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평역 삼국지의 잘못옮긴 부분을 지적하고, 삼국지와 관련된 속설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책 자체의 목적이 앞의것에 있었고 서문이나 책겉의 광고글도 모조리 앞엣것에 대한 것이지만, 뒤엣것도 사실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특히 『유세명언喩世明言』이라는 소설집에 실렸다는, 사마모가 한나라 건국시의 영웅들을 삼국시대에 등장시켰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있는 이야기거리다. 이를테면, 한 고조를 도와 한나라의 건국공신이 되었던 한신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으니 후한 말에 조조로 다시 태어나게 하고, 한 고조 유방은 헌제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고 사마모가 염라대왕을 대신하여 판결한다는 식이다.

책의 앞부분은 역시 이문열 삼국지의 틀린 부분을 지적하는데 많은 힘을 쏟는다. 이문열이 터무니없게 옮긴 부분은 생각보다 많았다. 가령, 고대 중국어에서 "무장대소撫掌大笑"는 본래 박장대소와 같은 뜻인데 이를 "손바닥을 쓸며 크게 웃었다"라고 옮긴 부분은 현대 중국어에서도 무撫가 애무愛撫와 같이 "쓰다듬다"는 뜻으로 자주 쓰이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춘추 시대 초나라의 성득신成得臣을 "일껏 얻은 신하"라고 한다든가, "예양중인국사지론豫襄衆人國士之論"은 "예양의 중인국사론"이라는 뜻인데 "국사國士"를 아예 빼먹고 "예·양 땅의 사람들이 하는 말"이라고 옮긴 것 등은 옮기는 이의 성실성을 망각한 처사라 할 만하다. 성득신이라는 사람은 본래 중국 역사나 역사소설을 그다지 많이 읽지 않은 나는 모르니까 뭐라고 할 말이 없지만, 예양은 사마천 『사기史記』 '자객열전'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인물인데 이를 잘못 옮긴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유종호 선생은 『시란 무엇인가』의 「숨어있는 부호」에서 '숨어있는 부호'를 읽지 못하면 "두세 겹의 목소리와 울림"을 읽지 못한다고 했다. 유종호 선생이 직접 예를 들고 있듯이 그리스도가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한 것을 당시 사람도 못 알아들었는지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마태복음 27:47)라고 하지만, 사실은 시편 22편 1절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 말을 알지 못하면 이성복의 「정든 유곽에서」의 "엘리, 엘리 죽지 말고 내 목마른 裸身에 못박혀요 / 얼마든지 죽을 수 있어요 몸은 하나지만 / 참한 죽음 하나 당신이 가꾸어 꽃을 / 보여 주세요 엘리, 엘리 당신이 昇天하면 / 나는 죽음으로 越境할 뿐 더럽힌 몸으로 죽어서도 / 시집 가는 당신의 딸, 당신의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다.

또, 나귀의 얼굴에 '제갈자유諸葛子瑜'라고, 얼굴이 길기로 유명했던 제갈근의 성과 자字를 써놓으니 그 아들인 제갈각이 거기다 "지려之驢"라고 써서 아버지의 명예를 구했다는 것이, 나귀를 노새라고 옮기는 바람에 성적인 농담이 되어버렸다는 것도 흥미있는 이문열의 오류다.

삼국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읽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저자는 전문 한학자도 아니고 대학을 나온 사람도 아니지만, 삼국지를 열렬히 좋아하는 재중동포라는 조건이 읽기 괜찮은 책을 낼 수 있게 한 듯 싶다. 사실관계를 밝히거나 새로운 것을 알려주는 책에 적극적인 의미의 '평評'을 하기는 힘들다. 장점이라면, 지나치게 긴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원문을 소상히 인용하여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독자가 어느 부분이 잘못 옮겨진 부분인지를 쉽게 알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상투적인 비유나 과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눈감아줄만한 정도다.


