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탄압' 때문에 운영을 할 수 없다"고 우는 소리를 하는 《동아일보》가 택해야 할 길은 정해져 있다.

'광고 탄압'이라고 하니까 70년대의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그 때의 《동아일보》는 대단했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박수로 채택하였다. 이것이 정부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에 박 정권은 그 해 12월 16일부터 광고주들을 압박하여 《동아일보》에 광고를 주지 못하도록 했다. 《동아일보》는 75년 3월 결국 사주가 정부에 굴복할 때까지 한동안 백지광고 또는 격려 광고로만 채워졌다(강준만 2000, 486-490). 《동아일보》 스스로도 당시 광고 탄압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東亞日報 민족과 더불어 80년'이라는 글에서 상당 부분을 할애하여 이 광고 탄압 사건을 다루고 있다.

Daum 아고라 글 블라인드 공지
어쨌든 지금 우는 소리를 하는 《동아일보》에게 문제는 국가 권력에 의한 광고 탄압이 아니라 시민 결의의 '광고 탄압'이다. 지금 《동아일보》는 꽤나 급한 모양이다. 《동아일보》는 불과 며칠 전 사설을 통해 자못 비장한 목소리로 "본보는 민주주의와 언론자유의 본질을 짓밟는 어떤 세력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언론자유를 수호할 것임을 다짐한다."라고 말했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그 '언론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라는 것이 다음 아고라의 글을 블라인드 처리 하는 등 언로를 막는 방법이었다는 사실이다. 《동아일보》가 진정 언론자유를 원한다면, 다른 방법을 택해야 마땅했다.

1. 조중동이 택해야 할 길

늘 언론자유를 주장했던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가 택해야 할 길은 명백하다: 신문 값을 올리는 것이다.

한국의 신문 값은 너무 싸다. 한국신문협회국내 신문 구독료 변화 연혁 자료에 따르면 2002년부터 500원 하던 것이 최근에 그나마 올라서 이제 600원이다. 알다시피 《경향신문》과 《한겨레》의 구독자 수가 많이 늘어서 "자칫 유동성 위기 등 경영상의 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예견도 있을 정도다. 신문 값이 너무 싸서 구독자가 많을수록 손해를 본다는 얘기다. 신문이 신문 값을 받을수록 손하라면, 신문은 무얼로 먹고 사는가: 바로 광고다. 한국의 이야기다.

사실 나는 이 글에서 약간 이상주의적인 말을 하려고 한다. (이 실용주의의 시대에!) 하지만 언론이 제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이상주의가 꼭 필요하다. 아니, 사실은 내가 하려는 말이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신문 값이 너무 싸다는 이야기는 바로 《중앙일보》 사주인 홍석현이 자주 했던 말인 것이다. 그러던 2004년 《중앙일보》가 구독료를 인하하면서 '덤핑' 논란이 일자 《중앙일보》 측은 이렇게 말했다: "《중앙일보》 한 부당 제작비 중 인건비를 제외한 신문 용지대와 잉크값 등 순수 재료비는 5500원인데 이를 어떻게 덤핑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리고 그에 대해 다른 신문들이 《중앙일보》를 맹비난하면서 인용했던 것이 홍석현의 말이었고, 이에 덧붙인 말이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성'이다. 내 말이 그 말이다. 나는 언론이 자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는 신문 값을 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언론이 정치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노무현만큼 언론에게 두들겨 맞은 대통령이 또 있을까. 반면 경제 권력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역시 꽤 오래된 이야기다: 손석춘은 《세계일보》의 '삼성의료원 부실 기사'와 서울신문의 '한솔 뇌물사건 연쇄연루' 기사 등을 비롯하여 경제 권력에 무릎 꿇은 신문의 이야기를 길게 전한다(손석춘 1997, 111-121). 그들이 경제 권력에 약한 이유는 그들이 광고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수익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2. 신문 값과 광고 수입 비율

손석춘(1997, 117)은 기자협회에서 1995년에 조사한 '신문수입 중 광고수입 비중'을 싣고 있다. 이 표에 따르면 지방지와 경제지를 제외하고는 《조선일보》가 가장 높은 광고의존도를 보여주고 있다.

