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어릿광대의견해/그말이잎을물들였다

'국어순화'와 언어 심미주의: '우리말 다듬기' 유감

엔디 2008. 9. 5. 01:23

무분별한 한자어나 외래어의 사용은 분명히 언어의 양극화를 심화시켜 정보의 불균형을 낳는다. 정보가 민주적으로 배포되지 않는 곳에서 세계는 평평하지 않다. 때문에 한자어나 서양 외국어 독해에 어려움을 겪는 대중들에게 외래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운동은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

이를테면, '국어순화' 운동의 가장 큰 성과로 생각되는 '갓길'이 그렇다. 숄더shoulder나 노견路肩이라고 하면 썩 잘 다가오지 않는 개념이 갓길이라고 하면 한눈에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게다가 갓길은 숄더나 노견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말이다. 정과리(1998, 38)는 "'노견'이라는 가금家禽 종자 같은 이름을 벗어던지고 새로 차려 입은 우리말이 상큼한 여성성을 연상케"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립국어원에서 운영하는 우리말 다듬기 사이트에서는 매주 외래어 하나씩을 골라 한국어 갈음말(대체어)을 내놓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갈음말이 그대로 표준어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이 말이 널리 쓰이면 표준어의 지위를 획득하여 사전에 실리게 되는데, 이 때 최초 제안자의 이름도 함께 넣는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낱말들은 이미 상당한 정도로 쓰이고 있다. 예를 들어, 댓글reply이나 누리꾼netizen, 다시 보기vod 등은 일반은 물론 몇몇 언론에서도 쓰이고 있으며, 영화헤살꾼spoiler이나 참살이well-being, 늘찬배달quick service도 적지 않게 사용되고 있다.

아름다운 말과 알맹이가 없는 말

문제는 우리말 다듬기에서 다듬은 말 가운데 '갓길'처럼 아름다운 말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갓길이 아름답다는 것은 단지 그 말의 말맛語感이 좋다는 뜻만은 아니다. 갓길은 그 사이시옷의 매력을 한껏 돋우는 발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번 들으면 누가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무엇을 말하는지 알 만한 직관성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설명적이지 않고, 길이도 짧다.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자랑차게 뽐내는 낱말로 손색이 없다.

우리말 다듬기에서 '갓길'처럼 아름다운 말을 찾으라면 '댓글'이나 '다시 보기' 따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댓글'은 직관적이고 짧으면서도 '댓거리'처럼 알려진 말과 조화가 맞는다. '다시 보기'는 VOD보다 긴 듯하지만, 음절 수는 같으며 video on demand로 풀지 않으면 의미를 알 수 없는 VOD에 비해 훨씬 직관적이다. 또 AOD를 '다시 듣기'로 표현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등 활용도도 높다. 하지만 이런 낱말들은 기실 우리말 다듬기에서 순화하기 이전에도 널리 쓰였던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말 다듬기의 존재 의의는 상당히 축소된다.

어떤 말은 외양은 화려한데 알맹이가 없는 것도 있다. '행사빛냄이'가 그렇다. 한국인들이 격식을 차릴 때 주로 쓰는 '(자리를) 빛내다'라는 동사를 써서 꽤나 화려해보이는 말이지만, 사실 저 말은 '레이싱걸'을 순화한 말이다. 무엇보다 레이싱걸이 행사를 빛내는 사람인지는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는 '-이' 접사를 국립국어원도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고 있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본래 '-이' 접사는 명사나 용언의 어간, 어근, 의성·의태어 뒤에 붙어 명사를 만드는 접미사다. 절름발이는 명사 뒤에 붙은 예이고, 높이는 형용사 어간 뒤에, 먹이는 동사 어간 뒤에, 홀쭉이는 의태어 뒤에, 딸랑이는 의성어 뒤에 '-이'가 붙은 예이다. 요즘 흔히 보이는 '지킴이'나 우리말 다듬기에서 선정한 '…빛냄이'처럼 용언의 명사형에 '-이'가 붙는 경우는 없다. 외래어를 우리말로 아름답게 다듬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알맹이가 사라지거나 규칙이 무분별하게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규칙이 무시되는 것이 외래어의 유입보다 한국어에 더 나쁜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외래어는 한국어 속으로 들어오면서 기존 언어의 규칙보다는 한국어의 규칙 속에 편입된다. 이 경우 외래어는 어휘 수준에서 한국어 속으로 편입되지만, 형태론적 차원이나 통사론적 차원에서는 한국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가령 영어 동사인 lead가 이미 '이끌다'는 뜻을 가진 동사임에도 한국어 내에서는 '리드하다'는 식으로 '-하다'를 붙여서 나타난다. '픽업하다', '프린트아웃하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또, '내츄럴하게'에서 볼 수 있듯이 natural은 본래 영어에서의 부사접미사인 -ly를 포기하고 한국어의 문법을 따라 '-하게'라는 어미를 채용하게 된다. 때문에 외래어의 유입이 한국어의 문법을 바꾸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all-in을 '다걸기'로 옮긴 것도 문제가 있다. 보통 '올인하다'라는 동사형으로 쓰이는 이 말을 '다걸기'라고 옮기면 '올인해'는 '다걸기해'가 된다는 말인가? '다 걸어'면 족할 일이다. 국어의 형태론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무분별한 순화의 사례라고 하겠다.

