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책 61

알레고리 없이 '워터십 다운' 읽기: R. Adams『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다른 많은 판타지 소설이 그렇듯이, 리처드 애덤스의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아이들의 요구에서 시작된다. 애덤스의 아이들은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않은' 길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원했다. 아이 때는 누구나 이야기를 원한다. 삶의 언어, 언어로 표현된 삶이 인간에게 본래적인 즐거움을 가져다준다는 증거이다. 허구虛構를 뜻하는 '소설fiction'이라는 말에 환상幻想을 뜻하는 '판타지fantasy'라는 말이 덧붙여졌을 때, 그 말의 파괴력은 절정에 달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거짓'의 극한極限이다. 그런데, 놀라워라, 판타지 소설의 독자는 그 '거짓'을 '거짓' 그대로 믿게 된다. 이름에서 보자면 허구의 끝으로 달려가는 것이 판타지소설인데도 판타지소설의 독자는 그것을 진..

삼국지의 홍수 속에서: 황석영 옮김 『삼국지』

출판도 유행을 따르는 것 같다. 아니, 내가 헤아려 보건대 출판이야말로 유행에 가장 민감한 분야 중 하나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셜록홈즈 전집이나 뤼팽 전집이 시일에 큰 차이를 두지 않고 두세 출판사에서 중복 출판된 것이 하나의 예가 될 것이며, 또 얼마 전의 '쥘 베른'의 중복 출판도 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유행은 '삼국지'다. 소설가 황석영이 『삼국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질 때 즈음하여 다른 출판사들은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섰다. 『삼국지』로 가장 많은 상업적 성공을 본 민음사나 정역正譯의 자부심이 넘치는 솔출판사의 온-오프라인 서점 마케팅은 꽤나 살벌했다. 그 와중에 나는 글 한편 '이링공 뎌링공' 만들어 '당첨'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기분은 그렇게 깔끔하고 깨끗하지 않다. '삼..

홍수 가운데의 정수淨水: 김구용 옮김『삼국지연의』

"'삼국지'는 없다"고 누군가가 자신의 '삼국지' 번역본 서문에서 말했다. '삼국지'는 홍수처럼 많이 출간되지만 진짜 '삼국지'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문열, 김홍신을 대표로 하여 정비석, 박종화, 조성기는 물론이고 멀리는 박태원 가까이는 황석영까지 당대의 글쟁이와 문장가는 삼국지 번역을 한 번씩 해보려는 욕심이 있는 모양이다. 이문열이 그 서문에서 말한 의미로 "쓸모없는 노력의 중복"이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 모두는 '역자 서문'에서 출간의 변辨을 한 마디씩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출간의 변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번역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이다. 이문열은 '평역 삼국지' 서문에서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를 "거의 대역이 가능할 정도로" 모본을 충실히 따..

고도를 기다리며 쏟아내는 장광설: Beckett『고도를 기다리며』

'고도Godot'는 죽음이다. 도대체 사람이 이생에서 죽음말고 무엇을 기다릴 수 있단 말인가. 이성복이 삶이란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던 것처럼 고도기다리기 역시 '집으로 가는 길'이다. '집'에 도달하면 그들은 살게(즉, 죽게) 된다. 블라디미르 내일 목이나 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야. 에스트라공 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 그럼 살게 되는 거지. -『고도를 기다리며』오증자 옮김, 민음사, 2000, 158쪽.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죽기를 바라고 목을 매달아도 그들은 죽을 수 없다. 에스트라공 그렇다면 당장에 목을 매자. 블라디미르 나뭇가지에? (둘은 나무 앞으로 다가가서 쳐다본다) 이 나무는 믿을 수가 없는걸. (24쪽) 그곳은 '죽지 못하는 곳'이다. 에스트라공이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

소비에트판 집없는 아이: 오스뜨로프스끼『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최인훈의 『회색인』에는 독고준이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하는 부분이 나온다. 아마도 작가 자신의 생각을 많이 투영하고 있을 그 평가는 이렇다: 그가 요즈음 읽고 있는 책은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였다. 유명한 소련 작가의 그 소설은 러시아 제정 끝무렵에서 시작하여 소비에트 혁명, 그 뒤를 이은 국내 전쟁을 통하여 한 소년이 어떤 모험과 결심, 교훈과 용기를 통해서 한 사람의 훌륭한 공산당원이 되었는가를 말한 일종의 성장소설(成長小說)이었다. 그러나 그가 공산당원이라든가 짜르 정부가 얼마나 혹독했는가는 아무래도 좋았다. 소설의 처음부터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주인공 소년의 익살스럽고 착한 성격이, 그리고 황폐해가는 농촌과 도시의 눈에 보이는 듯한 그림, 주인공의 바보같이 순..