신문 광고비율(%) 신문 광고비율(%)
서울신문 74.5 경인일보 72.7
세계일보 73.2 부산매일 85.8
조선일보 84.9 부산경제신문 95.3
한겨레신문 72.4 경남신문 79.7
서울경제신문 90.4 대전일보 75.4
강원일보 76.2 인천일보 79.4
광주매일 84.3 전남일보 73.5
국제신문 87.8 제주신문 72.1
[표1] 신문수입 중 광고수입 비중 (기자협회, 1995)

이런 상황은 현재도 마찬가지여서 미디어경영연구소가 2004년 발표한 '신문 광고·판매 매출 비교'를 보면 전국지의 광고수익 대 판매수익의 비율은 82.5% 대 17.5%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또 신문발전위원회가 공개한 2005회계년도 일간신문의 구독수입광고수입 자료(pdf)를 보아도 전체 수입 가운데 구독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개 30%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건 대체로 한국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바로 이웃 일본만 해도 한국과는 다르다. 미디어오늘이 인용한 일본신문협회의 자료는 일본 신문들이 구독료를 인상한 결과 1992년 이후 판매수입이 광고수입을 앞지른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본신문협회의 『일본신문 2003 DATA BOOK』에는 일본 신문의 판매 및 광고수입의 비중이 잘 나타나있다(신인섭 2004, 18).

연도 판매수입(%) 광고수입(%)
1995 60.2 39.8
1996 58.9 41.1
1997 58.6 41.4
1998 60.1 39.9
1999 60.4 39.6
2000 58.7 41.2
2001 59.7 40.3
2002 62.2 37.8
[표2] 일본 신문의 판매, 광고수입 (일본신문협회, 2003)

이제 눈을 유럽으로 돌려보자. 유럽 신문들은 대체로 광고수입 비중이 낮다. 대표적인 유럽 신문의 하나인 프랑스의 《세계Le Monde》지의 경우 광고수입 비율이 38%에 불과하다. 이것은 최근 증가한 숫자로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광고수입 비중은 30% 정도로 유지되었다(최연구 2003. 69). 그밖에도 일반적으로 서구 신문의 광고 수입 비중은 무척 낮다. 캐나다나 미국 등 북미권 언론사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광고수입 비율이 60% 내외이거나 50% 미만이 된다(신인섭 2004, 16).

  판매수입(%) 광고수입(%)
이딸리아 46 54
영국 40 60
프랑스 53 47
독일 57 43
노르웨이 37 63
캐나다 21 79
[표3] 서구 수개국의 판매와 광고 비율 (세계신문협회WAN, 2003)

3. 미국의 광고수입 비율과 지방지의 특성

미국의 경우는 광고수입이 상당히 높은 편으로, 한국 신문보다도 그 비율이 높다고 볼 수도 있다.

  판매수입(%) 광고수입(%)
1980 73.0 37.0
1985 76.7 23.3
1990 78.7 21.3
1995 78.8 21.2
2000 82.2 17.8
[표4] 미국 신문의 광고, 판매수입 (미국 신문협회)

그러나 미국의 경우, 전국지라고 할 만한 것이 《미합중국 오늘USA Today》 외에는 없다시피 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수많은 지방지들에는 지방의 작은 회사 광고도 많이 실릴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부고 광고 같은 것도 30달러 정도면 낼 수 있다고 한다(출처: 원문한국어). 그래서인지 미국 신문에서 전국 광고의 비중은 15~16%밖에 되지 않는다. 반면 소매광고가 36~40%를 차지하고, 안내 광고가 44~48% 정도를 이룬다(신인섭 2004, 17).

또, 미국은 광고 단가 자체가 훨씬 싸다. 임동욱(1998, 10)에 의하면 미국의 광고 단가는 한국의 1/4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면 미국에서는 작은 중소기업이라도 신문에 광고하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손석희도 여러 강연에서 "MBC도 수신료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는데, 그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렇게 함으로써 "중소기업도 공중파에 광고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수 있기 때문이고 하였다.

국가(신문) 단가
한국(조선·중앙·동아·한국) 7750만원
한국(기타) 4150만원
미국(월스트리트 저널) 1880만원
일본(요미우리) 3300만원
[표5] 한국, 미국, 일본 신문의 전면광고비 비교 (임동욱, 1998)

그러므로 미국의 경우는, 광고의 비중이나 광고 단가 등의 요인으로 보아, 신문이 자본(권력)의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가능성이 한국보다 적을 수 있다. (실제로 영향력을 비교해서 적다는 뜻은 아니고, 적어도 그럴 개연성만은 있다는 말이다.)

