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탄압' 때문에 운영을 할 수 없다"고 우는 소리를 하는 《동아일보》가 택해야 할 길은 정해져 있다.

'광고 탄압'이라고 하니까 70년대의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그 때의 《동아일보》는 대단했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박수로 채택하였다. 이것이 정부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에 박 정권은 그 해 12월 16일부터 광고주들을 압박하여 《동아일보》에 광고를 주지 못하도록 했다. 《동아일보》는 75년 3월 결국 사주가 정부에 굴복할 때까지 한동안 백지광고 또는 격려 광고로만 채워졌다(강준만 2000, 486-490). 《동아일보》 스스로도 당시 광고 탄압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東亞日報 민족과 더불어 80년'이라는 글에서 상당 부분을 할애하여 이 광고 탄압 사건을 다루고 있다.

Daum 아고라 글 블라인드 공지
어쨌든 지금 우는 소리를 하는 《동아일보》에게 문제는 국가 권력에 의한 광고 탄압이 아니라 시민 결의의 '광고 탄압'이다. 지금 《동아일보》는 꽤나 급한 모양이다. 《동아일보》는 불과 며칠 전 사설을 통해 자못 비장한 목소리로 "본보는 민주주의와 언론자유의 본질을 짓밟는 어떤 세력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언론자유를 수호할 것임을 다짐한다."라고 말했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그 '언론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라는 것이 다음 아고라의 글을 블라인드 처리 하는 등 언로를 막는 방법이었다는 사실이다. 《동아일보》가 진정 언론자유를 원한다면, 다른 방법을 택해야 마땅했다.

1. 조중동이 택해야 할 길

늘 언론자유를 주장했던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가 택해야 할 길은 명백하다: 신문 값을 올리는 것이다.

한국의 신문 값은 너무 싸다. 한국신문협회국내 신문 구독료 변화 연혁 자료에 따르면 2002년부터 500원 하던 것이 최근에 그나마 올라서 이제 600원이다. 알다시피 《경향신문》과 《한겨레》의 구독자 수가 많이 늘어서 "자칫 유동성 위기 등 경영상의 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예견도 있을 정도다. 신문 값이 너무 싸서 구독자가 많을수록 손해를 본다는 얘기다. 신문이 신문 값을 받을수록 손하라면, 신문은 무얼로 먹고 사는가: 바로 광고다. 한국의 이야기다.

사실 나는 이 글에서 약간 이상주의적인 말을 하려고 한다. (이 실용주의의 시대에!) 하지만 언론이 제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이상주의가 꼭 필요하다. 아니, 사실은 내가 하려는 말이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신문 값이 너무 싸다는 이야기는 바로 《중앙일보》 사주인 홍석현이 자주 했던 말인 것이다. 그러던 2004년 《중앙일보》가 구독료를 인하하면서 '덤핑' 논란이 일자 《중앙일보》 측은 이렇게 말했다: "《중앙일보》 한 부당 제작비 중 인건비를 제외한 신문 용지대와 잉크값 등 순수 재료비는 5500원인데 이를 어떻게 덤핑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리고 그에 대해 다른 신문들이 《중앙일보》를 맹비난하면서 인용했던 것이 홍석현의 말이었고, 이에 덧붙인 말이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성'이다. 내 말이 그 말이다. 나는 언론이 자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는 신문 값을 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언론이 정치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노무현만큼 언론에게 두들겨 맞은 대통령이 또 있을까. 반면 경제 권력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역시 꽤 오래된 이야기다: 손석춘은 《세계일보》의 '삼성의료원 부실 기사'와 서울신문의 '한솔 뇌물사건 연쇄연루' 기사 등을 비롯하여 경제 권력에 무릎 꿇은 신문의 이야기를 길게 전한다(손석춘 1997, 111-121). 그들이 경제 권력에 약한 이유는 그들이 광고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수익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2. 신문 값과 광고 수입 비율

손석춘(1997, 117)은 기자협회에서 1995년에 조사한 '신문수입 중 광고수입 비중'을 싣고 있다. 이 표에 따르면 지방지와 경제지를 제외하고는 《조선일보》가 가장 높은 광고의존도를 보여주고 있다.