더 아름다운 천국: Hesse『페터 카멘친트』

『페터 카멘친트』는 헤세의 데뷔작이다. 나는 그래서 이 작품이 정돈되기 보다는 거칠은 어떤 것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그런 것을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작품은 깨끗했다. 데뷔작에서부터 우리가 흔히 '헤세적'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잘 드러나고 있었다. 가령 자연 친화, 기독교적 신의 거부, 민중적 삶에 대한 애착 등이 여기서 페터 카멘친트라는 인물을 통해 제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아마 이것들은 이미 그의 유년기에 형성된 것이기가 쉽다. 인도 선교사였던 그의 아버지와 동양학자였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상상해 볼 수 있겠다. 카멘친트는 '촌뜨기'다. 그는 도회지에서 사교생활을 해보지만 결국 그는 촌뜨기로서 시골로 돌아간다. 줄거리만 가지고는 『수레바퀴 아..

분석된 시: Brecht『시의 꽃잎을 뜯어내다』

브레히트가 시에 대해 가진 생각은 아주 독특하다. 문학과 예술의 무용성無用性을 강조하는 일군의 예술가와는 달리 브레히트는 문학 역시 써먹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브레히트의 첫 시집인 『가정기도서』는 "이 가정기도서는 독자들이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이 시집은 아무 의미없이 처먹혀서는 안된다"라는 사용지침서를 가지고 있다. 브레히트가 시의 사용가치를 중요시하는 것은 그의 서사극 이론의 핵심인 '낯설게하기효과Verfremdungseffekt'와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사실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이 책의 소중한 점 가운데 하나는, 모든 면에서 신비주의를 배격한 브레히트가 시인들에게 하는 충고이다. 책의 표제로도 쓰인 '시의 꽃잎을 뜯어내는 일'은 시를 하나하나 분석하는 일이다. 그는 꽃이 꽃..

타오르는책/詩 2003.05.29

죽음의 시, 시의 죽음: 허만하『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김구용 선생이 옮긴 『삼국지 연의』를 사러 헌책방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보니 나올 당시 신문에서 꽤 많이 떠들어댄 것 같은데, 왜 내 기억속엔 남아있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몰랐던 처음에는 그저 책꽂이에 꽂힌 걸 보고 제목이 좋았고, 꺼내서 겉을 살펴볼 때는 책의 디자인과 장정이 마음에 들었다. 문학동네나 민음사에서 나오는 하드커버 시집과는 달리 품격이 있어보였다. 표지에 다른 유치한 디자인 없이 시를 넣어, 그 시만으로 표지가 되게 하는 것도 좋았고, 그걸 제목 그대로 수직성있게 배열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무턱대고 살 수는 없었다. 책장을 넘겨 몇 편의 시를 보았다. 느낌이라고 하면 너무 추상적이지만, '흉내내는' 시인은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늦가을 투명한 바람..

타오르는책/詩 2003.05.24

토속어의 유화油畵: 이문구『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낮이고 밤이고 혼자였던 시절, 외로움이든 무엇이든 밀려오면 소설을 읽었었다. 으례 소설은 읽히는 것으로 여겼었고, 그 예외라면 스토리 위주가 아닌 『낯선 시간 속으로』정도를 들었다. 이문구의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는 스토리 위주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스토리가 상당히 살아있는 단편집인데도 나를 오래도록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책 뒷표지를 보았다. "여기에서 말은 이미 말 이상이다." 말이 말보다 윗길에 있다면 그의 소설이 시詩라는 말이 된다. 이문구는 시를 썼던가. 책을 다 읽고 나서의 자답自答은 '그렇다'였다. 그가 충청지방의 토속어로 소설을 썼다, 고 대체로 말하겠지만 사실은 그가 충청지방의 토속어를 썼더니 그것이 소설이 되었다고 하는 게 더 옳을지도 모를 정도로 그의 소설은..

연애소설 아닌 척 하는 연애소설: 쓰지 히토나리『냉정과 열정사이 Blu』

쯔지 히또나리의 『냉정과 열정사이』도 결국 얼마간 연애소설을 벗어난 체하는 트랜디 연애소설일 뿐인 것 같다. 쥰세이의 직업이 독특해서 몇몇 전문적인 단어들이 등장하고 그것이 소설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이 소설의 축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하나의 지엽으로 그칠 뿐이다. 작기는 때로 神에 비견된다. 소설은 사실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고 소설의 등장인물 역시 실제로는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작가는 신이어서는 안 된다. 상상력은 망상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신의 거짓말'처럼 본래부터 모순되는 개념이다. 소설은 삶을 담아야 한다. 그러나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몇 달, 몇 년, …, 몇십 년까지 다루는 소설에서 삶의 세목들을 모두 다룰 수는 없다. 작가는 무엇을 더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