4. 무가지와 조중동

무가지는 공짜 신문이란 뜻으로, 독자들에게 무료로 신문을 나누어 주는 대신 광고로 경영을 해 나가는 신문을 말한다. 《메트로》나 《포커스》, 《AM7》 등 많은 무가지 때문에 스포츠신문은 물론이고 일간지들도 몸살이다. 한국만 그런 것은 아니다. 프랑스에서도 《메트로》나 《20분20 minutes》과 같은 무가지 때문에 기존 일간지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피가로Le Figaro》지와 《해방La Libération》지가 1.2유로(약 1900원), 《세계Le Monde》지가 1.3유로(약 2100원)이므로, 프랑스의 신문값은 비싼 편이기 때문에 어려움은 클 것이다.

무가지는 무료이기 때문에 광고 수익만으로 경영을 해야 한다. 그래서 무가지의 경우 광고 지면이 뉴스 지면과 비슷하거나 더 많다. 2003년 최경진 교수팀이 3개 일간지를 3일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메트로》, 《포커스》, 《AM7》의 광고 지면은 평균 48%에 이르렀다. 또 2004년 《미디어 오늘》이 1월 1일부터 16일까지 조사한 결과도 전체 지면의 44~52%가 광고임을 보여준다.

신문 광고 비율(%)
메트로 53
포커스 50
AM7 41
평균 48
[표6] 무가지 광고비율 (최경진, 2003)
신문 광고 비율(%)
메트로 46.7
포커스 51.6
AM7 44.1
[표7] 무가지 광고비율 (미디어오늘, 2004)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가지를 수준낮은 신문이라고 폄하했던 일부 일간지들의 광고 비율이 무가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김춘식 교수는 조중동의 2002년 전체 지면 중 광고 비율이 45.5%에 달한다는 것을 밝혔다. 이처럼 광고 비율이 높은 것은 한국의 특이한 현상이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2003년 2주간 국내외 신문의 광고 비중을 조사하여, 한국 신문의 광고 비율을 외국과 비교하였다.

매체 조선 중앙 동아 한겨레 경향 한국 NYT The Times Le Monde 아사히
광고 면 58.72% 59.39% 58.02% 42.22% 35.47% 46.96% 39.35% 42.27% 13.96% 46.97%
광고 없는 면 0.52% 1.30% 5.47% 10.58% 25.42% 5.11% 43.18% 8% 34.17% 3.29%
[표8] 한국과 외국 신문의 광고 비율 비교 (민언련, 2003)

민언련의 조사 결과를 보면 조중동은 광고 지면 자체만 가장 많은 것이 아니라 아예 광고가 없는 면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돌이켜보면 과거 박 정권이  《동아일보》에 대한 압박 카드로 광고 탄압을 택하게 된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조중동이 스스로에 대한 시민들의 심판을 '광고 탄압'을 여긴다면, 그런 탄압을 받지 않기 위해 광고 비율을 스스로 줄이고, 판매 수익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야 마땅하다. 그러면 (정말 본인들의 논지가 옳다고 믿는다면) 시민들의 '광고 탄압'에도 아랑곳 않고 스스로의 논리를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또한 정연구 한림대 교수의 '신문 무료화 현상과 저널리즘'을 참고해볼 수 있다. 정 교수는 그 글에서 신문의 정가(1달 구독가)가 2만원이 되더라도 "넉넉한 내용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덧) 광고와 소비자 주권

동아일보는 시민들의 불매운동을 두고 사설에서 "언론자유 유린이자 기업경영 방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김기창 고려대 법대 교수가 지적했듯이 소비자는 스스로의 소비를 스스로 통제할 권리가 있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알리고 동참할 것을 설득할 권리도 있다.

김광수 고려대 언론학 교수가 2005년 발표한 '광고와 언론'(pdf)이라는 글을 보면, CBS가 에미 상을 받은 드라마를 재방송하면서 광고주인 P&G의 요구에 따라 일부 에피소드를 취소한 사례가 나온다. P&G는 총기 통제, 낙태, 컬트 등의 기사 근처에 광고를 싣지 않기 때문이다. P&G는 또, 2000년 파라마운트 텔레비전의 토크쇼 진행자가 동성애를 생물학적인 일탈이자 성서에 배치되는 행위로 간주하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광고를 취소하기도 하였다.

Notable Sinclair advertisers

sinclairaction.org에 올라왔던 광고주 목록.

