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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 ! Rien de rien.
Non ! Je ne regrette rien.
Car ma vie, car mes joies
aujourd'hui, ça commence avec toi!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요,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내 삶도, 내 기쁨도
오늘, 시작되었으니까요, 당신과 함께!

아녜스 쟈우이Agnès Jaoui 감독의 첫 작품인 《타인의 취향Le goût des autres》의 대단원을 이루는 노래, 에디뜨 삐아프의 '아니요,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다. 그러나 그 영화 속에서 정작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은, 다른 사람의 취향goût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다. 《타인의 취향》은 아주 많은 걸 말하고 있지만 여전히 말하지 않은 부분을 남겨둔 영화였고, 그 말하지 않은 부분은 신비로 남을 것이었다. 물론 그 신비는 인간을 허무하게 만드는 신비가 아니라, 인간을 보다 진정한 행복으로 이끄는 신비가 된다. 그러므로 《타인의 취향》에서 취향보다 중요한 것은 삶과 기쁨, '당신'과 함께 시작된 삶과 기쁨이다. 어쩌면 취향은 거기에 얼마쯤 종속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취향》은 관계에 대한, 보수적인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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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우이 감독의 두 번째 영화 《환영처럼comme une image(번역 제목: 룩앳미)》은 《타인의 취향》의 연장선상에서 관계에 대해서 다시 고찰한다. 다만 첫 번째 영화가 취향을 문제삼았다면, 이번 영화는 성격caractère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극 예술이 성격에 초점을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랜 시간동안 그래왔다. 그래서 우리는 극에 등장하는 인물을 성격caractère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역사주의 비평과 자연주의naturalisme가 믿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시간temps과 종족race, 그리고 환경milieu에서 형성되는 사람의 성격과 그 성격들이 부딪히는 세계였다. 졸라의 루공-마까르 총서Rougon-Macquart는 바로 그 지점에 위치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연주의자들은 문학 작품을 쓰면서도 스스로 과학자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녜스 쟈우이는 말한다: 성격도 변한다. "에디뜨는 당신들이 변했다고 하던데요." 우리는 에띠엔 꺄사르Étienne Cassard의 글과 그의 정신esprit를 보고, 그의 성격의 형성을 짐작할 수 있다, 롤리따 꺄사르Lolita Cassard와 그 가족들을 보고 그의 성격의 형성을 짐작할 수 있다. 실비아와 삐에르 밀레 Sylvia et Pierre Millet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딱딱한 자연주의가 신비의 탈을 쓰게 되는 것은 이 시점이다. 그래서 세바스띠앙Sébastien이 등장한다. 우리는 꺄사르 씨의 위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실감할 것이다. (성격의 변화가 왜 중요한 이유는, 말 그대로, 한 사람의 성격이 바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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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말. 시안화칼륨의 치사량은 0.15 그램이다.

덧말2. 영화의 자막은 중역되었다. 꺄사르Cassard가 카사드로 옮겨지다니, 서양인들이 나를 Quan Ning Dian으로 부른다면 나는 기분이 좋지 않을 텐데. 거기다가 영화 속에서 모든 도량형은 원래는 미터법으로 이야기하는데, 자막은 철저하게 인치와 피트를 사용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미국영화, 곧 원래 인치와 피트를 사용하는 영화도 자막에서는 가능하다면 미터법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오히려 거꾸로였다.

덧말3. 아네스 자우이는 이상한 표기다. Agnès Jaoui의 발음은 아마도 [aɲεs ʒawi] 일 것이므로 이 국제음성기호를 최대한 비슷하게 한글로 고치면 아냬(녜)스 쟈위가 된다. 외래어 표기법에 맞춰서 쓴다면 아녜스 자우이가 된다. 아네스 자우이는 원음에 최대한 가깝게 표시된 것도 아니고, 외래어 표기법에 맞춰서 쓴 것도 아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건 당연히 [ɲ] 소리인데, 아녜스를 아네스로 바꾸는 건 에스빠냐를 에스빠나로 바꾸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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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는 황당한 제목으로 개봉한 영화다. 원제는 《번역에서 잃어버리는 것들Lost in Translation》 정도가 맞겠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 영화가 좋다고 추천들이었다. 영화를 소개하는 인터넷 사이트들은 두 상처입은 영혼의 만남 어쩌고 하면서 떠들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를 '영혼의 만남' 운운하며 극찬하는 것이야말로 번역 과정에서 많은 걸 잃어버린 주제 같다. 영화평론가들의 문제점은, 항상 현실을 보지 않고 이데아를 보려고만 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번역에서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고 있긴 하지만, 그냥 '로맨스' 영화다. 밥Bob과 샤를롯Charlotte이 상처입은 영혼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그냥 그뿐이다. 그런 정도의 상처라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상처이며, 그 정도의 상처를 우리는 그냥 우리 속에서 짓누르고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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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상처가 극대화 혹은 가시화되는 것은 단지 그곳이 뉴욕이라 LA가 아니라, 도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이 집이 아니라 호텔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호텔은 임시로 쓰는 방이고, 그런 만큼 거기서는 청소도 식사준비도 할 필요가 없다. 할 일이라고는 음악을 듣거나, 창밖을 바라보거나, 자기 몸을 씻고 화장하는 일 뿐이다. 끝없이 나르시스트가 될 수 있는 곳이 호텔이다. 호텔에서는, 바에 내려가 누군가에게 술을 한 잔 선물할 수도 있고, 문틈 아래로 쪽지를 전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끝없이 리버럴할 수 있는 곳이 호텔이다. 모든 만남은 더 우연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 공간은 로맨스의 공간이다. 그뿐이다. 상처의 치료라고? 그렇지 않다. 두 영혼의 상처는 영원히 남을 것이고, 그들은 잠시 상처를 잊었을 뿐이다. 물론, 그것이 의미있기는 하다. 상처라는 건 가끔씩 잠시만 잊어주어야 버틸 수 있는 것이니까.

