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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과 현자의 돌

최승희 PD가 연출한 KBS의 예능 프로그램 '본분 금메달'과 안준영 책임프로듀서가 맡은 M.net의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101'은 전혀 다른 구성을 하고 있지만 사실 본질은 같다. 이를테면 두 프로그램 사이의 간극은 딱 웃음과 눈물 사이의 간극과 같다. 요컨대 걸그룹은 웃음을 팔고 걸그룹 지망자들은 눈물을 파는 우리 시대를 그대로 반영한 프로그램들이다. 아니 방송사들이 자신의 프로그램을 통해 직접 웅변하는 대로 정확히 말하자면 이렇게 정정할 수 있겠다: "걸그룹은 웃음을 팔아야 하고, 걸그룹 지망자들은 눈물을 빼앗겨야 한다." 언론이 앞다퉈 보도한 내용이지만 굳이 반복하자면 '본분 금메달'은 "걸그룹은 항상 이미지 관리에 힘써야 한다"는 전제 아래 갑자기 바퀴벌레 모형을 내놓는다든지 해서 걸그룹을..

후세를 위해 노무현의 치수를 잰 영화 '변호인'

양우석 감독의 데뷔작인 영화 '변호인'은 성공한 영화다. 개봉한 지 불과 한 달여 만에 관객 수가 1000만 명을 넘어섰다. 일반적인 서사 예술의 문법으로 봐도 변호인은 별다른 흠을 잡을 수 없는 영화다; 아니 흠을 잡을 필요가 없는 영화다. 학벌이나 환경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던 한 사내가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고, 그 다음에 보다 의미있는 일을 위해 사회적인 성공을 저버리는 이야기. 별로 새로울 것도 없다. 굳이 작은 흠을 찾자면 '속물 변호사' 송우석이 갑자기 '인권 변호사'가 되는 모습이 너무 급작스럽다는 점 정도가 될 것이지만 줄거리 자체는 수백 번도 더 들어본, 매끈한 것이다. 거기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덧칠하는 순간 관객은 구름처럼 몰렸다.지금까지 관객 1000만 명을 넘은 한국 영화는 모두 9편..

극장전 2014.02.04

노동으로의 삼투, 문학으로의 귀환: 송경동의 산문

“시에서 돈 냄새가 났으면 좋겠다”고 최영미 시인은 말했지만, 송경동의 시에서는 무슨 냄새가 날까. 광주천을 붉다고 쓴 시 때문에 얻어맞아 얼얼한 볼을 한 채로 맡은 봄 향기일까, 눅눅한 잡부 숙소의 때 절은 이부자리에서 나는 피 섞인 정액 냄새일까, 아니면 가끔 비정규직 일터인 지하로 내려오던 어느 아름다운 정규직 여 직원에게서 끼쳐오던 향수 냄새일까, 그도 아니면 아들과 놀이터 삼아 가던 사우나의 수증기 냄새일까. 『꿈꾸는 자 잡혀간다』는 운문의 제약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쓰인 그의 줄글을 모은 책이다. 시집 속에서 그는 어쩔 수 없는 시인이었지만, 이 산문 속에서 그는 시인이기도 하고 시인이 아니기도 하다. 시인이 아닐 때 그는 노동자이자 투사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이자 남편이자 아들이기도 하다..

타오르는책 2011.12.20

오매와 오오미: 정치와 말

언어의 조탁에 관심이 많았던 시문학 동인 시인 김영랑은 『영랑시집』에 실린 시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에서 가을이 깊어가는 시절에 대한 감탄이 담긴 누이의 한 마디를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내용으로만 보면 이 작품은 전적으로 그 누이의 말이 계기가 되어 쓰여진 작품으로 보이는데, 첫 연의 시작과 두 연의 마지막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그 한 마디가 시의 발단과 절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오-매 단풍들것네」 장광에 골불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니리 바람이 자지어서 걱졍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보아라 「오-매 단풍들것네」 - 김영랑,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전문 강희숙 조선대 교수의 전라도의 언어 11: “오메 단풍 들것네”에 따르면 호남..

어머니와 무상급식

경북 구미의 선산이 고향인 내 어머니는 아주 평범한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다까기 마사오高木正雄와 동향인 탓에 비생산적인 오해를 사기도 했고, 실제로 아직도 그를 위인 중 하나로 꼽고 있지만, 글쎄 정치와는 별 무관한 삶을 살아왔다고 스스로 믿는 한 교사였을 뿐이다. 자식인 내가 이명박이 대통령 돼서는 안 된다고 안 된다고 길길이 뛰니까 대신 이회창을 찍은, 그런 TK 출신의 한 사람일 뿐이다. 어머니가 대구교대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것은, 어쩌면 가난 때문이었다. 당시 교대는 2년제였고, 학비가 무료였다. 대신 졸업 후에는 반드시 몇 년 이상 교사로 근무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교사 인력이 부족했던 시절이라 그런 식으로 양성하려 했던 것 같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이야기다. 학비가 ..