김광수 교수가 든 사례 가운데에는 좀더 정치적인 사례도 있다: 싱클레어 계열의 방송사에서 부시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케리를 공격하면서, 진보적 시각은 제외하고 보수적 논평만 방송하자 스테이플즈 사는 이 방송사에 대한 광고를 철회했다. 이 철회는 시민단체가 스테이플즈 쪽에 철회 압력을 가했고 회사는 이에 동참하여 벌어진 일이었다. 시민들은 sinclairaction.com이라는 사이트를 만들어 광고주를 압박했다. 이 과정에서 스테이플즈가 이 운동에 동참하여 광고를 뺐다는 워싱턴포스트 기사도 등장했지만, 이는 오보로 밝혀졌다. 중요한 것은, 광고주를 압력하는 류의 시민행동이 용인될 수 없는 사안은 아니었고, 오보까지 날 정도로 효과적일 수 있다는 개연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2008. 6. 26. 12:18 추가)  물론, 이 과정에서 미국의 수사기관이 시민단체를 구속 수사했다거나 그럴 방침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없다.

시민들은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소비할 권리가 있으며, 광고주 역시 자신의 소비자인 시민들의 뜻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를 두고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억지다. 오히려 공권력으로 정당한 소비자 운동을 막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라고 하겠다.

한 가지 더 덧붙인다. 시민들이 국가를 상대로 들고 일어난 '쇠고기 정국'의 촛불문화제 역시 정당한 소비자 주권이 아니겠는가?

참고문헌

강준만. 2000. 『권력변환 한국 언론 117년사: 1883-2000』. 서울: 인물과사상사.
김광수. 2005. "광고주의 언론에 대한 영향력 고찰--미국 사례를 중심으로". 실린곳: 『관훈저널』.
신인섭. 2004. "우리 나라 신문광고요금". 실린곳: 『KAA저널』. 2004년 7~8월. 서울:한국광고주협회. 14-24쪽.
임동묵. 1998. "세미나 중계". 실린곳: 『KAA저널』. 1998년 10월. 서울:한국광고주협회. 10-13쪽.
최연구. 2003. 『르 몽드』. 살림지식총서048. 서울:살림.

Posted by 엔디
1
저널리즘Journalisme은 말 그대로 하루하루jour의 일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시사 프로그램이나 뉴스 뿐만 아니라 오락 프로그램까지도 포괄하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오락 프로그램까지도 시대를 관통하는 흐름을 담고 있다. 그들은 항상 대립되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데, 지금은 '성장 대 분배', '개혁 대 보수'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언론을 흔히 개에 비유하여 감시견watch dog, 애완견lap dog, 경비견guard dog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한다. 우리는 5공시절에 철저하게 애완견의 역할을 수행했던 언론을 보아왔다. '보도지침'이나 '땡전뉴스'는 이제 유명한 얘기가 되었다. 또 이를테면, 《누가 한강의 자갈을 보았는가》라는 프로그램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저 프로그램에 따르면 한강의 자갈을 본 사람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며, 한강종합개발은 그의 공로다. 여기에 대해서는 좀더 깊은 검토와 성찰이 필요하겠지만 애완견의 대표적인 사례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심지어 그때는, '거리의 편집인'이라는 말까지도 등장했을 정도다. '거리의 편집인'들은 신문을 꼼꼼히 훑어보고 팔릴 만한, 이슈가 될 만한 기사들에 빨간 색연필로 표시해두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가리키는 기사를 보고 신문을 샀다. 실제 신문의 편집인들은 허수아비였기 때문이다. 신문의 편집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는 언론이 경비견의 역할로 이행된 상태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즉, 언론이 체제수호의 역할을 맡으며 기득권에 편입되었다는 주장이다. 김중배 전 MBC 사장은 수년 전에 "지금부터 언론이 싸워야 할 대상은 정치권력이 아니라 자본이다"라고 말했다. 나도 그 당시엔 무슨 소리인지 잘 몰랐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충분히 동의할 만한 내용이다.

어떤 면에서는 지금의 언론은 잠자는 개sleeping dog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프로그램이 오락화되어가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무서운 동질화이다. TV 연속극들의 '불륜의 강도强度'는 점차 높아지고 있다. 점차 쇼프로그램이나 연예인들의 토크쇼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오락 프로그램'으로 구분된 것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시사프로그램이나 교양프로그램도 뚜렷한 오락화·연질화軟質化 현상을 보이고 있다. 《미디어비평》이 《신강균의 사실은…》으로 바뀐 것에서 우리는 그 한 예를 볼 수 있다. 자연 도큐멘트리들도 점차 극화劇化되고 있고, 《경찰청 사람들》류의 비교적 오락성짙은 교양프로그램도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다.