삼국지가 울고 있네
리동혁 지음/금토

Posted by 엔디
출판도 유행을 따르는 것 같다. 아니, 내가 헤아려 보건대 출판이야말로 유행에 가장 민감한 분야 중 하나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셜록홈즈 전집이나 뤼팽 전집이 시일에 큰 차이를 두지 않고 두세 출판사에서 중복 출판된 것이 하나의 예가 될 것이며, 또 얼마 전의 '쥘 베른'의 중복 출판도 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유행은 '삼국지'다. 소설가 황석영이 『삼국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질 때 즈음하여 다른 출판사들은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섰다. 『삼국지』로 가장 많은 상업적 성공을 본 민음사나 정역正譯의 자부심이 넘치는 솔출판사의 온-오프라인 서점 마케팅은 꽤나 살벌했다. 그 와중에 나는 글 한편 '이링공 뎌링공' 만들어 '당첨'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기분은 그렇게 깔끔하고 깨끗하지 않다. '삼국지'라…. 상식적인 것부터 잠시 보자면 우리가 흔히 '삼국지'라 불리는 것은 진수가 쓴 동명同名의 역사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나관중이 각색한 『삼국지연의』를 말하는 것인데, 『삼국지연의』는 『수호지』, 『서유기』(혹은 『홍루몽』), 『금병매』 등과 함께 중국의 4대기서四大奇書의 하나다. 다시 말해 재미있는 소설작품이다. 그 안에서 삶의 지혜나 처세의 능란함을 배우기도 한다. 재미있으면서 지혜나 능란함을 배울 수 있다면 분명히 좋은 책이다. 그런데, 그것도 정도程度문제다.

다른 글에도 내가 썼듯이, 무명의 번역자가 옮긴 것이나 아동용 다이제스트판, 번역자도 표시되지 않은 '해적판' 등을 제외하고 중국문학자나 문인, 적어도 문文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의 번역만도 열을 헤아린다. 박태원, 이문열(민음사), 김홍신(대산출판사), 구용 김영탁(솔), 김동리·황순원·허윤석(박영사), 장정일(문화일보 연재), 황병국(범우사), 월탄 박종화(어문각/대현출판사), 정비석(고려원), 조성기(열림원), 연변대학삼국연의번역조(청년사)까지.

10여 개의 번역본을 헤아리면서 누구인들 한 가지 의심 하나 가지지 않을 수 있으랴. 모두가 정역正譯을 뽑내고, 자신의 『삼국지』가 진짜 '삼국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차라리 이문열은 "쓸모없는 노력의 중복"을 막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많이 반영시켜 평역評譯을 한다고 밝혔으니, 그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솔직하다고 하겠다.

황석영의 『삼국지』가 나온 것은 바로 이 시점이다. 듣자하니 창비의 수장(?) 백낙청 교수까지 황석영을 독려하여 번역작업을 진착시켰다고 한다. 입술 끝에서 씁쓸함을 느꼈던 것은 그 말을 듣고서가 아니었나 싶다.

황석영 자신도 중복출판에 대한 부담감은 그대로 떠앉지 않았을까 싶다. 모든 '삼국지' 번역자가 그러하듯이 황석영도 변명조의 역자 서문을 실었다. 역자는 말한다.

『삼국지』의 줄거리는 원래 정통역사서에서 출발해 여러 시대에 걸친 민중들의 구전설화와 재담, 연희·연극 등의 공연예술, 작가·문인들의 창작이 덧붙여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열 중에 일곱이 사실이라면 나머지 셋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이 나머지 셋이야말로 각 시대를 통해 끈질기게 이어져내려온 민중들의 꿈과 소망이 반영되어 있는 부분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보다 더욱 중요한 역사의식이다.