신문 광고비율(%) 신문 광고비율(%)
서울신문 74.5 경인일보 72.7
세계일보 73.2 부산매일 85.8
조선일보 84.9 부산경제신문 95.3
한겨레신문 72.4 경남신문 79.7
서울경제신문 90.4 대전일보 75.4
강원일보 76.2 인천일보 79.4
광주매일 84.3 전남일보 73.5
국제신문 87.8 제주신문 72.1
[표1] 신문수입 중 광고수입 비중 (기자협회, 1995)

이런 상황은 현재도 마찬가지여서 미디어경영연구소가 2004년 발표한 '신문 광고·판매 매출 비교'를 보면 전국지의 광고수익 대 판매수익의 비율은 82.5% 대 17.5%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또 신문발전위원회가 공개한 2005회계년도 일간신문의 구독수입광고수입 자료(pdf)를 보아도 전체 수입 가운데 구독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개 30%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건 대체로 한국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바로 이웃 일본만 해도 한국과는 다르다. 미디어오늘이 인용한 일본신문협회의 자료는 일본 신문들이 구독료를 인상한 결과 1992년 이후 판매수입이 광고수입을 앞지른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본신문협회의 『일본신문 2003 DATA BOOK』에는 일본 신문의 판매 및 광고수입의 비중이 잘 나타나있다(신인섭 2004, 18).

연도 판매수입(%) 광고수입(%)
1995 60.2 39.8
1996 58.9 41.1
1997 58.6 41.4
1998 60.1 39.9
1999 60.4 39.6
2000 58.7 41.2
2001 59.7 40.3
2002 62.2 37.8
[표2] 일본 신문의 판매, 광고수입 (일본신문협회, 2003)

이제 눈을 유럽으로 돌려보자. 유럽 신문들은 대체로 광고수입 비중이 낮다. 대표적인 유럽 신문의 하나인 프랑스의 《세계Le Monde》지의 경우 광고수입 비율이 38%에 불과하다. 이것은 최근 증가한 숫자로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광고수입 비중은 30% 정도로 유지되었다(최연구 2003. 69). 그밖에도 일반적으로 서구 신문의 광고 수입 비중은 무척 낮다. 캐나다나 미국 등 북미권 언론사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광고수입 비율이 60% 내외이거나 50% 미만이 된다(신인섭 2004, 16).

  판매수입(%) 광고수입(%)
이딸리아 46 54
영국 40 60
프랑스 53 47
독일 57 43
노르웨이 37 63
캐나다 21 79
[표3] 서구 수개국의 판매와 광고 비율 (세계신문협회WAN, 2003)

3. 미국의 광고수입 비율과 지방지의 특성

미국의 경우는 광고수입이 상당히 높은 편으로, 한국 신문보다도 그 비율이 높다고 볼 수도 있다.

  판매수입(%) 광고수입(%)
1980 73.0 37.0
1985 76.7 23.3
1990 78.7 21.3
1995 78.8 21.2
2000 82.2 17.8
[표4] 미국 신문의 광고, 판매수입 (미국 신문협회)

그러나 미국의 경우, 전국지라고 할 만한 것이 《미합중국 오늘USA Today》 외에는 없다시피 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수많은 지방지들에는 지방의 작은 회사 광고도 많이 실릴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부고 광고 같은 것도 30달러 정도면 낼 수 있다고 한다(출처: 원문한국어). 그래서인지 미국 신문에서 전국 광고의 비중은 15~16%밖에 되지 않는다. 반면 소매광고가 36~40%를 차지하고, 안내 광고가 44~48% 정도를 이룬다(신인섭 2004, 17).

또, 미국은 광고 단가 자체가 훨씬 싸다. 임동욱(1998, 10)에 의하면 미국의 광고 단가는 한국의 1/4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면 미국에서는 작은 중소기업이라도 신문에 광고하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손석희도 여러 강연에서 "MBC도 수신료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는데, 그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렇게 함으로써 "중소기업도 공중파에 광고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수 있기 때문이고 하였다.

국가(신문) 단가
한국(조선·중앙·동아·한국) 7750만원
한국(기타) 4150만원
미국(월스트리트 저널) 1880만원
일본(요미우리) 3300만원
[표5] 한국, 미국, 일본 신문의 전면광고비 비교 (임동욱, 1998)

그러므로 미국의 경우는, 광고의 비중이나 광고 단가 등의 요인으로 보아, 신문이 자본(권력)의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가능성이 한국보다 적을 수 있다. (실제로 영향력을 비교해서 적다는 뜻은 아니고, 적어도 그럴 개연성만은 있다는 말이다.)