이 영화를 구원해주는 것이 있다면 밥이 샤를롯에게 속삭이는 마지막 장면이다. (음모론적으로 말한다면 2편을 위한 포석일 수 있겠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속삭인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속삭이고 나서 서로 제 갈 길을 간다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면서 서로를 끊임없이 돌아본다는 것이 중요하다. 상처라는 것은, 그렇게 무디어져 가는 것이니까.

도중에 멈추지 않고 끝까지 영화를 보게 만든 스칼렛 요한슨의 아름다움에 졸문을 바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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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ion에 대해서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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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무어Michael Moore의 «화씨 911»은 다 알다시피 깐느에서 처음으로 황금종려상la palme d'or을 받은 첫 기록documentaire 영화다. 드림웍스의 야심작 «슈렉»조차 빈 손으로 돌려보낸 '오만한' 깐느가 선택한 기록 영화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그 속에 엄청나게 극적인dramatique 폭로가 있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만들 정도일까. 혹은 이라크 침공의 도덕적·절차적 문제를 조목조목 파고들어 부시 대통령이 직접 그 영화를 보더라도 승복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을까.

아니다. 이 영화에 가득찬 것은 반어와 풍자다. 여러 번 기사화된 무어 감독의 발언에서 짐작할 수 있는 그의 비판방식 그대로를 이 영화에 담은 것이다. 그리고, 그 비판방식은 사실 길고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에서 몰리에르를 거쳐 지금까지 내려온 이 흥미로운 양식은, 그러나 신뢰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것이니, 꼭 민감한 폭발물같은 것이다. 가령 우리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에 동의하기 힘든 것이다.



무어 감독은 여기서 20세기 후반 이후에야 생각해낼 수 있는 방법-비디오 편집을 사용하는데, 이것이 특히 미국의 대통령과 행정부에 대한 비판에 무척 적절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보이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찍은 수많은 홍보비디오나 기자회견, 국무위원들의 답변, 보좌관의 발언, 국제회의에서의 주장 등의 자료 수집은 그 자체로 비판의 일부로 기능했다. 왜냐하면 부시 행정부가 너무도 자주 말을 바꾸고 있음을, 그 자료는 여실如實히, 아니 사실 그 자체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 풍자 양식은 ‘그들’의 양복에 담긴 권위주의적 신뢰성을 무너뜨리는 데도 상당부분 공헌하고 있다. 양복을 입은 채 기자회견실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signifié와 상관없이 어떤 특정한 모양signfiant을 갖는다. 우리에게 신뢰감을 주는 것은 그 모양이다. 그러므로 권위주의적인 그 모양을 깨기 위해서는 그 내용을 특정한 발화상황과 떼어놓고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풍자는 여기서 큰 힘을 발휘한다.

이상하게도 실패하지 않았던 사업가로서의 조지 W. 부시와 미국의 대통령으로서의 조지 W. 부시 사이의 '유착관계' 역시 감독이 공들여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는 의혹제기 수준이므로 결코 성공적이랄 수는 없다. 풍자 영화는 바로 이런 부분에서 조심해야 한다. 부시 반대파들끼리 웃고 즐기려고 영화를 만든 게 아니라면, 이건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설득은 오히려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건 이 영화의 장점이자 약점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이라크전 참전 군인들에 대한, 그리고 이라크전 전사자의 가족들에 대한 인터뷰다. 이 인터뷰들은 상당히 감정적이어서 감독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조차도 스스로의 입장을 지킬 수 없게 만드는 면이 있고, 더구나 거대담론에 흡수되어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을 개개인의 이야기를 영화를 통해 복원해서, 보다 삶에 밀착한 관점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더구나 그것이 부시의 관점이 아니라는 점까지도 말이다. “부모나 형제, 또는 친척을 잃는 슬픔이 어떤 것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 ……슬프군요it pains me.”