과학과 정치윤리: 그리섬 대 서태윤, 천안함 미스터리

몇 년 전, 한국의 한 과학자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 하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묘한 말을 했다. 안 그래도 가득할 대로 가득한 한국인의 국가주의nationalisme를 자극했던 그 말은, 비록 빠스뙤르Pasteur가 먼저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결코 '과학적'인 언사라고는 할 수 없었다. 조국을 위한다는 명목 때문인지 몰라도, 실제로 그는 여성의 난자를 구입하는 비윤리적인 행태에서부터 1차 자료 조작이라는 과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까지 저버리는 사건--사고가 아니라--까지 저질렀다. '조국' 운운한 발언의 여파는 컸다. 그에 대한 옹호는 지금도 정치적인 색채를 띤다: 난자를 매매한 것은 그저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간단히 면죄부가 부여된다;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라고 ..

이 어두운 극장 밖에선 도대체…: 『작은 연못』

그래, 먼저 가만히 작고 어두운 영화관 하나를 떠올려보자. 시인 기형도가 죽었다던 허름한 종로의 극장도 좋고, 사람들이 데까메론을 알건 모르건 매년 그해의 '보카치오'를 동시상영으로 마구 틀어댔던 동네의 3류 극장도 좋다. 예술영화를 자주 틀어주는, 그래서 관객은 별로 없는 조용한 극장도 괜찮다. 사실 꼭 작고 어두운 극장일 필요도 없다. 푹신푹신한 의자에 음료 거치대까지 있는 최신식 멀티플렉스 영화관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내가, 당신이, 그리고 사람들이 영화를 본다는 것이다. 자, 영화가 끝났다. 영화란 건 늘 금세 끝나는 법이니까.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대다수 극장에서는 환하게 불도 켜준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어디로? 세상으로. 커다란 박스 속에 들어가 한두 시간을 어둠 속에 머..

극장전 2010.04.12

빨간 사과의 진실과 구라

IMF 위기를 조금씩 극복해나가던 2001년 한 카드사의 신년 광고는 어느 여배우를 등장시켜 아주 단순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여러분, 부자되세요. 꼭이요." 무차별 카드 발급의 여파로 신용불량자가 매해 증가하던 시절이었다. 광고는 대박을 쳤다. 카드사의 이미지도, 배우의 이미지도 덩달아 올라갔다. 카드사로서는 소비자들이 원하는 지점을 정확히 공략한 셈이었다.소비자들은 모두 부자가 되기를 원했다. 적어도 그런 말이라도 듣기를 바랐다. "부자되세요."그래서…… 그때부터였던 듯하다, 친한 사람들끼리 발랄하게 "새해 복 많이 받아" 대신 "새해 돈 많이 받아" 하고 인사를 주고 받았던 것은. 그 말은 묘하게도 위악爲惡스러운 매력이 있었고, 또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는 그런 욕심이 있었으므로 '진실'한 말이..

무협지와 80년대: 김영하 『무협 학생운동』, 유하 『무림일기』

90년대 끝무렵에 대학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세기말 학번'이라고 했다. 당시 내가 있던 대학의 총학생회은 이른바 '비(운동)권'이었고, 단과대 학생회는 NL(민족자주)이었다. 별로 개의치 않았다. 새터(신입생수련회)에서 단대학생회가 주는 가방을 받았다. '통일'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고 보라색과 회색이 있었는데, 나는 바라던 회색 가방을 받아서 내심 기뻤다. 학생회는 신입생들에게 IMF를 주제로 촌극을 만들라고 했다. 우리는 각 과/반별로 모여 촌극을 준비했고, 한국이가 대학 들어가서 공부 안 하고 놀다가 결국 F 학점을 받지만(I am F!=IMF),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열심히 공부해 A로 올라선다는 진부한 스토리의 우리 과/반 촌극은 전체 2위를 차지했다. 그게 다였다.우리네 동기들은 세..

타오르는책 2010.01.04

시간과 기억 속 재편되는 계급: 박주택 『시간의 동공』

최초의 시계, 최초의 달력은 사람의 눈이었다. 사람들은 태양과 달의 모양과 움직임, 물의 흐름을 보고 세월歲月과 시간時間과 촌음寸陰을 알았다. 박주택의 시집 『시간의 동공』은 시인의 눈을 따라 시간의 흐름을 꿰뚫어보고, 눈이 보았던 기억과 그 속에 숨어있는 계급을 살펴보는 시집이다. 시인의 눈은 먼저 "문을 닫은 지 오랜 상점"을 바라본다. 불빛이 없어 어두운 그곳에는 발가벗겨진 채 갇혀 있는 인형이 보인다. 시인은 문득 섬뜩함을 느낀다. 그리고 사뭇 달랐던, 처음 그곳에 갔을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때는 허리춤이 드러난 한 여자가 물을 뿌리며 창을 닦고 있었고, 사랑스러운 아이와 고요한 커피 잔도 시인의 눈에 들어왔다. 아마 인형도 그 때는 옷을 걸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인은 그 먼 기억..

타오르는책/詩 2009.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