4. 무가지와 조중동

무가지는 공짜 신문이란 뜻으로, 독자들에게 무료로 신문을 나누어 주는 대신 광고로 경영을 해 나가는 신문을 말한다. 《메트로》나 《포커스》, 《AM7》 등 많은 무가지 때문에 스포츠신문은 물론이고 일간지들도 몸살이다. 한국만 그런 것은 아니다. 프랑스에서도 《메트로》나 《20분20 minutes》과 같은 무가지 때문에 기존 일간지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피가로Le Figaro》지와 《해방La Libération》지가 1.2유로(약 1900원), 《세계Le Monde》지가 1.3유로(약 2100원)이므로, 프랑스의 신문값은 비싼 편이기 때문에 어려움은 클 것이다.

무가지는 무료이기 때문에 광고 수익만으로 경영을 해야 한다. 그래서 무가지의 경우 광고 지면이 뉴스 지면과 비슷하거나 더 많다. 2003년 최경진 교수팀이 3개 일간지를 3일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메트로》, 《포커스》, 《AM7》의 광고 지면은 평균 48%에 이르렀다. 또 2004년 《미디어 오늘》이 1월 1일부터 16일까지 조사한 결과도 전체 지면의 44~52%가 광고임을 보여준다.

신문 광고 비율(%)
메트로 53
포커스 50
AM7 41
평균 48
[표6] 무가지 광고비율 (최경진, 2003)
신문 광고 비율(%)
메트로 46.7
포커스 51.6
AM7 44.1
[표7] 무가지 광고비율 (미디어오늘, 2004)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가지를 수준낮은 신문이라고 폄하했던 일부 일간지들의 광고 비율이 무가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김춘식 교수는 조중동의 2002년 전체 지면 중 광고 비율이 45.5%에 달한다는 것을 밝혔다. 이처럼 광고 비율이 높은 것은 한국의 특이한 현상이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2003년 2주간 국내외 신문의 광고 비중을 조사하여, 한국 신문의 광고 비율을 외국과 비교하였다.

매체 조선 중앙 동아 한겨레 경향 한국 NYT The Times Le Monde 아사히
광고 면 58.72% 59.39% 58.02% 42.22% 35.47% 46.96% 39.35% 42.27% 13.96% 46.97%
광고 없는 면 0.52% 1.30% 5.47% 10.58% 25.42% 5.11% 43.18% 8% 34.17% 3.29%
[표8] 한국과 외국 신문의 광고 비율 비교 (민언련, 2003)

민언련의 조사 결과를 보면 조중동은 광고 지면 자체만 가장 많은 것이 아니라 아예 광고가 없는 면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돌이켜보면 과거 박 정권이  《동아일보》에 대한 압박 카드로 광고 탄압을 택하게 된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조중동이 스스로에 대한 시민들의 심판을 '광고 탄압'을 여긴다면, 그런 탄압을 받지 않기 위해 광고 비율을 스스로 줄이고, 판매 수익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야 마땅하다. 그러면 (정말 본인들의 논지가 옳다고 믿는다면) 시민들의 '광고 탄압'에도 아랑곳 않고 스스로의 논리를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또한 정연구 한림대 교수의 '신문 무료화 현상과 저널리즘'을 참고해볼 수 있다. 정 교수는 그 글에서 신문의 정가(1달 구독가)가 2만원이 되더라도 "넉넉한 내용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덧) 광고와 소비자 주권

동아일보는 시민들의 불매운동을 두고 사설에서 "언론자유 유린이자 기업경영 방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김기창 고려대 법대 교수가 지적했듯이 소비자는 스스로의 소비를 스스로 통제할 권리가 있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알리고 동참할 것을 설득할 권리도 있다.

김광수 고려대 언론학 교수가 2005년 발표한 '광고와 언론'(pdf)이라는 글을 보면, CBS가 에미 상을 받은 드라마를 재방송하면서 광고주인 P&G의 요구에 따라 일부 에피소드를 취소한 사례가 나온다. P&G는 총기 통제, 낙태, 컬트 등의 기사 근처에 광고를 싣지 않기 때문이다. P&G는 또, 2000년 파라마운트 텔레비전의 토크쇼 진행자가 동성애를 생물학적인 일탈이자 성서에 배치되는 행위로 간주하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광고를 취소하기도 하였다.