《손석희의 시선집중》이나 《100분 토론》역시 청취율/시청률에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다시말해 오락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시선집중》의 공격적인 질문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것이 청취율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100분 토론》에서 그것은 특히 토론자를 정할 때나 토론 주제를 정할 때 고민의 핵으로 작용한다. 인기있는 토론자를 세우고자 하는 욕심은 늘 있지만, 그러면 또 항상 같은 사람을 세우게 된다. 또, 교육이나 사회 현안에 대해 토론을 하고 싶지만, 정치 문제가 아니면 시청률이 높게 나오질 않는다.

스스로는 '정도定道'와 '금도禁道'를 지켜야 하지만, 시청률이 지나치게 낮으면 프로그램이 '의미'를 잃게 되기 때문에 무작정 오락성을 배척할 것만은 아니다. 그 중간점을 열심히 찾아가는 것이 《…시선집중》이나 《100분 토론》의 목표가 될 것이며, 언론의 목표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2
지금 MBC의 존재 양상은 모순적이다. '공영방송'이라는 직함은 갖고 있지만, 운영은 모두 광고로 충당된다. 그래서 나는 한참을 MBC도 시청료 받아야 한다고 여러 곳에서 언급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름뿐인 '공영방송'이 있다면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진짜 공영방송화 시키는 방법과 아주 민영화를 시켜는 방법이 있지만, 나는 시청료 등의 지원을 통해 좀더 공영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진하게' 생각해보면 시청료 2000원 내면, MBC의 광고 의존도가 줄어들 것이고, 그러면 광고 단가를 낮출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 15초짜리 광고 하나 단가가 700만원정도다. 더구나 이것은 하루만 하거나 한달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훨씬 더 장기계약을 해야만 광고 계약을 맺을 수 있는데, 이를테면 이것은 중소기업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광고 단가가 낮아지면 중소기업도 공중파 방송에 광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말로만 중소기업 육성 운운하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더 사실적이지 않은가.

또 대기업의 경우도 광고 단가 인하로 얻은 실질적인 생산비 저하를 통해 제품 가격을 동결하거나 낮출 수 있을 것이다. '순진하게'만 생각하면 소비자들은 시청료의 얼마쯤은 이런 가격 인하를 통해 돌려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3
오늘 특강 내용은 인터넷에 무분별하게 올리지 말아달라. 예전에도 내가 한 말이 인터넷에 오른 적이 있는데, 큰 소동이 일어났었다. 지금 내가 한 특강 중에서 몇몇 부분만 오려서 신문이나 인터넷에 게제가 되면, 사람들은 맥락을 모르기 때문에 흥분할 수 있다. 나는 인터넷의 문제점도 거기에 있다고 본다.

말을 잘라서 게시하면 맥락context은 사라지고 문장text만 남고, 역사history는 사라지고 얘기stroy만 남는다.
Posted by 엔디
르몽드
『르 몽드』
최연구, 살림.
2003년 12월 30일 초판.

<ㅉ=69>르 몽드 광고 수입은 38%

르 몽드의 1년 매출액은 1999년 기준으로 2억3천5백만 유로(약 2,700억 원) 규모이다. 그런데 르 몽드 총매출액 중 신문 판매를 통한 수입은 2000년 기준으로 전체 수입 중 62%이다. 반면 광고 수입은 38%이다. 이 수치는 장-마리 콜롱바니 회장이 르 몽드를 이끌면서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광고 비중을 대폭 늘린 이후의 수치이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르 몽드의 수입 구조는 구독료 수입(지대)과 광고가 각각 70%, 30% 정도였다. 어쨌거나 광고 수입보다 신문 판매 수익이 절대적으로 많다는 것은 이 신문이 광고주인 대기업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의 언론은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일 수는 있어도, 광고주인 기업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르 몽드는 이런 자본주의 언론의 한계를 처음부터 자각했고, 경제권력(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 광고보다 판매 수익을 우선으로<ㅉ=70>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초지일관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 권력으로부터의 재정적 독립은 르 몽드의 독립성을 뒷받침하는 토대이다. (한편 우리나라 신문은 어떤가. 우리나라는 그 구성 비율이 정반대이다. 우리나라 주요 일간지의 재정구조를 보면 광고 수입이 평균적으로 신문 재정의 약 70%를 웃돈다.)