그러나 이 영화의 기법과 방식은 무척 단순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영화에 관심이 많은 대학생들조차 돈만 있다면 만들 수 있는 수준의 영화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의 이 평가가 이 영화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는 내 스스로의 평가를 보며 오히려 대학생들의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대학생 때의 정신으로 돌아간다면. 무어 감독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이 영화는 내게 내가 오래 간직하고 싶은 대학생 정신l’esprit universitaire을 생각나게 하는 영화였다.

덧. 이 영화에서 가장 가슴아픈 부분은, 미국의 ‘대량살상무기’에 의해 숨진 이라크 아기의 모습도, 전사한 미군의 모습도 아니다. 세계무역센터 빌딩의 희생자도, 희생자 가족도 아니다. 전쟁에 참전해 전쟁의 실상을 알게 된, 스스로를 오랫동안 공화당지지자였던 사람이라고 소개한 한 상이 군인이, 앞으로는 민주당 열성당원이 되겠다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기자에게 다짐하는 부분이었다. 그에게는 그 둘 외에 다른 선택이 없는 것이다. Où se trouve la démocrat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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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영화는 건조하다. 영화가 줄거리삼은 것들이 결코 건조하지 않고 오히려 '질펀'하거나 축축한데도 건조하게 느껴지는 것은 '홍상수 어법'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야기를 푸는 방식탓이다. 식당에서 날아드는 파리를 쫓는 모습이나 금붕어에게 가만가만 먹이를 주는 모습같이 아무렇지 않은 행동들 하나하나가 한 편의 영화를 지탱하는 힘이 되는 것 같다. 실제로 세밀한 언행, 혹은 그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오! 수정》은 이어서 보다 자세히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부터 이미 홍상수 감독의 중요한 관심거리였음이 분명하다.

《강원도의 힘》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공간이다. 직소퍼즐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우리는 그 영화를 짜맞추어야 한다.

하지만 어법도 공간의 상상력도 사실은 인물에 초점을 두고 펼쳐졌다는 생각을 나는 아직도 떨칠 수가 없다. 영화 속의 지숙은 매우 답답한, 매력적인 캐릭터다. 상권도 현실 속에 파묻혀버린, 어떤 소꿉장난의 기억을 가진, 할 말 많은 캐릭터다. 그런데 상권과 지숙의 모습은 상권-지숙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에 잘게 쪼개져 여러 공간 속에 '건조'하게 퍼져있는 것이다. 가장 눈에 잘 띄는 '숨은 그림'은 절벽에서 남자가 여자를 민 것으로 추정되는 커플과 금붕어다. 그들이 지숙과 상권을 속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런 '형국形局'이라는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가 흔히 '사실주의'라고 평가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같다. 홍상수의 영화가 '객관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의 영화는 냉정하다. 일테면 교수인 후배가 비행기를 타고 떠나버린다든지, 항공사 직원이 뒤이어 떠난다든지, 아직 살아있는 생물을 산 채로 묻는 모습이라든지, 하는 세부적인 것에서부터 그 배경까지가 어떤 주관적 개입도 없는 냉정함의 주관성을 통해서 구성되어 있다.

시간 순서대로 구성하면 술안주감도 안 될 이야기가 능히 한 편의 영화가 되는 것은 그 냉정함을 바탕으로 한 무개입의 주관성이 일관되게 유지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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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 이용악「오랑캐꽃」

사투리를 줏대로 하여 황산벌 당시의 상황을 그려보겠다, 는 발상으로 만든 영화, 라는 문구가 《황산벌》의 주된 광고전략이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황산벌》은 웃음을 주기 위한 오락영화에서 조금쯤 비켜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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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은 일단 무엇보다 '전쟁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몇몇 '리얼'하다는 전쟁영화에서 쓰인 '들고 찍기hand held'의 방법이 여기에서도 쓰였는데, 그것은 꽤 희화화 되긴 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참혹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전쟁의 장면들을 자세히 그리고 있다.

희화화된 전쟁도 여전히 잔혹스러움을 드러내고 있으니, 그것은 온갖 성적인 코드들로 무장한 두 진영의 '욕' 싸움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어느 나라나 성적인 의미의 '욕'이 가장 많다는 것은 그것이 사람 스스로에 대한 가장 큰 수치가 된다는 데에 그 이유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욕'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근원적인 야유이며, '왜 죽는가'라는 질문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 그렇다면, '왜 죽는가' 그러니까 '왜 싸우는가!' 영화 한가운데 김유신과 계백이 장기를 두는 장면에서 그것은 드러난다. 목적없이 죽어가는 '장기알'들이 보여주듯이 싸움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계백에게 좀더 절실하게 나타난다. 김유신이 대뜸 계백에게 "증치를 모리는 장수넌 군사더럴 개죽엄허게 만더는 기라"고 한 것은 그래서 정확한 지적이었다.