Notable Sinclair advertisers

sinclairaction.org에 올라왔던 광고주 목록.

김광수 교수가 든 사례 가운데에는 좀더 정치적인 사례도 있다: 싱클레어 계열의 방송사에서 부시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케리를 공격하면서, 진보적 시각은 제외하고 보수적 논평만 방송하자 스테이플즈 사는 이 방송사에 대한 광고를 철회했다. 이 철회는 시민단체가 스테이플즈 쪽에 철회 압력을 가했고 회사는 이에 동참하여 벌어진 일이었다. 시민들은 sinclairaction.com이라는 사이트를 만들어 광고주를 압박했다. 이 과정에서 스테이플즈가 이 운동에 동참하여 광고를 뺐다는 워싱턴포스트 기사도 등장했지만, 이는 오보로 밝혀졌다. 중요한 것은, 광고주를 압력하는 류의 시민행동이 용인될 수 없는 사안은 아니었고, 오보까지 날 정도로 효과적일 수 있다는 개연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2008. 6. 26. 12:18 추가)  물론, 이 과정에서 미국의 수사기관이 시민단체를 구속 수사했다거나 그럴 방침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없다.

시민들은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소비할 권리가 있으며, 광고주 역시 자신의 소비자인 시민들의 뜻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를 두고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억지다. 오히려 공권력으로 정당한 소비자 운동을 막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라고 하겠다.

한 가지 더 덧붙인다. 시민들이 국가를 상대로 들고 일어난 '쇠고기 정국'의 촛불문화제 역시 정당한 소비자 주권이 아니겠는가?

참고문헌

강준만. 2000. 『권력변환 한국 언론 117년사: 1883-2000』. 서울: 인물과사상사.
김광수. 2005. "광고주의 언론에 대한 영향력 고찰--미국 사례를 중심으로". 실린곳: 『관훈저널』.
신인섭. 2004. "우리 나라 신문광고요금". 실린곳: 『KAA저널』. 2004년 7~8월. 서울:한국광고주협회. 14-24쪽.
임동묵. 1998. "세미나 중계". 실린곳: 『KAA저널』. 1998년 10월. 서울:한국광고주협회. 10-13쪽.
최연구. 2003. 『르 몽드』. 살림지식총서048. 서울:살림.

Posted by 엔디

김수영의 시 「'金日成萬歲'」를 읽었다. 제목만 봐도 어지간해서는 출간을 못했겠구나 싶은 시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 것이다. 이를테면, 텍스트가 가리키는 달이 분명 '한국의 언론 자유'라고 하더라도, 그 손가락인 텍스트가 너무 '섹시'했기 때문에 당국은 텍스트 자체를 모자이크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건 김수영 같은 시인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아름다운데다 달을 가리키기에 더이상 효과적인 수단을 찾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시를 읽어 보자(김수영 2008, 119):

'金日成萬歲'
韓國의 言論自由의 出發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韓國
言論의 自由라고 趙芝薰이란
詩人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金日成萬歲'
韓國의 言論自由의 出發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韓國
政治의 自由라고 張勉이란
官吏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1960.10.6.)

시적인 기교를 거의 부리지 않은 무척이나 담박한 시다. 김수영이 진실로 김일성을 추종하는 시인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고, 오로지 무엇이든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검열의 왕국을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김수영은 외로이 잠이 들었다가 깬다. 그는 함께 이야기할 말벗이 없다. 장면이라는 관리뿐 아니라 조지훈이라는 시인까지도 '자유'에 대한 '견해'가 달랐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그보다 일찍이 1956년에는 「눈」이라는 시를 통해 대나무숲에라도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을 쏟아놓기도 했다(김수영 1981a, 97):

기침을 하자
젊은 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1956)

4월혁명이 일어난 후, 김수영은 4월 26일 조간에 발표된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는 시를 통해 이제 '상식'이 된 민주주의와 자유를 부르짖는다. (그날 낮 1시 이승만은 하야를 발표한다.) 김수영은 "기침을 하자"에서 벗어나 하고 싶었던 말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운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제2공화국이 들어서자 김수영은 6월 30일 일기에서 비통하게 말한다(김수영 1981b, 333):

第二共和國!

