 용어들까지 규제하는 것은 옳지 않고 단순히 경제성이나 효율성만을 따진 용어는 규제하는 것, 이것이 영어 규제의 한 기준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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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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