클라우제비츠 같은 사람은 "가능한 다른 정치 수단보다 전쟁이 더 이익이 될 때 전쟁은 일어난다"고 하여 전쟁의 목적을 정치적 측면에 못박았지만, 그것은 정치가들이 좋아할 만한 관점이지 장수들의 관점은 아니다. 계백에게 있어 전쟁의 목적은 '이기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계백에게는 불행하게도, 어쩔 수 없이 '전쟁'은 정치에 종속된다. 아이끼리의 싸움은 유치하고 덜 성숙한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 단체끼리 혹은 나라끼리의 싸움은 숭고하고 거룩한 것으로 포장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계백의 각시가 "똑바로" 말한 대로 "호랭이는 가죽땜시 죽고, 사람은 이름땜시 죽는" 현실이다. 거기서 '민족주의'가 나온다.

《황산벌》이 민족주의에 대해 가지는 태도는 두 방향의 것이다. 백제의 민족주의는 '나라를 지키자'는 종류의 대항민족주의로 그것은 민중의 삶과 직접 연계되어 나타난다. 가령 '거시기'가 "지금쯤 낱알이 여물 것인디 울 엄니 혼자 내내 고생하게 생겨부렀소"하는 부분에서는 민중을 지키기 위한 민족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다시 한 번 그의 대사를 들여다보면 전쟁에서 지더라도 자신들은 결국 평소 하던 "고생"을 계속 해야 한다는 뜻을 살필 수 있다.

《황산벌》이 지닌 또하나의 민족주의는 '외세(唐)'에 관한 것이다.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통일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부정적인 입장에서 바라보지만 그것은 역사성을 결여한 푸념이다. 그 당시 삼국이 '우리는 서로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가졌을 리는 만무하다. (영화의 설정과는 달리 언어도 달랐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내내 소정방의 태도와 신라의 태도를 견주며 외세 유입에 대한 비판적인 각도를 유지한다. 그것은 계백에게는 "즌쟁은 알아도 증치를 모린다"고 하고 김법민에게는 "증치는 알아도 즌쟁은 모린다"고 하여 '유아독존唯我獨存'적으로 멋있게만 그려지는 김유신이 마지막에 소정방 앞에다 칼을 꽂으며 '화룡점정畵龍點睛'하는 장면에서 극에 달한다.

이런 미성숙한 민족주의를 가지고 전쟁의 참혹함을 다루려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위험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아주 적절하다. 김유신이 "화랑들을 계속 보내라"며 "즌쟁은 미쳐야 하는 기야"라고 하는 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전쟁 자체가 '미성숙한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보아야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화랑의 세속오계 중의 '임전무퇴臨戰無退'는 바로 그러한 발상이다. 우리가 익히 배워왔던 유치진의 『원술랑』도 반공이데올로기 전파에 앞장섰던 그의 행적에 비추었을 때 그 함의의 일면을 알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답이 되었는가, '왜 죽는가'의 답이 되었는가. 답은 이미 나왔다. 계백의 각시가 '사람은 이름땜시 죽는다'고 했을 때의 그 정답은 추상적이긴 하지만 정확한 대답이다. 그러므로, '거시기'와 '거시기의 어머니'가 목가적인 논밭 한가운데서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는 것은 인위적인 장면으로 영화 마지막에 초를 치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앞의 여러 장면들에서 이미 암시된 것이다. "저같은 것 이름 알아서 뭣에 쓴답니까요. 그냥 '거시기'로만 알아두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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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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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의 마리아는 호메로스의 나우지카에서 사랑의 표본을 찾는다.

「옛날에는 달랐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호머가 나우지카 같은 사랑스럽고 건강하며 섬세한 여인을 만들어 낼 수 있었겠어요? […] 오늘날의 시인이라면 나우지카를 여자 베르테르로 만들어 버렸겠지요 […] 사람들은 오로지 취하게만 하는 묘약만 알 뿐, 생기를 주는 사랑의 샘물을 모르는 걸까요?」

-막스 뮐러『독일인의 사랑』신역판, 차경아 옮김, 문예출판사, 1987, 84-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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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은 다르지만 미야자끼의 애니메이션에서도 그 본질적인 것은 다르지 않다. 결국은 '사랑없음'이 모든 문제의 발단이고 '사랑'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사랑이 진부한가? 아니다. 사랑이 진부하다면 성교性交도 식사食事도 수면睡眠도 모두 진부하다. 하야오가 굳이 '나우시카'라는 이름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그럴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표현하려는 사랑은 인간과 자연간의 사랑이다. 인간이 인간끼리의 사랑만을 강조하고 자연과의 사이에 금을 긋기 시작하면서 문제는 시작되었다. 영화에서 가장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이념이 휴머니즘이라는 것을 보면 그것은 확실하다. 그런 휴머니즘은 영화에 등장하는 세 마을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다. '거신병'을 '테크노피아'의 알레고리로 파악하는 데서 토르메키아를 더 비난하고, '오무'의 유충을 미끼로 '오무'를 마을 파괴에 이용하는 페지테를 더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바람계곡의 사람들도 실은 그런 비난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영화 중반에 삽입된 회상 씬에서 나우시카는 아버지 지루에게 '오무'의 유충을 빼앗긴다.