이처럼 광고 수입을 제한하여 언론의 독립성을 견지하고 있는 르 몽드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1985년부터는 광고 업무를 아예 자회사로부터 분리시켜 편집과 광고의 유착 관계를 근원적으로 '단절'시켰다. 르 몽드는 이런 면에서 여러 가지로 독립 언론의 모델이 되고 있다.

그러나 르 몽드가 최고의 지성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독특한 소유 구조나 재정적인 독립성 때문만은 아니다. 르 몽드는 분명한 색깔과 논조를 가지고 있는 소신 있는 언론이다. 기사의 깊이와 세련된 분석은 단연 타 신문의 추종을 불허한다.

르 몽드는 '모든 권력(정치권력과 금권)으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한다. 하지만 독립성과 중립성은 다른 개념이다. 르 몽드는 양비론처럼 모호한 입장을 표방하거나, 중립성을 내세우는 회색 언론은 결코 아니다. 르 몽드의 입장은 오히려 분명하고 명확하다. 특히 인종주의나 극우 이데올로기에 대한 르 몽드의 입장은 비타협적이기까지 하다.

프랑스 언론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정치적 색깔을 분명히 갖고 있고 사설의 논조도 일관성을 갖는다. 르 몽드의 목소리는 진보적이다. 르 몽드는 프랑스 지성들이 그러하듯 자신과<ㅉ=71>다른 의견에 대한 정치적인 공격을 가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언론이 정치인이나 정당, 정치 세력에 대해 색깔 공세를 퍼붓는다는 것은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상상할 수도 없다. 프랑스 문화와 지성을 유지해 온 가장 큰 힘은 다양성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적 다양성, 문화적 다양성은 프랑스 사회가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가치이다. […]

<ㅉ=75>중립 표방 않는 프랑스 언론

프랑스 언론은 결코 중립을 표방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나라 언론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점이다. 우리나라 언론은<ㅉ=76>저마다 정론직필의 정론지를 자처하고 있고 언론의 객관성, 중립성을 내세운다. 보수적인 신문이든 진보적인 언론학자이든 모두 같은 논지를 펴고 있다. 가령 언론학자 김동민 교수는 오마이뉴스에 실린 글을 통해 "나는 거듭 강조하거니와 언론의 생명은 '도덕성'과 '비당파성'이다"라고 말했다. 언론의 중립성을 통한 공정성을 주장하는 것은 진보적인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프레시안에 실린 다음의 글은 '새 언론포럼'에서 프레시안의 한 간부가 발표한 발제문의 일부이다.

언론이 현실의 특정 정치 세력과 일체화되는 것은 위험하다. 현실의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진리와 정의를 독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은 항상 옳다'는 공산당의 무오류 선언은 오류였음에 드러났다. 마찬가지로 현실의 한 세력이 절대선을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며 이에 동조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현실의 특정 세력은 정당성의 일부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누가 더 정당성의 비율이 많은가'이다. 언론의 역할은 공정한 심판자로서 현실 세력의 시시비비를 냉정하게 가려내는 것이다.(「프레시안」, 2003년 11월 21일.)

언론이 공정한 심판자로서 현실 세력의 시시비비를 객관적으로 가려낸다는 것이 가능한가? 정치적 사안에 대한 공정한 심판이 과연 가능한가? 이런 객관성, 가치중립성의 주장<ㅉ=77>은 막스 베버적인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보수건 진보건, 한국 언론들이 하나같이 공정성과 중립성을 표방하는 것은 한국 언론이 그동안 너무 편파적이거나 친권력적이었음을 반증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언론이 중립성, 비당파성, 객관성을 견지한다는 것 또한 관념적인 신화에 불과하다. 프랑스 언론은 도덕성, 진실성은 표방하지만 비당파성을 표방하지는 않는다. 하니리포터 김승열은 언론은 오히려 당파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프랑스 언론에 비추어 본다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다.

현재 한국 언론은 당파성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본다. 한국 언론 대부분이 무당파성, 정론, 객관성, 균형을 강조하지만, 이는 그야말로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릴 뿐이다. 프랑스에는 오히려 이러한 당파성을 근거로 논쟁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극우에서 극좌에 이르는 언론들이 무지개처럼 늘어서 있고, 누군가가 사회에 대한 발언을 할 때는 그가 지지하는 정당, 그 정당을 지지하는 언론을 보아야만 올바로 발언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으며, 미국도 마찬가지도 명백히 공화당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언론이 나누어져 있다.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라면 다양성을 토대로 하여야 하고, 이는 언론의 당파성을 인정하는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언론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과 진실이지 비당파성이 아니다. 피하여야 할 것은 왜곡이지 당파성이 아니다.(김승열, 「하니리포터」, 2001년 7월 5일.)