너는 나의 적이다.
나는 오늘 나의 완전한 휴식을 찾아서 다시 뒷골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제의 나는 없어!
[­…]

오오, 자유. 오오, 휴식.
오오, 허망.
오오, 그럼 나의 벗들.

第二共和國!

너는 나의 적이다. 나의 완전한 휴식이다.
영광이여, 명성이여, 위선이여, 잘 있거라.

그가 이런 어조로 2공화국을 '까'는 이유는 무엇일까. 혁명 속에서 말의 자유를 만끽했던 김수영이 2공화국에서 어떤 훼방을 발견한 것이 아닐까? 분명히 2공화국은 최인훈의 『광장』을 용인했고, 대한민국 제2공화국 헌법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사전 허가 또는 검열제를 금지하는 등 자유권의 강화가 많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김수영은 한국의 언론 자유에 대해 '~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으로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 같다. 다시 김수영의 일기를 보자. 9월 20일자 일기다(김수영 1981b, 338-339):

언론자유나 사상의 자유는 헌법조항에 규정이 적혀있다고 해서 그것이 보장되었다고 생각해서는 큰 잘못이다. 이 두 자유가 진정으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위선 자유로운 환경이 필요하고 우리와 같이 그야말로 이북이 막혀 있어 사상이나 언론의 자유가 제물로 위축되기 쉬운 나라에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이 두 개의 자유의 창달을 위하여 어디까지나 그것을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하지 방관주의를 취한다 해도 그것은 실질상으로 정부가 이 두 자유를 구속하게 된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정부가 지금 할 일은 사회주의의 대두의 촉진 바로 그것이다. 학자나 예술가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국가를 초월한 존재이며 불가침의 존재이다. 일본은 문인들이 중공이나 소련같은 곳으로 초빙을 받아 가서 여러가지로 유익한 점을 배우기도 하고 비판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되어있다. 언론의 창달과 학문의 자유는 이러한 자유로운 비판의 기회가 국가적으로 보장된 나라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검열이란 정부 기관이나 영진위, 기윤실, 유림 따위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검열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이미 존재하며, 자기 검열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검열이다. 글쓰는 사람이 조건반사처럼 글을 쓰면서, 심지어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때조차 스스로의 글과 생각을 제한해야 한다면, 거기엔 실질적인 검열이 없더라도 언론 자유가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불평은 있지만 검열 때문에 불평을 말할 수 없는 오웰의 『1984』보다 불평 자체를 느끼지도 못하는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더 끔찍한 세계다.

위 김수영의 일기를 읽고 놀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논리정연한 글에 고개를 끄덕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 「'金日成萬歲'」나 그 제목을 읽고서는 아마 한국인들의 대부분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김태권의 시사 책꽂이: 김수영전집

ⓒ시사인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81


10월 6일 이후, 이 시가 겪은 수난은 시인의 일기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여기에 옮겨 보자(김수영 1981b, 339-340, 342):

10월 6일

시 「잠꼬대」*를 쓰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썼는데, 현경한테 보이니 발표해도 되겠느냐고 한다.

이 작품은 단순히 〈언론자유〉에 대한 고발장인데, 세상의 오해여부는 고사하고, 《現代文學》지에서 받아줄는지가 의문이다. 거기다가 거기다가 趙芝薰도 이맛살을 찌푸리지 않는가?

* 이 작품의 최초의 제목은 「○○○○○」. 詩輯으로 내놓을 때는 이 제목으로 하고 싶다.

10월 18일

시 「잠꼬대」를 《自由文學》에서 달란다. 「잠꼬대」라고 제목을 고친 것만 해도 타협인데, 본문의 〈×××××〉를 〈×××××〉로(한글로--편집자 주) 하자고 한다.

집에 와서 생각하니 고치기 싫다. 더이상 타협하기 싫다.

허지만 정 안되면 할 수 없지. 〈      〉부분만 언문으로 바꾸기로 하지.

후일 시집에다 온전하게 내놓기로 기약하고.

한국의 언론자유? God damn이다!