(큰 나무를 등지고 필사적으로 외치는 나우시카. 그러나 그녀의 발 사이로 오무의 유충이 기어나온다)
나우시카 나오지 마!!
오무의 유충입니다.
역시 곤충에게 홀려있었구나… 이리 다오 나우시카!
나우시카 싫어!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어요!!
곤충과 인간은 같은 세계에서 살 수 없단다! (뺏어간다)
나우시카아앗--!! 제발!! 죽이지 말아요!! 제발…


인간과 곤충이 함께 살 수 없다는 인식을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이상, 불을 많이 사용하든 적게 사용하든 결국은 마찬가지다.

그 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언급할 내용은, 불을 사용하는 이들은 모두 남자들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나우시카 자신도 여자이고, 페지테의 비행선에서 탈출하려는 나우시카를 도와준 것은 아스벨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자이고, 눈먼 예언자인 할머니도 여자이다. 결국은 거신병을 택하긴 하지만 계속해서 공격을 망설이고, 유보했던 크샤나도 여자이다.

나희덕 시인은 「생태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그리고 시」라는 제목의 글에서 김혜순 시인의 「잘 익은 사과」를 인용하며

이 시에서처럼 존재를 태운 자전거 바퀴가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을 때마다 그녀는 그만큼 고향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고향에서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는 모습은 대지의 어머니 가이아(Gaia)를 연상시킨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여성성에 대한 강한 자의식과 환유적 문체를 결합한 김혜순의 최근 시들이 생태적인 세계와 자연스럽게 만나는 한 지점을 보여준다.

- 나희덕「생태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그리고 시」, 『창작과 비평』2000년 겨울호, 61쪽.


고 적고 있다. 여성성은 모성성을 빼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여성이 남성보다 더 생명의 근원에 가까이 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 영화에서 나우시카를 페지테의 비행선에서 탈출시키는 일의 주동자가 죽은 라스텔의 '어머니'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중의 작품인 《모노노케 히메》가 좀더 인간에 대한 혐오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산의 입을 빌려 "인간은 싫어."라는 직설을 내뱉게 하는 데 반해 나우시카는 인간을 비롯한 무릇 생명을 모두 소중히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마 그런 차이는, 산은 인간이라고 말하기가 껄끄러운 이력을 갖고 있는 반면 나우시카는 두말 할 것 없이 인간이라는 근본적인 다름의 결과이겠지만, 또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분노한 자연과 인간을 이어줄 다리는 결국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감독의 인식이 표현된 것일 수도 있다.

흔히 "깨끗한 환경은 후손들에게서 빌려온 것"이라는 말로 자연보호와 환경보존의 당위성을 말하지만, 사실 그 말 역시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우시카처럼 자연에 직접 손을 내미는 것이다. 테토처럼 손가락을 조금 물다가 말수도 있고 '오무'처럼 '희생'을 요구할 수도 있지만, 인간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선택은 정해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덧) 《모노노케 히메》가 흔히 비판받는 대로 여기서도 일본색을 강조했다고 비판하려면 못할 것은 없다. 거신병을 원폭의 알레고리로 토르메키아를 미국의 알레고리로 볼 수 있으며, 페지테 역시 열강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바람을 특히 중요시하고 불을 싫어하는 부분은 카미카제神風와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빤한 알레고리를 이용한 해석의 시도는 훌륭한 작품을 정교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망가뜨리는데 일조할 뿐이다.

덧2) 그림이 코난 류와 무척 비슷하다든가, 나우시카의 천진한 웃음소리가 어딘지 가식적으로 들린다든가, 페지테 비행선에서의 유파의 검술의 우스꽝스러움은 시대의 반영일까. 후후.

Posted by 엔디
《왕자와 공주》는 '꿈과 희망의 공장'인 디즈니가 절대 넘볼 수 없는 수준의 새로운 아니마시옹이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우화적인 알레고리에 불과한 것이지만, 《왕자와 공주》는 상상력과 자의식이라는 부분을 겹쳐놓은 풍부한 두께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그 안에 소속된 단편들은 유럽의 고전 동화들의 세계관에서 유달리 나아진 것이 없지만, 그런 상징들을 그들이 체현體現하는 과정은 전혀 새로운 방식이었던 것이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내지는 '믿음대로 되니라'라는 표현에 기초해볼 때 이 영화는 피그말리온의 '믿음'과도 관련될 것이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자신을 향해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피그말리온적인 나르시시즘이다.