<ㅉ=78>언론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은 언론의 독립성이다. 한 나라가 독립을 잃으면 자유를 잃듯이, 언론도 독립성을 잃으면 자유를 잃게 된다. 언론의 역사는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언론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현대 사회에서 언론은 입법, 행정, 사법부에 버금가는 제4의 권력(제4부)이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주필인 이냐시오 라모네(Ignacio Ramonet)는 자신의 저서 『커뮤니케이션의 횡포』에서 미디어를 제4부가 아닌 제2부로 규정하고, "제1부로 뛰어오른 경제, 제3부로 밀려난 정치와 함께 새로운 '삼권 분립'을 이루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하지만 그래도 이 막강한 펜의 힘은 때로는 정치권력 앞에, 때로는 자본의 위력 앞에 굴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프랑스의 언론도 처음부터 자유 언론이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국력이 절정에 달했던 나폴레옹 시대의 언론만 보더라도 프랑스의 언론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의 신문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기는커녕 정치권력 앞에서 해바라기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권력 앞에서 신문 편집이 굴절된 고전적인 예가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 최대 일간지 모니퇴르(Moniteur)이다. 지금은 사라진 언론이지만 모니퇴르는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시민혁명을 옹호하면서 최대의 일간지로 부상했다. 하지만 반혁명적인 나폴레옹이 집권하자 이번에는 나폴레옹을 적극적으로 지<ㅉ=79>지하면서 시민세력의 기대를 저버린다. 나폴레옹이 패전한 뒤 엘바 섬으로 유배되자, 이 신문은 다시 나폴레옹을 비판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1815년 3월 1일 엘바 섬을 탈출해 다시 파리로 입성한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 파리로 들어오는 20일간에 드러난 모니퇴르의 논조 변화를 보면 언론이 권력에 대해 얼마나 무력했고 친권력적이었는지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모니퇴르 머리기사의 제목 변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살인마 소굴에서 탈출
-코르시카의 아귀 쥐앙 만에 상륙
-괴수 카프에 도착
-괴물 그르노블에 야영
-폭군 리용을 통과
-약탈자 수도 60마일 지점에 출현
-보나파르트 급속히 전진! 파리 입성은 절대 불가
-황제 퐁텐블로에 입성하시다
-어제 황제 폐하께옵서는 충성스런 신하들을 거느리고 궁전에 듭시었다(손석춘, 『신문읽기의 혁명』(개마고원, 1997) 재인용.)

전두환 장군이 집권하자 조선, 동아일보가 보여주었던 용비어천가식의 보도 기사가 프랑스의 나폴레옹 시대에도 있었던 것이다.

<ㅉ=80>언론은 권력과 긴장 관계 유지해야

물론 오늘날의 프랑스 언론에서 이런 권력에 대한 아부를 찾아볼 수는 없다. 그만큼 시민 사회가 탄탄해졌고, 언론이 투쟁을 통해 '자유'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쟁취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언론이 사회의 공기(公器)로서 제 기능을 다하자면 언론은 권력과 부단히 긴장 관계를 가져야 한다.

언론이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라고 해서 언론의 독립성이 완전히 실현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경제권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언론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언론은 여전히 '광고'라는 경제권력으로부터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르 몽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르 몽드는 자본주의의 언론도 충분히 경제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때문에 르 몽드는 정치권력과 금권으로부터의 독립성이야말로 신문의 생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엔디
노무현 대통령이 4월 초 국정연설에서 '족벌언론', '견제받지 않은 권력'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일부 언론들을 비판했다. 이에 대해 '일부 언론'은 물론이고 비교적 '친노'했던 언론들까지도 일제히 비판의견을 냈다. '일부 언론'들에서는 언론학자들을 동원해 '언론은 독자와 시청자들로부터 매일 심판을 받는다'는 인용까지 하면서 노무현의 의견을 비판했다. 맞는 말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옳은 말이다. 문제는, 그게 실험실에서만 그렇다는 것이다.