특히 원작자인 나관중의 정치적 입장은 당대 민중의 인의론(仁義論)과 한족 정통성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나관중은 이민족 원나라에 항거하는 농민봉기에도 가담했으며, 그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장사성(張士誠)과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천하통일의 기초가 된 조조의 위나라보다 유비의 촉한을 중심으로 줄거리가 서술되고 있는 당연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조조는 귀족이었고 손권도 강남 명문제후의 후손이었지만, 촉한의 유비·관우·장비는 물론 제갈량까지도 당대 백성들과 거의 같은 몰락한 선비거나 지방 무뢰배에 지나지 않았다. 유비가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의리를 지키느라고 여포에게 여러 차례 시달린다든가, 세력의 근거지가 될 한중땅을 단번에 차지할 수 있는데도 도덕적 대의명분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가까스로 기반을 마련하는 과정을 보면 『삼국지』가 당대 민중들과 더불어 추구하려 했던 가치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관운장이 온갖 영예를 뿌리치고 조조를 떠나 필마단기로 유비를 찾아가는 과정이나 선주 유비와의 약속 때문에 어리석은 유선을 보좌하다가 위나라 정벌을 떠나기에 앞서 제갈량이 「출사표」를 올리는 대목 등에서 우리는 뜨거운 감동과 함께 눈물에 젖는다. 그러나 인덕과 의리를 추구한 유비 삼형제와 제갈량 등의 촉한은 실패한다.

의(義)를 추구했지만 현실에서 실패하고 좌절한 영웅을 기리는 백성들의 풍조는 동서고금이 다 같은데, 일본에서는 오히려 조조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때로는 그를 중심으로 『삼국지』의 기본 줄거리를 전개하는 작품도 있다. 이는 패권과 현실에서의 힘을 추구하는 가치관에서 비롯한 것이다. 나는 저러한 이른바 '현대적 해석'에 대해서 백성들의 보편적인 염원을 훨씬 중요하게 여기는 축이다. 따라서 나는 원본의 관점과 흐름에 적극 찬동했고, 이것이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의 『삼국지』에 대한 일관된 애정의 원천이기도 하다.

고전은 무엇보다도 원문대로 전달이 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누구나 그것을 읽고 나름대로의 가치관에 따라 해석하고 비판하고 재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고전의 정신이야말로 무한한 재생산의 보고이다. 『삼국지』의 형성과정이 그렇듯이, 천여년 동안 여러 시대와 나라를 거치면서 투영된 당대 백성들의 소망이며 꿈은 역사적으로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변명과 추측이 난무하여 일관성을 결하고 있는 이 옮긴이의 말은 『장길산』작가의 번역이라는 이미지에 그야말로 밀려나고 있다. 그는 나관중이 원에 항거하는 농민봉기와 그 지도자인 장사성과 관계가 있다는 '설說'을 근거랍시고 들며 "위나라보다 유비의 촉한을 중심으로 줄거리가 서술되고 있는 당연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하고, "인의론(仁義論)과 한족 정통성"에 근거를 둔 정치적 입장을 견지했다고 하다가 유비 등이 "무뢰배"였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민중과의 유대는 황석영이 '힘'의 심볼로만 파악한 조조의 위魏나라에서 더 잘 보인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위진남북조시대'라고 부를 때, 우리는 촉蜀과 오吳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동양사학계가 '위'를 삼국의 대표격으로 본 이유는, 조비가 헌제의 양위를 받았다는 것도 작용했겠지만, 역사의 정통성을 당대 민중과의 유대와 민중을 위한 정책의 유무로 판단하기도 하는 사정 때문이다. 당시 위는 한나라 때부터 있었던 '둔전제'를 발전시킨 '전농부 둔전제'를 시행하였는데, 빈농貧農에게는 토지뿐만 아니라 밭갈이 소와 농기구, 그리고 종자까지 대여해 허창 주변에서 둔전시키기도 하였다.