자신이 극의 주인공이고 싶어하는 것은 사실 아이들이 흔히 가지는, 잘 알려진 동일시 행동이다. 디즈니의 시청자는 주인공이 되는 환상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환상일 뿐이다. 디즈니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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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캐릭터가 너무 강렬해서 다른 사람은 그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왕자와 거지》의 주인공들이 그림자극처럼 묘사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시종 얼굴조차 자세히 비치지 않는다. 스콧 매클루드는 『만화의 이해Understanding Comics』에서 사실화보다는 카툰과 같은 단순한 묘사가 자기동일시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끝으로 전통, 《왕자와 공주》에서 전통의 문제는 생각보다 크다. 여기서 유럽의 전통은 그대로 소재가 된다. 아니 유럽의 전통뿐 아니라 일본의 회화나 3000년대의 미래세계의 여왕까지도 어떤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미국문화와예술'을 듣는 후배 둘에게 "미국에 문화가 있어?"라고 물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러나 내 생각은 아직까지도 큰 변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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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산울림의 《고도…》가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다는 소리도 들은 바 있고 해서 기대를 상당히 했는데, 그 기대가 전혀 깨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의 흠도 없이 진행된 연극은, 거의 세 시간이나 되는 긴 연극이었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예상과는 무척 다른 연극이긴 했다. 그건 나의 고정관념 때문에 텍스트를 잘못 읽어서 생긴 문제였다. '실험극', '부조리극' 따위의 말 때문에 나는 이 연극이 으례 지루하고, 시종 비장감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베케트의 '고도…'는 비장한 극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희극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라고 이 연극을 보고 동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이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형식이다. 비극적인 희극 혹은 희극적인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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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거의 완전히 원작을 실제로 구성해냈다. 내가 원작에서 특히 주목했던 부분은 대사들의 리듬이었다. 물론 원작에 특별히 meter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혹시 있다고 해도 번역과정에서 사라졌기가 쉬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대사들이 '운율'이 없이도 한 권의 시집처럼 리듬감있게 진행되고 있었다. 번역의 뛰어남과 연출·연기의 뛰어남이 함께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에스트라공 그런데 우리가 그자한테 정확히 무슨 부탁을 했지?
블라디미르 너도 같이 있었잖아?
에스트라공 난 정신을 안 차렸거든.
블라디미르 저― 딱히 뚜렷한 건 없었지.
에스트라공 일종의 기도였지.
블라디미르 맞아.
에스트라공 막연한 탄원이었고.
블라디미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에스트라공 그래 그잔 뭐라고 대답하데?
블라디미르 좀 두고 보자는 거야.
에스트라공 아무것도 약속은 못하겠다는 거군.
블라디미르 생각을 해봐야겠다는 거지.
에스트라공 맑은 정신으로.
블라디미르 가족들하고 의논도 하고.
에스트라공 친구들하고도.
블라디미르 지배인들하고도.
에스트라공 거래상들하고도.
블라디미르 자기 장부하고도.
에스트라공 은행 통장하고도.
블라디미르 그래야 결정을 내리겠다는 거지.
에스트라공 그건 당연하지.
블라디미르 하긴 안 그렇겠니?
에스트라공 그런 것 같군.
블라디미르 내 생각도 그렇다.

-『고도…』, 25-26쪽.

여기서의 대화의 리듬은 두 사람이 단어들을 주고받는 데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 장면에서 그들 두 사람이 말한다고 하는 것보다는 말이 '튀어나온다'고 하는 편이 좀더 정확한 설명이 될 것이다.

에스트라공 가자.
블라디미르 갈 순 없다…….
에스트라공 왜?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81쪽)

이 대사는 연극 전편에 걸쳐 계속 나오고 있는데, 블라디미르가 오금을 굽혀앉으며 "고―도를 기다려야지―"라고 대답하면 에스트라공은 합장을 하며 "참! 그렇지!"한다. 번역자 오증자가 말한 것처럼 이 대화는 '교향곡의 모티브'처럼 계속되어 "기다림에 이유와 활기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런 "이유와 활기"는 그것이 단지 계속된다는 점에서 부여되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임영웅의 연출은 베케트의 극에 대한 충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훌륭한 연출이다.