"물은 0℃에서 얼고 100℃에서 끓는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실제로는 물이 0℃에서 얼지도 않고 100℃에서 끓지도 않는 경우도 많다.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등산이라도 한 번 해본 사람은 그 차이를 더욱 잘 알고 있다. 이 경우, 물이 100℃에서 끓는다는 사실은 그렇게 큰 의미가 없다. 고산지대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생활공간에서 물은 늘 100℃ 못미쳐서 끓는다. 그들이 학교에 다닌다면 물이 100℃에서 끓는다는 걸 배울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 고산지대에 사는 사람들이다.

언론이 늘 시장에서 검증받으려면, 자유경쟁이 되어야 한다. '일부 신문'의 경품 및 사은품 제공 등의 몰상식한 행태는 언론이 늘 시장에서 검증받는다는 자신들의 논조에 가장 큰 반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공정거래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늘 우리 독자들로부터 평가받고 있다"고 말하는 건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언론사들의 발행부수 늘리기 경쟁은 우리가 익히 들어온 바다. 세계신문협회는 메이져 종합일간지인 조선·중앙·동아일보의 발행부수를 210만 부에서 243만 부에 육박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한국언론재단) 반면 유료부수는 그에 못미쳐 조선일보가 180만 부이고, 중앙일보가 그보다 30-40만 부 적고, 동아일보가 10만 부 더 적은 것으로 알려졌다. (주간조선2002. 10. 24. 1725호) 즉, 발행부수와 유료부수가 60-70만부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공정한 경쟁과는 관계없이 조선·중앙·동아일보를 도처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일간지를 비교분석하여 가장 정확한 정보와 정확한 논지를 펴는 신문을 선택할 만한 구조가 이미 되어있지 않은 것이다.

언론사들이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굳이 유료구독을 하지 않더라도 모든 기사들을 다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인터넷으로 여러 신문의 기사들을 비교분석하고 비판적인 안목을 키우려고 노력해 본 일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신문 하나를 꼼꼼히 읽는데만도 시간이 좋이 30분-1시간은 걸린다. 그런데 여러 신문을 다 읽는다? 언론에 관계하는 사람이나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실제로 가정에서 유료구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신문을 한 부만 구독하고 있다.(한국언론재단) 그 이유는 다른 신문과 비교분석하기가 실질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절대로 구독하고 있는 신문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 아니다. 매체별 신뢰도 조사에서 중앙일간지는 라디오, 공중파TV, 인터넷에 이어 4위를 차지했다.(한국언론재단) 그나마 5위인 케이블TV와의 격차도 극미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언론은 매일매일 독자로부터 평가받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설령 이 모든 상황을 인정하고서라도 언론은 독자로부터 늘 평가받으며 이 결과들은 평가의 결과라고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가정에서 구독하는 신문이 하나뿐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알게모르게 그 신문에 길들여지기가 쉽기 때문이다.

언론이 독자들을 길들이고 장악하기 쉬운 이유는 그들이 각자의 논조를 가지고 있으면서 정보전달의 역할까지 겸한다는 이유이다. 언론이 없다면 독자들은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때문에 정보를 얻는 데는 온전히 언론에만 의지해야한다. 그런데 언론은 각자의 논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알릴 정보도 그 논조에 유리한 정보만을 걸러내서 알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최근 정부가 도입하려는 브리핑룸 제와 비슷한 점이 없지 않다. 이에 대해 언론사에서는 정부가 정보공개를 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고 대응했다. 정부에서는 성실히 정보를 전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성실히 정보를 전하겠다고-전하고 있다고 늘 광고에서 말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정보는 늘 필터링된다. 정부의 브리핑룸 제는 업무의 효율성과 언론의 지나친 경쟁을 막기 위해 바람직하다고 보지만 정보를 전달할 의무가 있는 언론에서의 지나친 기사 필터링은 과연 옳은 것인지가 의문이다. 적어도 언론사들은 정부가 자신들의 치적만을 내세우게 될 것이라는 지적과 우려를 할 자격이 없다.)

그렇다면 한 신문을 계속 보던 사람은 그 신문의 논조를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신문에서 정보를 많이 얻기 때문에 정보와 함께 그 논조까지도 흡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 언론을 객관적으로 보기란 이미 불가능하다. 유력 언론은 독자들의 판단까지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언론이 언론 시장에서 판단받는다는 말은 그래서 때때로 옳지 않을 수 있는 것이고, 불행히도 지금이 바로 그런 때인 것이다.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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