[…]

10월 19일

[…]

시 「잠꼬대」는 無修正으로(언문 교체 없이) 내어밀자.

10월 29일

「잠꼬대」는 발표할 길이 없다. 지금같아서는 시집에 넣을 가망도 없다고 한다.

12월 25일

「永田絃次郞」과 「○○○○○」를 함께 월간지에 발표할 작정이다.

12월 25일

「○○○○○」는 〈인간본질에 대해서 설치된 諸制限을〉관찰하는 데 만족하고 있는 시이다.

김수영은 이 문제가 되는 시를 "아무렇지도 않게" 썼다고 했다. 그런데 아내에게 보여 주니 "발표해도 되겠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니 수영 자신도 은근히 걱정이 되는 모양인지 잡지에서 받아줄지 안 받아줄지 걱정한다. 《현대문학》이 받아주지 않았는지 《자유문학》으로 지면을 바꾸어 보지만 거기서 다시 타협을 요구하고, 김수영은 그걸 받을지 말지 고민한다. 결국 그가 《자유문학》에 내민 원고가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결국 그 시는 발표할 지면을 찾지 못했다. 시집으로도 넣지 못한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김수영의 울분이 느껴지는 듯하다.

12월 25일자 두 일기의 「○○○○○」가 「'金日成萬歲'」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가타 겐지로永田絃次郞」 역시 월북 등 북한과 관련된 시이므로 「○○○○○」를 「'金日成萬歲'」로 보는 것에 문제는 없어 보인다. 김수영은 「○○○○○」가 단지 "인간본질에 대해서 설치된 제제한을 관찰하는 데 만족하"는 시라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는 '언론의 자유'라는 것을 넘어서서 인간의 본질에 대해 설치된 모든 제한을 관찰하는 시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이유가 내부 검열 또는 자기 검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검열을 시작하게 되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김수영 1981a, 249-250):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 짜리 갈비가 기름덩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려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1965. 11. 4.)

1965년이면 1963년 윤보선을 상대로 대선에 성공한 '민간인' 박정희가 군인들을 베트남으로 파병했던 시기이다. 아마 이 때쯤부터 미국과의 긴밀한 협조가 더욱 공고해졌을 것이다. 사상의 통제는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김수영은 "왕궁의 음탕"에 대해 쓸 수 없었다. 그것을 쓰면 잡혀갔을 것이고, 그것을 쓴다고 해서 받아줄 잡지도 출판사도 없었다. 김수영이 스스로 반성하고 있는 이 시, 「어느날 古宮을 나오면서」를 읽을 때면, 그가 얼마나 소시민이었고 그가 얼마나 옹졸했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그가 말을 하는 데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옳다.

김명인(2008, 168)은 "김수영에게 언론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문학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밝혀 쓰고 있고, 김현(1991, 399)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있어서는 자유가 없는 곳에서의 시란 방랑이며 고초이며, 설사이다. 그것은 소음이다. 그러나 그는 그 소음을 더욱 크게 내지르려고 애를 쓴다. 그것은 저질의 참여시가 아니라, 높은 정신의 자기 학대이다."라고 쓰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김수영의 시 「'金日成萬歲'」를 그대로 실었을 경우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체제가 무너지거나 권위가 떨어지거나 했을 것인가 하는 가정이다. 이북의 1960년대는 이른바 '천리마 시대'였다. 천리마 시기가 되어 증산增産은 물론 사상의 통제도 더욱 심해졌다. 이 운동의 결과 북은 아마 상당 부분의 성과를 거두었던 것 같다. 김일성은 문예에 대해서도 천리마 운동이 필요하다고 교시한다. 그에 따르면 "문학과 예술은 언제나 현실보다 앞서"서 공산주의로 가는 투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작가들이 "천리마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여러 차례 비판한 모양이다(신형기·오성호 2000, 219-225).