럭키의 그 유명한 장광설도 잘 읽어보면 그러니까 잘 들어보면 어떤 리듬이 거기에 숨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어떤 구두점이 없음에도 대략 길이가 일정하게 설정된 어구의 길이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고, "인체체체", "아카카카데미", "설설설정"(이상 69쪽) 처럼 흐르는 리듬을 끊는 장치에 의거하기도 하는 것이다. 또 럭키의 장광설은 생각을 시작하게 되면 외부로부터의 치명적인 강압이 없이는 그가 말을 그만두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역시 그 리듬감과 리듬의 관성을 충분히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임영웅은 이를 치밀하게 계산하여 '생각' 이전에 일정한 휴지休止를 둠으로써 그 리듬감을 극대화시키고 있고, 더구나 굉장히 빠른 '생각'을 통해서도 리듬을 전혀 망치지 않고 훌륭하게 소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김인환은 "한 권의 시집이야말로 한 편의 연극에 매우 유사한 구조를 밑에 깔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도 훌륭한 연극은 그 음악성 때문에 궁극적으로 시가 되고 만다.

블라디미르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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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s das Kind Kind war...
아이가 아이였을 때…




《베를린 천사의 시》의 원제는 '베를린의 하늘Der Himmel über Berlin'이다. 영어 제목은 '욕망의 날개Wings of desire'다. 아무데나 詩를 갖다붙이는 행태는 비난받을 것이지만, 이 영화의 번역과 이 당시의 영화제목의 번역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내용과도 잘 부합하고 있다. 적어도 《식스 센스》, 《나씽 투 루즈》, 《어댑테이션》따위보다는 훨씬 낫다.

역사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천사는, 영화에서 색맹이다. 그들은 지하철, 도서관, 누군가의 집, 길거리…… 어디에나 있지만 사실은 아무 데도 없다. 가령 그들에겐 모든 역사가 TV이다, 환상이다. 감정도 얼마간 가질 수 있고 사람들의 생각도 마음대로 읽어내지만 그걸로 끝이다. "우린 역사의 방관자가 아니야!" 그들은 역사의 방관자다.



천사는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 마천루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을 보고, 그의 생각을 읽어내고, 그는 떨어지고, 다만 "안돼Nein!!!"라고 소리칠 뿐이다. 그들은 왜 있는 것일까? 그들은 왜 영원한 것일까? 그들은 죽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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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엘Damiel이라는 한 천사(Bruno Ganz 扮)가 강림했다. 그의 강림은 전혀 신비롭지 않았다. 아마 높은 곳에서 떨어졌을 것이다. 그의 갑옷이 그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그가 사람이 되면서 제일 먼저 느낀 것이 아픔이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가 아픔을 기뻐하기 때문이다. 그는 뒤통수에 흐르는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맛보고("맛이 좋군.") 행인에게 묻는다. "이게 빨간색?"

아이가 아이였을 때,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나는 왜 나이고, 네가 아닌가.
왜 나는 여기에 있으면서, 저기에 있을 수 없는가.
내가 아직 나이기 전에, 나는 무엇이었는가.
언젠가는 나란 존재는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천사가 천사였을 때,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알기를 바랐다.
천사가 천사였을 때, 영원한 삶을 가졌다.
그럼에도 그는 살기를 바랐다.

그가 인간이 되었을 때 가장 중요한 변화는 색깔이 아니다. 감각도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표면적인 변화에 불과하다. 그는 영생을 넘어서는, 순간에 바야흐로 직면한 것이다. 그가 느끼는 순간은 다만 순간으로서가 아니라, 놀라워라, 영원으로 있는 것이다. 그가 영원이었을 때 이리저리 표류하던 이미지와 사건들이 그가 순간이 되자 하나의 극점을 향해 나름의 배열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와의 사랑을 시작하면서 마리온Marion(Solveig Dommartin 扮)은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라, 무언가의 화신이고……"



영화에는 한 시인이 나온다. 머리터럭이 거의 빠진, 주름살이 온 얼굴을 덮은, 지팡이 짚은 노시인이다. 시인의 일은 물론 시를 쓰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시로 쓰는가. 인생을? 슬픔을? 죽음을?

앞으로 달려가던 미개인이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것이 전쟁의 시작이 되었다.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전쟁의 역사, '늙.은.' 시인은 아마도 그것을 쓸 것이다. 그곳 베를린에서. 히틀러는 단지 히틀러가 아니라 무언가의 화신이고, 2차대전은 단지 2차대전이 아니라 무언가의 화신이고, 시인은 그리고 그것을 쓰는 시인이고…….

아이가 아이였을 때 산딸기를 따러 높은 곳에 올라갔고,
지금도 그렇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낯선 사람 앞에서 쑥스러워했고,
지금도 그렇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창던지기도 했고,
그때 꽂힌 창이 지금도 흔들리고 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가 바로 '지금jetzt'이다. '지금'이 영원보다 영원한 것이다.

Lied vom Kindsein
Song of Childhood
어린 시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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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양자, 안성기, 김추련, 금보라, 전영선 등의 캐스트로 지금으로 봐서는 상당한 스타캐스팅인 것 같다. 그러나 내용은 원작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영화였다. Rendez-vous de Séoul의 '서울프랑스영화제'에 포함되어 상영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보았다.