더구나 인의론이란 무엇인가. 『삼국지연의』의 서두에 등장하는 '고조참백사'는 유劉씨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내포를 담고 있다. 유비가 결국 황제가 된 것도 (적어도 명분상으로는) 백성들의 열망과 염원과는 별 관계없이 그가 옛 왕족의 후손이라는 것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보편적인 염원을 훨씬 중요하게 여기는 축"이라서 나관중의 역사인식에 찬동한다는 것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무지의 소치所致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고전은 원문대로 전달되어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그의 변辨에 대해서도 우리는 충분히 반박할 수 있다. 그것은 『월탄 삼국지』나 '이문열『삼국지』'는 또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정역正譯을 표방하며 나왔고 어느 정도 인정도 받고 있는 '구용『삼국지』'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구용『삼국지』'의 비교우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럴 뜻도 없지만 그럴 능력도 없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황석영이 구용의 작품이 있음에도 새롭게 '삼국지'를 낸다면 구용의 작품에 대해서도 어떤 입장 정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황석영 삼국지에 의의가 전혀 없지는 않다. 중국 고대 인물화의 권위자라는 왕훙시의 삽화를 실었다는 점 이외에도 흔히 번역대본으로 삼는 '모종강본'을 버리고 원본인 '나관중본'을 번역텍스트로 삼았다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창작과비평사'와 같은 출판사가 『삼국지』를 출간하는 것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민음사 관계자가 "본래 영웅사관에 입각해 있는 삼국지는 '민중작가' 황석영과는 어울리지 않는 측면이 있다"고 말한 것은, 더구나 그 지면이 조선일보이고 보면, 속이 뒤틀리는 대목이긴 하지만 어쨌든 맞긴 맞는 이야기다. 『삼국지』의 원본이 여기 있는데, 창비의 원본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삼국지 1
나관중 지음, 황석영 옮김, 왕훙시 그림/창비(창작과비평사)

Posted by 엔디
"'삼국지'는 없다"고 누군가가 자신의 '삼국지' 번역본 서문에서 말했다. '삼국지'는 홍수처럼 많이 출간되지만 진짜 '삼국지'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문열, 김홍신을 대표로 하여 정비석, 박종화, 조성기는 물론이고 멀리는 박태원 가까이는 황석영까지 당대의 글쟁이와 문장가는 삼국지 번역을 한 번씩 해보려는 욕심이 있는 모양이다. 이문열이 그 서문에서 말한 의미로 "쓸모없는 노력의 중복"이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 모두는 '역자 서문'에서 출간의 변辨을 한 마디씩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출간의 변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번역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이다. 이문열은 '평역 삼국지' 서문에서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를 "거의 대역이 가능할 정도로" 모본을 충실히 따랐다고 하고 있고, 조성기는 "삼국지는 없다"고 쓰면서도 이례적으로 하나의 예외를 두고 있다. 그만큼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는 시기적으로도 선구적이지만, 내용의 충실도에 있어서도 결코 이후의 번역본에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앞선다.

솔판 『삼국지연의』의 표지를 열면 진수의 '삼국지'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는 글이 나온다.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역사'가 아니라 '역사소설'이라는 점이다. 그 조어造語는 '역사'보다 '소설'에 방점을 찍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렇다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모름지기 한 편의 문학작품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가 응당 대접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번역의 대상인 원텍스트를 아무런 가감加減없이 그대로 옮겼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가 '삼국지연의'를 하나의 문학작품이라고 보는 이상 우리는 그것의 완전성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다른 모든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삼국지연의'의 텍스트도 열려있다. 그러나 그 열림은 외부로 향한 열림이지 내부로 역류하는 열림은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삼국지'의 첫머리에 나오는 고조참백사高祖斬白蛇의 고사만 해도 그렇다. "한나라는 한 고조가 흰 뱀을 죽이고 대의를 일으킨 데서 시작하여 마침내 천하를 통일한 것"이라는 역사인식은 '삼국지연의'의 전개에서는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수의 '삼국지'와의 근본적인 차이점, 촉한정통론을 담보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당수의 다른 번역본에서는 이 중요한 부분이 삭제되어 있거나 대체되어 있다. 우리는 유비가 사금을 모아 산 차茶를 강에다 내다 버리는 유비의 어머니 이야기에 알게모르게 길들여져 있다. 이문열의 삼국지에서도 '고조참백사'의 장면은 아예 없고, 상황 설정도 무척 자의적이다.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는 '삼국지연의'의 보다 정확한 이해를 담보시켜 줄 것이다. 그것은 어지러운 홍수의 흙탕물 속에 하나의 정수가 되어 줄 것이다.

삼국지연의 1
나관중 지음, 김구용 옮김/솔출판사

Posted by 엔디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