한국 사회가 「'金日成萬歲'」를 용인하지 못했던 것은 자기 체제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1960년대 당시에 김수영의 「'金日成萬歲'」가 발표될 수 있었다면 국가 체제는 물론이고 권위 역시 더욱 공고해졌을 것이다. 김수영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를 썼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그 영민한 김수영이 과연 「'金日成萬歲'」라는 시가 지면을 찾지 못하리라는 것을 몰랐을까. 사람들이 달을 보지 못하고 '섹시'한 손가락만 바라볼 것이라는 걸 그가 몰랐을 리 없다. 나는 그가 더 먼 미래를 바라보고 이 시를 썼으리라고 생각한다. 4월 혁명보다 더 먼 미래를 말이다. 4월 혁명은 성공한 혁명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김수영은 「그 방을 생각하며」에서 이렇게 말한다(김수영 1981a, 160):

革命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

革命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狂氣----
失望의 가벼움을 財産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歷史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財産으로 삼았다

[…]

방을 잃고 落書를 잃고 期待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

(1960. 10. 30.)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꾼 셈이 되었고, 언론 자유도 없어 펜은 녹이 슨 데다 이제 뼈와 광기만이 남은 상태다. 재산은 실망의 가벼움뿐이다. 이것이 시인의 현실 인식이다. 1960년 10월이면 『광장』이 발표된 때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자유로웠던 그 시기에 김수영은 이미 녹슨 펜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수영은,

그러나 수영은 언젠가 「'金日成萬歲'」를 출간할 날이 오리라고 믿었던 것일까. 그의 가슴은 그 때 무엇으로 풍성했던 것일까.

덧말) 정지창 교수는 다산연구소에 기고한 글, 「유언비어의 시대」에서 언론 자유가 없던 시절에 '유언비어'가 담당했던 기능에 대해 회고하고 있다. 그 시절 '유언비어'는 진실의 다른 이름이었다. 당시의 '유언비어'는 언론 통제를 공격하는 게릴라부대와 같다. 이제 '괴담'이라는 이름의 '유언비어'를 다시 통제하려고 하는 정권이 들어섰다. 김수영이 말했듯 민주주의와 자유는 이제 상식으로 되었다. '김일성만세'가 빤히 잡지에 실릴 수 있는 이 시대에, 언론 통제는 번연히 살아 있음을 본다. 방의 벽에라도, 인터넷 어느 구석에라도 나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 라고 낙서라도 꾹꾹 눌러서 하자.

참고문헌

김명인. 2008. "제 모습 되살려야 할 김수영의 문학세계: 김수영 미발표 유고 해제". 실린곳: 『창작과 비평』. 통권 140호. 서울:창비. 153-176쪽.
김수영. 1981a. 『김수영 전집』. 1:詩. 서울:민음사.
------. 1981b. 『김수영 전집』. 2:散文. 서울:민음사.
------. 2008. "'金日成萬歲'". 실린곳: 『창작과 비평』. 통권 140호. 서울:창비. 119쪽.
김현. 1991. "김수영을 찾아서". 실린곳: 김현. 1991. 『상상력과 인간/시인을 찾아서』. 김현문학전집3. 서울:문학과지성사. 392-399쪽. 처음실린곳: 『심상』. 1974년 3월호.
신형기·오성호. 2000. 『북한문학사: 항일혁명문학에서 주체문학까지』. 서울:평민사.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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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2008년 가을호(통권141호) '독자의 목소리'에 실린 요약:

김수영의 시 「‘金日成萬歲’」를 읽었다. 제목만 봐도 어지간해서는 발표 못했겠구나 싶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 것이다. 이를테면 텍스트가 가리키는 달이 분명 ‘한국의 언론자유’라 하더라도, 그 손가락인 텍스트가 너무 ‘쎅시’했기 때문에 텍스트 자체를 모자이크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읽어보면, 이 시는 기교를 거의 부리지 않은 무척이나 담백한 시다. 김수영이 진실로 김일성을 추종하는 시인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고, 오로지 무엇이든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검열의 왕국을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해제에서 김명인도 “김수영에게 언론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문학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밝혀 쓰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金日成萬歲’」를 그대로 실었다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체제가 무너지거나 권위가 떨어졌을 것인가 하는 가정이다. 한국사회가 이 시를 용인하지 못했던 것은 체제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1960년대 당시에 이 시가 발표될 수 있었다면 국가체제는 물론이고 권위 역시 더욱 공고해졌을 것이다. 김수영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를 썼던 것이다.

김수영은 언젠가 「‘金日成萬歲’」가 발표될 날이 오리라 믿었던 것일까.

요약문을 보니 국가 체제와 관련된 부분에서 내 뜻과 달리 오해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2008. 08. 24. 00:41)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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