무엇보다도 조세희의 원작은 연작소설임에도 마치 장편소설처럼 일관된 무언가가 있어 그 짜임새를 잘 느낄 수 있게 하였는데, 이 영화는 장편영화임에도 장면과 장면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하고 분산된 느낌을 주었다. 영수(안성기 分)를 중심으로 영화 줄거리가 이끌어지기는 하는데 그것이 아버지와 동생들, 명희 등의 에피소드들로 나뉘어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영화는 또, 비루함을 가지고 원작의 정신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난장이네 가족들이 겪는 일들을 감상적이고 비루하게 만들어 그들을 어떤 '불쌍한'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극 내내 울음이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나를 더 건조하게 만들었다. 등장인물들이 담담함을 보였다면 오히려 내가 진정 울었을지도 모르는데.

선량함도 마찬가지다. 함부로 얘기해서는 안 될 착함이 등장인물들에게 있었다. 가령, 명희가 죽고난 뒤 영호, 영희와의 대화에서 영수의 "가난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행복하다"는 대사는 영화전체를 일거에 무너뜨려버린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사람은 김불이 씨다. '난쟁이' 역할을 맡은 그는 가장의 역할과 놀림받는 난쟁이의 역할, 그리고 달나라에 '릴리푸트'마을을 건설하는 환상게 빠져있는 모습들을 잘 소화해냈다. "극단에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술집에서 일하면서 삶의 역함을 알게 되었다"는 그의 말은 이 영화 전체를 통해 단연 압권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영희(금보라 分)가 철거촌에 새로짓는 아파트 분양권 장사를 하던 남자를 따라가 그와 동거하면서 몰래 분양권을 훔쳐오는 부분은 그야말로 코미디다. 관계 후 영희는 욕실에서 울고, 남자는 침대에 남은 혈흔을 보고 만족해 하는 부분도 말할 수 없이 황당하고 웃기는 설정이지만, 그보다 분양권을 훔쳐 아파트를 신청하는 영희를 남자가 발견하고서 "난 니가 이뻐"라면서 오히려 분양권만 갖곤 아파트를 신청할 수 없다며 돈을 건네주는 장면은 감독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 의심하게 만든다. (인터넷에서 뒤져보니) 검열이 심해서 영화가 그랬다는 말도 있지만 너무 심각한 원작 훼손이다.

어쨌든 영희는 분양권을 가지고 돌아오지만 난쟁이는 죽어있다. 아마 자살인 듯 하다. 릴리푸트 마을을 건설하러 갔을까? 그렇지만 이 영화는 '거인'이 만든 영화다.

덧1: 안성기가 큰 아들로, 이효정이 작은 아들로 나오는 건 그렇다 쳐도…… 금보라가 막내딸로 나오다니!
덧2: 영화 포스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만들었을까.
Posted by 엔디
free music


《원령공주》의 우리나라 개봉일이었다. 연인과 함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았고, 어제는 《이웃집 토토로》를 보았다. 《센》이나 《토토로》에서는 조금 약화되거나 암시적으로만 있고, 《원령공주》나 《나우시카》에서는 좀 더 주제의식이 명확하다는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미야자끼 하야오 감독은 '생태'를 그 가운데 두고 있다고 생각된다. "인간과 숲이 함께 살아갈 수는 없나요?"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


인간의 추악하고 역겨움, 그건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되지 않을 때 이미 예견된 일이 아니었을까? 신들이나 자연이 인간을 역겨워 하거나 증오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자연보다 위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새것 콤플렉스와 성장발전의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들은 '에보시'가 왜 단죄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이르는 대로, 여자들이 속편히 살 수 있는 곳을 만들어주고 나병환자들까지 수용한다. 그는 철저한 인본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 자체가 늘 죄이듯 인본주의는 자연과의 대립을 낳기가 쉬울 것 같다. 아시타카나 산은 노한 자연과 인간의 가운데에 있는 이들이다. 시시 신의 분노는 얼마쯤 대홍수 모티프를 닮아있다. 홍수 모티프에는 늘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아시타카와 산이다. 데우칼리온과 퓌라가 등 뒤로 돌을 던졌듯 아시타가와 산은 시시 신의 머리를 돌려준다. 그리고 대자연에 새로운 싹이 돋는다... 시종 영화에 끌려다니기만 했다. 그만큼 미야자끼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흡인력이 있다. 그래서 영화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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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의 거짓말
영화 《제이콥의 거짓말Jacob the Liar》는 유렉 베커Jurek Becker의 소설『거짓말쟁이 야콥Jakob der Lügner』를 영화화한 것이다. 로빈 윌리암스가 아니면 못할 제이콥 역이 훌륭하게 소화되는 것을 오늘 보았다. 적어도 선/악이 그렇게 단순한 구도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멋진 영화같다. 단순화함으로 복잡함을 드러내는 것은 이 영화의 장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베커의 소설을 잘 영상에 옮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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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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