깁더와 붙갈이소리

해방 이전에 주시경 선생의 제자로 외솔 선생과 쌍벽을 이루었던 김두봉은 아름다우면서도 정확한 말을 만드는 데 뛰어났다. 그는 자신이 지은 문법책 『조선말본』의 증보판增補版을 내면서 『깁더 조선말본』이라 이름붙였다. '깁더'는 '깁고 더한'을 줄인 말이다. 이 '깁더'라는 말은 2007년 김진우 선생이 『언어: 이론과 그 응용』의 새판을 『언어: 이론과 그 응용 깁더본』이라 이름하면서 후대에 이어지기도 했다.

김두봉이 지은 다른 말로는 붙갈이소리가 있다. 언어학의 음운론 용어인데, 파찰음破擦音을 토박이말로 바꾼 것이다. 붙었다가 터지면서 소리가 나지만, 완전히 터지지 않고 갈아서 나는 소리인 'ㅈ', 'ㅉ', 'ㅊ'을 일컫는 말이다. 파찰음보다 얼마나 더 쉽고 얼마나 더 아름다운지 보라.

푸른 바다의 은유와 샹글릴라의 이상향

우리말 다듬기가 다듬었다는 말 가운데 정말 실소를 금할 수 없는 것은 대안시장이라는 말이다. 대안시장은 연전에 널리 인기를 끌었던 블루오션을 다듬은 말이다. 블루오션 전략은 모두 알다시피 경쟁이 많은 피바다 레드오션이 아니라 경쟁이 없는 푸른 바다 블루오션을 찾자는 마케팅 전략이다. 블루오션 전략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은 대안시장이 블루오션 전략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는 있지만, 전체를 갈음하기는 어렵다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 대안시장이란 마치 기존의 시장과는 전혀 다른 시장을 말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블루오션 전략은 '비고객을 고객으로 만들라'고 주문하는 등 '대안시장'과 전혀 관계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블루오션 전략의 적지 않은 부분은 기존 고객의 많은 수가 별로 신경쓰지 않는데 원가만 많이 드는 고정관념 속의 재화나 용역을 버리고 고객의 진정한 필요를 찾아 거기에 투자하라는 데에 바쳐진다. 가령 태양의 서커스라는 시르크 뒤 솔레이유는 서커스에서 동물이 등장하는 부분을 버리고 이야기와 곡예를 강화하거나 창조하여 새로운 서커스를 만들어내어 세계적인 인기를 끈다는 식이다. 그러므로 블루오션이 전혀 다른 새로운 대안 시장을 만들어내는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블루오션은 어떻게 한국어로 다듬으면 좋을까? 영어를 처음 배우는 초등학생에게 물어봐도 답은 금방 나온다. '푸른 바다'다. '블루오션 전략'은 '푸른 바다 전략'이라고 부르면 된다. 본래 '블루오션 전략'은 가치혁신value innovation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었던 전략인데, 김위찬 교수와 르네 마보안 교수가 책을 내면서 은유적인 의미를 더해 '블루오션 전략'이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이것을 다시 '대안시장'으로 다듬는다면 원뜻에서 한참 멀어지고 만다. '국어순화' 운동이 이런 간단한 은유조차 담지 못하는 것은 확실히 문제다. 원어에서 은유가 도입되었다면 갈음말에서도 은유를 쓰는 것이 당연하다.

또, 아름다운 이름의 고유명사 샹그릴라를 굳이 '꿈의 낙원'이라는 설명적인 용어로 바꾼 것도 문제다. 샹그릴라는 무릉도원, 유토피아, 엘도라도, 그리고 율도국과 함께 사람들이 오래 생각한 이상향의 한 종류인데, 저 이상향들은 각기 다른 문화적 전통과 초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샹그릴라는 샹그릴라일 뿐이다.

맺음말: 민족주의와 심미주의

말이란 관념이나 이념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가는 곳이 곧 길이 되듯, 모든 말무리言衆들이 쓰는 것이 곧 말이다. 외래어를 '순화'시켜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상허 이태준으로 되돌아가 보아야 한다(이태준 1988, 27):

그는 클락에서 캡을 찾아 들고 트라비아타를 휘파람으로 날리면서 호텔을 나섰다. 비 개인 가을 아침, 길에는 샘물같이 서늘한 바람이 풍긴다. 이제 식당에서 마신 짙은 커피 향기를 다시 한번 입술에 느끼며 그는 언제든지 혼자 걷는 남산 코스를 향해 전차길을 걷는다.

이 문장에서 클락, 캡, 트라비아타, 호텔, 커피, 코스 등의 외래어를 굳이 안 쓴다고 해보라. 이 외에 무슨 말로 '그'라는 현대인의 생활을 묘사해낼 것인가? […]

새 말을 만들고, 새 말을 쓰는 것은 유행이 아니라 유행 이상 엄숙하게, 생활에 필요하니까 나타나는 사실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커피를 먹는 생활부터가 생기고, 퍼머넨트 식으로 머리를 지지는 생활부터가 생기니까 거기에 적응한 말 즉 커피, 퍼머넨트가 생기는 것이다.

말은 말무리의 것인데, '국어순화'론자들은 말을 민족의 것으로 치환해버린다. 한국어가 한국어 말무리들의 것이 아니라 민족의 것이 되면, 한국어는 외래어나 한자어를 배격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말을 아름답게 만들려는 심미적 욕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민족주의는 너무나도 무겁고 심각하기 때문이다.

가령 김우창(1977, 385-386, 388-389)은 '얼'이나 '슬기'와 같은 민족주의적 고유어가 강요하는 외경감에 대해 말한다. '얼'이라는 말 한 마디에서 우리는 자랑스러운 한민족임을 느끼면서 자못 종교적인 열락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런 민족주의 열락에 빠지게 되면 고유어는 하나의 가짜 '심미화'를 형성하게 된다. 발터 베냐민에게 '정치의 심미화'가 그랬던 것처럼(신형기 2003, 180), '얼'이라는 억압적인 말이 가짜 아우라를 갖게 되면서 우리는 그 억압적인 말과 화해하게 된다. 여기서 '얼'이 본래 '어리석어 빠지다'는 뜻의 '얼빠지다'를 잘못 분석해서 생긴 말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민족주의의 가짜 '심미화'에서 벗어나 진짜 한국어의 아름다운 맛을 느낄 수 있는 언어 운동이 생기기를 바란다. 뷔퐁이 "문체(스타일)는 곧 그 자신이다Le style est l'homme même."라고 말한 것은 그저 한 말이 아니다. 언어 심미주의야말로 언어 운동에서 가장 소중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우창. 1977. "말과 現實: 國語醇化運動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수록처: 『궁핍한 시대의 詩人』. 김우창전집1. 서울:민음사. 378-390쪽.
신형기. 2003. "남북한 문학과 '정치의 심미화'". 수록처: 『민족 이야기를 넘어서』. 동시대인 총서12. 서울:삼인. 171-197쪽.
이태준. 1988. 『문장강화』. 창비교양문고10. 서울:창작과비평사.
정과리. 1998. "대한국인이 갓길을 침범할 때". 수록처: 『문명의 배꼽』. 문지스펙트럼4-009. 서울:문학과지성사. 38-41쪽.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